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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마도 지키려면 있을 때 잘해줘야 했다
김종성의 동아시아 권력교체의 역사 7.
[130호] 2012년 01월 01일 (일) 14:10:36 김종성 동아시아 역사연구가  minjog21@minjog21.com
 
한반도와 일본열도 사이의 섬, 대마도. 우리에게 익숙한 표현이지만, 이것은 틀린 표현이다. 왜 틀렸을까? 대마도가 한반도와 일본열도 사이에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이 표현에 숨어 있는 편파성을 깨뜨리지 못할 경우 대마도에 대한 우리의 인식은 불공평하게 될 수밖에 없다.

대마도 몰락, 일본 부상의 신호탄
조선의 외교적 실책, 대마도 상실
경협을 간절히 원한 이웃 외면 


그럼, 어떻게 해야 하는가? 간단하다. 흔히 하는 말처럼, 입장 바꿔 생각해보면 된다. 대마도인의 입장에서 대마도를 생각해보는 것이다. 대마도인의 입장에서는 ‘한반도와 일본열도를 양옆에 두고 있는 섬, 대마도’라고 인식하지 않겠는가.

‘한반도와 일본열도 사이의 섬, 대마도’란 표현을 ‘한반도와 일본열도를 양옆에 두고 있는 섬, 대마도’로 대체해야 할 필요성은 너무나도 절실하다. 왜냐하면 한·일 양국이 대마도 문제를 지나치게 자기중심적으로 해석하기 때문이다. 대마도가 전통적으로 자국 영역이었다고 주장하는 한·일 양국 국민들이 많다.

하지만, 이것은 옳지 않다. 1869년 이전까지 대마도는 엄연한 독립국이었다. 그 이전에 한·일 양쪽에서 대마도를 실질적으로 지배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대마도와 한·일 양쪽의 관계를 추적해보면 그 점을 알 수 있다.

1869년 이전까지 대마도는 한·일 양쪽에 대해 똑같이 사대(事大)의 예를 갖추었다. 양쪽에 대해 똑같이 신하국의 예를 갖춘 것이다. 조선시대의 경우를 예로 들면, 대마도 군주는 조선 주상으로부터는 대마도주(對馬島主)라는 지위를 받고, 일본 막부 쇼군으로부터는 대마도 슈고(守護) 혹은 다이묘(大名)라는 지위를 받았다.

일본어 발음으로 ‘바쿠후’인 막부(幕府)는 무사 정권의 수뇌부, 쇼군(將軍)은 그 수뇌부의 수장을 가리킨다. 1185년부터 1868년까지 일본에서는 천황 정부와 막부 정부가 공존했고, 실권은 후자에 의해 장악되었다. 그리고 슈고는 일종의 지방장관, 다이묘는 일종의 봉건제후였다.

한·일 양속 관계 유지한 대마도

대마도가 한·일 양쪽에 똑같이 종속된 것을 역사학 용어로는 양속(兩屬)이라 부른다. 이런 양속은 동아시아에서 자주 출현했다. 예컨대, 명나라 초기의 관찬 지리서인《대명일통지》권89에 따르면, 14∼16세기에 명나라와 사대관계를 체결한 여진족 군소집단 184개 중에서 79개는 조선과도 똑같은 관계를 체결했다. 또 1874년 이전의 오키나와는 청나라와 일본을 동시에 상국으로 떠받들었다. 사대관계는 중앙정부와 지방정부 간의 국내관계가 아니라, 독립국과 독립국 간의 국제관계였다. 그래서 이 관계는 신하국의 독립성과 자주성을 인정하는 전제 위에서 이루어졌다. 이는 조선이 중국과 사대관계를 체결하면서도 독립자주국의 지위를 누린 사실에서 잘 드러난다.

이런 사대관계를 2개 이상의 국가와 동시에 체결하는 경우, 신하국의 독자성은 한층 더 보호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대마도는 상국을 하나만 둔 신하국보다는 훨씬 더 독립적이고 자주적일 수밖에 없었다. 이런 역사적 사실을 외면하고 한·일 양국이 대마도에 대해 역사적 연고권을 주장하고 있으니, 이는 고구려가 중국의 책봉을 받았다고 해서 고구려를 중국의 지방정권으로 격하하는 중국 역사학계의 태도와 다를 바 없는 일이다. 중국인들의 엉터리 주장을 비판하는 우리가 그와 똑같은 오류를 범해서는 안될 것이다.

한·일 양국의 입장에서 물러나 대마도인의 입장에서 대마도를 관찰할 경우, 우리는 이와 같이 대마도가 한·일 양쪽 사이에서 오랫동안 독립자주성을 유지했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본래 대마도는 한국 땅도 일본 땅도 아닌, 대마도의 땅이었다.

작은 섬, 대마도가 한·일 사이에서 독자성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은 기본적으로 지리적 특성 때문이다. 한·일 어느 쪽에서도 쉽게 접근하기 힘든 바다 한가운데 있다는 지리적 요인이 대마도의 독자노선을 가능케 한 결정적 요인이었다. 이 점은 부산-대마도 여객선을 이용해 보면 금방 실감할 수 있다. 부산국제여객터미널에서 363톤짜리 여객선을 타고 최대 속력 47노트(시속 약 87킬로미터)의 속도로 부산항 방파제를 넘어서는 순간부터, 정원 376명의 이 선박은 심한 파도에 흔들리기 시작한다. 객실 창문에까지 바닷물이 튀어오를 정도다. 그래서 배가 혹시라도 기울지나 않을까 하는 두려움이 생기기도 한다.

현대의 항해 사정이 이와 같다면, 과거의 항해 사정이 어떠했으리라는 것은 두 말할 나위도 없다. 한·일 양국을 오고간 수많은 사신들이 물고기의 밥이 된데서도 알 수 있듯이, 과거에는 대한해협을 건너는 것이 사실상 목숨을 거는 일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런 대한해협의 한가운데 있었기에, 대마도는 한·일 어느 쪽에도 넘어가지 않고 독자성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독자노선을 걷는 것만으로는 대마도의 미래를 보장할 수 없었다. 왜냐하면, 예나 지금에나 대마도는 외부와의 교류 없이는 먹고 살 수 없기 때문이다. 이 점은 대마도의 지형적 특징을 관찰하면 금세 알 수 있다.

대마도는 대마도(島)라고 하지만, 엄밀히 말하면 대마산(山)이라고 해야 한다. 대마도는 제주도 면적의 40%밖에 안된다. 그나마 면적의 88%는 산이다. 사실, 대마도는 대한해협에 떠 있는 하나의 산이다. 이렇게 평지가 매우 적은 탓에, 전통적으로 농업이 취약할 수밖에 없었다. 대마도에 평지가 얼마나 적은가는 이곳의 도로 사정에서 잘 드러난다. 대마도에서는 2차선 도로를 발견하기 힘들다. 대부분의 도로가 사실상 1차선이다. 산중에 펼쳐진 좁은 도로에서, 마주오는 차량이 아슬아슬하게 비껴갈 때마다 관광객들은 긴장과 스릴을 느낄 것이다. 이처럼 평지가 극히 적기 때문에, 대마도인들은 왼쪽 대륙이나 오른쪽 열도에서 식량을 구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대마도가 한·일 양국을 상국으로 받든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식량을 얻자면 신하국 행세를 해야 했던 것이다.


▲ 대마도에서는 산골짜기에 형성된 마을을 많이 볼 수 있다.
 
대마도 영향력 잃은 외교적 실책

한·일 양국의 힘이 미치기 힘든 곳에 있다는 지리적 장점 때문에 독자성을 유지할 수 있었지만, 농업생산이 극히 힘들다는 지형적 단점 때문에 한·일 양국에 고개를 숙일 수밖에 없었던 대마도. 이 때문에 대마도는 대한해협에서 왼쪽 혹은 오른쪽으로 둥둥 떠다닐 수밖에 없는 존재가 되었다. 한·일 양쪽에 동시에 고개를 숙이면서도, 경제적으로 좀더 유리한 쪽으로 경도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실제로, 14세기 이후에는 대마도가 한반도 쪽으로 훨씬 더 기울어졌다. 이것은 14세기 후반의 국제정세와 연동된 현상이었다. 몽골제국이 1368년 북쪽으로 쫓겨난 뒤에 상대적으로 여유를 갖게 된 쪽은 한반도였다. 중원에는 명나라의 권력이 들어섰지만, 명나라는 만주의 여진족은 물론이고 몽골초원의 몽골족과도 대결해야 했다.

한편, 일본열도는 남북조 내란을 겪고 있었다. 이런 상태에서 한반도는 상대적으로 여유로웠다. 왕씨에서 이씨로 왕조가 교체되기는 했지만, 한반도는 여전히 통일성을 유지하고 있었다. 대륙은 대륙대로, 열도는 열도대로 혼란스러운 틈을 활용해서, 한반도는 대마도에 대해 사상 초유의 공세를 강화했다. 고려 때 박위의 대마도 공격(1389), 조선 태조 때의 대마도 공격(1396), 세종 때의 대마도 공격(1419) 등은 이런 분위기 속에서 이루어진 일들이다.

또 조선 전기의 실록에서 대마도의 조공 사례가 자주 발견되는 것은, 대마도에 대한 조선의 공세가 경제적 측면에서도 활발했음을 의미한다. 경제적 공세란 다른 말로 하면 경제협력을 가리킨다. 대마도가 조공을 한 것은, 조공에 대한 회사(回賜, 답례)를 전제로 한 것이었다. 물물교환 차원에서 조공이 이루어졌던 것이다. 조선 전기에 대마도가 조공을 많이 했다는 것은 그만큼 조선이 대마도와의 경협을 강화했다는 뜻이다.

일본열도가 분열된 상태에서 한반도가 공세를 강화했으니, 대마도가 한반도 쪽으로 기우는 것은 당연했다. 이 점은 당시의 대마도주 가문인 종씨(宗氏)가 한민족처럼 한 글자의 성(姓)을 취한데서도 드러난다. 본래 유종(惟宗)씨였던 그들이 두 글자의 성을 포기한 것은 조선과의 외교관계를 위해서였다는 시각이 있다.

이처럼 대마도가 한반도 쪽으로 끌려왔는데도, 조선은 대마도를 좀더 견인하지 못했다. 그것은 조선의 외교적 실책때문이었다. 당시 명나라는 여진족 토벌구도를 통해 동아시아 패권을 강화하고자 했다. 명나라는 조선이 다른 데 신경을 쓰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 여진족 토벌전쟁에 끌어들였다. 여진족 토벌에 끌려 다니는 횟수가 많아짐에 따라, 대마도에 쏟아 부을 수 있는 조선의 역량에는 한계가 생기지 않을 수 없었다. 조선이 여진족에 눈을 돌린 사이에 대마도에 대한 조선의 영향력은 약해질 수밖에 없었고, 이는 대마도와 일본의 관계를 밀접하게 만드는 요인이 되고 말았다. 남의 나라 전쟁에 끌려 다니느라 대마도를 제대로 챙기지 못하는 실책을 범한 것이다.

16세기 이전만 해도 대마도를 둘러싼 역학구도에서 조선은 일본에 대해 우위를 지켰다. 그러나 조선이 기회를 살리지 못하자, 이 구도의 시소는 일본 쪽으로 기울기 시작했다. 16세기 후반에 일본이 내부분열을 극복하고 통일을 이룩함에 따라 대마도가 일본 쪽으로 관심을 돌리기 시작한 것이다. 대마도가 일본의 임진왜란 도발에 협조한 것은 그런 배경에서 나온 현상이었다. 대마도가 협조하지 않았다면 일본이 전쟁을 일으키기도 힘들었을뿐만 아니라, 조선이 그처럼 무방비로 전쟁을 맞이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임진왜란 이후에도 대마도가 계속해서 일본 쪽으로 기울어진 데는 크게 두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 일본이 적극적인 해양정책을 전개했기 때문이다. 임진왜란 패배로 대륙 진출에 실패한 일본은 17세기 이후로는 바다 쪽으로 국운을 걸었다. 이 시기에 일본은 서유럽·중동·인도·동남아 등으로까지 진출했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대마도에 대한 일본의 영향력도 한층 더 강화되었다. 둘째, 조선이 대마도와의 경협을 꺼렸기 때문이다. 17세기 이후 조선은 청나라를 따라 해금(海禁)정책 기조를 유지했다. 바다로부터 스스로를 차단한 것이다. 이 때문에 바다와의 인연은 한층 더 멀어졌다. 17세기 이후 대마도와의 경협을 꺼린 것은 그런 분위기 속에서 나온 현상이다. 그러자 대마도는 어떻게든 조선에 사신을 파견해서 무역을 성사시키기위해 그야말로 별의별 핑계거리를 다 만들어냈다.

대마도는 “대마도주가 자리에서 물러났다”, “새로운 도주가 취임했다”, “전직 도주가 죽었다”, “전전(前前) 도주가 죽었다” 등의 명목을 대면서 조선에 사신을 파견하곤 했다. 한 사신이 전직 도주와 신임 도주의 교체를 통지하면 되는데도, 전직 도주의 죽음을 통지하는 사신과 새로운 도주의 취임을 통지하는 사신을 별도로 파견함으로써, 그런 기회에 어떻게든 무역을 하고자 했던 것이다. 조선이 대마도를 귀찮아하니까 그런 아이디어까지 짜낸 것이다. 이 정도로 조선이 대마도와의 경협을 귀찮아했으니, 대마도가 일본 쪽으로 한층 더 경도된 것은 지극히 당연했다.

일본 부상의 신호탄, ‘대마도’ 몰락


▲ 대마도에서 시행된 역지빙례를 기념하는 비석.

대마도인들이 일본 쪽으로 기우는 데 결정적 역할을 한 사건이 있었다. 그것은 1811년에 한·일 간에 있었던 역지빙례였다. 종래 조선통신사는 대마도를 거쳐 에도(동경)까지 가서 성대한 환영을 받았다. 일본 막부는 에도에서 조선통신사를 위해 거대한 빙례(선물교환의식)를 열어주었다.

일본이 조선통신사 접대를 위해 사용한 경비는 1년 쌀 수확량의 12% 이상이었다. 조선과의 관계가 국익에 긴요하다는 판단에서 그런 ‘유혈’을 감내했던 것이다. 그런데 18세기 후반부터 일본은 자국이 조선을 이미 능가했다고 판단했다. 더 이상 조선통신사를 위해 큰돈을 들일 필요가 없다는 주장이 힘을 얻기 시작했다.

그래서 나온 방안이 ‘일본 사신이 대마도에 가서 조선통신사를 접대하고, 그곳에서 빙례를 열어준 뒤에 돌려보내자’는 것이었다. 대마도에서 빙례를 열면 비용을 훨씬 절감할 수 있다는 것이 막부의 판단이었다. 지역을 바꾸어서 거행하는 빙례라 하여 역지빙례(易地聘禮)라 불린 것이다. 그런 역지빙례가 열린 곳이 바로 대마도다. 자기네 땅에서 역지빙례를 생생히 목격한 대마도인들은 한·일양쪽 중 어디에 줄을 서야 하는지 명확히 인식할 수 있었다.

그러던 차에 1868년 일본이 메이지유신을 단행하고 근대국가를 향한 개혁에 돌입하자, 대마도는 이듬해인 1869년 정치적 독립성을 포기하고 일본의 중앙집권체제 속으로 들어갔다. 조선보다는 일본에 배팅을 건 것이다. 이렇게 해서 독립국 대마도는 사라지고 그곳에 일본의 지방정부가 들어서게 되었다. 이로써 한·일 간의 역학구도는 일본 쪽으로 완전히 기울어지고 말았다.

14~15세기에 한반도 쪽으로 기울었던 대마도는, 16세기 후반부터 일본이 강력해진데다가 17세기 이후로는 한반도가 경협을 꺼리자 일본 쪽으로 급격히 기울었다.

그후 18세기 후반 한·일의 국력이 역전되고 19세기 후반 일본이 근대국가로 발돋움하자 결국 한반도를 버리고 일본을 선택했다.

자국과의 경협을 간절히 원하는 이웃을 외면하고 귀찮아했기에, 조선은 대마도를 일본에 빼앗기고 한·일관계에서 불리한 처지에 놓일 수밖에 없었다. 있을 때 잘하라는 말은 이런 경우를 두고 하는 것이 아닐까.



 
Posted by civ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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