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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장성, 삼백리를 이은 천년의 물음표
2009년 12월 09일 08시 37분 32초

 
장성하면 십중팔구는 진시황이 쌓았고 명나라때 보수했다는 만리장성을 뇌리에 떠올린다. 발해기슭의 산해관(山海关)으로부터 서북지역의 가욕관(嘉峪关)까지 장장 6000여킬로메터 이어진 만리장성은 우주선에서 육안으로 보이는 인공축조물로 소문을 놓을만큼 세상에 이름이 자자한 고대유적이다.

막상 천리밖의 연변에서 만리장성은 세상 저쪽의 이야기나 다름없다. 장성이 바로 마을뒤산에 있다는건 더구나 황당한 렵기 자체로 비쳐지는것이다. 연길 동북쪽의 광흥촌(广兴)에서 만난 왕씨 성의 촌민은 아예 살다가 별꼴 다 보겠다는 기색이였다.

“아니, 그게 어떻게 우리 마을에 있지요?” 

진짜 수림에 들어가서 꼬리달린 물고기를 찾고 강물에 들어서서 네발가진 짐승을 찾는 사람을 만나면 그런 표정을 지을가싶다.

우리는 잠깐 할말을 잃고 농가 마당에 어정쩡하니 서있었다. 북산 꼭대기에 둔덕처럼 높이 솟은 봉화대가 무덤덤하게 마을을 내려다보고있었다. 봉화대에 철심처럼 박혀있는 송신탑은 말 그대로 천년전 하늘에 뭉게뭉게 피여오르던 연기를 세상 저쪽으로 말끔히 밀어버리고 있는것 같았다.


문물지(文物誌)를 비롯한 자료의 기록에 따르면 연길지역의 옛 장성은 서북쪽 팔도(八道)향의 쌍봉산(双凤山)과 태암(台岩)촌의 평봉산(平峰山), 동북쪽의 청차관(青茶关)을 거쳐 바로 도문시 장안진의 이 광흥촌 북산을 지난다. 이 옛 장성은 만리장성과 천리 너머 상거한건 물론이요, 형태도 전혀 달라 아무런 련관이 없는것으로 알려진다. 또 잔존한 성벽의 상당부분은 자칫 길게 뻗은 흙무지나 돌무지 정도로 오인을 받기 십상이다. 그래서인지 마을사람들은 봉화대이면 몰라도 장성이 있다는 말은 난생 처음 듣는다는것이다.

“혹여나” 하고 무척 우려되였지만 장성 흔적은 의외로 북산에 적지 않았다. 0.5~1메터 높이의 토성은 군데군데 끊어지면서 산등성이를 따라 마을동쪽의 욕지산(浴池山)까지 이르고있었던것이다. 욕지산 산정에는 아직도 옛 초소자리와 건물자리가 온전하게 남아있었다. 성벽은 동쪽으로 부르하통하를 건넌후 더는 보이지 않고 나중에 계림(鸡林) 북산의 봉화대에서 맥이 끊어지고있었다.

화룡시 서성(西城)의 이도구(二道沟)에서 시작되는것으로 알려진 옛 장성은 이처럼 연길동쪽의 하룡촌 부근에서 끝나며 전 구간을 걸쳐 무려 150킬로메터에 달한다. 현지의 일부 산악인들은 동쪽으로 20킬로메터 정도 떨어진 곡수(曲水) 부근의 산마루에서도 망대 흔적을 발견, 이를 장성의 련속으로 보고있지만 장성이 거기까지 이어져 있다는건 아직까지 고고학적으로 확증된바 없다.

뒤이야기이지만 현지에서 장성이 있다는걸 알고있는 사람은 학자나 일부 산악인을 제외하고도 적지 않았다. 룡정시 세린하촌에 살았던 김무석씨가 바로 그중의 한사람이다. 그는 뒤산에 있는 토성이 바로 장성이라고 로인들에게서 들었다고 하면서 이 토성은 산등성이를 타고 마을북쪽의 동불사쪽으로 갔으며 초겨울 나무잎이 다 떨어지면 산우에 토성의 륜곽이 아주 선명하게 드러났다고 말한다. 잠깐 짚고 넘어가야 할 점은 동불사의 장성이 관선(官船)과 사수(泗水) 지역을 지나 팔도로 이어진다는것이다. 그가 말한 “토성”이 바로 옛 장성 줄기의 일부라는 점을 확인시켜주는 부분이다.


그러나 우리를 안내하여 오랜만에 고향을 찾은 김무석씨는 산길을 따라 오르다가 나중에 탄식을 락엽처럼 련방 떨어뜨렸다. 이전에 땔나무 등 람벌로 벌거숭이로 되였던 산이 다시 본연의 모습으로 돌아가고있었던것이다. 빼곡한 수풀속에 묻힌 장성은 그야말로 강물에 떨어뜨린 바늘을 찾기나 다름없었다.

장성은 이곳에서 그때 그 이야기로 남았지만 그렇다고 옛 기억을 죄다 지워버린게 아니였다. 세린하부근의 지명에 사진처럼 그대로 찍혀있었던것이다. 바로 서남쪽의 룡정과 화룡의 접경지에 “장성촌(长城村)”이라고 하는 마을이 있었다. 그러나 장성촌서쪽의 산에도 성벽은 없고 돈대만 홀로 남아있었다. 산꼭대기에 위치한 돈대는 수십메터의 둘레에 높이가 3,4메터나 되여 멀리서도 금세 눈에 띄였다. 장성의 일부 구간은 이처럼 성벽이 아닌 돈대와 망대, 봉화대 등으로 이어지고있었다.

장성은 장성촌에서 계속 서남쪽으로 화룡의 약수동(药水洞)과 룡문, 장항(獐项)을 차례로 지나며 이도구의 동산에 이르러 마지막으로 토성의 흔적을 보이고있었다. 사실 이도구남쪽 팔가자의 서산에서도 망대 등의 군사시설이 발견되였으며 이때문에 현지에서는 또 장성의 서쪽 끝머리를 팔가자 부근으로 보아야 한다고 하는 주장이 나오고있었다.

하긴 장성이라면 모두 평지를 최대한 성안에 넣고있는게 특점이다. 적군에게 산을 넘어 대렬을 정돈할 여지를 주지 않고 또 곡물이 산출되는 그 땅을 지키자는게 목적이기때문이다. 그런 시각에서 보면 장성이 투도(头道) 벌을 품에 안은 팔가자의 서산까지 련결된다는 설에는 신빙성이 없는게 아니다.

이러니저러니 연길, 도문, 룡정, 화룡 등 지역을 아우른 150킬로메터의 옛 장성은 지면조사에 한정되고 유물이 발견되지 않았으며 문헌적인 고증이 없었기때문에 상당기간 확실한 축성년대가 밝혀지지 않았다. 일부에서는 발해시기 중경과 동경을 수비하기 위한 군사시설이였으며 그후 동하국시기에 계속 사용되였다고 주장하였다. 또 금나라시기의 장성이라는 설도 있었다. 1986년, 연변박물관 고고학자들이 청차관 부근의 장성 돈대 단면에서 목탄표본을 채집, C14 년대측정을 진행한 결과 1580±75년전(수륜교정)으로 수치를 얻었으며 이로부터 고구려때 축성된 장성이라는 주장이 우세하게 되였다. 연변지역은 고구려가 일찍 B․C 28년 책성을 설치, 북옥저에 실질적인 지배를 해왔기때문이다. 따라서 옛 장성은 고구려가 4,5세기 북부 읍루세력의 침입을 방어하고 북옥저에서 고구려세력의 통치와 안전을 도모하기 위해 쌓은것으로 보인다.

솔직히 고구려 150킬로메터의 장성은 명나라 만리장성의 거창한 규모에 전혀 비길바가 아니다. 또 장기적인 수비를 위한 견고한 방어선이라기보다 변방의 성곽들을 련결하는 보조시설에 불과하다. 그러나 연변에 현존하는 최대의 유적으로서 사상 전대미문의 방대한 군사시설이라는데 의미가 있다. 어마어마한 이런 시설은 약 2백년후 동북땅에 또 하나 나타난다. 고구려 영류왕(荣留王)이 당나라의 진공에 대비하여 16년간 부여성(지금의 농안부근)부터 시작하여 서남으로 바다에 이르기까지 천리장성을 쌓았던것이다. 『삼국유사』에 따르면 이때 남자들은 모두 장성축조공사에 나가고 녀성들이 밭갈이를 하였다. 천리장성은 규모나 형태가 연변 3백리의 옛 장성과 류사한걸로 분석된다. 마찬가지로 천리장성을 축조할 때의 상황은 3150킬로메터의 옛 장성 토목공사에도 엇비슷하게 벌어졌으리라고 짐작할수 있다.

미상불(주:더욱이) 이 옛 장성은 나중에 제구실을 하지 못했거나 인력과 물력만 소모한 “치레거리”에 지나지 않았나싶다. 장성에서 량군이 싸웠다는 기록은 사서에 전무하며 또 장성의 바깥쪽 전연요새로 주장되는 오호령(五虎岭)산성이나 송월(松月)산성 등 고대성곽에도 전투기록은 발견되지 않고있기때문이다. 산등성이에 피페한 언덕으로 서있는 장성유적은 어쩌면 력사에 글 한줄 바로 남기지 못한 아쉬움 그 자체가 아닌지 모른다.


그나마 유적지에 가까스로 담겨있던 옛 기억은 후세의 무심한 인간들에게 간간이 토막나고 있었다. 언제인가 계림의 북산을 오르던 산악인 리승희씨는 봉화대를 파는 도굴군을 발견하고 실소를 금치 못했다고 한다.

“그게 무덤이 아닙니다. 괜히 헛수고를 하지 마세요.”

그러나 도굴군은 도무지 미덥지 않는 눈치였다는것이다. 길가는 나그네가 싱겁게 도굴을 념려해서 거짓말을 하는줄로 알았던 모양이다.

장성 성벽 역시 무지한 도굴군의 파괴에 못지 않게 개간의 보습에 찍혀 동강이 난 곳이 한두 곳 아니다. 또 오랜 세월을 거치면서 자연적으로 끊어져 없어진 성벽도 적지 않다. 특히 하천류역의 평지에는 성벽이라곤 거의 꼬물만치도 보이지 않는다. 다행이 잔존한 성벽은 아직도 몇리씩 되는게 여럿 있으며 또 일부 성벽은 높이가 몇메터나 되는 등 그제날의 모습을 더듬을수 있게 한다.

장성의 그러한 참모습을 찾기 위한 사학자와 산악인들의 답사는 1980년대부터 지금까지 내처 끊어지지 않고있었다. 와중에는 이도구부터 계림까지 장장 몇백리를 주파한 괴력의 인물도 있다. 이처럼 어려운 노력임에도 불구, 기점과 종점마저 어딘지 왈가불가 론쟁이 많은 등 장성의 일부 구간은 여전히 혼선을 빚는다. 일명 변장(边墙)이라고 불리우는 훈춘 경내의 옛 장성과 한데 련결하여 고구려 400킬로메터 장성이라고 하는 설도 등장하고있다.

그야말로 150킬로메터의 옛 장성은 한마리의 신비한 룡처럼 머리와 꼬리는 물론 몸통의 일부까지 숨기고있었다. 한쪼각 두쪼각씩 일부나마 세상에 드러나고있는 옛 기억의 편린들… 어쩌면 연변의 산과 들에 그려진 이 미스터리의 거대한 유적은 선인들이 후세에 남겨놓은 천년의 타임캡슐이 아닐지 모른다. 

김호림/중국국제방송국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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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civ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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