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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환의 흔적의 역사]임금의 이름이 외자인 까닭
경향신문 선임기자  입력 : 2013-10-08 11:14:28ㅣ수정 : 2013-10-08 11:34:55

“<춘추>는 존귀한 사람과 친한 사람, 어진 사람의 이름을 숨겼다.(春秋爲尊者諱 爲親者諱 爲賢者諱)”

<춘추>의 주석서인 <춘추공양전> ‘민공원년경신조’에 흥미로운 대목이 보인다. 존경하는 자와 친지, 그리고 현자의 이름자와 호를 부르지 않는다는 것이다.

무슨 말인가. 이것이 서양문화와 달리 남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지 않는 유교 문화의 특징이다. 이를 ‘기휘(忌諱)’ 혹은 ‘피휘(避諱)’라 한다. 

친한 사이에도 별칭이나 아호, 별호 등을 지은 뒤에야 마음껏 불렀다. 그랬으니 웃어른은 물론이고. 황제나 국왕, 심지어는 공자와 주공, 주희, 노자 등 성인이라 추앙하는 사람들의 이름자를 저촉하기만 하면 큰일나는 줄 알았다. 아니 실제로 멸족이라는 극형을 받은 사례도 비일비재했다. 기휘 혹은 피휘를 둘러싼 갖가지 이야기보따리를 풀어보자.

조선시대 국왕의 업적을 뽑아 기록한 <국조보감>. 세종대왕의 이름과 자를 붉은 종이로 가려놓았다. 임금의 이름자를 함부로 침범할 수 없다는 <기휘> 때문이었다. |국립고궁박물관 소장

■ 大丘가 大邱가 된 사연“대구(大丘)라는 말을 쓰기가 매우 꺼려집니다.”

1759년(영조 26년), 경상도 대구부의 유학자 이양채가 간곡한 상소문을 올린다. 해마다 대구의 향교에서 공자의 제사를 올릴 때 축문식(祝文式)에 대수롭잖게 ‘대구(大丘) 판관’이라는 직함을 쓰는데 이것이 망령된다는 것이었다. 

“대구의 ‘구(丘)’자는 바로 공자의 이름인 구(丘)이니, 제사 때마다 공자의 이름을 함부로 침범하게 됩니다. 이 때문에 인심이 불안하게 여깁니다. 이름을 바꾸도록 조치해주십시오..”(<영조실록>)

공자의 이름을 할 수 없이 부르게 되어 민심이 불안해진다? 영조 임금은 혀를 끌끌 차며 상소문을 기각했다. 

“지명 가운데 구(丘)자가 들어간 곳이 얼마나 많은데 그런 소리를 하느냐. 지난 300년 동안, 조정의 그 많은 유생들은 이양채보다 못해서 그냥 두었겠냐.”

그러나 ‘대구(大丘)’는 결국 정조-순조 시대를 지나며 슬그머니 ‘대구(大邱’)로 둔갑했다. 삼국시대부터 ‘넓은 공간(達)의 마을(伐)’, 즉 달벌(달구벌)의 한자이름이었던 대구(大丘)는 결국 공자의 이름을 범했다는 이유로 고유의 이름을 잃고 만 것이다. 그 뿐인가.

■ 신임 관찰사, 부임을 고사한 까닭 

1419년(세종 1년), 우의정을 지낸 류관(柳觀)의 아들 류계문은 충청도 관찰사로 임명됐다. 지금으로 치면 충청도지사가 되었으니 가문의 경사였다.

그러나 정작 당사자인 류계문은 부임을 매우 꺼려했다. 이유는 딱 하나. 관찰사(觀察使)의 ‘관(觀)’자가 부친의 이름과 같다는 것이었다. 직함을 부르게 되면 결국 아버지의 이름을 범하는 격이니 도저히 직무를 감당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어쩌랴. 결국 아버지(柳觀)가 이름을 ‘觀’에서 ‘寬’으로 바꾸고 나서야 아들이 임지로 떠났다. 

또 있다. 세종대왕(본명 이도)이 즉위하자(1418년) 이름을 바꾸는 사례가 속출했다. 예컨대 개성 유후 이도분(李都芬)은 이사분(李思芬)으로 고쳤다. 충청도 공주의 교통통신시설인 ‘이도역(利道驛)’도 충청도 관찰사의 상소로 ‘이인역(利仁驛)’이 됐다.(<세종실록>) 사실 임금의 이름과 한자가 같지 않는 데도 단지 음이 같다는 이유로 이름을 바꾼 것이다. 

또 경복궁의 3개 문 가운데 중문의 원래이름은 ‘예(禮)를 널리 편다’는 의미에서 홍례문(弘禮門)이었다. 하지만 1867년(고종 4년) 흥선대원군이 청나라 건륭제의 이름(홍력·弘歷)을 피해야 한다며 ‘흥례문(興禮門)으로 고쳤다. 최초의 주자학자인 안향(安珦·1234~1306년)은 140여 년이 지난 조선조 문종 때부터 안유(安裕)로 일컬어졌다. 왜냐. 문종의 초명이 향(珦)이었기 때문이었다.

1875년(고종 12년) 고종은 왕세자(순종)의 이름을 두고 빈청에서 올린 ‘3개의 후보’(삼망) 가운데 ‘척(土+石)’을 낙점했다. 자는 ‘군방(君邦)’으로 정했다.(임민혁의 <왕의 이름, 묘호>에서)
 
■ 천개소문과 연개소문

조선 뿐이 아니다. 신라시대 명문인 문무왕비문과 숭복사비문에는 간지인 병진(丙辰)과 병오(丙午)를 경진(景辰)과 경오(景午)로 쓴 사례가 보인다. 이것은 당나라 고조의 부친이름인 ‘병(昞)’의 음을 기휘한 것이다. 또 <삼국사기>는 고구려 대막리지인 연개소문(淵蓋蘇文)을 천개소문(泉蓋蘇文)으로 기록했다. 중국측 기록인 <신당서>, <구당서>, <자치통감> 등도 모두 천개소문으로 돼있다. 당나라 고조의 이름(이연·李淵)을 피하기 위해 ‘연씨’가 ‘천씨’로 둔갑한 것이다. 고려 창왕(1388~1389년)은 수창궁(壽昌宮)의 이름 가운데 ‘昌’자가 왕의 이름과 같다 해서 ‘수령궁(壽寧宮)’으로 고친 뒤 거처까지 옮겼다. 고려의 숙종(1095~1105년)의 초명은 ‘희(熙)’였지만, 요나라 9대 황제 천조제가 즉위한 1101년 이름을 갑자기 ‘옹(顒)’으로 바꿨다. 천조제의 이름(연희·延禧)과 발음(희자)이 같았기 때문이었다. 


■ 아버지 이름 때문에, 과거시험도 포기했다. 

기휘, 혹은 피휘의 원조격인 중국은 오죽했을까.

후한의 허신(55~125년 추정)이 편찬한 <설문해자>는 중국에서 가장 오래된 자전(字典)이다. 1만 자에 달하는 한자 하나하나에 본래의 글자 모양과 뜻 그리고 발음을 종합적으로 해설했다. 

그런데 허신이 이 불세출의 사전에서 해설하지 못한 글자가 있었으니 바로, ‘시부(示部)’에 나오는 ‘호(祜)’자이다. 허신이 주석을 달지 못한 까닭이 있다. 당시 후한의 황제인 안제(재위 106~125년)의 이름이 ‘유호(劉枯)’였기 때문이었다. 사전에서조차 지존인 황제의 이름을 해설할 수 없었던 것이다. 진시황의 본명(영정·嬴政) 때문에 ‘정월(政月)→정월(正月)’로, 한고조의 본명(유방·劉邦) 때문에 ‘방(邦)→국(國)’으로 각각 바꿨다. 한고조의 정부인인 여후의 이름(여치·呂雉) 때문에 꿩(雉)은 야계(野鷄), 즉 야생 닭으로 일컬어졌다. 또 한 문제의 이름(항·恒) 때문에 중국 신화에 나오는 달의 여신인 ‘항아(姮娥)’는 ‘상아(嫦娥)’로 바꿔 불렀다. 

심지어 후한 광무제의 이름(유수·劉秀) 때문에 뛰어난 재능의 소유자를 뜻하는 ‘수재(秀才)’는 ‘무재(茂才)’로 일컬어지기도 했다. 수나라 양제(양광·楊廣) 때는 고대 백과사전의 이름이었던 <광아(廣雅)>가 <박아(博雅)>로 바뀌기도 했다.

당나라 때는 더욱 심했다. 당태종(이세민·李世民) 때문에 백성을 뜻하는 민(民)은 인(人)으로 바뀌었다. ‘관세음’은 아예 ‘관음’으로 일컬어졌다. 당나라 때 ‘시의 귀재’라 일컬어졌던 이하(李賀·790~816년)라는 시인은 26살에 죽을 때까지 과거인 진사과 시험을 결코 보지 않았다. 그 이유가 걸작이었다. 그의 할아버지 이름이 ‘진숙(晋肅)’이었다. 그러니까 진사의 진(進)자와, 진숙의 진(晋)자가 음이 같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이하는 “할아버지의 이름을 함부로 부를 수 없다”면서 시험을 거부한 것이다. 

■‘멸문의 화’가 된 ‘옹정(雍正)’과 ‘유지(維止)’ 

하기야 자칫 황제의 이름을 썼다가는 멸문의 화를 당할 수도 있었으니 그럴만도 했다. 

하나라부터 청나라까지 300여 명에 이르는 황제 이름을 피한다는 것이 어디 쉬웠겠는가. 여기에 성현의 이름까지 피해야 했으니 이름을 둘러싼 옛 사람들의 목숨을 건 분투가 눈물겨울 따름이다. 

예컨대 청나라 강희제 시대 사람인 대명세(戴名世)는 자신의 개인문집 <남산집>에서 남명(南明) 영력제의 연호를 사용한 게 드러났다. 남명은 명나라 멸망 뒤 명황가의 일족이 세운 지방정권(1644~1662)년이고, ‘영력(永歷)’은 명나라 신종의 손자인 주유량의 연호였다. 청나라 조정은 명나라의 부흥을 도모한 죄로 대명세를 참수하고 일족을 몰살했다. 

또 1726년(옹정 4년), 이부시랑 사사정(査嗣庭)이 향시의 시험문제를 출제할 때 ‘유민소지(維民所止)’라는 시제를 발췌했다. 이 시제는 <시경> ‘상송(商頌)·현조’에 등장하는 ‘방기천리(邦幾千里) 유민소지(維民所止)’에서 인용한 것이다. 즉 ‘도성에서 사방 천리 되는 지역은 아무리 넓어도 백성들이 거주하는 곳’이라는 뜻이다. 아무 정치적인 색채가 없었던 시제였다. 

그런데 이것이 화를 불렀다. 시제의 첫글자인 ‘유(維)’자가 ‘옹(雍)’자의 머리를 없앴고, 마지막 글자인 ‘지(止)’는 ‘정(正)자’의 밑을 자른 것이라는 모함을 받은 것이다. 한마디로 이 시험문제는 옹정황제의 머리와 발을 자른다는 의미, 즉 황제를 시해하려는 의도를 드러낸 것이라는 주장이 제기됐다. 결국 사사정은 효수됐고, 일족은 죽임을 당했거나 원지로 유배되는 참화를 겪었다.

1757년(건륭 22년), 강서의 팽가병(彭家屛)은 가문의 족보 <대팽통기(大彭統記)>를 간행하면서 건륭제를 ‘기휘’하지 않는 실수를 저질렀다. 이 죄로 팽가병은 자살, 집안은 참수형을 당했다. 이밖에 강서의 왕석후(王錫侯)는 사전인 <자관(字貫)>을 펴낼 때 범례에 강희제·옹정제·건륭제의 이름을 집어넣는 바람에 대역죄로 처단된다. 그와 16세 이상의 친족은 처형되고, 처첩과 16세 이하 어린아이들은 원지로 유배되거나 공신들의 노예가 됐다. 기휘 혹은 피휘의 방법은 주로 3가지가 있었다. 피해야 할 글자의 마지막 획을 빼거나, 혹은 다른 글자로 대체하거나, 아예 공란으로 남겨두거나 하는 방법이었다.

그런데 팽가병이나 왕석후는 이 세가지 중 하나도 택하지 않아 참변을 당한 것이다.

■ 임금 이름이 외자인 까닭


조선 임금들의 이름. 3대 태종(방원)과 6대 단종(홍위)를 빼고는 모두 외자 이름이다. (정종수의 <조선시대 국왕의 호칭과 묘호>에서) 

우리 역사를 유심히 살피면 흥미로운 현상 하나를 발견할 수 있다.

바로 임금의 이름을 외자로 짓는다는 것이다. 고려왕조의 경우 475년 동안 34대의 국왕이 거쳐갔는데, 그들의 이름은 모두 외자였다. 1대 태조(건·建), 2대 혜종(무·武), 3대 정종(요·堯), 4대 광종(소·昭)….

조선의 경우엔 3대 태종(방원)과 6대 단종(홍위·弘暐)를 뺀 나머지 25명의 국왕 이름이 외자이다.

이 가운데 태조(이성계)와 2대 정종(방과), 3대 태종(방원)은 조선 건국 이전에 지은 이름이므로 두 자였다. 그것도 태조는 조선을 건국한 이후 성계→단(旦)으로, 정종은 방과→경(日+敬)으로 각각 바꿨다.

단순 왕족으로 강화도에서 평민처럼 살았던 강화도령 이원범은 철종으로 즉위하자 외자인 ‘변(日+弁)’으로 개명했다. 또 초명이 이명복이었던 고종은 왕위에 오르자 역시 ‘희(혹은 형)’로 바꿨다.

역대 국왕들이 외자를 택한 이유는 바로 ‘백성을 사랑하는 마음씨’였다.

백성들의 입장에서 황제나 임금, 옛 성현의 이름을 피해야 했던 ‘기휘(피휘)’는 불편하기 짝이 없는 제도였다. 그러니 임금으로서는 피해야 하는 글자를 한자라도 줄여 백성들의 편의를 돌봐야 했다.

역대 임금들은 일부러 거의 사용하지 않거나 희귀한 글자를 골라썼고, 심지어는 사전에도 없는 한자를 새롭게 만들기도 했다. 선조는 아예 역대 임금들의 이름을 대신하는 글자를 제정하기도 했다.

■“이미 이름을 고쳤는데 또 무슨….”

1704년(숙종 30년), 국왕으로 추존된 덕종의 초명, 즉 숭(崇)을 피해야 할 지를 두고 논란이 벌어졌다. 

덕종은 세조의 아들이자 성종의 아버지로 세자였지만 즉위 전인 20살에 요절했다. 인수대비의 남편이기도 한 덕종은 성종이 즉위한 후 왕으로 추존됐다. 

그런데 230여 년이 지난 숙종 때 종친들이 왕실의 족보인 <선원계보>를 편찬할 때 덕종의 초휘가 ‘숭’이었음을 발견하고 기휘 여부를 문제삼은 것이다. 그러나 기나긴 논란 끝에 덕종의 초명을 피해야 할 이유가 없다는 결론을 내린다. 당시 <성종실록> 등 당대의 자료를 검토한 춘추관 관리들의 결론은 이랬다.

“덕종의 초휘(숭)는 세조대왕이 원자(元子)를 봉할 때에는 휘(諱)를 이미 고쳤습니다. ~세조 대왕(世祖大王)께서 이미 백성의 불편함을 아시고 원자(덕종)의 이름을 바꾸신게 아니었겠습니까.”(<숙종실록>)

무슨 얘기냐면 세조가 적장자인 덕종을 원자로 봉하면서 이름을 ‘숭’에서 ‘장(暲)’으로 고친 것을 뜻한다. 이미 백성들을 위해 초명을 바꾼 바 있는데, 230여 년이 지난 지금에 와서 초명을 피한다는 것은 좀 지나치다는 것이었다. 숙종도 ‘백성들이 불편하다’는 요지의 춘추관 간언을 받아들였다. 

■“괜찮으니 불러라! 불러!”

영조도 “지나친 기휘(피휘)를 금물”이라는 명령을 내린 일이 있었다. 

영조 임금이 40년간이나 입밖에 내지 않았던 자신의 이름(금·昑)을 우연히 발설한 것이 발단이 됐다. 그러자 문제가 생겼다. 승지가 임금에게 올리는 상소문을 읽어올릴 때 어느 대목에서 말을 잇지 못하는 것이었다. 바로 상소문에 영조 임금의 이름이 적혀있었던 것이다. 그러자 영조 임금은 혀를 끌끌 찼다.

“승지가 읽지 못하는데, 반드시 그럴 필요가 없다. 읽어도 된다. 과인이 40년간이나 (내 이름을) 말하지 않았던 까닭을 아는가.” 

영조는 덧붙여 “본명 이외에도 ‘이름 자와 음이 같은 이름’(嫌名)까지 피하는 것은 지나치다”며 국왕의 이름을 회피하는 범위를 좁히라는 명을 내리기도 했다.(<연려실기술>, ‘국조전고·휘피’)

지금 보면 소모적이고 비생산적인 전통이 아닐 수 없다. 하지만 글자 하나에도 목숨을 내걸만큼 이름 석자는 대단한 의미를 지녔음을 알 수 있다. 그러고 보니 이름, 함부로 지을 게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참고자료>

정종수, <조선시대 국왕의 호칭과 묘호>, 동원학술논문집’ 제14집, 국립중앙박물관·한국고고미술연구소, 2012년
한용수, <韓中避諱小考>, ‘한중인문학연구’ 제28집, 한중인문학회, 2009년 
임민혁, <왕의 이름, 묘호>(하늘의 이름으로 역사를 심판하다), 문학동네, 2010년




 
Posted by civ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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