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www.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945575.html?_fr=mt2
n번방 ‘엄벌’하자는데… 또 미뤄진 ‘디지털성범죄 양형기준’
등록 :2020-05-19 16:21 수정 :2020-05-19 21:27
[대법원 양형위, 오는 12월로 ‘디지털성범죄’ 양형기준 의결 연기]
2012년 불법촬영물 단순 유포도 처벌 가능해졌지만
양형기준 없어 ‘보복성 영상물’ 등 솜방망이 처벌로 빠져나가
“엄중처벌 외친 양형기준 설정 투쟁 역사 이제는 끝내야”
공동소송플랫폼 ‘화난사람들’ 누리집 갈무리.
지난 18일 누리꾼들의 시선은 대법원에 쏠렸다. 이날 오후 대법원 양형위원회(대법원 양형위·위원장 김영란)의 ‘디지털성범죄 양형기준’ 초안 의결이 예정돼 있었기 때문이다. 디지털성범죄의 가중영역 상한을 징역 13년으로 권고하는 등 처벌 기준을 강화하는 안이 초안에 담겼다.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는 ‘#양형위원회에_바란다’는 해시태그와 함께 ‘엔(n)번방은 정말 버닝썬 꼴이 나면 안 됩니다’, ‘국민 법감정과 동떨어진 성범죄 양형기준을 현실화하라’는 의견이 쏟아졌다. 누리꾼들은 ‘사법부의 결자해지를 기다린다’는 내용의 글을 양형위에 팩스로 보내는 이른바 ‘팩스총공(총공격)’도 펼쳤다.
하지만 대법원 양형위는 이날 “법률(성폭력 처벌법) 개정이 있었기 때문에 이를 반영해 양형기준안을 마련하는 것이 타당하다는 데에 의견을 같이했다”며 기준안 의결을 12월로 미뤘다. 누리꾼들의 탄식이 이어졌다. ‘지금도 다른 (엔번)방들이 수없이 돌아갈테고 그 안에서도 여성들은 착취를 당하고 있을텐데 의결을 12월로 미룬다고요?’, ‘엔번방 가해자들을 지금의 양형으로 처벌하겠다는 의지를 보여준 것밖에 안 된다’는 비판이 나왔다.
누리꾼들의 분노는 디지털성범죄 양형기준 설정 촉구가 2012년부터 8년 동안 이어져온 목소리라는 점에서 기인한다. 디지털성범죄는 그동안 양형기준이 없던 탓에 가해자들에 대한 처벌이 솜방망이에 그쳐왔다는 지적이 여러 차례 제기됐다.
스마트폰의 대중화로 ‘불법촬영 범죄’가 급증하기 시작한 2010년께부터 디지털성범죄에 대한 엄중 처벌이 필요하다는 목소리가 나오기 시작했다. 2012년에는 성폭력처벌특례법이 전부 개정되면서 이 법 14조에 ‘촬영 당시 동의를 했더라도 원치 않는 유포행위를 처벌’하는 내용의 조항이 신설됐다. 그러나 이후에도 명확한 양형기준이 없는 탓에 ‘고무줄 판결’과 ‘솜방망이 처벌’이 반복된다는 비판이 나왔다. 남인순 더불어민주당 의원실이 대법원으로부터 제출받은 자료를 보면, 2012~2017년 불법촬영 범죄로 재판을 받은 7446명 가운데 징역·금고형을 받은 사람은 647명(8.7%)에 불과했다.
2015년 8월 성착취 사이트 운영자의 지시를 받은 여성이 국내 한 워터파크 샤워실에서 200여명을 불법 촬영한 사건은 양형기준 설정 촉구에 불을 붙였다. 이후 2016년 강남역 살인사건이 발생하고, 미투 고발이 이어지면서, 2018년 분노한 여성들이 거리로 쏟아져 나와 ‘불편한 용기’라는 이름의 시위를 6차례 열었다. 한국사이버성폭력대응센터(한사성)는 같은 해 2월 불법촬영물 유포 사이트와 삭제 업체가 공생하며 범죄를 산업화한 ‘웹하드 카르텔’ 범죄를 고발하면서 불법촬영 범죄에 대한 엄중 처벌을 위해선 상향된 양형기준이 필요하다고 촉구했다. 그해 10월에는 가수 구하라씨의 전 남자친구 최종범씨가 “함께 찍은 영상을 유포하겠다”며 구씨를 협박한 사실이 알려지면서 “보복성 영상물 가해자들한테 징역형을 선고하라”며 양형기준 설정을 촉구하는 청와대 국민청원이 처음으로 등장하기도 했다. 지난해 4월 출범한 제7기 양형위원회는 디지털성범죄에 대한 양형기준을 설정하겠다고 밝혔다.
‘엔번방 사건’ 등 텔레그램 내 성착취 문제는 또 다시 디지털성범죄 양형기준 필요성에 불을 지폈다. 지난 1월 여성들을 중심으로 ‘엔번방 가해자들을 엄중 처벌해달라’는 내용의 국민청원과 국회 입법청원이 등장했다. 공동소송 플랫폼 ‘화난사람들’은 지난 1월부터 3월까지 2만182명의 국민으로부터 디지털성범죄 양형기준에 대한 의견을 들었고, 이 가운데 43.6%는 ‘(디지털성범죄 가해자에 대한) 감경 사유가 없어야 한다’고 답했다. 지난달 김영미 변호사(법무법인 숭인)는 이런 내용이 담긴 ‘국민의견 보고서’를 대법원 양형위에 제출했다.
여성계는 성폭력 처벌법 개정 등의 내용이 양형기준 상향에 반영되는 것은 다행으로 생각한다면서도 사법부의 양형기준 논의가 애초부터 너무 지지부진했다고 지적했다. 서승희 한사성 대표는 “불법촬영 범죄가 이슈가 된 건 2015년도부터였고 양형 기준이 필요하다는 주장은 그 전에 ‘소라넷’ 사건 때부터 꾸준히 있어왔다. 그러나 관련 법이 이제야 바뀌고, 양형기준이 지난해에 와서야 논의된 건 너무 늦었다”며 “더 이상은 양형기준안 마련을 늦출 수 없다. 이번이 마지막 기회”라고 말했다.
<디지털 성범죄 양형기준 투쟁 일지>
1. 2012년 12월 성폭력 처벌 특례법 전면 개정으로 불법촬영물 ‘단순 유포’도 처벌
―개정 이후 지금까지 양형기준 없어 ‘고무줄 판결’과 ‘솜방망이 처벌’이 반복
2. 2015년 ‘워터파크 불법촬영 사건’
―일상화된 불법촬영 범죄 위험성 제기
3. 2018년 5∼12월 ‘불편한 용기’ 시위
―불법촬영물 가해자 솜방망이 처벌 규탄 시위 6차례 이어져
4. 2018년 10월 가수 구하라씨 전 남자친구의 솜방망이 처벌
―디지털 성범죄 양형기준 설정 촉구하는 청와대 국민청원 첫 등장
5. 2019년 4월 대법원 양형위원회 7기 출범
―디지털 성범죄에 대한 양형기준 마련하기로 결정
6. 2019년 11월 구하라씨 사망
―‘디지털 성범죄 양형기준 마련하라’ 국민청원 다시 등장해 20만명 이상 동의
7. 2020년 1월 ‘엔(n)번방 사건 가해자 강력 처벌’ 등 청원 잇따라
―국민청원과 국회 입법청원에 디지털 성범죄 양형기준 설정 내용 담김
8. 2020년 4월 공동소송 플랫폼 ‘화난사람들’, 디지털 성범죄 양형기준에 대한 국민의견 대법원에 제출
9. 2020년 5월18일 누리꾼들 ‘#양형위원회에_바란다’ 해시태그 운동, ‘팩스 총공’ 진행
오연서 기자 loveletter@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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