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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야가 살아온다 <10> 제2부 비밀의 문 ④임나일본부에 가린 ‘임나’
국제신문 2002년 11월 

고대 한·일관계사를 전공한 양국 고고학자들은 여러모로 닮은 점이 많다. 학자된 입장에서 싫든 좋든 상대국 문화에 오랫동안 관심을 가지다 보니 서로 동화되는 경향을 보인다. 이들은 상대국의 말을 할줄도 알고 근·현대 문화상도 꿰뚫고 있다.

한·일 고고학자들이 진보적이고 개방적일수록 이러한 현상은 더욱 두르러져 사석에서 호형호제할 정도로 친근하게 지내는 이들이 적지 않다. 그러나 허물없는 이들도 일단 임나일본부설(任那日本府說)이 화제에 오르면 긴장하면서 극도로 말을 아낀다. 제국주의 일본 고고학자들이 우리 민족에 열등감을 심어주기 위해 만들어낸 허황된 이 학설은 표면상 이미 사장됐지만 실제로는 절친한 양국 고고학자들에게조차 ‘뜨거운 감자’로 남아 있는 셈이다.

임나+일본+부의 합성어

임나일본부(任那日本府)는 임나+일본+부의 합성어다. 이 중 ‘임나’라는 말은 광개토왕릉비 ‘일본서기’ ‘삼국사기’ ‘통전’ 등 한·중·일의 문헌에서 확인되는 용어다. ‘일본’이란 국호는 7세기 이후에나 확인되는 것으로 임나일본부가 거론되는 6세기 중엽에는 존재하지 않는다. 따라서 이는 ‘일본서기’ 편찬시에 왜(倭)를 일본으로 고쳐쓴 것에 불과하다는 것이 통설이다. ‘부’는 기관이나 관청을 뜻하는 것이 보통이나 학계의 연구결과 임나일본부의 경우 가야에 파견된 왜의 사신이라는 주장이 많은 지지를 얻고 있다.

인제대 이영식(사학) 교수는 “임나일본부설을 파생시킨 ‘일본서기’, 광개토왕릉비문, 칠지도 명문 등이 전면적으로 검토되면서 이 학설을 굳게 믿는 한일 사학자들이 크게 줄었다”고 말한다.

그러나 임나일본부설은 일본내에서 극우파가 만든 일본사 교과서에는 아직도 버젓히 실려 있다. 또 고대 한일 고대사를 발전적으로 연구하고 규명하는 양국 학계의 노력에 찬물을 끼얹을 수 있는 부정적 요소로 남아 있는 게 현실이다.

익히 알려진대로 임나일본부설은 일제 강점기를 전후해 일본 어용 사학자들이 지어낸 작품이다. 신화에 나오는 왜국의 신공황후가 369년 임나(가야)를 군사력으로 점령한 후 일본부라는 기관을 두고 562년 신라에 패퇴할 때까지 이 지역을 통치하였다는 내용. 에도시대 국학자 모토오리 노리나가(本居宣長)의 ‘조선 경영설’이 씨앗이 돼 1949년 스에마츠 야스카즈(末松保和)가 ‘임나흥망사(任羅興亡史)’를 발표하면서 큰 반향을 불러 일으켰다. 지난 1960년대 말까지도 이 설은 한일 고대사를 좌우하는 정설과 다름 없었다.

그러나 1960년대 말~1970년대 초에 펼쳐졌던 미·일 안보협약 반대투쟁을 기점으로 임나일본부설의 허구성이 속속 밝혀지기 시작했다. 

일본에 간 유물 반환돼야

‘임나’는 한일 사학계가 결코 망각할 수 없는 ‘역사적 땅’이다. 일제가 임나의 증거를 찾기 위해 한반도에서 끼워 맞추기식으로 무수한 가야 유적을 파헤치는 통에 우리 역사가 왜곡되고 한국 사학계가 함께 피해를 입은 점을 일본 사학계는 잊지 말아야 한다는 얘기다.

일제는 고령(대가야 영역), 김해(금관가야), 함안(아라가야), 창녕(비화가야), 고성(소가야), 진주, 성산 등지를 임나로 추정하고 그곳에서 임나일본부설의 증거를 찾기 위해 고분들을 집중 발굴했다. 그러나 그들은 결국 뜻을 이루지 못했다. 이 중 김해 회현리패총은 한반도 지배 논리를 찾던 일제가 우리나라 최초의 학술 목적인 문화재 발굴이라는 미명하에 함부로 조사한 대표적 사례로 꼽힌다.

일제의 발굴동기가 불순하다 보니 그들 사학자는 정식 발굴 조사서를 낸 경우가 거의 없었고 마구잡이식으로 출토한 많은 가야 유물들은 일본으로 흘러 들어갔다. 이 때문에 가야사를 증언할 소중한 유물들이 연구자를 만나지도 못한 채 무참하게 훼손됐다. 그동안 국내에서 가야 유적 발굴과 문헌사적 연구가 활발하게 진행됐지만 완성 단계에 이르지 못하고 있는 까닭도 여기에 연유한다.

이에 대해 홍익대 김태식(역사교육) 교수는 “한반도 및 동아시아 고대사 연구와 정립에 절대적인 가야사를 재정립하기 위해서 일본으로 건너간 가야 유물들은 우리나라로 반환되어야 하며 국내 사학계도 이를 적극적으로 요구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한일 사학자들은 그 동안 쏟아진 극히 다양한 임나일본부설에 대한 연구들을 추스려 볼 때 임나가 한반도의 가야지역을 지칭한다는 점에 대해서는 별 이견을 달지 않는다.

이영식 교수는 “임나는 일본열도의 한 지역이 결코 아니며 일본서기에 기록된 임나일본부 관련 사료는 가야지역에서 전개됐던 역사적 사실이 반영된 것으로 밖에 볼 수 없다”고 말하고 있다.

엄정한 한일 고대사 정립을 가로막는 온갖 오염물질을 배출해온 임나일본부설, 그 중에서도 임나는 원래의 순수한 정체성을 되찾아야 한다. 지금까지 양국 사학계가 보인 막연한 선입관과 감정적 반발로 그려진 평행선을 지우고 접점을 찾아야 한다. 지금이 그 때이다.




Posted by civ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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