출처 : http://www.honam.co.kr/read.php3?aid=1279724400337236141
세계 해전에 빛나는 한산대첩 <상>
경남 통영 한산도
호남정신의 뿌리를 찾아서 2부 - 임진왜란과 호남 사람들 12
경남 통영 한산도
호남정신의 뿌리를 찾아서 2부 - 임진왜란과 호남 사람들 12
입력시간 : 2010. 07.22. 00:00
학익진 전법으로 왜선 섬멸
사방 포위해 화포 쏘아대자 혼비백산
이순신, 부하들의 전투 소상히 기록
지난 7월10일 토요일에 경남 통영을 갔다. 주말에 장맛비가 많이 내린다는 일기예보에도 아랑곳 하지 않고 길을 나섰다. 현장을 제대로 답사하지 않고서는 기행 글이 써 지지 않아 아내와 함께 통영 가는 버스를 탔다. 출발 시간은 오후 1시 10분. 광주에서 통영까지는 2시간 30분이 걸린다.
버스에서 한산 대첩 관련 책을 자세하게 읽는다. 한산 해전은 1592년 7월 8일 조선 수군 1만 명과 왜군 1만 명이 한산도 앞 바다에서 격돌한 임진왜란 최대의 해전이다. 이 해전은 임진왜란의 분수령이 된 전투이고 세계 3대 해전중의 하나이다. 이 한산 대첩 상황은 이순신 장군이 7월15일에 선조 임금에게 보고한 ‘삼가 적을 무찌른 일로 아뢰나이다’로 시작하는 견내량파왜병장(見乃梁破倭兵狀) 장계에 소상하게 기록되어 있다.
1592년 6월10일 제2차 출전을 마치고 여수로 귀환한 이순신 장군은 다음 해전을 위하여 전선을 정비하고 훈련을 하는 등 준비를 갖추면서 경상도 해역의 왜군의 동태를 수시 파악한다.
한편 당포와 당항포에서 또 다시 일본 수군이 패하였다는 소식을 들은 도요토미 히데요시(풍신수길)는 크게 노한다. 그리고 긴급 작전회의를 소집한다. 이 회의에서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참모들에게 이순신이라는 장군이 누구인지를 물었으나 자세히 아는 사람이 없었다.
6월23일에 풍신수길은 일본 수뇌부에게 조선 수군을 전멸시키라는 강력한 명령을 내린다. 즉 연합함대를 결성하라고 하면서 쿠키 요시타카를 함대 사령관으로 육전에 참가 중이던 해군 장군 와키자카 야스하루를 선봉장으로, 가토 요시아키를 참모장으로 삼는다는 군령을 내린다.
이 군령은 왜군 한성사령부를 통하여 급히 하달되었다. 선봉장 와키자카도 이 지령을 받았다. 그런데 그는 연합함대에 합류하라는 상부의 명령이 달갑지 않았다.
그는 그깟 조센징 함대 하나를 가지고 왜 이리 호들갑을 떠는지 모르겠다면서 자기 휘하의 병력만으로도 조선 수군을 이길 수 있다고 장담하였다. 와키자카는 5월에 있었던 용인전투의 용장이었다. 그는 1천600명의 소수 병력으로 5만 명의 조선군을 무찌른 바 있어 조선군을 얕잡아 보았고 공명심과 자신감이 넘쳐 있었다.
그는 휘하 대장들에게 단독으로 해전을 치르겠다는 결심을 하고 이동 채비를 서둘렀다. 그리하여 와키자카는 쿠키와 가토가 출전준비를 하는 동안 단독으로 출전을 감행한다. 와키자카 부대는 대선 36척, 중선 24척, 소선 13척 도합 73척으로 조선수군을 섬멸하고자 김해를 떠나 거제도 쪽으로 향하였다.
이런 상황에서 조정에서는 이순신과 이억기에게 경상도로 출전하라는 명령을 내렸고, 이순신 또한 경상도 가덕도, 거제도등지에 왜선 10여척 내지 30여척이 수시로 출몰한다는 첩보와 함께 전라도 금산 지역에도 왜군이 다가와 수륙으로 침범할 조짐이 있다는 정보를 얻었다.
드디어 이순신 장군이 이끄는 전라좌수군은 이억기의 전라우수군과 7월4일 전라좌수영 본영 여수에서 합류한다. 5일에는 전라좌우도 연합함대는 작전 계획을 논의하고 6일에 3차 출전을 한다. 이 날 전라도 연합함대는 남해의 노량에 도착하여 원균과 합류한다.
원균은 깨어진 전선 7척을 수리하여 거느리고 왔다. 당시에 조선 수군 연합함대는 총 58척이었는데 여기에 거북선도 여러 척 있었다. 이날 연합 함대는 진주 땅 창신도에서 하룻밤을 지낸다.
조선 함대는 출항 둘째 날인 7월7일에 동풍이 크게 불어 항해하지 못하다가 날이 저물 무렵 고성 땅 당포에 도착하였다. 이때 미륵 섬의 목동 김천손이 와서 "왜선 70여척이 오늘 오후 2시 영등포 앞 바다를 지나 고성과 거제도의 경계인 견내량(見乃梁)에 머물고 있다”는 정보를 알려주었다. 견내량은 경남 거제시 사등면 덕호리와 통영시 용남면 장평리를 잇는 거제대교의 아래쪽에 위치한 좁은 해협이다.
이 정보에 따라 조선 함대는 7월 8일 아침 일찍 왜적의 함대가 있다는 견내량으로 출발하였다. 조선 함대가 한산도 앞바다를 지나 견내량 근처에 이르렀을 때, 일본의 척후선으로 보이는 대선 1척과 중선 1척이 조선함대를 발견하고 저들의 본대가 있는 포구 쪽으로 들어갔다.
조선함대는 이들을 추격하였다. 과연 첩보의 내용대로 왜선 70여척이 대열을 이루고 있었다.
견내량은 수심이 얕고 암초가 많아 대형선박이 항해하기 어려운 긴 해협이었다. 지금도 견내량은 길이가 약 3km, 폭은 약 180m에서 400m까지, 수심은 2.8 미터 정도 되는 좁은 해협이다.
이순신은 이곳에서 판옥선 같은 큰 배는 서로 부딪쳐서 싸우기가 어렵다고 판단하였다. 그래서 한산도 바다 가운데로 끌어내어 섬멸할 계책을 세웠다. 이순신은 넓은 바다로 왜적을 끌어내는 것이 급선무라고 생각하여 전선 5-6척을 보내어 일본 함대의 선봉과 싸우다가 도망가는 작전을 세웠다. 왜적들은 도망가는 조선 수군을 보고 일제히 돛을 올리고 맹추격에 나섰다.
일본 함대는 견내량에서 한산도 바다까지 약 18km에 이르는 거리를 2시간 동안에 이순신 함대를 추격하였다. 이 2시간 동안 와키자카는 조선 수군이 싱겁게도 겁쟁이라고 생각하였다. 이즈음 이억기와 원균의 함대는 한산도 근처의 섬 화도와 방화도 등에 숨어서 왜적을 기다리고 있었다.
이윽고 버스는 섬진강 휴게소에 도착한다. 15분간 휴식이다. 휴게소에서 남해안 관광안내지도를 보았다. 거기에는 남해안 지명이 비교적 상세하게 나와 있다. 통영과 거제 그리고 한산도 지명을 찾아보았다. 그리고 보니 한산 해전의 장소를 어느 정도 알 것 같다. 버스는 이제 섬진강 다리를 지나 경상도 땅에 이르렀다. 나는 한산 해전의 하이라이트 대목을 한참 읽어 내려간다.
한편 뒤도 돌아보지 않고 줄곧 도망만 가던 이순신 함대는 한산도 앞바다에 이르자 갑자기 세 갈래로 나누어졌다. 그리고 왜선을 향하여 돌진하기 시작하였다. 이 광경을 본 왜군들은 너무나 의아하게 생각하였다. 숨겨진 계략이 있는 것인지 아니면 더 이상 도망가지 못하여 사생결단을 하려는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와키자카는 조선 함대를 섬멸하고자 총공격을 명하려는 순간에 갑자기 ‘쾅! 쾅!’하는 포성이 등 뒤에서 연이어 울려 퍼졌다. 뒤에서 포위하고 있던 이억기와 원균의 수군들이 화포를 쏜 것이다. 앞에 있던 이순신 함대도 학의 날개가 깃을 펴는 모양의 진법 소위 학익진 (鶴翼陣)으로 왜선을 둘러싸고 일제히 공격하였다. 공격의 선봉은 거북선이었다. 거북선 돌격대는 지자, 현자 총통을 발사하면서 왜적의 선봉선 2-3척을 일시에 격파하였다. 왜군 함대도 필사적으로 돌격을 하였으나 사기가 꺾인 상태라 역부족이었다.
더구나 이순신 함대는 좌우 척후장, 좌우 거북선 돌격장, 좌우 특공대장 등 선단을 학의 날개모양처럼 펴고 함포를 마구 쏘아대었다. 특히 왜군들에게 장님배라고 불리는 거북선은 왜선에 바로 근접하여 왜선을 들이받고 전후좌우 20여문의 대포를 일제히 쏘아대어 왜선들이 마구 피해를 입었다.
앞에는 이순신 함대, 뒤에는 이억기와 원균의 함대에 포위된 일본 함대는 서로 엉키어서 아수라장이었다. 일본이 자랑하는 맹장 와키자카는 창피하게도 ‘후퇴하라’는 명령을 내리었다. 왜선들은 도망가기 시작하였으나 이미 겹겹으로 포위되어 크게 무너지고 말았다.
“그때 모든 장수들과 군사들이 승리한 기세를 타고 서로 다투어 돌진하며 포탄과 화살을 교대로 쏘아 댔는데 그 형세는 마치 바람 불고 천둥치는 듯했습니다. 그래서 적선을 불사르고 적병을 사살하는 일을 한꺼번에 해치워버렸습니다.” -7월15일 이순신의 '견내량파왜병장 장계'
한산도 해전에서 와키자와 함대는 불과 2-3시간 만에 완전히 궤멸되었다. 왜군은 최소 3천명이상 살상을 당하였고 47척의 배가 불태워졌으며 12척이 나포되었다. 다만 적진 후방에 있던 14척의 배들만이 멀리 김해 쪽으로 도망을 갔고 전투중인 400여명 왜군들이 살아서 한산도가 육지인줄 알고 헤엄쳐 도망갔다. 나머지는 모두 도륙 당하거나 수급이 베어졌다.
승리를 장담하던 39세의 왜군 총사령관 와키자카는 구사일생으로 살아남았다. 그러나 그의 부장으로서 해적 출신인 와키자카 사베에, 그리고 와타나베 시치에몬은 전사하고 선장 마나베 사마노조는 한산도에 상륙하였다가 할복자살하였다. 일본 측으로 보면 참으로 비참한 패전이었다.
나중에 이순신은 한산 해전의 전과를 선조 임금에게 보고 하면서 그 때의 전투 기록을 상세하게 적고 있다.
순천부사 권준, 광양현감 어영담, 사도첨사 김완, 흥영 현감 배흥립, 방답첨사 이순신(李純信), 좌돌격장(거북선 돌격대장) 이기남, 낙안군수 신호, 녹도만호 정운, 좌도별장 윤사공과 가안책, 발포만호 황정록, 참퇴장 이응화, 우돌격장 박이량, 유군 제1영장 손윤문 그리고 제5영장 최도전 등의 전공을 자세히 기록하고 있다.
이렇게 전라좌수군 장수와 부하들의 전공을 소상하게 일일이 기록하여 임금에게 아뢰는 이순신의 지극 정성은 감동적이다. 공을 부하에게 돌리는 그 마음이야 말로 이 시대의 리더들이 정말 본받을 만한 일이다. 더구나 한산대첩의 전투기록이 이렇게 상세히 남아있어, 해전사 연구 사료로서 큰 가치가 있으니 후세 역사가들이 이순신을 기록의 달인으로 크게 평가할 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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