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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지왕 [腆支王]
민족문화대백과 집필자 노명호

백제 제18대 국왕, 직지(直支), 진지(眞支), 여영(餘映), 부여영(扶餘映), 부여전(夫餘腆), 아신왕(阿莘王)의 맏아들
생몰 :  미상 ~ 420년(전지왕 16)
재위 : 405∼420년
가계
     부왕 : 아신왕
         이복동생 : 부여신(扶餘信)
         왕후 : 팔수부인(八須夫人)
             아들 : 구이신왕
         후궁 : 해씨부인(解氏夫人)
             아들(서자) : 비유왕 

405년9월(음) 아신왕 죽음, 전지왕 즉위함. 
406년1월(음) 동명묘(東明廟) 배알하고 남쪽제단에서 천지(天地 
406년2월(음) 동진에 사신 보냄. 
406년9월(음) 해충을 달솔로 삼고 한성의 조 1천 석을 줌. 
407년2월(음) 여신(餘信)을 내신좌평(內臣佐平) 
409년(음) 왜의 사신이 와서 야명주(夜明珠)를 바침. 
415년5월(음) 혜성 나타남. 
416년(음) 동진(東晉)에서 왕에게 작호 보내줌. 
417년1월1일(음) 일식이 있었음. 
417년4월(음) 가뭄이 발생함. 
417년7월(음) 사구성(沙口城)을 쌓음. 
418년(음) 백금(白錦, 삼국사절요에 의해 綿을 錦으로 
419년1월(음) 혜성 나타남. 
419년11월1일(음) 일식이 있었음. 
420년3월(음) 전지왕이 죽음, 구이신왕 즉위함. 


직지(直支) 또는 진지(眞支)라고도 한다.『송서(宋書)』에는 여영(餘映)으로 표기되어 있다. 아신왕(阿莘王)의 맏아들이다. 왕비는 팔수부인(八須夫人)으로서 해씨(解氏) 집안 출신이다. 전지왕(腆支王)의 사망 연대에 대해 『송서(宋書)』백제전에는 424년 이후에, 『일본서기』에는 428년 이후에 죽은 것으로 나와 있어서 『삼국사기』에 쓰여 있는 420년과는 차이가 난다.

전지왕은 태자로 있을 때 부왕인 아신왕에 의해 397년(아신왕 6)에 왜(倭)에 인질(人質)로 보내졌다. 이는 아신왕이 고구려의 남진압력에 대항하기 위해 왜와의 화호(和好)를 도모하고, 보다 돈독한 외교관계를 맺고자 취한 조처였다.
전지왕의 왕위계승을 둘러싸고 지배세력 간의 갈등이 있었다. 전지가 왜에 인질로 있을 때인 405년에 아신왕이 죽었다. 아신왕의 동생 훈해(訓解)가 섭정을 하면서 그의 환국(還國)을 기다렸는데, 막내동생 설례(碟禮)가 형을 죽이고 스스로 왕이 되었다. 태자 전지는 부왕의 부음을 듣고 왜에서 귀국하던 중 “국내 정세가 변했으므로 경솔하게 입국하지 말라”는 한성인(漢城人) 해충(解忠)의 간청을 받아들여 해도(海島)에 머물렀다.
 
전지왕 즉위 과정에서 백제 지배세력은 전지 옹립파와 설례 지지파로 나뉘어 대립하였다. 전지 옹립파는 훈해로 대표되는 일부 왕족과 전지가 귀국할 때 그를 호위하였던 100명의 왜군 및 해충으로 대표되는 세력을 들 수 있다. 반면, 설례의 지지세력은 구체적으로 알 수 없다. 설례는 한성사람 해충과 그의 지지세력에 의해 진압되고 이어 전지가 왕위에 오르게 되었다.
 
이를 통해 전지왕의 즉위는 해씨세력의 지지에 힘입은 바가 컸음을 알 수 있다. 전지왕 즉위 이후 해씨 가문이 크게 부상하였다. 한성인 해충은 전지왕의 옹립에 기여한 공로로 달솔(達率)의 관등에 조(租) 1천석을 지급받았으며,해수(解須)는 내법좌평(內法佐平), 해구(解丘)는 병관좌평(兵官佐平)에 각각 임명되었다. 이로써 이전의 진씨(眞氏) 왕비족 시대는 퇴조를 걷게 되었다.
 
전지왕은 왕권을 뒷받침하기 위해 상좌평(上佐平)을 설치하였다. 기존의 연구는 5세기 왕권의 대귀족 통제력이 흔들리는 시기에 실권을 장악한 해씨세력이 자신들의 권익을 보호하기 위해 상좌평을 설치했다고 보고 있다. 하지만 상좌평의 설치는 오히려 왕권중심의 정치체제 확립과정에서 나타나고 있는 제도적 장치란 특징이 있다. 또한 전지왕대의 상좌평에는 의붓동생인 여신(餘信) 등과 같이 국왕과 밀착된 인물이 임명되기 때문에 왕권을 뒷받침하기 위해 상좌평을 설치한 것으로 보기도 한다.
 
여신은 해씨세력과 더불어 전지왕의 옹립에 깊이 관여하였던 인물로 추측되므로, 전지가 왕권강화 정책을 펼 수 있는 정치적 기반을 제공해주었다고 보여진다. 즉 전지왕이 왕족을 통해 여타의 세력들을 제어하면서 왕권강화 정책을 추구하고자 했던 것이다. 이와 더불어 해씨세력도 진씨세력의 퇴조라고 하는 정치구도 변화 속에서 그들의 권력기반을 안정시키고 왕실과 원만한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여신의 상좌평 임명에 적극적으로 협력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따라서 상좌평은 왕권 중심의 정치세제를 확립시키기 위해 설치된 관직임을 알 수 있다.
 
한편 대외관계에서 전지왕은 동진(東晉)과 긴밀한 외교 관계를 유지해, 416년에 ‘진동장군 백제왕(鎭東將軍百濟王)’이라는 작호를 받았다. 또 왜와의 우호 관계도 계속 유지했는데, 야명주(夜明珠)를 보내온 왜의 사자를 우대하고 왜에 비단〔白錦〕 10필을 보내기도 하였다.
 
[참고문헌]
『삼국사기(三國史記)』
『삼국유사(三國遺事)』
『송서(宋書)』
「백제사비시대의 좌평제 연구」(양기석, 『충북사학』9, 1997)
「백제 전지왕대(百濟 腆支王代)의 정치적 변혁(政治的 變革)」(양기석, 『호서사학(湖西史學)』10, 1982)
「백제왕실(百濟王室)의 남천(南遷)과 지배세력(支配勢力)의 변천(變遷)」(노중국, 『한국사론(韓國史論)』4, 서울대학교 국사학과, 1978)
「백제(百濟)의 좌평(佐平)」(이종욱, 『진단학보(震檀學報)』45, 1978)
「백제왕위계승고(百濟王位繼承考)」(이기백, 『역사학보(歷史學報)』11, 1959)



 
Posted by civ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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