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www.honam.co.kr/read.php3?aid=1280934000338360141

세계 해전에 빛나는 한산대첩 <중>
경남 통영 한산도
호남정신의 뿌리를 찾아서 2부 - 임진왜란과 호남 사람들 13
입력시간 : 2010. 08.05. 00:00

제승당
 
해를 목욕시키고 하늘을 보수한 명장
해전동참한 명나라 제독의 이순신 평가
왜군들 도망치기 바빠 전세는 조선으로 

통영으로 가는 버스 안에서 나는 1592년 7월10일에 있었던 안골포 해전 관련 글을 읽는다. 

7월 8일 밤이 저물도록 한산도 앞 바다에서 왜적을 소탕한 조선 함대는 견내량에서 하룻밤을 보냈다. 그리고 이튿날 가덕도 쪽으로 순항하였다. 그 무렵 왜군 신예함대 40여척이 부산에서 가덕도를 거쳐 안골포로 향하고 있었다. 이순신 장군은 7월9일 해질 무렵에 “왜선 40여척이 안골포에 정박하고 있다” 는 척후선의 보고를 받았다. 이 보고를 받고 이순신은 이억기, 원균과 함께 대책을 논의하였으나 날이 저물었으므로 거제 땅 온천도(현재의 칠천도)에서 다시 하룻밤을 보냈다. 

조선함대가 7월10일 새벽에 출발하여 안골포에 도착하니 선창에 대선 21척, 중선 15척, 소선 6척 등 총 42척의 왜선이 정박 중이었다. 이곳의 일본 수군 장수는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직속 정예군인 구키 요시다카와 가토 요시아카라의 부대이었다. 안골포는 지금의 경남 진해시에 있는 포구이다. 그런데 안골포는 포구가 워낙 좁고 수심이 얕아 판옥선 같은 큰 배가 쉽게 들어갈 수 없었다. 

사정이 이러하므로 조선함대는 다시 한 번 일본 함대를 유인하는 전술을 구사하였다. 그러나 왜군의 주력함대가 패한 소식을 이미 들은 일본 함대는 바다 한 가운데로 나오려고 하지 않고 포구에 틀어 박혀 있었다. 


제승당내 한산대첩도

별 수 없이 이순신은 여러 장수들이 번갈아가며 포구 안으로 들어가 왜선을 깨트리는 작전을 구사하였다. 그러자 왜군도 응전하기 시작하였다. 왜군의 응전은 상당히 결사적이었으나, 처음부터 조선 수군의 적수가 되지 못하였다. 명장 이순신의 지휘아래 일사불란하게 퍼붓는 조선 수군의 포격에 왜적은 힘없이 무너졌다.

하루 종일 계속된 전투에서 왜선 40여척은 거의 불태워졌고, 살아난 왜군들은 육지로 도망갔다. 

조선왕조실록 ‘선조실록’에는 안골포 해전 기록이 이렇게 적혀 있다. 

'10일에 안골포에 도착하니 적선 40척이 바다 가운데 벌여 정박하고 있었다. 그 중에 첫째 배는 위에 3층 큰집을 지었고 둘째 배는 2층집을 지었으며 그 나머지 모든 배들은 물고기 비늘처럼 차례대로 진을 결성하였는데 그 지역이 협착하였다. 아군이 두세 차례 유인하였으나 왜적은 두려워하여 감히 나오지 않았다. 우리 군사들이 들락날락하면서 공격하여 적선을 거의 다 불살라버렸다. 이 전투에서 3진이 머리를 벤 것이 2백 50여 급이고 물에 빠져 죽은 자는 그 수효를 다 기록할 수 없으며 잔여 왜적들은 밤을 이용하여 도망하였다.' 

이순신은 추격을 계속하면 우리 백성들이 피해를 입을까 걱정이 되어 이내 중지를 하고 안골포 근처에서 그날 밤을 보냈다. 다음날인 11일 새벽에 조선 함대는 다시 안골포를 포위하였으나, 왜군들은 이미 도주하여 버린 상태였다. 

조선 수군은 12일 오전에 한산도에 도착하였다. 이 때 한산도에는 400여명의 왜군 패잔병이 있었지만 이들의 처리는 경상우수사 원균에게 맡기고 7월13일에 본영 여수로 돌아왔다.

한산도와 안골포 해전이 끝난 후에 보니 아군의 피해는 전사자 19명, 부상자 114명이었다. 이들 전사자와 부상자 중에는 노비들도 상당수 포함되어 있었다.

이순신은 전사자는 구휼법에 따라 장례를 치러주고 부상자들은 치료에 최선을 다하도록 조치하였다. 유공 장병들도 전공에 따라 3등급으로 구분하여 후히 포상했다. 나머지 전 장병에게도 그 노고를 치하하였다. 그리고 이순신은 7월 15일 임금에게 올리는 장계(전투 보고서)에 전사자와 부상자 명단을 한 사람 한 사람 모두 적어 그들의 충정을 선조임금이 알도록 하였다. 

어느덧 버스가 통영 버스터미널에 도착한다. 도착시간은 15시 40분. 2시간 30분이 걸린 것이다. 서둘러서 통영여객선 터미널로 갔다. 마침 오후 4시에 한산도로 출발하는 카페리 호가 있다. 급히 표를 끊고 배에 올랐다. 한산도까지는 25분 정도 걸린단다. 

한산도 구경은 이번이 두 번째이다. 25년 전인 1985년에 갔을 때는 조그마한 배를 탔는데 이번에는 차도 싣는 대형 카페리호이다. 배에서 사진을 여러 장 찍었다. 이곳이 바로 한산해전이 일어난 역사적 장소라는 생각을 하면서. 

한산도 앞바다는 너무나 푸르고 넓다. 주변에 섬이 별로 없고 망망대해이다. 한참을 가니 좌측에 큰 섬 두개가 나온다. 이윽고 한산 대첩비가 보이고 거북등대가 나온다. 이곳이 바로 한산도이다. 이 근처에서 충무공 이순신 장군이 왜적을 섬멸하였다는 생각을 하니 감회가 깊다. 

한산도 이충무공 유적지는 사적 제113호로 주소는 경남 통영시 한산면 두억리이다. 매표소에서 입장료 1천원을 내고 제승당으로 향한다.길가에는 해당화가 피어 있다. 이미자가 부른 섬마을 선생님 노래가 생각난다. “해당화 피고 지는 섬마을에, 철새 따라 찾아온 총각 선생님. 열아홉 살 섬 색시가 순정을 바쳐….”

길옆에는 안내판이 여러 개 있다. 그 중에 한산도 이충무공 유적 안내판을 살펴본다.

이곳은 이순신 장군께서 1592년 임진왜란 때 세계 해전사상 길이 빛나는 
한산대첩을 이루신 후 운주당을 지으시고 1593년부터 1597년까지
삼도수군의 본영으로 삼으시어 제해권을 장악하시고 국난을 극복하신 
유서 깊은 사적지이다. (후략)

제승당의 외삼문 이름은 대첩문(大捷門)이다. 한산대첩을 기념하는 문이라는 뜻이다. 그곳에는 수군 2명이 보초 서 있다. 처음에는 사람이 서 있는 것으로 생각하였는데 자세히 보니 밀랍인형이다.

대첩문 한 곳 안내판에는 '이충무공 정신 1. 멸사봉공의 정신 2. 창의와 개척 정신 3. 유비무환의 정신'이라고 적혀 있다. 

멸사봉공, 창의개척, 유비무환. 이 말을 되새기면서 제승당으로 간다. 조금 걸어가니 내삼문이 보인다. 계단을 올라서 내삼문에 이르렀다. 내삼문 이름은 충무문이다. 충무공 이순신을 기리는 문. 

내삼문을 들어서니 바로 정면에 제승당이 있다. 이순신은 1593년 7월15일부터 1597년 2월26일 한양으로 붙잡혀 갈 때 까지 3년 8개월 동안 이곳 3도수군 통제영에서 지냈다. 군영 이름은 운주당(運籌堂)이라 하였다. 이 이름은 '군막 안에서 작전을 세워 천리 밖에서 승리를 쟁취한다'라는 '사기'에 나오는 운주제승(運籌制勝)에서 딴 것이다. 

운주당은 1597년 정유재란 때 불타 없어지고 폐허가 되었다. 이후 142년이 지난 1739년(영조 15년)에 제107대 통제사 조경이 운주당 터에 건물을 새로 지으면서 이름을 제승당(制勝堂 승리를 만드는 건물)으로 개칭하였다. 이를 기념하기라도 한 듯 통제사 조경은 제승당 현판 글씨를 직접 썼다. 

제승당 안에는 이순신 장군의 해전과 삶을 그린 다섯 폭의 그림이 전시되어 있다. 가장 오른 편부터 사천해전도, 우국충정도, 한산대첩도, 진중생활도 그리고 노량해전도가 놓여 있다. 이 중에서 '한산대첩도'는 한 가운데 있는 데 그 앞에 두 개의 기둥이 있다. 이 기둥에는 욕일보천(浴日補天), 맹산서해(盟山誓海)라는 한문 글씨가 적혀 있다. 

이 한문이 무슨 뜻일까. 궁금하여 책에서 찾아보니 욕일보천은 ‘해를 목욕시키고 하늘을 보수한다’는 뜻인데 이 말은 명나라 제독 진린이 이순신을 평가한 말이다. 진린은 1598년에 이순신과 같이 노량해전을 치른 명나라 수군 장수인데, 전쟁이 끝나자 그는 선조 임금에게 임진왜란이 종결된 것은 이순신장군의 공이라고 하면서 그 공을 '해를 깨끗이 씻어 내고, 구멍 난 하늘을 때운 공' (욕일보천지공 浴日補天之功)이라고 극찬하였다. 

한편 맹산서해는 산에 맹세하고 바다에 서약하다는 의미인데, 이순신의 시 '진중음 陣中吟'에서 나온 시구이다.

즉 이순신의 시에 '바다에 서약하니 고기와 용이 움직이고 (서해어룡동 誓海魚龍動) 산에 맹세하니 풀과 나무가 알더라(맹산초목지 盟山草木知)' 라는 구절이 있는데 여기에서 맹산과 서해를 따온 것이다.

제승당 건물 기둥의 주련에는 이순신이 쓴 시 '한산도 야음' 나무패가 4개 걸려 있다. 

수국추광락 水國秋光落 한산 섬에 가을빛이 저무니 
경한안진고 驚寒雁陣高 추위에 놀란 기러기 떼 높이 나는 구나 
우심전전야 憂心輾轉夜 근심스런 마음에 잠 못 이루는 밤에 
잔월조궁도 殘月照弓刀 새벽달만 활과 칼을 겨누는 구나. 

제승당에서 나와서 수루(戍樓 병영의 누각) 근처로 간다. 거기에는 한산대첩 상황도 안내판이 있다. 이 지도에는 이순신이 왜선을 유인하는 장면, 학익진으로 전투하는 장면 그리고 왜군이 도망가는 장면 등 3가지 상황이 설명되어 있다. 

이어서 나는 이순신의 유명한 시조 '한산 섬 달 밝은 밤에 수루에 혼자 앉아'가 만들어진 현장인 수루에 오른다. 수루에서 보니 한산도 앞바다가 훤히 보인다. 나는 한 순간 이순신이 되어 시조를 읊어본다. 

한산 섬 달 밝은 밤에 수루에 혼자 앉아 
큰 칼 옆에 차고 깊은 시름 하는 차에 
어디서 일성호가는 남의 애를 끊나니

김세곤 (전남지방노동위원회 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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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civ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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