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1468321

정조는 '수도를 화성으로 옮긴다'고 안 했다
[사극으로 역사읽기] KBS 2 청춘사극 <성균관 스캔들>, 여섯 번째 이야기
10.10.27 16:51 l 최종 업데이트 10.10.27 16:51 l 김종성(qqqkim2000)

▲  KBS2 <성균관 스캔들> 속의 정조 임금(조성하 분). ⓒ KBS

KBS2 사극 <성균관 스캔들>에서 고독한 개혁군주 정조(조성하 분)가 중대 계획을 입 밖으로 누설했다. 수도를 서울에서 화성 즉 수원으로 옮기겠다는 속마음을 내비친 것이다. 

25일 방영된 제17부에서 정조는 젊은 성균관 유생들인 잘금 4인방(믹키유천·박민영·송중기·유아인 분)을 깡패들이나 모일 것 같은 은밀한 지하 벙커로 불러들여 화성천도 계획을 밝히면서 "신분의 귀천이 없는 새로운 세상을 이곳에서 열겠노라"고 말했다. 그런 계획을 갖고 있으니 자신을 좀 도와달라는 것이 정조 임금의 당부였다. 

세계적 경제사 학자인 안드레 군더 프랑크의 <리오리엔트>에 따르면 1500~1800년 기간에 세계 무역흑자의 40% 이상을 흡수한 청나라와 더불어 동아시아의 G3(조선·청·일본) 안에 포함되었던 조선왕국의 군주가 일개 대학생 4명을 불러다 놓고 웅대한 야망을 밝히며 절절히 도움을 구하고 있으니, 참 딱하고 서글픈 일이 아닐 수 없다. 아르바이트 대학생 4명을 불러다 놓고 "우리, 가족처럼 열심히 해보자"고 호소하는 구멍가게 사장도 아니고 말이다. 

2년 전의 드라마 <이산> 때만 해도 어딘가 근사하고 희망적이던 정조 임금이 요즘 <성균관 스캔들>에 와서는 왜 이렇게 변해 있는 것인지 알 수 없는 일이다. 물론 이것은 드라마 속의 상황에 불과하다. 실제로도 그랬다면, 식민지 근대화론자들 혹은 식민사관 추종자들의 주장처럼 조선은 정말로 불쌍하고 궁상맞은 나라였을 것이다.

<성균관 스캔들> 속 정조 임금의 이미지는 그렇다고 치고, 과연 이 드라마의 이야기대로 정조 임금은 과연 화성으로 도읍을 옮길 계획을 갖고 있었을까?

정조는 죽기 4년 전인 정조 20년(1796년)에 45세의 나이로 신도시 화성을 완공했다. 화성은 궁궐(화성행궁)과 성곽과 4대문과 군사령부를 갖춘, 속이 꽉 찬 계획 도시였다. 이쯤 되면 정조가 천도 계획을 갖고 있었을 것이라고 짐작할 만도 하다. 그런데 정작 정조의 입에서는 천도 계획이 나오지 않았다.  

이런 상태에서 정조 24년(1800)에 정조가 갑작스레 죽고 말았으니, 화성천도 문제는 그야말로 미스터리 영역으로 넘어갈 수밖에 없는 것이다. 오늘날 한국 역사학계에서 화성천도설을 논의는 하면서도 확실한 결론을 내리지 못하는 것은, 정조가 신도시만 덩그러니 지어놓고는 별다른 말도 없이 세상을 떠나버렸기 때문이다. 


▲  경기도 수원시 팔달구 소재 화령전에 보관된 정조의 초상화. 화령전은 화성행궁과 붙어 있다. ⓒ 김종성

'천도계획을 밝히지 않았다면 그런 계획이 없었다고 보아야 하지 않는가?'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꼭 그렇게 볼 수도 없는 것이, 정조가 웬만해서는 속마음을 잘 드러내지 않는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외형적인 발언 여부만 갖고는 정조의 의중을 정확히 파악할 수 없다. 

그 같은 정조의 인격을 보여주는 사례가 있다. 집권 초기에 그를 보좌한 최측근 중에 홍국영과 김종수가 있었다. 두 사람은 매우 밀접한 동지관계였다. 이들은 정조의 외할아버지인 홍봉한이 정조의 아버지인 사도세자의 억울한 죽음에 책임이 있다고 맹비난을 가했다. 그런데 이 시기에 정조는 어머니인 혜경궁 홍씨와 단둘이 있을 때에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혜경궁의 회고록인 <한중록>에 나오는 대화 내용이다. 

"시방은 저들이 하는 대로 놔두고 외할아버지의 저러한 처지(무죄)를 밝혀 드리지 못하지만, 후왕(순조) 때에 이르면 제 아비를 보호하고 종사(나라)를 지킨 (홍봉한의) 충성을 어찌 찬양하지 않겠습니까?"

홍봉한에게는 아무 잘못이 없는데도 홍국영·김종수가 홍봉한을 비난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는 발언이었다. 그러면서도 그는 '지금 당장에는 홍국영·김종수가 하자는 대로 지켜보겠다'고 말했다. 밖에서는 홍국영·김종수에 대한 무한 신뢰를 표출하는 정조가, 어머니 앞에서는 툭 까놓고 그들에 대한 적개심을 표출하고 있는 것이다. 정조가 그런 생각을 하고 있으리라고는 어머니 외에는 아무도 알 수 없었다.  

그로부터 얼마 후에 정조는 김종수를 이용하여 홍국영을 실각시켰다. 비록 임금의 지시를 받았다고는 하지만, 어제의 동지인 홍국영을 물어뜯는 김종수의 태도를 두고 혜경궁이 정조에게 "어쩜 저럴 수 있느냐?"고 말하자, 정조는 "지도 살아야 하니 어쩌겠습니까?"라고 답했다. 정조의 밀명을 받고 홍국영을 공격하는 김종수 역시 실은 정조의 미움을 받고 있었던 것이다. 김종수 역시 눈치 챌  수 없을 정도로 정조는 속마음을 철저히 숨기고 있었던 것이다. 

이런 줄도 모르고 실각되기 이전의 홍국영은, 정조 3년 9월 26일자(1779.11.4) <정조실록>에 따르면, 정조 임금의 처소 근처에 있는 자신의 집무실에서 이따금씩 큰소리로 고함도 쳐보고 마치 왕이나 된 것처럼 시녀들을 끼고 유흥을 즐겼다. <한중록>에 따르면, 그는 임금의 밥상인 수라상까지 시켜 먹기도 했다. 

홍국영은 정조 임금이 자신을 절대적으로 신임하고 있다는 믿음을 갖고 있었던 것이다. 실상은 정조가 자신을 경계하고 있으며 조만간 제거하려 하고 있다는 사실을 전혀 눈치 채지 못했기에, 그처럼 방자한 행동을 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런 일화에서 잘 드러나듯이, 겉으로 드러나는 발언 여부만 갖고 정조를 파악하기에는 정조란 인물의 속마음이 너무나 깊고도 깊었다. 그렇기 때문에 정조가 화성 천도에 관한 발언을 하지 않았다고 하여, 그것만 갖고는 정조가 그런 계획을 품지 않았다고 곧바로 단정할 수 없는 것이다. 

정조처럼 여간해서는 속마음을 드러내지 않는 인물의 의중을 파악하려면, 발언 여부보다는 행적 여하를 분석하는 것이 보다 더 타당한 방법이 될 것이다. 화성 문제와 관련하여 그가 남긴 객관적 행적 가운데에서 주요한 7가지를 살펴보면서, 그가 과연 화성 천도를 계획했는지 여부를 판단해 보기로 하자. 

1. 아버지를 격상시키고 그 무덤을 화성으로 옮기다

즉위년인 1776년에 정조는 오늘날의 서울시 동대문구에 있는 아버지 사도세자의 무덤을 수은묘에서 영우원으로 격상시켰다. 왕실의 무덤은 능-원-묘의 3등급 체제였기 때문에, 이 조치는 아버지의 무덤을 제3등급에서 제2등급으로 격상시키는 것이었다. 죄인 신분으로 죽은 아버지의 위상을 회복하지 않고서는 자신의 정치적 권위를 세울 수 없었기에, 정조는 꼭 아버지를 위해서가 아니라 자기 자신을 위해서라도 그렇게 할 수밖에 없었다. 

이로부터 13년 뒤인 정조 13년(1789), 정조는 화성 건설을 준비하면서 아버지의 무덤을 수원으로 옮기고 그로부터 4년 뒤에 수원을 유수부(광역시) 급으로 승격시킨 다음에 수원의 명칭을 화성으로 바꾸었다. 왕으로서의 자신의 권위와 직결된 아버지의 무덤을 화성으로 옮기면서 그곳에 신도시를 건설했다는 사실은, 정조가 화성과 관련하여 뭔가 대단한 결심을 굳혔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  사도세자의 무덤인 융릉. 정조에 의해 영우원으로 격상된 사도세자의 무덤은 고종황제 때인 1899년에 융릉으로 다시 격상되었다. 융릉은 경기도 화성시 안녕동에 있다. ⓒ 융릉 홈페이지

2. 어머니의 환갑잔치를 화성에서 열다

정조 19년(1795)에 정조는 화성행궁에서 혜경궁의 환갑잔치를 열었다. 한성 왕궁에서 해도 될 일을 굳이 화성에서 벌인 이유는 무엇일까? 아버지의 무덤을 화성에 모신 데에 이어 어머니의 환갑잔치마저 화성에서 열었다는 것은, 정조가 수도 한성에 대해 어딘가 염증을 느끼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어머니와 아버지가 있는 곳, 그곳이 곧 인간이 돌아가야 할 곳이 아닌가? 이는 그의 마음이 화성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다시 말해, 정조가 화성에 대해 뭔가 대단한 결심을 굳히고 있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  화성행궁에서 환갑잔치를 즐기고 있는 혜경궁 홍씨. 사진은 화성행궁 안에 전시된 밀랍인형이다. ⓒ 김종성

3. 친위부대를 화성에 주둔시키다

강력한 기득권세력에 둘러싸여 고독한 투쟁을 전개해야 했던 정조 임금은 즉위 초부터 친위조직 건설에 역점을 두었다. 그래서 나온 것이 규장각과 장용영이었다. 규장각이 문관 중심의 친위조직이라면, 장용영은 무관 중심의 친위조직이었다. 

그런데 정조는 화성 건설을 준비한 지 4년 뒤인 정조 17년(1793)에 친위부대 장용영을 이원화하는 조치를 취했다. 한성 중심의 '장용영 내영'과 화성 중심의 '장용영 외영'으로 양분하고, 이 두 조직이 기존의 중앙군인 오군영보다 더 큰 비중을 갖도록 조치한 것이다. 강력한 군대가 있는 곳에 강력한 권력도 있는 법이다. 화성 중심의 친위부대를 건설했다는 것은 정조가 화성에서 제2의 권력을 꿈꾸었다는 해석을 낳기에 충분한 것이다.  

4. 화성 사대문의 명칭을 의미심장하게 짓다

화성의 북문은 장안문이고 남문은 팔달문이다. '영원한(長) 평화(安)'의 이미지를 떠올리게 하는 장안(長安)은 한나라·당나라를 포함해서 15개의 중국 왕조가 총 1200년 이상이나 도읍으로 삼았던 곳이다. 

한편, 팔달(八達)은 말 그대로 사방팔방으로 통하는 중심지라는 의미다. 장안이니 팔달이니 하는 표현을 화성의 대문 명칭으로 결정했다는 사실은, 정조가 새로운 제국의 중심지를 이곳에 세우려 했을 것이라는 추론을 가능케 하는 대목이다.  


▲  화성의 북문인 장안문의 모습. ⓒ 김종성

5. 화성에 백성들을 끌어 모으다

정조는 시범 농업단지 건설 혹은 세금이나 요역(노동력 제공의무) 면제 등의 유인책을 써서 신도시 화성으로 백성들을 끌어 모았다. 그는 특히 엔지니어나 상인들을 끌어들이는 데에 주력했다. 이를 통해 화성을 자급자족적이며 이상적인 신도시로 만들려 한 것이다. 화성에 친위부대를 배치한 데에 이어 백성들까지 화성으로 대거 유인했다는 것은, 정조가 이곳을 새로운 세상의 모델로 만들려 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지금까지 열거한 5가지 행적을 보노라면, 정조가 정말로 화성천도 계획을 세운 게 아닌가 하는 느낌을 갖는 것도 결코 무리가 아니다. 화성 완공 직후에 정조가 급사하지만 않았다면, 조선의 수도가 한성에서 수원으로 바뀔 수도 있었겠구나 하는 판단이 들 수도 있다. 그런데 아래의 행적들을 살펴보면, 판단을 신중히 해야겠다는 느낌을 갖지 않을 수 없다. 

6. 화성의 규모를 제한하다

실제로 화성을 방문해보면, 과연 수도가 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가 이곳이 좀 좁다는 느낌이 든다. 남문인 팔달문에서 북문인 장안문까지의 거리는 약 1.28킬로미터다. 신호등과 횡단보도도 없고 사람들도 다니지 않는다고 가정하면, 1분 정도에도 충분히 달릴 수 있는 거리다.  

그리고 궁궐인 화성행궁은 서울의 경복궁·창덕궁·창경궁 등과 비교할 때에 너무나 비좁다는 느낌을 주고 있다. 이런 점들을 보면, 정조가 이곳을 도읍 후보지가 아닌 다른 장소로 생각한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수도 있다.  


▲  팔달산 기슭에서 내려다본 화성행궁. 궁의 규모가 좁다는 점을 알 수 있다. ⓒ 김종성

7. 조기 은퇴계획을 세우다

<한중록>에 따르면, 정조는 아들(순조)에게 일찌감치 왕위를 물려주고 53세 때인 1804년 갑자년에 상왕으로 물러날 계획을 갖고 있었다고 한다. 그는 여러 차례에 걸쳐 이런 계획을 어머니에게 내비친 바 있다. 그중 한 대목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정조가 죽기 얼마 전에 어머니에게 말한 내용이다. 

"제가 왕위를 탐내서가 아니라 나라를 위해 마지못해 (자리를 지키고) 있지만, 4년 뒤 갑자년(1804)이면 원자(순조)가 열다섯이 되니 왕위를 물려주기에 충분할 겁니다. 처음 마음먹었던 대로 마마(어머니)를 모시고 화성으로 가서 경모궁(아버지)께 자식으로서 행하지 못했던 평생의 큰 한을 이룰 겁니다."

상왕이 되어 아들을 통해 자신의 뜻을 펼 수도 있겠지만, 일단 상왕이 되면 공식적인 권력을 손에서 놓지 않을 수 없고 그렇게 되면 아무리 자식이라도 자기 마음대로 통제할 수 없는 경우도 생기게 된다. 정조가 그런 것을 몰랐을 리 없다. 물론 상왕이 된다고 해서 천도를 실현시킬 가능성이 아주 없어지는 것은 아니지만, 그것은 현직에 있을 때에 그렇게 하는 것보다 훨씬 더 힘든 일이다. 천도계획을 품고 있었다면 과연 조기은퇴를 결심했겠을까 하는 의문을 품지 않을 수 없다. 

이상이 정조의 화성천도 계획 여부를 판가름하는 데에 도움이 되는 주요 징표들이다. 여기서 긍정적인 징표 5개와 부정적인 징표 2개를 제시했다고 하여, 정조가 천도를 계획했을 가능성이 훨씬 더 높은 것은 결코 아니다. 5 대 2의 수치는 그리 중요하지 않다. 해석하기에 따라서는 2개의 부정적 징표가 갖는 무게가 5개의 긍정적 징표가 갖는 그것보다 훨씬 더 무거울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현재로서는 '정조가 화성천도를 계획했을 가능성이 어느 정도 있었다'는 수준에서 이 문제를 정리하는 게 바람직할 것이다. 드라마 속의 정조 임금은 아주 명쾌하게 "화성으로 간다"고 말했지만, 실제의 정조 임금은 그렇게 명쾌한 인물이 아니었다. 

어떻게 보면 천도계획을 품은 것도 같고 또 어떻게 보면 아닌 것도 같으므로, 정조가 화성을 건설한 진짜 동기가 무엇인지는 앞으로도 계속 미스터리로 남을 수밖에 없다. 꾸준한 학술적 탐구에 기대를 거는 수밖에 없다.



 
Posted by civ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