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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속의 천도] 上. 고구려는 왜 국내성에서 평양으로 옮겼나
너른 평야에 매료 … 광개토대왕이 기획
[중앙일보] 입력 2005.05.21 17:09 / 수정 2006.01.30 22:46

고구려는 장수왕 때(427년) 국내성에서 평양으로 도읍을 옮겼다. 사진은 평양 일대의 대성산성. 3~5세기에 쌓은 것으로 추정된다. [중앙포토]

천도란 가장 강렬하고 극적인 사건이게 마련이다. 왜냐햐면 수도를 옮기는 일에는 각 사회 계층의 이익이 복잡하게 얽혀 있기 때문이다. 더욱이 고대국가의 수도는 단순히 정치.행정의 중심지 역할에만 그치지 않는다. 수도는 지배층 대부분의 거주지이기도 하다.

고대국가에서는 수도(왕경)에 살고 있다는 것 자체가 하나의 특권으로서, 왕경인과 지방민 사이에는 상당한 신분적 차별마저 있었다. 따라서 지배층이 되는 세력은 모두 수도로 옮겨와 살아야만 했다. 사정이 이러하니 군사방위 체계는 물론 교통과 통신, 조세 징수제 등 모든 정치.사회 시스템이 수도를 중심으로 편제되게 마련이다.

따라서 천도를 한다는 것은 단지 왕궁과 관청이나 지배층의 거주지를 옮기는 데 그치는 게 아니다. 사회체제 전반을 새롭게 뒤바꾸는 커다란 변혁인 셈이다. 그것은 오늘의 행정수도 이전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역사 속의 천도를 되돌아보는 기회를 갖는 이유도 바로 그 때문이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고구려는 천도를 두 번했다. 건국 시조 주몽왕이 처음 도읍한 곳은 졸본이었다. 졸본의 위치는 대략 오늘날 중국 랴오닝(遼寧)성 환런(桓仁) 일대로 추측된다. 그러나 이곳에서 도읍한 기간은 그리 길지 않았고, 다시 국내성으로 도읍을 옮겼다.

이곳이 바로 오늘날까지도 고구려 시대의 유적이 가장 풍부하게 남아 있는 중국 지린(吉林)성 지안(集安) 지역이다. 여기서 4백년을 지내고는, 다시 장수왕 15년(427년)에 평양으로 천도해 그곳에서 국운을 마쳤다.

그런데 혹자들은 이 평양 천도 대목에서 아쉬움을 토로하기도 한다. 당시 고구려는 최전성기를 맞이하고 있었다. 그런데 왜 이때 굳이 수도를 옮겼을까? 그리고 하필 천도지로 한반도의 평양을 선택했을까? 요동 땅 어디쯤에 기세 좋게 새로운 근거지를 마련할 수도 있지 않았을까? 혹 고구려가 평양으로 천도하면서 대륙을 향한 진출력이 약화된 것은 아닐까? 사실 이런 의문은 누구나 가져볼 만하다.

중국 지안에 가보면 국내성과 환도성을 비롯해 1만2천여 기의 고분이 온 도시 여기저기에 흩어져 있어, 옛 도읍지다운 역사의 향취에 흠뻑 취할 수 있다. 지금 둘러보아도 이곳 국내성이 만주 다른 어디보다 살기가 좋은 곳이라는 건 금방 알 수 있다.

게다가 태왕릉.장군총 등 수많은 조상들의 무덤이 이곳에 있고, 4백년 동안 대대로 가꾸어와 살기에 익숙해진 이곳을 장수왕은 왜 떠나려 했을까? 그건 국내성이 새로운 도약을 위한 근거지로는 아무래도 제약이 있기 때문이었으리라. 그러면 반대로 평양은 그런 제약을 넘어서는 어떤 유리한 점이 있다고 전망했을까?

당시 고구려의 국가 발전 방향은 제국적 발전이었다. 이는 단순히 영토의 확대에 그치는 것이 아니다. 다양한 문화와 종족을 아우르며 국제무대에서 독자적 세력권을 구축하는 일이었다. 여기에 가장 적합한 근거지로 찾아낸 곳이 평양이었다.

우선 평양은 비옥하고 너른 평야 지대를 끼고 있기 때문에, 경제적 기반에서 국내성 일대와는 비교가 되지 않는다. 풍부한 물산을 자랑하는 이곳은 산간 지대에서 수백 년을 살아온 고구려인들에게는 충분히 매력적인 곳이었으리라. 당시 이 지역의 생산물은 고구려 국가 경제의 가장 큰 몫을 차지했는데, 이곳에서 멀리 떨어진 국내성에서는 그러한 풍요를 한껏 누리기가 어려웠을 터이다. 게다가 이제 고구려가 동아시아의 강대국으로 성장한 만큼, 고구려의 지배층은 그 위상에 걸맞은 왕도를 건설하고 화려한 영화를 누리려는 욕망도 없지는 않았으리라. 평양은 이를 충족시킬 수 있는 가장 적절한 곳이었다.

둘째, 내륙 깊숙이 있는 국내성과는 달리 평양은 교통의 요지에 자리잡고 있다. 새로이 고구려의 중요 기반으로 떠오른 한반도 서북부의 중심일 뿐만 아니라, 요동이나 한반도 남부 지역으로 진출할 때에도 거점과 배후 기지로서의 역할을 톡톡히 할 수 있는 지리적 이점을 갖고 있었다. 또한 바닷길로 국제 무대에 진출할 수 있는 중심지이기도 했다. 즉, 평양의 지리적 조건은 폐쇄적인 국내성과는 달리 훨씬 개방적이고 국제적이었다고 할 수 있다.

당시 고구려는 급변하는 국제 정세에 대한 안목을 키워가기 시작했다. 사실 광개토대왕대 정복 활동의 화려한 성공은 군사적인 힘만으로 이루어진 것은 아니다. 전연.백제.신라.왜 등의 동향을 파악하고 이에 적절히 대응해간 탁월한 국제적 감각이 뒷받침되었기에 가능했다. 광개토대왕릉비에 보이듯 고구려가 천하의 중심이라는 독자적 천하관은, 당시 동아시아 국제 정세에 대해 깊이있는 안목을 갖추고 있음을 잘 보여주고 있다.

고구려는 스스로 국제사회에서 자신의 자리를 정당하게 차지하려 했고, 그러기 위해서는 수도의 입지도 국제 무대에 용이하게 진출할 수 있는 곳이어야 했을 것이다. 이 점에서 보면 평양만한 후보지도 없었다.

셋째로 평양은 고조선 이래의 역사적 전통과 낙랑군 이후 중국 문화의 세례를 받은 우수한 문화 전통을 갖고 있는 곳이란 점도 결코 지나칠 수 없는 이점이었다. 4세기 중반 이후 북방의 유목민족은 북중국으로 남하해 5호 16국 시대를 열었다. 이는 바로 유목민족이 중국 문화에 수용되고 동화해가는 과정이기도 했으니, 이제는 중국 문화가 동아시아의 국제적 문화 기준으로 확대되기 시작한 것이다. 이미 국제 무대에 깊이 발을 내민 고구려도 이러한 조류에서 벗어나 있을 수 없었다. 소수림왕대의 율령 반포와 불교 수용도 그러한 방향에 대응해가는 고구려의 태도를 잘 보여준다. 평양 천도를 계기로 고구려의 문화도 더욱 풍성해지고 다양화했다.

이처럼 평양이 국내성에 비해 여러 모로 유리한 점을 갖고 있었지만, 좋은 곳이 있다고 금방 도읍지를 옮길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고구려의 평양 천도 역시 오랜 정지작업 끝에 이뤄졌다. 사실 평양 천도의 실질적인 기획자는 광개토왕으로 보인다. 그는 평양의 도시 건설을 추진하면서 사찰을 건립하고, 주민을 이주시켰으며, 수시로 평양에 순시하였다. 

평양에 대한 지대한 관심은 광개토대왕릉비에도 잘 나타나 있다. 그는 당시 평양을 한반도내 외교.군사 활동의 본거지로 활용하고 있었다. 이렇게 본다면 고구려의 평양 천도는 장수왕 대에 이뤄졌을지라도, 그 이전 광개토대왕 대에 이미 천도가 결정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5세기 이후 고구려의 국제적 위상이 높아진 데는 수도로서 평양이 갖는 지리적 개방성과 국제성이 한몫을 했다고 본다. 당대 고구려는 북위.남조.유연과 더불어 동아시아 국제 질서를 유지해가는 중심축의 하나였다.

또한 고구려적 '천하'의 새로운 중심지가 된 평양은 새로운 문화 변동의 구심점이기도 했다. 평양 천도 이후 고구려의 문화적 성격은 이전에 비해 상당한 변화를 보인다. 평양 일대에 흩어져 있는 고분 벽화가 그러한 변화를 잘 보여주고 있는데, 본래의 전통적 문화 기반 위에 외래의 다양한 문화 요소를 융합해 독자적인 문화를 창출하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문화는 주위의 신라 등에 큰 영향을 주어 중국 문화권과는 구별되는 동북아시아 문화권을 형성하기도 했다.

이렇게 평양 천도는 '도읍 옮기기'에 그치지 않고 '나라 바꾸기'를 시도한 하나의 '개혁'이었던 것이다. 


임기환 한신대 학술원 연구원 역사문화연구소 연구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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