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2045097
사도세자의 궁녀 살해, 영조때문이었다
[사극으로 역사읽기] SBS <비밀의 문> 네 번째 이야기
14.10.20 17:00 l 최종 업데이트 14.10.20 17:00 l 김종성(qqqkim2000)
▲ 드라마 <비밀의 문>의 사도세자(이제훈 연기). ⓒ SBS
사도세자는 피해자다. 그것도, 억울한 피해자다. 이 점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하지만, 그의 또 다른 측면에 주목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그의 진면목뿐만 아니라 그가 실패한 이유를 이해할 수 없게 된다.
사도세자는 피해자인 동시에 패배자이지만, 우리는 앞의 것에만 주목하고 패배자라는 측면에는 덜 주목하는 경향이 있다. 그는 불리한 위치에서 패배한 인물이 아니었다. 그는 매우 유리한 위치에서 패배한 인물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가 패배한 이유를 살펴보는 것은 꼭 필요한 일이다.
사도세자는 왜 실패했을까?
사도세자는 13년간 주상을 대신해서 국정을 운영한 대리청정의 주역이다. 그의 권력은 오늘날의 대한민국 총리보다도 막강했고, 미국의 부통령보다도 막강했다. 게다가 그는 단순히 대리청정만 했던 게 아니라, 대리청정을 통해 기득권 세력에 맞섰던 개혁의 투사였다.
사도세자는 비록 임금은 아니었지만 개혁 의지를 갖고 13년간 통치권을 행사했던, 우리 역사에서 몇 안 되는 인물이다. 이제껏 우리 역사에서 (사회를 바꿔보겠다는 열망을 가진 개혁가나 혁명가 중에서) 사도세자처럼 비교적 수월하게 최고 권력에 오른 인물은 별로 없었다. 그런 의미에서 그는 행운아였다.
그런데 그런 행운을 갖고도 뜻을 성취하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딴 데도 아닌 뒤주(쌀통)에 갇혀 죽임을 당하는 어처구니없는 패배를 맞이하고 말았다. 자신에게 주어진 행운을 제대로 행사하지 못했던 것이다. 그로 인해 그는 역사 발전에 별로 기여하지 못한 채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사도세자가 실패한 원인은 어찌 보면 그리 거창한 게 아닐 수도 있다. 관점에서 따라서는 사소한 것일 수도 있다. 그 실패 원인 중 하나는, 그가 '실패한 아들'이라는 점에서 찾을 수 있다.
사도세자와 아버지의 관계는 일반적인 아들과 아버지의 관계가 아니었다. 이 관계는 부자관계인 동시에 군신 관계였다. 또 정치적 동지 관계였다. 두 사람은 똑같이 탕평정치를 추구했다. 또 대리청정을 통해 대권을 빌려주고 빌리는 관계가 되었다. 그런 의미에서 정치적 동지 관계였다.
따라서 사도세자 입장에서는 '성공한 아들'이 되는 것이 정치적 성공과도 직결되었다. 성공한 아들이 되어야 성공한 신하가 되는 것이고 성공한 동지가 되는 것이었다. 그래야만 공동의 목표인 탕평정치도 실현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는 그렇게 하지 못하고 실패한 아들로 남았다. 이것은 그의 정치적 실패를 초래한 결정적 요인 중 하나였다.
13년간의 대리청정, 그건 문제가 아니었다
▲ 드라마 <비밀의 문>의 영조(한석규 연기). ⓒ SBS
장남인 효장세자를 잃고 7년 만에 갓난아이(사도세자)를 안아든 영조는 이 아이에게 모든 기대를 걸었다. 영조는 자상한 아버지가 되기보다는 엄격한 아버지가 되고 싶었다. 아들을 강력한 후계자로 만드는 것이 그의 꿈이었다. 그래서 그는 생후 100일 된 갓난아이를 부모의 품에서 떼어내 궁녀와 환관들에게 맡겼다. 훌륭한 후계자로 키울 목적으로 특수교육을 시킨 것이다.
사도세자는 대단한 아이로 성장했다. 그의 성장과정을 기록한 궁중 문서에 따르면, 그는 생후 7개월 만에 동서남북을 분간하고 두 살 때 60개 정도의 글자를 썼다. 이 문서는 부인인 혜경궁 홍씨가 기록한 <한중록>에 인용되어 있다.
유아기의 사도세자는 단순히 글자의 발음만 익힌 정도가 아니었다. 그는 그 나이에 글자의 의미까지 이해했다. 위의 문서에 따르면, 세 살 때 사람들이 과자를 주면 복 복(福)자나 장수 수(壽)자 같은 좋은 의미의 글자가 찍힌 과자만 집어 들었다고 한다.
사도세자는 그저 똑똑한 아들로만 성장한 게 아니다. 그는 정의로운 아들로도 성장했다. 그가 얼마나 정의로웠는지는, 열 살 때 보수파인 외척과 노론당의 문제점을 비판한 사실에서도 단적으로 드러난다. 이 중에서 외척은 보수파인 동시에 영조의 친위세력이었으므로, 외척을 비판한 것은 곧 아버지 영조를 비판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우리는 한국 현대사에서 대통령의 딸이나 아들들이 아버지의 재산을 숨겨주고 아버지의 잘못을 비호하는 모습만 보아왔다. 사도세자처럼 아버지와 연계된 친위세력을 비판한 대통령의 자녀는 없었다. 그것도 나이 열 살에 그렇게 할 수 있는 사람은 없었다. 이처럼 대한민국 대통령의 자녀들이 흉내낼 수 없을 정도로 사도세자는 똑똑하고도 정의로웠다. 그런 아들이었기에 영조가 13년간이나 대리청정을 맡겼던 것이다.
그런데 대리청정 이후로 사도세자는 아버지와의 관계에서 문제점을 드러냈다. 물론 그는 대리청정의 권한을 받은 뒤에도 아버지의 권위를 존중했다. 국정을 임의로 처리하지 않고 아버지의 의견을 듣고 처리했던 것이다. 그래서 대리청정 자체가 부자간에 문제가 되지는 않았다.
사도세자는 대리청정을 통해 강력한 왕권을 구축하고 보수파의 권력 독점을 견제함으로써 공평한 정치 시스템을 만들고자 했다. 이 때문에 그는 외척과 노론당을 비판했고, 이로 인해 그들의 견제를 받았다.
이렇게 사도세자가 보수파와 갈등을 일으키다 보니, 이것은 사도세자뿐만 아니라 영조의 입지에도 영향을 미치지 않을 수 없었다. 아무리 영조가 탕평정치를 추구했다 하더라도 보수파의 눈치를 살피지 않고는 국가를 운영할 수 없는 상황에서, 대리청정을 하는 사도세자가 보수파와 갈등을 일으키다 보니 영조 정권 자체에 부담이 생기지 않을 수 없었다.
이것은 사도세자에 대한 영조의 태도에 영향을 미쳤다. 사도세자에게 실망감과 불만을 드러내기 시작한 것이다. 이로 인해 영조가 아들에게 이것저것 간섭하는 일이 많아졌다. 엄격한 아버지인 영조는 엄격함과 함께 잔소리까지 갖춘 아버지로 바뀌어 갔다.
아버지를 넘어서지 못한 아들, 사도세자
▲ 사도세자의 사당이 있었던 경모궁 터. 서울대학교병원 뒤편에 있다. 2012년 11월에 찍은 사진이다. ⓒ 김종성
물론 쉬운 일은 아니지만, 가장 성공적인 아들은 아버지를 극복하는 아들일 것이다. 아버지의 틀에 갇혀 아버지의 한계를 벗어나지 못하는 아들은 그리 좋은 아들이 아닐 것이다.
결과적으로 뛰어난 아들 사도세자는 무서운 아버지를 극복하지 못했다. 그래서 아버지에게 맞서지 못했다. 아버지를 자신의 정치적 목표에 대한 지지자로 만들 엄두도 내지 못했다. 그저 아버지로 인한 스트레스만 느낄 뿐이었다.
아버지를 극복하지 못해도, 그런 대로 성공적인 아들이 되는 경우도 있다. 아버지의 그늘에서 아버지가 내준 과제를 충실히 수행하는 아들도 있다. 하지만, 사도세자는 이마저도 하지 못했다. 아버지의 질책이 늘어나자, 그는 어떻게든 아버지를 회피하려 했다. 아버지와 부딪히지 않는 최선의 길은 방안에 누워 있는 길뿐이었다. 그러자니 자연히 꾀병을 부리는 일도 많아졌다.
이러다 보니 아버지에 대한 문안을 게을리 할 수밖에 없었다. 영조 33년 11월 8일자(양력 1757년 12월 18일자) <영조실록>에는 영조가 "지난 7월(음력) 이후로 동궁의 문안을 받지 못했다"고 불평하는 대목이 나온다. 하지만 이 정도는 별 게 아니었다. 사도세자가 몇 달씩이나 아버지를 피해 다니는 일은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가 아버지 몰래 평안도 여행을 갔다가 반역 혐의를 썼다는 이야기는 유명하다.
이 시기의 사도세자는 이미 20대의 나이였다. 오늘날 대한민국의 20대는 사회생활을 하는 나이일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은 나이일 수도 있지만, 조선시대의 20대는 사회생활을 시작하고도 한참이 지난 나이였다. 열 살 미만의 아동들이 노동 현장(논밭)에서 조수로 일하던 시대였다. 그렇기 때문에 20대 성인이 아버지를 피해 다니는 모습은 당시로서는 좀 특이한 광경이었다.
게다가 사도세자는 아버지와의 대화 채널마저 유지하지 못했다. "지난 7월 이후로 동궁의 문안을 받지 못했다"는 영조의 말은 사도세자 앞에서 나온 말이 아니다. 정승들 앞에서 영조가 한탄하면서 나온 말이다. 아들에게 해야 할 말을 정승들에게 했다는 것은 이들의 부자관계가 비정상적이었음을 반영하는 것이다.
두 사람은 단순한 부자관계가 아니라, 대리청정을 매개로 한 정치적 파트너 관계였다. 이런 관계인데도 두 사람의 대화 채널이 제대로 가동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사도세자가 영조를 피해 다니기까지 했다. 이렇게 아버지를 피해 다녔으니, 사도세자는 아버지를 극복하는 아들이 될 수 없었음은 물론이고 아버지의 그늘에 적응하는 아들도 될 수 없었다.
실패한 아들, 그게 몰락의 시작이었다
▲ 사도세자가 뒤주에 갇혀 죽은 곳인 창경궁 문정전 앞뜰. ⓒ 김종성
아버지와의 관계 파탄은 아버지와의 관계만 망친 게 아니라 사도세자 자신의 정신 건강까지 망치는 요인으로 작용했다. 그는 아버지와의 관계에서 발생한 스트레스를 정상적으로 해소하지 못했다.
사도세자의 정신건강에 관한 한, 혜경궁 홍씨가 기록한 <한중록>보다는 정조 정권이 편찬한 <영조실록>이 상대적으로 더 신빙성이 있다고 볼 수 있다. 혜경궁 홍씨는 자기 집안이 사도세자를 죽이지 않았다는 점을 강조하고자 사도세자의 정신병을 어떻게든 과장할 수밖에 없었다. 반면에 정조 정권은 그럴 이유가 없었다.
그런데 <영조실록>에서도 사도세자의 정신병을 어느 정도는 인정했다. 영조 38년 윤5월 13일자(1762년 7월 4일자) 영조실록에서는 사도세자가 궁녀와 환관을 죽인 뒤에 후회한 적이 있다는 사실을 소개했다. 이런 점을 보면, 사도세자가 아버지로 인한 스트레스로 제정신을 잃고 궁녀나 환관에게 화풀이하는 일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것은 아버지와의 관계를 풀지 못해 결국 자기 자신까지 파탄으로 몰아넣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자기 자신을 파탄으로 몰아넣고 아버지와의 관계를 파탄으로 몰아넣은 것은 사도세자의 정치적 몰락을 초래했다.
자기 자신을 파탄으로 몰아넣은 일은, 보수파의 공격을 초래하는 명분이 되었다. 아버지와의 관계를 파탄으로 몰아넣은 일은, 보수파의 공격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해줄 버팀목을 없애버리는 결과를 초래했다. 결국 그는 아버지와 보수파의 암묵적 합의 속에 쌀통에 갇혀 8일 만에 숨을 거두고 말았다.
사도세자는 분명 억울하고도 불쌍한 사람이었다. 또 그는 똑똑하고 정의로운 사람이었다. 동시에 그는 정치적으로 실패한 인물이다. 그는 웅대한 개혁의지를 품었고 그런 의지를 실현시킬 만한 권력이 있었다. 하지만 그는 허망하게 패배했다. 그 이유 중 하나는 그가 '실패한 아들'이었다는 사실에서 찾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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