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code=990100&artid=201206062106545

[이기환의 흔적의 역사]멘붕 빠진 유학생 최치원
이기환 문화·체육에디터 lkh@kuynghyang.com  입력 : 2012-06-06 21:06:54ㅣ수정 : 2012-06-07 09:45:47

“모자와 신발이 뒤바꿨습니다. 부끄럽습니다. ~길이 남을 일국의 수치가 되었습니다.(冠구實참於倒置~永胎一國之恥)”

최치원의 글(<고운집>)이다. 그런데 무엇이 그리 수치스러워 속된 표현대로 ‘멘붕’에 빠진 것일까.

최치원의 초상화. 6두품 출신으로 12살 때 중국유학을 떠난 뒤 18살 때 당나라 빈공과에서 급제했다. /경향신문 자료

■ 최치원의 분노

872년의 일이다. 당나라에서 ‘빈공과(賓貢科·외국유학생들을 위한 과거)가 열렸다. 발해 유학생 오소도(烏沼度)가 수석합격의 영예를 차지한다. 신라 유학생 이동(李同)을 제친 것이다. 900년 전통의 신라가 신생국 발해에게 밀리다니….

“옛 고구려의 미친 바람이 잠잠해 진 뒤 잔여 세력이 느닷없이 나타나 이름을 도둑질했습니다. 그것이 지금의 발해로 바뀌었습니다. 그런데 그 발해가 요즘 계속해서 고과(高科·우등급제)하고 있습니다.”

발해는 물론 망한 고구려까지 싸잡아 욕했다. 그러면서 발해인들을 우대하는 듯한 당나라에 원망의 화살을 돌리기도 한다.

“어찌 술지게미(발해)를 박주(신라·접대에 쓰는 좋은 술)와 함께 마시며 취할 수 있겠나이까.(縱謂파揚糠粃 豈能포철糟)”

최치원은 874년 시험에서 최치원 자신이 합격함으로써 그 수치를 씻었다. 그러면서 자신을 뽑아준 당나라 예부상서 배찬에게감사의 편지(‘與禮部裵尙書瓚狀’)를 보낸다. 

“덕분에 이전의 치욕을 씻을 수 있었습니다. 앞으로는 혹시라도 바뀌는 일이 없게 될 것입니다.”

877년 빈공과에서도 발해 유학생은 한 명도 발탁되지 못했다. 신라인만 두 명(박인범·김악) 합격한다. 그의 ‘당나라 고대부에게 보내는 편지(新羅王與唐江西高大夫湘狀)’는 역시 신라인을 발탁한 고대부(高大夫)에게 감사의 뜻을 전하는 글이다. 

“~대부의 엄정한 시험관리로 (신라인) 박인범과 김악은 급제했지만, ‘추한 오랑캐(발해인)’은 용납하지 않아 과거에 흠집을 내지 못하도록 했습니다.”

■ 강성한 발해, 쇠약한 신라 

충남 보령시 미산면 성주사터에 있는 낭혜화상 무염(800~888)을 위한 비. 최치원이 왕명을 받고 찬했다. 최치원은 잇단 비문청탁에 매우 부담을 느낀 듯 했다. 그래서인지 그는 비문에 “당나라 유학은 이쪽이나 저쪽이나 다 했는데 누구는 스승이 되고 누구는 일꾼(최치원)이 되니...”하고 푸념했다. 그러면서 “심학자(心學者)는 고귀하고 구학자(口學者·최치원)는 고달프단 말인가. 그래서 옛 군자는 배울바를 삼가하 하셨나 봅니다”고 썼다. 최치원은 자신을 입으로 학문하는 사람으로 낮춘 것이다. /국립경주박물관

하지만 발해도 가만있지 않았다. 897년 7월 당나라에 파견된 발해 왕자 대봉예가 “이젠 신라보다 발해 사신이 윗자리를 차지해야 한다”고 공식요청했다. 물론 당나라는 발해의 요청을 거절했다. “국명의 선후를 어찌 ‘강약(强弱)’으로 따질까. 조제(朝制)의 순서도 ‘성쇠(盛衰)’를 근거로 바꿀 수는 없는 일이다.”(<고운집> ‘사불허북국거상표·謝不許北國居上表’)

이 글을 보면 당나라도 발해가 강(强)하고 성(盛)하며, 신라는 약(弱)하고 쇠(衰)했음을 인정한 것이다. 그럴 만도 했다. 당시 신라는 효공왕 즉위년을 맞이하고 있었다. 원종·애노의 난(889)으로 급속도로 쇠약해졌으며 후삼국으로 분열되고 있었다. 반면 발해는 ‘해동성국’의 전성기를 구가하고 있었다. 당나라가 거절했으니 말이지 신라로서는 가슴을 쓸어내는 순간이었을 것이다. 최치원은 당나라에 보내는 감사의 표문(‘謝不許北國居上表)’에서 발해를 맹비난한다. 

“발해의 원류는 고구려가 멸망하기 전에는 보잘 것 없는 부락에 불과했습니다.~ 백산(백두산)에서 아경을 떨치며 떼강도짓을 했습니다.” 

최치원의 증오가 이어진다.

“신의 나라가~ 무식한 놈들과 함께 서있다는 것 자체가 차마 입에 담을 수 없습니다. 저 발해야말로 아무 짝에도 쓸모없는 자갈과 모래 같고~ 삼가 제 본분을 지킬 줄을 모르고 오로지 웃사람들에게 대들기만을 꾀했습니다.~다시는 위아래가 뒤집히지 않도록 하게 해주소서.”

■ 발해유학생의 제소 

그런데 906년의 빈공과에서 신라유학생 최언휘(崔彦휘)가 발해유학생(오광찬·烏光贊)보다 높은 등수로 합격했다. 그러자 오광찬의 아버지(오소도)가 당나라에 정식으로 이의를 제기한다. 오소도는 바로 872년 신라인 이동을 제치고 수석을 차지한 발해의 영재, 바로 그 사람이었다. 숙적 신라의 유학생들을 제친 오소도의 자부심은 대단했을 것이다. 이 천재유학생은 귀국 후 요직을 두루 거쳤으며, 재상의 자리에 올라 있었다. 그런 그에게 아들이 신라유학생보다 성적이 낮았다는 소식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을 것이다. 혹 신라가 사주한 것이 아닐까. 예전과 형편이 달라져 이제는 발해의 국세가 신라를 훨씬 능가하는데…. 아버지는 도저히 참을 수 없다는 듯 당나라 조정 공식적으로 이의를 제기한다. 

<고려사> ‘최언휘전’을 보자.

“발해재상 오소도의 아들 광찬이 급제했다. 하지만 그의 이름이 최언휘(신라)의 아래에 있게 되자 아버지 오소도가 표를 올렸다. ‘예전에 신(오소도)도 (신라인) 이동의 위에 있었습니다. 이번에 신의 아들도 (신라인) 최언휘의 윗자리로 옮겨주소서.”

하지만 당나라 조정은 “최언휘의 재주와 능력이 오광찬을 능가한다”는 이유로 오소도의 제소를 기각했다.

■ 남의 나라 과거시험의 공정성까지 따진 분들 

참 대단한 분들이다. 남의 나라 과거의 등수는 물론 남의 나라 ‘과거의 공정성’까지 문제삼아 감놔라 배놔라 했으니…. 하기야 신라와 발해는 중국 유학에 가문과 나라의 명운을 걸었다.


발해 수도 상경용천부의 유적. 옛 고구려 땅 이상의 영토를 개척한 발해는 해동성국으로 일컬어질만큼 번성했다./경향신문 자료사진   

“발해는 당나라 유학생들이 고금의 제도를 배워 해동성국이 됐다.(習識古今制度 至是遂海東盛國)”(<신당서> ‘발해전’)“

발해의 당나라 유학생이 귀국해서 신생국인 조국의 ‘동량(棟梁)’이 된 덕분에 해동성국으로 성장했다는 이야기다.

발해는 714년 6명을 당나라로 보낸 것을 필두로, 학생들을 수시로 교대하면서 유학을 이어갔다. 714년이면 발해가 건국한자 불과 16년 되는 해이다. 이를테면 지금의 국비유학생이었을 것이다. 

당나라 시인 온정균(溫庭均·812~866)은 당나라와 발해는 ‘문물제도가 한 집안을 이뤘다(車書本一家)’고까지 했다. 그가 장안에 머물던 발해왕자 대문악(大文萼)의 귀국길에 지어준 시에 나오는 구절이다.

신라인들은 더 했다.

“840년(문성왕 2년) 당나라 유학생 105명이 유학만료가 되어 귀국했다”(<삼국사기>)기록이 있을 정도였다. 당시 얼마나 많은 유학생들이 당나라 유학에 나섰는 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유학에 머물지 않고 빈공과에 급제하는 것은 가문의 영광이자 출세의 지름길로 여겨졌다. 

6두품 출신인 최치원이 불과 12살 때(868) 당나라 유학길에 올랐을 때 아버지가 했다는 말은….

“10년 안에 과거에 합격하지 못하면 내 아들이 아니다.(十年不第 卽非吾子也)”(<삼국사기> ‘최치원전’)

요즘 기준으로도 이런 극성아버지는 드물 것이다. 하지만 아버지의 마음, 이해할 수 있는 대목은 있다. 6두품이라는 신분의 벽은 높았으니까. 6두품은 행정기관의 장인 영(令)에 이를 수 없었으니까…. 

■ 빈공과를 싹쓸이한 신라·발해인

고려시대 최해(崔瀣·1287~1340)의 문집(<졸고천백·拙藁千百>)은 “당나라와 그 뒤를 이은 오대까지 빈공과에 합격한 이는 모두 90명에 이르렀다”고 기록했다. 그 가운데 발해인 10여 명(渤海十數人)을 빼고 나머지 80명 가까운 합격자가 신라인이었다고 한다. 발해인 합격자 가운데는 이미 언급한 오소도·오광찬 부자와 고원고(高元固), 흔표(欣彪), 사승찬(沙承贊) 등이 있다.

빈공과 합격자의 절대 다수를 차지한 신라의 자부심은 대단했을 것이다. 그런데 발해가 불쑥 나타나 해동성국이니 뭐니 하며 윗자리를 내놓으라 했으니…. 그것도 모자라 신라인들이 독차지했던 빈공과 수석자리를 차지해버리니…. 

최치원, 그리고 신라사람들이 느끼는 자괴감은 필설로 다할 수 없었을 것이다. 최치원이 앙앙불락하며 발해를 욕한 이유가 될 것이다. 발해의 오소도는 또 어떤가. 자신의 아들성적이 신라인보다 처진다는 소식에 ‘그럴 리 없다’며 당나라 조정에 제소한 극성맞은 아버지가 아닌가. 얼마 전 한국인 최초로 미국 하버드대 학부를 수석졸업했다는 뉴스가 들렸다. 곧바로 수석졸업의 비결 등등 온갖 기사들이 쏟아져 나왔다. 1200년 전에도 마찬가지였을까. 발해의 오소도, 신라의 최치원이 합격했다는 소식…. 그 소식은 온 나라의 자랑이었을 터….
 

<참고자료>

<발해정치사연구>, 송기호, 일조각, 1995
<발해의 역사>, 왕승례, 송기호 역, 한림대 아시아문화연구소, 1987
<고운집>, 최치원, 이상현 역. 한국고전번역원 기획, 사단법인 ‘올재’, 2011
<발해사의 이해>, 임상선 편역, 신서원, 1990 
<고려사>, <삼국사기>, <신당서>, <요사>, <졸고천백> 등




 
Posted by civ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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