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vimeo.com/47061236, http://blog.daum.net/santaclausly/117935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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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벽과 성벽사이에 일정한 간격을 낸 뒤 그 사이에 문을 만든 것이다. 일종의 옹성의 형태로 적이 침입해 오면 이렇게 사방에서 공격하기 위한 것이다. 평면도를 통해 나머지 구간의 성벽도 복원해 보자. 평면도에 불룩하게 표시된 이건 뭘까? 그 흔적 역시 국내성에서 찾아볼 수 있었다. 일직선으로 이어지던 성벽이 사각으로 튀어나와 있다. 지금처럼 허물어지기 전 사진을 보면 그 원래의 모습을 좀 더 분명히 알 수 있다. 이건 바로 치다. 역시 적을 공격하기 위한 것이다.
[HD 역사스페셜] 위성으로 본 국내성 - 그곳에 고구려가 있다!
KBS, 문화재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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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반도와 중국을 가로지르는 압록강. 그 너머 중국 땅 집안. 그곳에 우리의 역사가 있다. 지금도 도시 곳곳엔 무수히 많은 고구려의 흔적이 남아 있다. 이곳이 2000년 전 고구려의 중심, 수도 국내성이다.
1.
여러분은 고구려하면 뭐가 가장 먼저 떠오르세요? 광개토왕비? 장군총? 아니면 견고한 고구려의 돌성들? 아마 지금 제가 이야기한 것들이 고구려를 대표하는 유적들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텐데, 이러한 유적들을 한 눈에 볼 수 있는 곳이 있습니다. 이 사신은 중국의 집안지역을 촬영한 위성사진입니다. 그동안 나온 위성사진 중 가장 정밀한 사진인
데요, 바로 이 위성사진 속에 고구려의 대표적인 유적들이 있습니다. 우선 오른쪽 귀퉁이의 이 지점을 한번 볼까요?
이게 뭔지 아시겠습니까. 여기 자세히 보시면 계단식으로 뭔가를 쌓아올렸다는 걸 알 수 있을 텐데요, 이게 바로 그 유명한 장군총입니다. 돌을 계단식으로 정교하게 쌓아올린 거대한 돌무덤입니다. 이번엔 장군총에서 아래쪽으로 좀 내려와서 이쪽을 볼까요? 이건 전각의 지붕입니다. 오렌지 빛 지붕이 예쁜데요, 이곳으로 가는 길도 잘 다듬어 놓았습니다. 우리에게 너무도 잘 알려진 광개토대왕비입니다. 예전엔 비만 세워져 있었는데 최근 훼손을 막기 위해 이렇게 전각을 세워놓았습니다. 그래서 위성사진으로는 이렇게 지붕만 보이는 것입니다. 이번엔 이쪽을 볼까요.
여긴 앞서 본 장군총과 비슷한 모양의 돌무덤들이 즐비해 있죠. 거대한 돌무덤들이 떼를 이루고 있어 그야말로 장관인데요, 지금으로 말하면 고구려인의 공동묘지인 셈입니다. 이렇게 집안은 책에서나 볼 수 있었던 고구려의 귀중한 유적들이 다 모여 있는데요. 집안은 고구려의 수도인 국내성입니다. 오늘은 위성사진을 통해 고구려의 수도, 국내성의 모습을 그려보고 또 이곳에 남아있는 유적을 통해 고구려의 시작과 최전성기 고구려의 모습을 만나보겠습니다.
압록강을 사이에 두고 북한과 접해 있는 중국의 한 지방도시 집안. 위성사진을 통해 보았던 고구려유적들을 실물로 만나볼 수 있다. 오랜 세월을 견뎌낸 유적들은 고구려를 이해하는 귀중한 단서들이다. 집안에서 가장 많이 눈에 띄는 것이 돌무덤 떼다. 산 아래 마치 공원처럼 깨끗하게 정비되어 있는 곳. 그곳에 고구려의 돌무덤인 적석묘가 있다. 이 산 아래만 1500여기의 돌무덤이 있고 집안지역 곳곳에 분포되어 있는 것이 무려 12,000기에 달한다. 직접 옆에서 보면 그 규모에 또 한 번 놀란다. 이 적석 묘는 한 변이 20m, 높이 7m. 3층 건물 높이다. 돌 하나만으로도 그 규모를 실감할 수 있다. 거대한 돌을 정교하게 쌓아올려 그 웅장함을 더 하고 있다. 그런가 하면 다듬지 않은 강돌을 그냥 쌓아올려 만든 무덤도 있다. 모양은 다르지만 이것도 분명 돌을 쌓아 만든 고구려의 적석묘다. 초기형태의 것으로 보고 있다. 그런데 우연히 무덤 윗부분에 구멍이 뚫린 무덤을 발견했다.
인터뷰
PD : 적석묘 내부가 이렇게 생겼군요.
최종택 교수/고려대 고고미술사학과 : 네 석실이 있는 적석묘 적석총이예요.
조명을 비춰 안을 들여다보니 내부는 텅 비어 있었다.
최종택 교수
"중국사람들은 석광이라고 그러고 우리는 석곽인데 돌로 곽을 짜고 위를 덮어버린 거죠. 이런 건 문이 달려있으니까 추가장이 가능하죠."
내부에 텅 빈 공간이 시신을 모셔두는 석실이다. 초기 적석묘 축조과정을 보면 땅위에 돌로 석실을 만들고 그 위에 돌을 쌓아올려 봉긋한 무덤의 형태를 만들었다. 그런데 집안에서만 적석묘를 볼 수 있는 건 아니다. 고구려의 첫 수도였던 중국 환인. 이곳에서도 도심 곳곳에 적석묘가 떼로 남아 있다(상고성자고분군). 집안에서와는 달리 초기형태의
적석묘가 대부분이다.
인터뷰
PD : 이 하얀 건 뭐죠.
최종택 교수 : 이건 고분을 만들고 고분위에서 화장했을 때 화장한 흔적이 남아 있는 겁니다. 뼈가 있는데 붙어 있는 데도 있구요. 이건 뼈는 없지만 뼈 가루들이 화장할 때 붙은 것입니다.
그런데 초기 적석묘 중에 모양이 조금 다른 무덤형태가 보인다.
인터뷰 최교수
"보통 큰 돌만 갖다놓은 것이 아니고 절석을 한거죠. 다듬어서 기단 줄에 맞게..."
무덤 아래쪽에 단단한 기단을 만든 뒤 작은 당돌들을 쌓아올렸다. 적석묘는 왜 이렇게 다양한 형태로 남아 있는 것일까? 처음엔 이렇게 강돌을 쌓아올렸다. 그런데 세월이 지나면서 자꾸 무너져 내리자 기단을 만들어 보다 견고하게 만들었다. 그 다음엔 좀 더 정교하게 계단식의 형태를 갖추게 되고 마지막으로 거대한 돌계단 사이에 널방을 만드는 완
성된 형태가 등장한다. 세월이 지나면서 적석묘도 점차 발달된 형태를 갖추게 된 것이다.
고구려의 첫 수도였던 환인과 두 번째 수도였던 국내성. 즉 집안 외에 적석묘가 나타나는 지역이 또 있을까. 적석묘 분포지역을 보면 환인과 집안 외에 압록강중상류지역에 고르게 적석묘가 보인다. 그런데 삼국지위지동이전에 의하면 3세기 고구려 영역은 북쪽에 부여, 동쪽에 동예, 남쪽의 낙랑으로 둘러싸인 압록강 중상류일대로 나타난다. 흥미롭게도 초기 고구려 땅과 적석묘가 나타나는 지역이 일치하고 있다.
강현숙 교수 / 동국대 고고미술사학과
"이러한 적석총이 압록강 중하류역 혼강 유역에 집중 분포하고 있어서 다른 지역과 구별됩니다. 반면에 중국의 무덤들은 땅을 파고 지하에 시신을 안치하는 옹무덤 계통의 무덤이죠. 중국과 구별되고 압록강 혼강 유역에 집중되어 있는 이런 무덤을 통해서 우리가 고구려의 묘제라고 정의를 내릴 수가 있죠."
집안일대에 무수히 많은 돌무덤 떼. 적석묘는 고구려를 대표하는 독특한 무덤양식이다.
2.
적석묘가 남아 있는 지역을 보니 참 재미있는 사실을 알 수가 있네요. 초기 고구려 땅이었던 곳에는 어김없이 적석묘가 남아 있습니다. 다시 말해 적석묘는 고구려지역에서만 볼 수 있는 고구려의 독특하고도 독자적인 무덤양식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주변지역의 묘제는 어땠을 까요? 우선 당시 주변국의 상황을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여기 지도를 보시면 압록강 중상류지역에 고구려가 있습니다. 그리고 그 위쪽에 부여, 동쪽에 옥저와 동예, 한반도 남쪽엔 마한, 진한, 변한. 그리고 서쪽엔 중국의 한나라 세력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 주변국, 어떤 나라에서도 적석묘를 찾아볼 수 없습니다. 그들의 묘제는 고구려 것과는 확연히 달랐습니다.
모양부터 전혀 다르죠. 돌이 아닌 이런 흙으로 쌓아올린 토광묘입니다. 그리고 내부를 보면 이렇게 시신은 땅을 파서 묻었습니다. 그런가하면 적석묘는 돌을 차곡차곡 쌓아올렸고 내부 역시 토광묘와 다르게 이렇게 지상에 시신을 안치했습니다. 부여, 한나라 등 고구려의 주변국은 모두 토광묘를 썼고 고구려에서만 적석묘를 썼습니다. 그렇다면 여기
서 한 가지 의문이 생깁니다. 광개토대왕비에 보면 이런 글귀가 있습니다. ‘시조추모왕 출자북부여’ 풀이하면 고구려 시조 주몽은 부여에서 왔다. 그러니까 고구려를 건국한 주몽은 부여사람이란 얘긴데 왜 부여의 묘제인 토광묘를 쓰지 않고 이 적석묘를 쓴 것일까요?
주몽이 세운 고구려 첫 수도의 모습은 어땠을까. 주몽이 도읍을 세웠다는 비류수는 지금 환인의 혼강이다. 서쪽 산에 세웠다는 성은 오녀산성으로 추정되고 있다. 800m 깎아지른 듯한 절벽. 그 위에 고구려의 첫 수도성이 있다. 산으로 오르는 길에서도 절벽으로 둘러싸인 산세를 느낄 수 있다. 비교적 경사가 완만한 산의 동쪽에 성벽이 남아 있다. 2000년 세월에도 성벽은 옛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이끼만이 장구한 세월의 흔적을 느끼게 한다. 중간에 성벽이 끊어진 이곳이 문이 있던 자리다. (기역자 보일 때) 남아 있는 성벽의 모양이 기역자. 문이 옹성의 형태였음을 말해주고 있다.
고구려의 첫 수도성 오녀산성. 세면은 깎아지른 절벽을 이용하고 동쪽만이 성을 쌓은 자연지형을 이용한 고구려의 걸작품이다. 절벽 위는 남북 1km, 동서 300m 축구장 30개 넓이의 넓고 평평한 땅이 있다. 지금은 나무가 무성하지만 산성 내에서 발견된 건축지는 이곳에 사람이 거처했음을 말해준다. 수십 채의 소형 주거지와 3개의 대형 건물지. 최근 중국의 대대적인 발굴조사 작업의 성과다. 오녀산성에서 발굴된 토기다. 아래가 평평하고 손잡이가 달린 게 고구려 토기의 특징인데 그 중에서도 고구려 초기의 것으로 보고 있다.
최종택 교수
"오녀산성 토기 경우 이른 시기 토기는 모양은 화분 모양입니다. 깊은 사발이라고 하는데 그런 모양의 손잡이가 달리는데 사로로 달리는 게 특징입니다. 이런 이른 시기의 토기가 오녀산성의 다른 시설물에서 출토된다는 건 오녀산성이 이른 시기 적어도 기원전 1세기에서 기원후 1세기에는 성곽으로서 기능을 했음을 보여주는 중요한 증거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적석묘가 나타나는 것 역시 고구려 건국시점인 기원전 1세기경일까. 그 의문을 풀 수 있는 단서가 집안의 오도령 구문에서 발견된 적석묘다. 오도령 적석묘에서는 청동무기가 발견되었다. 그런데 청동창의 경우 기원전 4, 3세기에는 나타나는 한국식 청동창과 그 형태가 매우 유사하다.
강현숙 교수
"매장방식이나 유물에서 고구려 적석총과 상호 관련성을 보여주기 때문에 이 유적을 통해서 고구려 적석총이 축조된 시기를 추정할 수 있는데요. 그 시기는 한국식 동검을 통해 기원전 4세기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고구려 건국이전부터 압록강 유역에는 적석총을 축조했던 사람들이 살고 있었음을 우리가 알 수 있습니다."
주몽이 고구려를 건국하기 이전, 이미 토착세력들이 있었다는 이야기다. 삼국사기에는 주몽과 토착세력의 융합과정이 나타나 있다. 부여에서 졸본으로 남하해오면서 여러 토착세력과 만났다는 기록이다. 그런가 하면 이런 기록도 보인다. 여기서 졸본 부여왕이란 부여에 내려와서 왕이 된 자로 그 세력이 주몽세력에 합류한다. 즉 주몽이 오기 전 이미 많은 사람들이 부여에 내려와 토착세력과 함께 살고 있었음을 의미한다.
토착세력과 부여세력과의 융합과정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유적이 있다. 환인에 있는 망강루 적석묘. 이 무덤에서 금귀걸이가 나왔다. 그런데 학계에서는 이것을 부여계통의 것으로 나왔다. 고대 부여의 중심지였던 길림시를 찾았다. 지금은 흔적이 없지만 부여 중심지 동단산성이다. 그 아래 왕성으로 추정되는 넓은 토성터가 있다. 지금은 밭으로 쓰이고 있지만 이곳에 고대 부여의 화려한 왕성이 있었을 것이다.
동단산 인근에서 부여의 무덤들을 찾아보기로 했다. 밭 사이에 봉긋이 올라와 있는 것이 바로 흙을 이용한 토광묘다. 움푹 파인 이곳은 토광묘의 흔적이다. 그런데 길림성 북부의 유수노하심 무덤 군에서 유물들이 대거 출토되었다. 망강루 적석묘에서 나온 귀걸이는 바로 부여계통의 것이었다.
여호규 교수 / 한국외대 사학과
"망각루 적석묘는요, 고구려 첫 번째 도성이 있었던 환인지역에 위치하고 있구요. 무덤의 형식 자체는 고구려 고유 묘제인 돌로 쌓은 적석묘입니다. 그러한 망각루 적석묘 내부에서 유수노하심 즉 부여계통의 무덤에서 출토되는 금귀걸이와 같은 장식품이 출토되고 있습니다. 이건 대체로 어떻게 해석할 수 있냐면 주몽의 남하와 같이 부여지역에서 압록강 중류일대로 대거 많은 이주민들이 이주를 했고 그들이 토착세력하고 융화애서 세력을 성장시켜 나가는 사실, 그런 사실을 반영한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적석묘를 쓰는 토착세력과 부여에서 내려온 세력이 융화되는 과정에서 건국된 나라가 고구려인 것이다. 주몽은 적석묘와 같은 토착세력의 문화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여 고구려 700년 역사의 막을 열었다.
3.
집안을 비롯해 고구려 일대에 무수히 많이 남아 있는 적석묘는 바로 고구려의 시작을 보여주는 아주 귀중한 유적인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시작한 고구려의 첫 수도는 보신 것처럼 오녀산성이 있는 졸본이었습니다. 이곳 졸본은 40년 간 고구려의 수도역할을 합니다. 그리고 AD 3년, 국내성으로 천도를 하고 장수왕 때인 427년 수도를 평양성으로 옮깁니다. 3년부터 427년까지 무여 424년간 국내성은 고구려의 중심이었던 것입니다. 그러니 도시 곳곳에 고구려의 흔적이 남아 있는 건 어쩌면 당연한 일입니다.
한 나라의 수도. 그중에서도 가장 중심부에 자리하고 있는 것이 바로 왕궁과 관청이 들어서 있는 성일 텐데요, 그렇다면 국내성은 어디에 있었을까요? 지금 제가 보는 이곳이 집안의 중심가입니다. 시내가 건물들도 빽빽이 들어서 있죠. 그런데 그 중심부에 공터가 보입니다. 여기가 바로 시청이 있던 자린데요. 발굴 작업으로 인해 시청을 허물어버렸습니다. 하지만 시청이 있던 것으로 보아 이 일대가 지금 집안의 중심가인데요, 그런데 지금과 마찬가지로 고구려시대에도 여기가 수도의 중심지였습니다. 여기 도심 주변에 보면 담처럼 둘러쳐져있는 것이 보이죠. 이게 바로 고구려시대 쌓은 국내성 성벽입니다. 아파트 사이로 성벽이 주욱 이어져 있습니다. 하지만 지금 남은 건 북쪽과 서쪽 일부밖에는 없는데요. 그렇다면 2000여 년 전 국내성의 모습은 어땠을까요?
집안시내에 들어서면 바로 고구려의 성벽과 만난다. 국내성의 성벽이다. 세월을 느낄 수 없을 정도로 성벽의 상태가 깨끗하다. 중국이 2003년 세계문화유산 등록을 위해 대대적인 발굴과 복원작업을 한 결과다 10여 년 전까지 만해도 성은 아무렇게나 방치되어 있었다. 다 허물어진 성벽이 일반주택의 담벼락으로 쓰이고 있었다. 그때와 비교하면 지금은 완전히 달라진 모습이다. 일부구간은 새로 쌓아 복원해놓기도 했다. 성 주변에 있던 집들도 모두 허물어 깔끔하게 정비를 해 놓았다. 중국은 왜 이렇게 국내성 복원에 공을 들인 것일까? 국내성뿐 아니라 환인과 집안의 고구려 유적들을 대대적으로 발굴해 펴낸 보고서엔 그들의 의도가 잘 드러난다. 고구려를 중국의 지방정권으로 만들려는 동북공정작업이 지금도 계속해서 진행되고 있는 것이다.
신형식 교수 / 상명대 사학과
"정말 중국이 말하는 대로 고구려가 하나의 지방정권이라면 그 지방정권을 정복하는데 백만 대군을 동원할 필요가 있겠는가하는 점입니다. 천리장성이 고구려와 중국 사이에 긴 성벽을 쌓았는데 속국이라면 그 나라에 대항해서 만드는 성을 가만히 두고 있겠느냐는 점도 생각해 볼 수 있지 않습니까? 그건 논리적으로 봐도 중국의 주장이 맞지 않는다는 걸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역사인 고구려 국내성의 모습은 어땠을까? 중국은 시청 자리까지 허물며 대대적인 발굴 작업을 했다. 혹시 고구려의 왕궁 터가 아닐까 하는 추측에서였다. 기대와는 달리 왕궁 터로 추정할만한 대형 주춧돌은 나오지 않았다. 다만 와당이 대거 발견돼 시청 자리에 서 있었을 건물의 종류를 추정해볼 수 있다. 구당서의 기록을 통해 국내성 안에 왕궁이나 관청 같은 중요건물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현재 발굴 자료를 근거로 2000년 전의 모습을 복원해볼 수 있는 건 국내성 성벽뿐이다. 이번 발굴과정에서 중국학자들을 가장 당혹케 했던 구간이 성의 서벽남쪽 부분이다. 한 줄로 주욱 이어지는 성벽이 갑자기 끊어지더니 이렇게 두 줄이 되었다. 하지만 중국학자들은 그 이유를 찾지 못했다. 그런데 의문을 풀 수 있는 단서가 남아 있다.
서길수 교수 / 고구려 연구회
"이게 1910년대에 나온 조선 고적도본인데 여기 유일하게 국내성에 관한 기록으로는 담도 나오지만 당시 평면도가 나옵니다. 평면도 이렇게 봐야 되는데 동쪽, 서쪽, 남쪽, 북쪽... 어긋난 겁니다."
1910년경, 일본인이 직접 현장조사해서 그렸다는 국내성 평면도다. 이 평면도에 서남문의 형태가 뚜렷하게 보인다. 두 줄로 포개진 성벽 사이에 난 문, 어긋문이다.
서길수 교수
"발굴을 해보니까 이것이 바로 어긋문이었다는 것이죠. 성벽이 죽 오고 밖으로 왔는데 그냥 정면에 막았을 때는 적군이 쳐들어오기 쉬운데 어긋나게 만들고 문을 옆으로 만들어서 적이 S자로 들어와야 하는 거예요. S자로 들어올 때 그 안으로 들어오면 사방에서 공격할 수 있는 문이 되기 때문에 옹성이 되는 것입니다."
성벽과 성벽사이에 일정한 간격을 낸 뒤 그 사이에 문을 만든 것이다. 일종의 옹성의 형태로 적이 침입해 오면 이렇게 사방에서 공격하기 위한 것이다. 평면도를 통해 나머지 구간의 성벽도 복원해 보자. 평면도에 불룩하게 표시된 이건 뭘까? 그 흔적 역시 국내성에서 찾아볼 수 있었다. 일직선으로 이어지던 성벽이 사각으로 튀어나와 있다. 지금처럼 허물어지기 전 사진을 보면 그 원래의 모습을 좀 더 분명히 알 수 있다. 이건 바로 치다. 역시 적을 공격하기 위한 것이다.
인터뷰 최교수
"서벽에서 올라오다가 치가 양쪽에 있고 문이 나있고..."
이번 발굴의 최대성과는 평면도에 없던 문이 하나 새로 발견되었다. 성벽 사이의 빈공간이 문이 있던 자리다. 문 양쪽에 치가 있다. 적이 공격해 들어오면 이렇게 포위해 집중공격하기 위한 것이다. 그런가 하면 국내성의 서북문은 문을 성벽으로 둥그렇게 에워싼 전형적인 옹성형태다. 동문도 마찬가지다. 고구려는 이미 초기부터 다양한 형태의 옹성을 만들어 적의 침입에 대비했던 것이다.
서길수 교수
"당나라 때까지 옹성이라는 게 중국의 성에는 없습니다. 치가 북위 때 낙양에 딱 하나가 나오는데 그러나 그것도 북위라는 것도 고구려에 상당히 초기가 아니고 중기 즈음 들어 가기 때문에 고구려보다 빠르다고 할 수도 없고 그래서 치와 옹성이라는 건 고구려가 발명한 최대의 축성술이다 이렇게 얘기할 수 있고..."
고구려의 독창적이고 빼어난 축성술. 그 집약 판이 국내성이다. 2000년 전 국내성은 6개의 옹성문과 수많은 치로 방어시설을 갖춘 총 둘레 2.7km의 웅장한 모습이었다.
4.
바로 이 문이 발굴당시 중국학자들을 당혹케 했다는 국내성의 서남문입니다. 성벽과 성벽 사이에 문을 달아 적이 문으로 접근하면 이렇게 사방에서 공격을 하도록 한 것입니다. 일종의 옹성의 형태로 웬만해선 적이 문으로 접근하는 것이 어렵습니다. 문 하나만 보더라도 고구려인의 지혜와 기지를 엿볼 수 있습니다. 아쉽게도 성 내부는 아직 본격적인 발굴 잡업이 이뤄지지 않아 뚜렷한 성과가 없지만 이렇게 견고하게 만든 성안에 왕궁과 관청 같은 고구려의 중요한 건물들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집안지역엔 국내성외에 또 하나의 성이 있습니다. 국내성에서 서북쪽으로 2.5km 간 지점. 이곳에 산성이 있습니다. 바로 환도산성입니다. 산능선을 따라 성을 쌓아 방어에 아주 효과적인 성인데요, 이 성에 대해선 기록으로도 확인이 가능합니다. 삼국사기에 보면 “산상왕이 환도산성으로 옮겼다(王移都於丸都)”는 기록이 있습니다. 즉 환도산성에 왕이 거처했다는 것인데요, 그만큼 환도산성은 고구려시대 중요한 성이었다는 이야기가 되겠죠. 최근 이 환도산성에서도 대대적인 발굴 작업이 이뤄져서 새로운 사실들이 많이 밝혀졌는데요, 그렇다면 정말 이곳에 왕이 거처했을까요? 그리고 실제 왕이 머물렀다면 왜 국내성과 환도산성, 두 개의 성이 필요했을까요?
환도산성에도 성벽의 흔적이 남아 있다. 개울이 흐르는 곳이 문이 있던 자리다. 발굴조사 작업이 이뤄진 뒤 방송카메라에 환도산성을 담는 건 이번이 처음이다. 무너져 내릴 위기에 처한 성벽에 응급조치를 해놓았다. 다른 구간의 성벽도 많이 허물어져 있다. 이번 발굴 작업에서 새로운 문터가 발견됐다. 환도산성 서문이다. 문기둥을 꽂았던 구멍이 선
명히 남아 있다. 문 바깥쪽을 동그랗게 감싼 옹성의 형태다. 성 내부에서도 새로운 유적들이 대거 발견되었다. 적의 동태를 살피기 위해 쌓아놓은 점장대다. 돌을 차곡차곡 쌓아 올리고 계단을 만들었다. 계단을 올라서면 망루가 있었을 것이다. 점장대에서 보면 멀리 집안시와 남문터가 한눈에 들어온다. 적의 동태를 훤하게 꿰뚫어 볼 수 있는 것이다. 점장대 바로 옆에 주춧돌 흔적이 남아 있다. 이곳은 병사들이 머물렀던 병영터로 추정된다. 그렇다면 환도산성 안에 왕이 머물렀던 흔적은 남아 있을까? 산성 안에서 가장 평평하고 넓은 땅에 대형건물지가 나왔다. 병영 터에서 보던 것과 달리 주춧돌의 규모가 크고 주춧돌간의 간격도 넓다. 뿐만 아니라 독특한 형태의 건물터도 남아 있다.
최종택 교수
"이렇게 팔각형 건물이고 옆에 또 있고 보고서에 보면 두 개 있고 그 옆에 네모난 건물 있고..."
위성사진으로도 건물지는 확연히 보인다. 사방 95m나 되는 건물지다. 건물은 모두 11채. 그 중 팔각건물 두 채도 있다.
이병건 교수 / 동원대 건축학과
"그 건물터를 보면 대단히 큰 규모의 건축물이 있었다는 걸 알 수 있습니다. 그 대표적인 예로 일반 주거건축이라든지 일반 건축에서는 주춧돌 간격이 3m인데 이 왕궁 터의 주춧돌 간격은 5m 이상 됩니다. 여러 채 건물 밀집돼 있는 걸로 봐서 환도산성 내의 궁전 터가 명확합니다."
뿐만 아니라 이곳이 궁궐터였음을 짐작케 하는 유물이 발견되었다. 중요건물에서만 나온다는 와당들이다. 그런데 그 중에 글씨가 새겨진 와당이 있다. 소형. 고구려의 관직이름이다. 이곳에서 정치행위가 이뤄졌음을 시사하는 귀중한 유물인 것이다. 그렇다면 산 아래 수도의 중심성이 있는데 왕이 이곳에 머문 이유는 무엇일까? 환도산성의 쓰임새는 기록으로 확인할 수 있다. 위나암성은 곧 환도산성이다. 적이 침입해오면 환도산성에서 적과 대치했던 것이다.
신형식 교수
"환도산성이 분명히 고구려의 하나의 수도로 산성으로서 기록상에는 산상왕 때라든가 기록으로 옮긴 거다. 임시로 간 거다. 국난을 극복하면 원상복귀하는 이것이 고구려가 중국세력을 막는데 효과적으로 활용한 것이 아닌가..."
평지성, 산성. 두 개의 성을 가진 도성체제는 초기 수도, 환인에서도 보인다. 오녀산성 아래에 있는 마을. 하고성자란 이름이 이곳이 성이었음을 말해준다. 담벼락 아래 두둑하게 흙이 쌓여 있는데 이것이 바로 토성의 흔적이다.
짱리쥔 / 사적 안내원
"성벽은 원래 황토로 만들어졌었는데, 저 쪽 표지석에서 여기까지 이어져 있었습니다. 어르신들 말씀으로는 오래 전에 홍수로 대부분 유실됐다고 합니다."
깎아지른 듯한 절벽위의 오녀산성이 있고 평지성인 하고성자가 있는 곳이 졸본의 모습이다. 도성체제는 고구려 초기부터 나타나는 것이다. 고구려는 왜 이런 독특한 도성체제를 갖췄을까. 고구려는 건국초기부터 한나라세력의 공격을 받았다. 실제 삼국사기를 보면 고구려 초기, 끊임없이 중국 한나라 세력과 전쟁을 치른다. 따라서 자체 방어력을 키울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여호규 교수
"고구려가 국가 형성 과정에서부터 한나라를 비롯한 주위의 외압이라든지 그들의 침략을 물리치며 성장했다. 그래서 고구려인은 처음부터 외침에 대비하며 국가 성장했다. 그래서 외침이 있을 때 언제든지 대피할 수 있는 산성을 쌓아두고 유사시 평지성에서 산성으로 옮겨 농성을 벌이는 군사방어 전략을 펼쳤던 것이다."
이러한 사실을 말해주듯이 집안 일대의 발굴과정에서 유난히 많이 나온 유물이 무기류였다. 그 중 공격용 무기수만 모두 454점. 그 시대 기본적인 무기들이 다 출토 되었다. 이는 안악 3호분으로도 확인할 수 있다. 행렬도의 병사들이 든 무기들이 모두 실물로 확인된 것이다.
최종택 교수
"궁시도모라는 고구려의 무기체계가 이미 초기에 다 갖춰졌다고 할 수 있고 대체로 4세기에는 이런 무기들이 기능에 따라 동일한 무기라도 부위별로 다른 재질로 만들 정도로 잘 발달했다. 이런 점이 초기 군사력을 바탕으로 영토를 넓히고 국가체제를 갖춰왔음을 보여주는 또 다른 증거입니다."
방어에 뛰어난 도성체제를 갖추고 무기체계를 완성한 고구려는 그 바탕위에 중국대륙으로 세력을 뻗어나간다. 건국 초기 고구려를 가장 괴롭혔던 세력인 현도군이 점차 서쪽으로 밀려나는 과정은 고구려의 힘의 성장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고구려는 점차 동북아시아지역의 강자로 부상하기 시작한다.
5.
이렇게 고구려는 중국과의 끊임없는 전쟁을 통해 성장하게 됩니다. 그리고 우리가 너무도 잘 아는 광개토대왕에 영토를 급격히 확장해 나가 동북아시아 패자의 자리를 굳히게 됩니다. 이곳 집안에는 광개토대왕의 것으로 추정되는 릉도 남아 있습니다. 저 즈음인데요, 중심가에서는 조금 벗어난 곳이지요. 여기 이 밑으로는 보이는 것이 광개토대왕릉으로 추정되는 태왕릉입니다. 태왕릉 저 위쪽에 보이는 전각에 광개토대왕비가 있습니다. 이게 바로 광개토대왕비입니다.
실제크기로 복원해봤는데요, 정말 어마어마하게 크죠. 높이가 6.34m, 성인 남자 키의 3배는 훨씬 넘습니다. 더구나 정교하게 다듬거나 여러 개의 돌을 이어 붙이지 않고 거대한 자연석을 그대로 세워 놓아 그 웅장함이 더한 것 같습니다. 그리고 저 뒤에 있는 것이 태왕릉인데요, 한 변의 길이가 무려 66m고 높이가 14.8m입니다. 릉의 규모 역시 보는 이를 압도합니다. 이렇게 독자적인 구역을 차지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그 규모 역시 범상치가 않는 태왕릉, 이는 바로 막강했던 고구려의 힘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집안 시에서 가장 넓은 묘역을 차지하고 있는 것이 태왕릉과 광개토대왕비다. 두 유적의 주변은 깨끗하게 정비되어 있고 비석은 훼손을 막기 위해 전각을 세워 놓았다. 원래 릉과 비 주변엔 집들이 복잡하게 들어서 있었다. 그 집들을 모두 허물고 깨끗하게 조성한 것이다. 태왕릉 주변에 살던 사람들은 인근지역으로 집단 이주시킨 뒤 마을 이름을 태왕신촌이라 했다. 새롭게 마을을 하나 만들 정도로 중국은 고구려 유적 발굴과 정비에 적극적이다. 잔디까지 꾸며 관광객들에게 공개해 놓았지만 취재진의 접근은 엄격하게 막고 있다. 광개토대왕비는 보존을 위해 유리를 씌워 놓았다. 우리의 역사유적인데도 이렇게 먼발치에서밖에 볼 수 없다는 것이 안타깝다. 태왕릉은 멀리서도 그 규모를 실감할 수 있다. 한 변의 길이가 무려 66m, 높이가 14.8m다. 6층 건물높이다. 무덤중앙에 낸 문은 묘실로 들어가는 문이다. 왕과 왕비가 나란히 안치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태왕릉 발굴 작업에선 귀중한 유물들이 대거 출토되었다. 왕이 썼을 것으로 보이는 관모와 허리띠, 모두 금으로 화려하게 만들었다.
태왕릉 외에도 집안엔 독자적인 구역을 차지한 대형무덤이 여럿 있다. 서대묘는 한 변의 길이가 55m, 높이가 9m다. 오랜 세월 탓에 돌이 무너져 내려 원래 모습은 잃었지만 서대묘도 반듯한 피라미드 형태였다. 현재 남은 적석묘 중 가장 큰 천추묘. 한 변이 무려 80m, 태왕릉보다 20m나 더 크다. 그렇다면 언제부터 독자적인 구역에 거대한 무덤을 조
성하기 시작한 걸까. 서대묘와 천추묘에서는 구름문양 와당이 출토되었다. 그런데 이 와당의 구름무늬 사이에 연대를 추정할 수 있는 문자가 새겨져 있다. 태녕4년은 언제일까?
김성구 관장 / 당시 경주박물관장
"태령 4년은 서기 325년에 해당됩니다. 태녕이란 연호는 중국 동진의 연호이고 이 수막새는 4세기 초에 제작된 것으로 알 수 있죠."
4세기초. 고구려엔 어떤 일이 있었길래 이렇게 거대한 규모의 왕릉들이 등장하게 되는 것일까? 4세기가 되면 고구려는 무서운 기세로 중국 세력을 압박한다. 311년 압록강 하구의 서안평을 점령한다. 그리고 불과 2년 뒤 낙랑군을 몰아내고 뒤이어 대방군도 축출한다. 4세기 초 한반도와 요동지역에서 중국세력을 완전히 몰아내는 것이다.
여호규 교수
"그 이전에는 왕들이 각 부의 대표자면서 고구려를 대표하는 일반귀족하고 동일한 회의체면서 고구려 대표 귀족세력 일부며 고구려 대표다. 그러다 4세기 이후 중앙집권체제 정비하면서 귀족세력에서 초월한 그런 초월적 군주로 부상하게 되는데 그러면서 왕 중의 왕이란 의미로 태왕이란 칭호를 사용하게 됩니다."
고구려왕의 초월적인 힘을 보여주는 상징적인 유적이 장군총이다. 그 규모와 견고한 모양새만으로도 당당한 위용이 전해지는 것 같다. 정교하게 다듬은 돌 하나의 크기도 엄청나다. 이 큰 돌을 12.5m 높이까지 쌓아올렸다. 계단 사이에 만들어 놓은 돌방은 잘 보존되어 있다. 내부엔 왕과 왕비의 시신을 모셔두었던 관대가 두 개 나란히 놓여 있다. 1500년의 세월이 비껴간 듯 옛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는 장군총. 그 비밀은 축조방식에 있다. 땅에 박혀있는 자연석을 그대로 살려 거기에 맞게 돌을 가공한 그랭이 공법이다. 돌 사이에 틈이 벌어지지 않아 견고해지는 것이다.
돌 가장자리에 홈을 판 뒤 그 홈에 맞춰 윗돌을 놓은 것이다. 밀려 내려오는 것을 막기 위한 것이다. 이렇게 치밀하고 과학적인 방법으로 완성된 것이 장군총이다. 그렇다면 이렇게 큰 돌을 어디서 어떻게 옮겨왔을까? 장군총에서 서북쪽으로 약 16km 즈음에 고대채석장이 있다. 장군총에 쓴 것과 같은 재질의 돌이다. 아마 이곳의 돌을 떼어내 집안지
역까지 옮겼을 것이다. 그럼 이 큰 돌은 어떻게 옮겼을까?
최종택 교수
"고구려 채석장 유적에서 집안 고분군까지는 멀게 20km가 되는 큰 거리이기 때문에 육로로 운반했다고 보기 어렵고, 출토된 유물 중 신발 밑에 못이 박힌 요즘 말하면 아이젠 같은 유물 같은 게 나온 게 있기 때문에 아마 겨울에 채석을 한 것들을 이 아래 있는 골짜기에 소천구하라는 조그마한 강이 있는데 그 강위에 올려놓고 얼음으로 끌고 갔을 거라
주장하고 집안시내는 평지라 가까운 거리는 아마도 통나무 깔고 끌고 갔을 것이다라고 두 가지 가능성을 주장해 볼 수 있다."
자연지형을 이용해 돌을 산에서 끌어내린 뒤 이렇게 통나무를 깔아 운반했을 것이다. 마지막 돌을 쌓아올리는 작업은 어떻게 이뤄졌을까? 돌을 쌓아올린 방법을 알아보기 위해 건축전문가를 찾았다.
이건하 교수 / 한서대 건축공학과
"살펴보면 기단부와 6단으로 형성, 먼저 기단부에 석조를 일단 쌓고 난 다음에 흙 채우고 2단 쌓을 준비하고 3단 쌓고 4단을 쌓고 이런 식으로 계속 축조해서 올라갔을 것이다."
흙을 쌓아 운반하기 쉽게 길을 만든 뒤 한 계단씩 차곡차곡 쌓아올렸을 것이다. 이 과정에서 얼마나 많은 사람이 동원되었을지는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다. 장군총을 비롯한 거대한 왕릉을 축조하는 데는 단지 뛰어난 기술만 필요했던 건 아니다. 충분한 경제력과 많은 인원을 동원할 수 있는 강력한 왕권, 그것이 밑받침이 되었다. 장군총을 비롯해 집안 일대에 남아 있는 거대한 적석묘는 당시 동북아시아를 호령했던 고구려의 힘과 기상을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6.
저는 지금 장군총 위, 한 기단에 서 있는데요, 어떻습니까. 직접 이렇게 서보니까 그 규모가 실감이 나지 않습니까? 한 기단의 높이가 제 어깨선까지 옵니다. 직접 옆에서 보니, 왜 장군총을 보고 동방의 피라미드라고 하는지 알 것 같습니다. 중국 집안지역, 즉 국내성은 고구려의 대표적인 유적을 다 만나볼 수 있는 곳입니다. 오늘 그 유물 유적을 하나하나 자세히 살펴보면서 고구려의 시작과 동북아시아 패자로 성장하는 성장과정까지 알 수 있었습니다. 바로 국내성은 고구려가 700년 역사의 기틀을 잡은 고구려 역사의 중심지인 것입니다. 비록 압록강 너머의 중국 땅에 있지만 지금도 그곳엔 우리의 역사, 고구려가 살아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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