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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프다 내 아들아 나를 두고 어딜 가느냐”
호남정신의 뿌리를 찾아서 3부 - 정유재란과 호남 사람들 38
이순신, 아들 면의 죽음에 통곡하다. 
입력시간 : 2014. 03.11. 00:00
 

1. 아산 현충사 경내 이면 묘소 가는 길 
2. 아산 현충사 안에 있는 충무공 이순신 기념관 
3. 1597년 9월15일 정유일기 - 현충사 충무공이순신 

명량해전서 패한 왜군들은 이순신 가족들이 있는 아산으로 쳐들어갔다 마을을 불지르고 초토화 시켰다. 막내아들 면이 참지 못하고 맞서 싸우다 칼에 맞아 죽었다. 나이 스무 살이었다.  

1597년 10월 11일부터 안편도(신안군 장산도)에 머문 이순신은 14일에 충남 아산 본가로부터 한 통의 편지를 받았다. 셋째 아들 면이 전사했다는 소식이었다. 청천벽력이었다. 

이 날의 ‘난중일기’를 자세히 읽어보자. 

10월 14일 맑다. 

새벽 두시 쯤 꿈에 내가 말을 타고 언덕 위로 올라가는데 말이 발을 헛디뎌서 냇물 가운데 떨어지기는 했으나 말이 거꾸러지지는 않았다. 끝에 가서는 아들 면이 엎드려 나를 끌어안고 있는 듯한 모습을 보고서 잠이 깨었다. 이것이 무슨 조짐인지 모르겠다. (중략) 

난중일기에는 이순신의 꿈 이야기가 자주 나온다. 선몽(先夢)이라고나 할까. 꿈이 현실로 나타나는 일이 여러 번 있다. 명량대첩 때도 그랬다. 9월15일 일기에는 “밤에 신인(神人)이 꿈에 나타나 이렇게 하면 이기고 이렇게 하면 진다고 가르쳐 주었다”고 적혀 있다. 

10월 1일에 이순신은 명량해전에서 패배한 왜군이 아산 본가로 쳐들어가서 보복을 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서 큰 아들 회를 아산 집으로 보냈다. 그런데 이런 꿈을 꾸었으니 이순신은 몹시 불안하였다. 

저녁에 천안에서 온 어떤 사람이 집에서 보낸 편지를 전하는 데, 봉함을 뜯기도 전에 온몸이 먼저 떨리고 정신이 어지러웠다. 

겉봉을 뜯어내고 그 속의 편지 봉투를 보니 겉에 열의 글씨가 보였는데 ‘통곡(痛哭)’이란 두 글씨가 쓰여 있었다. 면이 전사하였음을 알고 나도 몰래 간담이 떨어져 목 놓아 통곡, 통곡하였다. 

이순신은 아산에서 온 편지를 받자마자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아니나 다를까. 둘째 아들 열이 겉봉투에 쓴 ‘통곡’이란 두 글씨에 그냥 목 놓아 통곡한 것이다. 

왜군들은 명량해전에서 패한 보복으로 이순신의 가족들이 있는 아산으로 쳐들어갔다. 본가와 마을을 통째로 불지르고 초토화 시켰다. 막내아들 면은 비분을 참지 못하고 왜군들과 맞서 싸우다가 왜군의 칼에 맞아 죽었다. 나이 스무 살이었다. 

이순신은 부인 방씨 사이에 회·열·면 3형제와 딸 하나를 두었다. 회와 열은 이순신 휘하에서 일하였고, 셋째 아들 면은 아산 집에 남아 어머니를 모시고 지냈다. 

하늘이 어찌 이다지도 어질지 못하는가? 간담이 타고 찢어지는 것 같다. 내가 죽고 네가 사는 것이 이치에 마땅한데, 네가 죽고 내가 살았으니 어쩌다 이처럼 이치에 어긋났는가? 천지가 깜깜하고 해조차도 빛이 변했구나. 슬프다, 내 아들아! 나를 버리고 어디로 갔느냐! 

너무나 가슴이 아프다. 자식을 먼저 저 세상으로 보낸 부모는 죄인이라고 하지 않던가. 자식이 죽고 부모가 살았으니 얼마나 가슴이 찢어질 일인가. 

임진왜란이 일어났을 때 아들 면은 15세였는데 이순신은 전쟁터를 전전하여 그를 챙길 겨를이 없었다. 전쟁이 끝나면 배필을 정해주리라 생각했는데 이렇게 무참히 죽은 것이다. 

영리하기가 보통 넘어섰기에 하늘이 이 세상에 머물게 하지 않는 것이냐! 내가 지은 죄 때문에 화가 네 몸에 미친 것이냐! 내 이제 세상에서 누구에게 의지 할 것이냐! 너를 따라 죽어서 지하에서 같이 지내고 같이 울고 싶지만 네 형, 네 누이, 네 어머니가 의지할 곳이 없으므로 아직은 참고 목숨을 이을 수밖에 없구나. 마음은 죽고 껍데기만 남은 채 울부짖을 따름이다. 

하룻밤 지내기가 한 해를 지내는 것 같구나. 밤 10시쯤 비가 내렸다. 

이순신은 비통하였다. 영리하여 끔찍이 사랑한 아들이 죽다니.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았다. 이 날 밤 늦게 가을비가 내렸다. 하늘도 슬퍼서 눈물을 흘렸다. 

1597년 정유년은 이순신에게는 정말 고통스런 해였다. 2월말에 선조의 노여움을 사서 서울로 끌려와 고초를 치렀다. 3월12일에 이순신은 혹독한 고문을 받았다. 72세의 원로대신 정탁이 이순신의 구명에 나섰다. 그리하여 4월 1일에 이순신은 옥에서 풀려난다. 하옥된 지 28일 만이었다. 4월13일에 이순신은 백의종군 길에 아산에서 모친의 임종소식을 들었다. 어머니 변씨 부인은 이순신이 잡혀갔다는 소식을 듣고 여수에서 배를 타고 서울로 올라가는 도중에 배 위에서 돌아가신 것이다. 4월19일에 이순신은 어머니 영전에 엎드려 곡하고 하직하여야 했다. 이순신은 이날 일기에 ‘천지간에 나와 같은 이 또 어디 있으랴. 차라리 일찍 죽은 것만 못하다’라고 적었다. 

7월16일에 칠천량 해전에서 조선수군이 전멸하자, 이순신은 8월3일에 다시 삼도수군통제사가 되었다. 그는 곧장 전라도로 달려와 9월16일에 명량대첩을 이루었다. 그런데 10월14일에 애지중지하던 아들 면이 왜적의 손에 죽었으니 참으로 비통하였다. 액운은 다시 액운을 낳는다더니 정유년 내내 고통이 잇따랐다. 

10월15일은 하루 종일 바람이 불고 비가 내렸다. 이순신은 누웠다 앉았다 하면서 하루 내내 뒤척거렸다. 부하들이 조문을 하는 데 이순신은 마음 놓고 울 수도 없었다. 아들이 전사한지 사흘째 되는 16일에 이순신은 소금 굽는 강막지 집에 가서 홀로 목 놓아 울었다. 17일에는 향을 피우고 곡하였다. 19일에는 새벽에 고향 집 종 진(辰)이 내려오는 꿈을 꾸었다. 이순신은 죽은 아들을 생각하며 또 다시 통곡하였다. 어두울 무렵에 코피가 터져 한 되 넘게 흘렸다. 
 
이런 비통함 속에서도 이순신은 일상을 게을리 할 수 없었다. 다시 수군 재건을 하여 왜적과 싸워야 했다. 10월 20일부터 이순신은 겨울나기 준비를 착실히 하였다. 해남 등지에서 군량을 확보하였고 선비 김종려에게 소음도 등 13개소의 염전 감독관을 맡겼다. 

10월 29일에 이순신은 목포 앞바다 고하도로 진을 옮겼다. 그곳에서 이순신은 막사와 군량창고를 지었고 전선을 건조하였다. 1598년 2월17일에는 완도 고금도로 진영을 옮겨 삼도수군 통제영을 차렸다. 

고금도에서 지내던 어느 날 낮에 이순신은 잠깐 선잠이 들었다. 그런데 꿈에 아들 면이 앞에 와서 슬피 울면서 말하기를 “저를 죽인 왜적을 아버지께서 죽여 주십시오” 하였다. 이순신이 면에게 물었다. "네가 살아있을 때 힘이 장사였는데 죽어서도 그 왜적을 못 죽인단 말이냐?” 

그러자 면은 “제가 그 놈의 손에 죽었기에 겁이 나서 못 죽이겠습니다. 아버지로서 자식의 원수를 갚는 일인데 이승과 저승이 무슨 상관이 있겠습니까? 더구나 원수를 같은 진중에 두고서도 제 말씀을 예사로 듣고 죽이지 않으시렵니까?” 하고는 슬피 울면서 사라졌다. 

이순신은 깜짝 놀라 잠에서 깨어 부하들에게 물어보니, 과연 새로 잡혀 온 왜적 한 놈이 배 안에 갇혀 있다고 하였다. 이순신은 그 자를 끌어내어 자세히 심문하니 그 포로가 아들 면을 죽인 것이 틀림 없었다. 이순신은 당장 그를 처형하여 아들의 영혼을 위로해주었다. 

이순신이 고금도에서 아들을 죽인 왜군을 처형한 이야기는 조카 이분李芬이 지은 ‘이충무공 행록’에 나온다. 

이순신 셋째아들 면의 묘소는 충남 아산 현충사 경내에 있다. 이순신 옛집을 지나면 큰 느티나무가 한 그루 있고, 조금 더 가면 소나무 숲 아래에 안내판이 있다. 이곳에서 계단을 올라가면 묘가 있다. 묘 앞에는 ‘충무공 셋째 아들 이면의 무덤’이라고 적힌 묘비가 있는데 비문은 노산 이은상이 지었다. 

한편 안편도, 지금의 신안군 장산도는 이순신의 눈물이 서린 곳이다. 이순신 유적지로 빼 놓을 수 없다.

김세곤 (호남역사연구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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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civ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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