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2027438

박 대통령은 절대 알지 못하는 이순신의 '슬픔'
[주장] 김영오씨 둘러싼 유언비어 난무... 자식을 잃은 슬픔을 왜곡하지 마라
14.08.29 18:50 l 최종 업데이트 14.08.29 18:50 l 최병일(mangchutai)

이순신 장군은 백의종군을 마치고 삼도수군통제사로 복직한다. 그는 칠천량 해전으로 인해 궤멸당한 조선 수군을 다시 이끌고 일본군을 격파한다. 영화 <명량>은 이 전사를 화면에 펼쳐 보이며, 1600만 명 이상의 관객을 동원했다. 영화는 이순신 장군의 승전으로 '훈훈'하게 끝이 나지만 실제 역사 속 인간 이순신은 명량대첩 이후 한 달이 채 되지 않아 통곡할 수밖에 없게 된다.


▲  영화 <명량>의 주인공 이순신. 그러나 역사 속 이순신도 한 명의 아버지였다. ⓒ CJ E&M

명량대첩 승리 이후, 아들의 죽음에 통곡하는 아버지

이순신은 가토 기요마사를 잡으라는 어명을 어겼다는 죄목으로 1597년 2월 말에 한양으로 압송돼 옥고를 치른다. 백의종군의 명을 받고 풀려난 것이 같은 해 4월 1일이다. 하루를 더 머물고 4월 3일 길을 떠난 이순신은 이틀 후인 4월 5일에 고향인 아산 염치에 도착한다. 그로부터 8일이 지난 13일, 어머니 변씨가 타고 오는 배를 마중하러 가던 중 이순신은 어머니의 부고를 접한다. 어머니 변씨는 여수를 떠나 그를 만나러 오는 중이었으며 타고 오던 배 안에서 세상을 떠났다. 이순신은 자신의 비통한 심사를 난중일기에 이렇게 적었다. 

4월 16일(양력 5월 31일) <병자> 궂은 비 오다. 
배를 끌어 중방포 앞으로 옮겨 대고, 영구를 상여에 올려 싣고 집으로 돌아오면서 마을을 바라보니, 찢어지는 듯 아픈 마음이야 어찌 다 말할 수 있으랴! 집에 와서 빈소를 차렸다. 비는 퍼붓고, 나는 맥이 다 빠진 데다가 남쪽으로 갈 날은 다가오니, 호곡하며 다만 어서 죽었으면 할 따름이다. 천안군수가 돌아갔다. 

애통해 하던 이순신은 3일 후 나라의 재촉으로 남행길에 든다. 부친의 임종도 곁에서 지키지 못하고 삼년상을 치른 바 있는 이순신은 전쟁의 와중에 어머니마저 잃은 채 종군길에 나선다. 그리고 영화에서처럼 이순신은 같은 해 8월 3일 선조의 교지를 받고 삼도수군통제사로 복귀한 후 9월 16일 명량해전을 승리로 이끈다.

그러나 명량대첩 이후 한 달이 채 지나지 않을 무렵 아들 면의 죽음과 대면한다. 이순신의 난중일기 1597년 10월 14일 자는 다음과 같이 적혀 있다. 

저녁에 어떤 사람이 천안에서 와서 집안 편지를 전했다. 봉한 것을 뜯기도 전에 뼈와 살이 먼저 떨리고 정신이 아찔하고 어지러웠다. 대충 겉봉을 뜯고 열(둘째 아들)의 편지를 보니, 겉에 통곡 두 글자가 씌어 있어 면이 전사했음을 짐작했다. 어느새 간담이 떨어져 목놓아 통곡, 통곡하였다. 하늘이 어찌 이다지도 인자하지 못하는고! 간담이 타고 찢어지는 것 같다. 내가 죽고 너가 사는 것이 이치가 마땅하거늘, 너가 죽고 내가 사니, 이런 어그러진 이치가 어디 있는가! 천지가 캄캄하고 해조차 빛이 변했구나. 슬프다, 내 아들아! 나를 버리고 어디로 갔느냐? 남달리 영특하여 하늘이 이 세상에 머물러 두지 않은 것이냐? 내 지은 죄가 네 몸에 미친 것이냐? 내 이제 세상에 살아 있어본들 앞으로 누구에게 의지할꼬! 너를 따라 같이 죽어 지하에서 같이 지내고 같이 울고 싶건마는 네 형, 네 누이, 네 어머니가 의지할 곳이 없으니, 아직은 참으며 연명이야 한다마는 마음은 죽고 형상만 남아 있어 울부짖을 따름이다. 울부짖을 따름이다. 하룻밤 지내기가 일 년 같구나. 이 날 밤 열 시쯤에 비가 왔다. 

일기는 알려진 그의 성정처럼 간결하였으나 자식을 잃은 슬픔은 그를 극도로 상심하게 했다. 김훈은 이순신의 아들 면의 죽음을 <칼의 노래>에서 그의 상상력을 더하여 이렇게 적고 있다. 

그 때 면은 고향에서 제 어미와 할머니 그리고 어린 조카들을 건사하고 있었다... 그리고, 면은 돌아서지 못했다. 다시 돌아서려는 순간, 적의 칼이 면의 오른쪽 허벅지를 찔렀다. 면은 왼쪽 다리로 버티고 서서 자세를 낮추었다. 살아남은 적은 셋이었다. 3명의 적을 앞에 두기 위하여, 면은 거듭 뒤로 물러섰다. 허벅지에서 피가 흘러 신발이 미끈거렸다. 면의 자세는 점점 낮아졌다. 면은 뒤쪽으로 퇴로를 뚫지 못했다... 그리고 나서 면의 오른편 다리가 꺾여졌다. 면이 다시 세를 수습하려고 몸을 뒤트는 순간, 적의 칼이 면의 오른쪽 어깨를 갈라내렸다. 면은 칼을 놓치고 제 피 위에 쓰러졌다. 스물한 살이었고, 혼인하지 않았다. 

개인적으로는 이순신의 아들 면의 죽음을 묘사한 이 부분이 <칼의 노래>의 백미라고 생각한다. 김훈은 수사가 배제된 문장으로 매일 바다의 날씨를 꼼꼼히 살피며 적과 아군의 형편을 살핀 <난중일기>가 무인이 쓴 글의 전범이라고 이해했다. 그도 작품 속에서 이를 따르고자 노력했다. 일체의 수사가 배제된 난중일기의 기록과 김훈의 묘사는 이렇게 닮아 있다.

김훈의 묘사를 덧붙인 이유는 면의 죽음 앞에 슬퍼하는 자연인 이순신의 모습을 더 쉽고 또 비통하게 떠올릴 수 있기 때문이다. 수군을 폐하라는 종용에 이순신은 "신이 죽지 않고 살아있는 한, 적이 우리를 감히 업신여기지 못할 것"이라며 장계를 올린다. 전장에서 맞닥뜨릴 적들을 오시하는 듯 한 기개가 느껴진다. 불패의 해전사를 완성하며 노량해전에서 숨을 거둘 때까지 이순신은 스스로와 군율에 엄격한, 신묘한 전략과 전술로 성웅으로 추앙되는 존재이다. 

그러나 그런 그도 자식의 죽음 앞에서 따라 죽지 못함을 애통해한다. 전쟁의 와중에 어머니를 병환으로 잃고 집을 지키던 자식마저 적들에게 잃은 것은 그저 개인사일지도 모른다. 당시 수많은 민초들이 겪은 참화 중의 하나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어머니를 잃고 또 제대로 떠나보내지도 못했던 슬픔, 가족을 돌보며 아직 혼인하지 않았던 21세 피붙이의 죽음 앞에 이순신은 아들로서, 아버지로서 오열한다.

세월호 참사 이후, 딸의 죽음에 분노하는 아버지

김영오씨의 애통함도 그와 다르지 않다.

"지금 밥 먹고 편하게 자는, 이게 다 죄스러워요. 남들이 (단식을) 그만두라고... 몸이 망가진다고 (말리지만), 이게 뭐 대수라고... 애가 공포에 떨었을 텐데, 난 살아 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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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재동 화백이 그린 유민 아빠 김영오 씨의 초상화 ⓒ 박재동 화백

SNS에는 김영오씨를 공격하는 무수한 악성 루머가 돌고 있다. 국정원이 나서서 조직적으로 음해하는 것 아니냐는 의구심마저 나온다. <조선일보>가 선두에서 이 루머를 퍼뜨리며 여론몰이에 나섰다. 현재의 상황이 참으로 저열할 수밖에 없다. 아버지의 슬픔과 비통함을 애써 외면하고 싶은 자들의 의도가 명백하게 드러났다.

이순신도 공적으로는 한 나라의 수군을 책임지는 삼도수군통제사의 직위에 있었으나 아들의 죽음 앞에 자연인으로 돌아와서 통곡할 수밖에 없었던 아버지였다. 김영오씨와 유족들의 슬픔과 분노는 당연하다. 그런데 지금 이들의 슬픔은 외면받게 만들고, 분노가 향하는 칼날은 사회의 부조리로부터 빗겨가게 하는 행태가 계속되고 있다. 

박근혜 대통령도 부모를 모두 잃었다. 자신을 낳아준 부모를 먼저 보낸 자식의 입장이다. 그 입장에서 아이를 먼저 보낸 부모의 슬픔과 분노를 이해할 수는 없는 걸까. 침몰하는 세월호를 TV 화면을 통해 바라본 국민들은 유가족에게 감정이입을 했다. 그 안에서 끝내 생환하지 못한 아이들과 유가족들에게 이입된 것은 동감의 정서였다.

가장 가까운 이들의 눈물이 눈물을 불렀고, 슬픔과 분노도 함께 하게 됐다. 그런데 보수언론은 이 눈물과 슬픔과 분노에 개인사의 비극을 덧칠한다. 개인사로 만들어 국가가 책임질 필요가 없는 것처럼 몰아간다. 심지어 그가 불순한 의도를 가졌다고 꾸며댄다. 이 정권과 보수 언론은 무엇을 두려워하고 있는 것일까.

유족을 일으켜 세우고 유족들의 눈물을 닦아 주지 못할 하등의 이유가 없다. 지금의 철벽과 같은 외면이 길어질수록 스스로를 옥죄는 사슬이 될 것이다. 끝내 정권의 힘으로 이 모든 것을 덮는다 해도 이 정권이 영원한 것이 될 수 없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이순신의 조카 이분이 쓴 <이충무공행록>에 전하는 바에 따르면 새로 잡혀온 왜적 중에 아들 면을 죽인 왜적이 있어 그를 죽이고 아들을 위로했다고 한다. 은폐의 시간이 지나면 반드시 그 대가가 돌아온다. 

침몰하는 세월호 안에서 숨져간 모든 이들의 죽음을 기억해야 한다. 다시는 같은 일이 반복되지 않도록 하는 일은 살아남은 자의 의무다. 이를 요구하는 것은 정당하다. 당연한 권리다. 김영오씨의 단식은 그가 죽음을 무릅쓰고라도 밝혀내야 하는 진실이 있음을 우리 사회에 알리는 일이었다. 어떤 흠집이라도 잡아내려고 혈안이 된 일부 언론이 절대로 잊어서는 안 되는 사실이 있다. 김영오씨는 아버지다.

자연인 이순신이 그랬듯, 자연인 김영오씨도 아버지다. 자식의 죽음에 슬퍼하고 분노한 아버지다. 그래서 이 둘은 닮았다. 그의 슬픔과 분노를 자연인 김영오, 아버지 김영오의 슬픔과 분노로 이해하고 감싸야 한다. 김영오씨를 폄훼하는 저열한 짓을 그만둬라. 슬픔은 슬픔으로만 보라.
 

덧붙이는 글 | 명량해전 이후 이순신은 아들 면을 잃는다. 자식을 잃은 슬픔 앞에서 그도 자연인으로 돌아가 통곡한다. 김영오씨는 자식을 먼저 보낸 아버지일 뿐이다. 그의 슬픔을 슬픔으로 직시하지 않으려하는 존재들은 스스로 감출 것이 너무 많음을 고백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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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civ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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