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0903111503545&code=900315

[초원 실크로드를 가다] (6) 중국 최초의 정복왕조 요나라
정수일 | 한국문명교류연구소장 www.kice.ac  입력 : 2009-03-11 15:03:54ㅣ수정 : 2009-08-19 11:34:47

고구려 성벽 위 거란의 자취, 다름을 받아들인 강함을 읽다

오늘은 츠펑을 떠나 1000여년 전 거란족이 세운 요나라의 옛터를 두루 돌아볼 작정이다. 대흥안령 기슭에 자리한 우란하오터시(烏蘭浩特市)까지 10여 시간을 달려야 하는 긴 노정이다. 중간에 들러야 할 곳이 몇 군데 있으니, 길을 다그칠 수밖에 없다. 일행을 기다리고 있는 것은 일세를 풍미했던 거란족이 남겨놓은 갖가지 유적·유물과 고구려인들의 발자국이 묻혀있는 성터나 마을들이다. 이제부터 우리 역사의 현장 답사가 시작되는 셈이다. 요나라의 첫 수도나 태조의 능 같은 유적이 이곳 츠펑시 영내에 있기 때문에 츠펑박물관 3층에는 요나라의 주요한 유물들이 거의 다 전시되어 있다. 전날 그 전시품들을 돌아본 일행에게는 어느 정도 이 나라에 관한 감이 잡혀 있다. 

바린줘 가는 길의 벌판에 있는 오보석. 오보는 우리나라의 성황당과 비슷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차는 아직 윤기가 채 가시지 않은 새 포장길을 미끄러지듯 달린다. 얼마쯤 가니 들판에 큰 돌덩어리들이 오뚝오뚝 서 있는 것이 보인다. 몇 개에는 푸른 리본이 가을바람에 나풀거린다. 오보다. 이 세상 몽골인들이 사는 곳 어디를 가나 이러한 오보가 지천에 깔려 있다. 거개가 우리네 성황당처럼 작은 돌멩이를 한데 모아놓은 것인데, 이곳의 오보는 이렇게 큼직한 돌덩어리다. 용도도 좀 다른 것 같다. 원래는 제사당으로서 제단은 남쪽을 향하고, 가뭄 때는 기우제를 지내는 곳이기도 하다. 그런데 요즘은 젊은이들의 만남의 장소로서 여기서 만나면 평생 잉꼬부부가 된다고 한다. 성소를 핑계한 인간의 아름다운 ‘이기(利己)’다.

츠펑을 떠나 근 두 시간을 달리니 바린차오(巴林橋)란 팻말이 눈에 띈다. 일명 황허(潢河)라고도 하는 시라무룬(西拉木倫)강 위에 놓인 다리다. 떠돌이 하던 거란족이 보금자리를 마련한 곳이 바로 이 강 유역이다. 오늘도 야릇한 거란족의 역사를 싣고 유유히 흘러가고 있다. 강을 지나 얼마쯤 가니 다반(大板)이란 곳이 나타난다. 츠펑을 경과하는 철도가 여기까지 이어지고 있는데, 이 철도는 일제가 내몽골을 노리고 부설한 것이어서 지금도 ‘일본식 기차’가 운행된다고 한다. 여기서 또 두 시간쯤 달려서 요나라의 첫 도읍지었던 바린줘(巴林左)기의 린둥(林東)진에 도착했다. 도착하기 전, 일행은 궁성 터인 ‘요상경유지(遼上京遺址)’를 찾았다. 지금은 나지막한 둔덕길로 에워싸인 허허벌판만 남아 있다. 이 둔덕길은 옛 성벽 자리로서 둘레는 족히 8~9㎞나 되어 보인다. 6~7m의 높이에 40개나 되는 문이 사방에 달려 있었다고 하니 규모가 꽤 큰 궁성이다. 돌 기단과 치(雉)가 있는 흔적으로 보아 원래는 고구려 성벽 터였는데, 후에 요나라식 토성을 겹쌓은 것으로 짐작된다. 사실 여기까지 오는 구간에는 고구려성이나 고구려인 마을 터, 심지어 고구려 이름이 붙여진 강도 여러 곳에 있는데, 일정 관계로 들를 수 없는 것이 못내 아쉬웠다.

츠펑시의 무덤에서 발견된 요나라 시위병 벽화.
 
1984년에 개관한 린둥진 요상경박물관에는 주로 바린줘기 영내에서 발견된 선비, 거란, 여진, 몽골 등 여러 민족들이 남긴 1500여점의 유물이 전시되어 있다. 박물관 앞 광장에는 ‘거란광장’이라고 음각한 널찍한 판석들이 깔려 있고, 그 한가운데 요나라 태조 야율아보기의 기마동상이 웅비하고 있다. 츠펑박물관이나 요상경박물관의 전시품, 그리고 몇몇 유적지들의 현장을 종합해 보면, 거란과 요나라의 과거가 파노라마처럼 눈앞에 그려진다. 윈래 거란은 요하 상류의 시라무룬강 유역에서 유목생활을 하던 몽골족 계통의 한 부족으로서 역사무대에는 4세기 중엽부터 등장한다. 5세기 후반에 이르러서는 이곳을 관장하던 고구려의 압박을 피해 요서 지방으로 남하한다. 5호16국 시대에 북조 여러 나라들과 마찰이 일자 조공이나 바치면서 가까스로 선린관계를 유지한다. 당대에 이르러 이곳에 송막(松漠)도독부가 설치되면서부터는 당의 치하에 들어간다. 그러나 얼마 안 가서 송막도독에 임명된 이진충(李盡忠)이 스스로를 ‘무상가한(無上可汗)’, 즉 ‘지고의 카간’이라고 칭하면서 당에 반기를 들었지만(696년) 곧 진압당하고 만다. 후환이 걱정된 거란인들은 다링허(大凌河) 양안의 비옥한 목지를 버리고 시라무룬강 방면으로 이천해 그곳에 정착한다.

거란에 관한 최초의 중국 문헌은 <위서>이지만, 이에 앞서 다링허 강가의 만불당(萬佛堂) 동쪽 동굴에서 502년에 건조한 거란어 비문이 발견됨으로써 미지의 거란 역사에 등불이 켜진다. 전설에 의하면, 옛날 백마를 탄 신인(神人)이 라오하무룬강(老哈木倫河)에 내려와 한 젊은이가 이끄는 수레를 타고 시라무룬강에 내려온 천녀(天女)와 두 강의 합류지점인 목엽산(木葉山)에서 만나 부부가 된다. 부부는 사내애 여덟을 낳았는데, 그들이 거란 8대 부족의 시조가 되었다고 한다. 바가토르(몽골어로 ‘용감한 자’란 뜻)라고 부르는 부족 추장들은 서로가 자웅을 겨루면서 심하게 다투기도 한다. 그러다가 7세기 초부터 부족들은 알력을 불식하고 합심해 8부 수장격인 카간을 3년에 한 번씩 교대로 선임함으로써 마침내 부족들 간의 화합을 이루어냈다.

이로부터 200년이 지난 후 야율아보기(耶律阿保機)란 불세출의 거물이 나타나 중국에 대한 설욕을 씻기나 하듯 첫 정복왕조인 거란국을 세운다. 거란족은 말과 소를 토템으로 하는 두 씨족으로 구성되었는데, 전자는 야율씨로, 후자는 소(蕭)씨로 불렸다. 그래서 야율은 말씨족 출신의 성이고, 아보기는 이름이다. 일찍이 고려를 침입한 거란군 가운데는 소씨 성을 가진 몇몇 장수들이 있었다. 아보기의 어머니는 태양이 뱃속으로 들어오는 태몽을 꾸고 그를 낳았는데, 9척 장신에다 300근짜리 활을 거뜬히 당기는 괴력의 사나이로 자랐다. 29세(901년)의 젊은 나이에 질자부(迭刺部)의 족장으로 추대되고, 907년에 카간으로 선출된 그는 9년 후인 916년에 세습제에 의한 거란국을 선포한다. 그는 ‘대거란’ 황제로 자칭하면서 신책(神冊)을 연호로 정하고 도읍은 상경 임황부(현 린둥진)로 잡았다. 


 
일찍부터 서구에서는 거란의 음사인 ‘키타이(Kitai)’로 중국을 지칭해 왔다. 8세기에 만들어진 오르콘강가의 돌궐비문에는 ‘키타누(Qitany)’로 씌어져 있고, <원조비사>에는 ‘키타이(Qitay)’로 나온다. 이것은 ‘자르다’라는 몽골어 ‘키트 쿠(kit-khu)’에서 유래된 것으로 일부 학자들은 보고 있다. 이것이 또 필자가 역주한 율의 <중국으로 가는 길>(1866) 책 제목에서 보다시피 서구에 ‘캐세이(Cathay)’로 와전된다. 아무튼 이것은 한때 거란이 중국을 대신할 만큼의 대국으로서 세상에 널리 알려졌다는 방증이기도 하다. 국호는 태조 야율아보기가 거란으로 시작했는데, 아들 태종 때에 요로 개명하고, 전성기를 맞은 6대 성종 때는 ‘대거란’으로 바뀌나, 8대 도종 때는 다시 요로 복원된다.동북아시아에서 당, 송으로 이어진 중국의 중화체제가 무너지고, 대신 여러 민족에 의한 다원체제가 출현하기 시작한 10~12세기의 역사적 격동기에 요나라가 9대 209년간(916~1125)이나 존속하면서, 황허 이북의 중국 땅은 물론, 계승국인 서요(西遼, 1132~1211)를 포함해 멀리 중앙아시아까지 그 위세를 떨치고 귀중한 인류 공동의 유산을 남겨 놓을 수 있었던 것은 그 나름의 독특한 제도와 정책, 문화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 요체는 이질적인 유목사회와 농경사회의 이중구조에 대한 효율적인 조화와 융합이다. 유목민이라서 당연히 유목경제에서 출발했지만, 농경과 수공업을 받아들여 사회의 경제적 지반을 다졌다. 한인 위주의 농경민과 수공업자들을 유치해 한성(漢城)이란 성곽도시를 만들어 농업과 수공업을 동시에 발전시켜 생산된 소금과 철을 인근 나라들에 수출했다. 

통치구조에서도 “번(거란인)은 한(중국인)을 다스리지 않고, 한은 번을 다스리지 않으며, 번과 한은 통치를 달리한다”라는 통치이념에 기초해 최고 행정기관으로 북·남 추밀원을 설치했는데, 북추밀원은 유목민들의 군사와 민정을 다스리고, 남추밀원은 중국인과 발해인 등 농경민들의 민정을 관리한다. 단, 군사만은 북추밀원이 관장하되, ‘15~50세 백성은 병적에 의해 관리’한다는 병민일치(兵民一致)의 군사제도를 시행해 전시에는 전민이 동원될 수 있는 체제를 갖췄다. 그래서 400만 인구에 160만 대군을 거느린 군사대국으로 위세를 떨칠 수 있었다. 중국식 관제를 도입해 전국을 5경으로 나눴는데, 그중 2경은 유목지대, 1경은 유목과 농경혼합지대, 나머지 2경은 농경지대다.

 

당의 기마정책(羈靡政策, 다른 민족에 대한 간접통치책) 하에서 유교적 통치이념의 영향을 적잖게 받은 요는 중국 문물제도를 수용해 활용했다. 건국 창업에 기여한 좌명(左名) 공신 21명 중에는 한인 지식층이 다수 포함되어 있으며, 과거제도도 받아들인다. 그리고 5대시대 같은 난세에 ‘이한제한(以漢制漢)’, 즉 ‘중국인으로 중국인을 제재한다’는 기민한 전략으로 후당을 멸하고 후진과는 군사적 동맹관계를 맺고 만리장성 이남의 연운(燕雲) 16주를 할양 받는 성과도 올린다.대외무역에서도 변방의 각장(場)교역을 적극 권장하면서 송나라와의 해상무역도 예하의 동단국(東丹國) 내 발해인들을 통해 활발히 전개한다. 문화면에서 특기할 것은 전혀 문자 전통이 없는 유목민으로서 2종의 문자, 즉 한자의 자형과 자의를 참고해 만든 표의문자인 ‘대자(大字)’와 음절 단위의 표음문자인 ‘소자(小子)’를 창제했다는 놀라운 사실이다. 이 대목에서 특별히 우리의 주목을 끄는 것은 거란 소자가 조자법에서 한글과 비슷한 점이 있어 한글 창제에 영향을 주었을 것이라는 한 일본 학자의 주장이다.

차창을 스쳐지나가는 일목일초가 거란의 옛 영광을 속삭여주는 성싶다. 서구인들이 거란(키타이)을 중국으로 알게 된 이유를 이제는 조금 알 것만 같다. 린둥빙관에서 늦점심을 먹고 쉴 참도 없이 바로 카이루(開魯)를 향했다. 햇볕에 말리는 새빨간 고추 더미가 길 양 옆을 빼곡히 메우고 있다. 한참 가니 포도 바구니가 또 길 양 옆에 쭉 늘어서 있다. 형형색색의 양산을 받쳐 든 아낙네들이 저마다 손을 저으며 호객한다. 농민들이 이런 부업으로 재미를 톡톡히 본다고 한다. 그런가 하면 허름한 민가의 지붕 위에도 소형 태양열 발전기가 설치돼 있다. 이 산간오지에도 변화의 바람이 불고 있다. 

멀리서 전기 불빛이 하나둘씩 반짝거리기 시작할 무렵, 요나라의 고지 퉁랴오(通遼)시에 도착했다. 어구를 감싸 흘러가는 요하강가에 ‘요하혼(遼河魂)’이라고 큼직하게 돋을새김을 한 우람찬 여동상이 강을 굽어보고 있다. 순간, ‘요하혼‘이란 과연 무엇일까 하는 물음이 떠오른다. 이것저것 세계 ‘제일’이라고 자랑하면서 거란을 비롯한 모두를 황제의 ‘후예’라고 싸잡아 넣는 이른바 ‘요하문명’이 추구하는 그 오만과 배타, 무모는 아닐 터, 오히려 그 반대편일 것이다. 바탕은 유목사회이지만 농경과 수공업을 창의적으로 수용해 유례없는 유-농-공의 복합사회를 요하강가에 일궈놓은 거란인들이 간직한 그 조화와 융합, 창의의 혼이 아니겠는가. 이러한 혼이 있었기에 여타 유목민들과는 달리, 발흥한 한 고장을 시종 본거지(수도)로 삼고 광활한 중국 땅을 지배할 수가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요나라를 중국의 첫 정복왕조라고 일컫는 것이다. 조화와 융합, 창의는 세상사와 인간사에서 만고불변의 진리다.





Posted by civ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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