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2040505
사도세자를 죽이는 데 기여한 인물이 정조라니...
[사극으로 역사읽기] SBS <비밀의 문> 두 번째 이야기
14.10.06 11:13 l 최종 업데이트 14.10.06 11:13 l 김종성(qqqkim2000)
▲ <비밀의 문>의 사도세자(이제훈 연기)와 영조(한석규 연기). ⓒ SBS
'한석규 표' 영조를 선보이고 있는 드라마 <비밀의 문>. 현재 초반부인 이 드라마는 경종 사망 직후에 영조와 노론당이 비밀리에 작성했다는 맹의라는 서약서를 중심으로 전개되고 있다. 노론당이 경종을 몰아내기 위해 압박을 가하는 상태에서, 영조가 이복형인 경종을 이어 왕이 되고자 노론당이 강요하는 서약서에 서명했다는 것이 이 드라마의 이야기다.
그런데 훗날 맹의를 손에 넣은 화가 신흥복이 이것을 사도세자(이제훈 분)에게 전달하려다가 노론당에 의해 죽임을 당하고, 세자가 이 죽음의 비밀을 파헤치려 하자 영조·노론당이 세자의 행보에 제동을 건다는 것이 현재까지 나온 스토리다. 이 드라마에서는, 영조·노론당 외에 세자의 부인인 혜경궁 홍씨까지도 남편의 행보에 제동을 거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이 같은 현재까지의 스토리는 사도세자를 뒤주(곡식 상자)에 가두어 죽이는 데 기여한 여러 가지 압력을 반영하고 있다. 사도세자를 죽음으로 몰아넣은 노론당과 외척은 물론이고, 아버지인 영조와 아내인 혜경궁의 역할이 이 드라마에서는 극적으로 묘사되고 있다.
그런데 영조·혜경궁·노론당·외척 외에 사도세자를 죽음으로 몰아간 '또 다른 인물'이 있다. 어쩌면 이 인물이 있었기 때문에 사도세자가 좀더 쉽게 죽었는지도 모른다. 만약 이 인물이 없었다면, 영조·혜경궁·외척·노론당이 그처럼 쉽게 사도세자를 죽이지는 못했을 것이다.
그 인물은 바로, 사도세자의 아들인 정조 이산이다. 사도세자의 죽음을 누구보다 슬퍼하고 사도세자의 복권을 누구보다 열망한 아들 정조가 사도세자를 죽음으로 몰아넣은 진짜 장본인인 측면도 있었던 것이다.
마흔 두 살 때까지 후계자가 없었던 영조
▲ <비밀의 문>의 영조. ⓒ SBS
영조는 경종과의 정치적 갈등 속에서 왕이 됐다. 그는 경종 독살 의혹 때문에 두고두고 시달렸다. 이런 상황에서 만약 영조가 아들을 낳지 못해 다른 왕족이 후계자가 됐다면, 영조의 입지는 한층 더 위태해졌을 것이다. 아들을 후계자로 둔 덕분에 그는 스스로를 지킬 수 있었다.
그런데 영조가 아들을 후계자로 만드는 과정은 매우 지난했다. 그는 왕이 된 지 1년 뒤인 1725년에 맏아들 효장세자(당시 6세)를 후계자로 책봉했다. 효장세자는 후궁 이정빈(정빈 이씨)에게서 얻은 아들이다. 하지만 효장세자는 3년 뒤인 1728년에 죽었다. 이때 영조는 서른다섯 살이었다.
그 후 7년간 영조에게는 후계자가 없었다. 마흔두 살 때인 1735년까지도 그랬다. 보위에 오른 지 11년이나 지난 42세의 임금이 후계자가 없었으니, 그 초조함이 어땠을지 짐작할 수 있다. 안 그래도 독살 의혹 때문에 왕권 유지를 걱정하는 처지였으니, 그 초조함은 이만저만이 아니었을 것이다.
그러던 차에 1735년에 후궁 이영빈(영빈 이씨)의 몸에서 출생한 왕자가 바로 사도세자 이선이다. 아들이 어찌나 반가웠던지, 영조는 이듬해에 세자 책봉을 단행했다. 두 살짜리 갓난아이를 책봉하는 것은 매우 이례적인 일이었다. 이렇게 어렵사리 얻은 후계자이기 때문에, 영조 입장에서는 왕실의 계승은 물론이고 자신의 안녕을 위해서라도 사도세자를 잘 지켜내야 했다.
이 점은 외척과 노론당의 입장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사도세자는 열 살 때인 1744년경부터 외척과 노론당의 문제점을 비판했다. 그래서 외척·노론당은 이 시기부터 사도세자를 경계했다. 하지만 이들은 사도세자의 급진성을 공격할 때 공격하더라도, 사도세자가 차기 주상이라는 점을 항상 염두에 두어야 했다. 왜냐하면, 사도세자 외에는 후계자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사도세자를 벼랑 끝으로 내모는 것은 외척·노론당이 선택할 수 있는 카드가 아니었다. 크게 보면 외척·노론당은 사도세자와 한편이었다. 이들은 모두 영조의 정통성을 기반으로 존재하는 사람들었다. 그렇기 때문에 사도세자를 위험에 빠뜨려 영조의 후사를 끊는 것은 외척·노론당 스스로에게도 불리한 일이었다.
그래서 사도세자가 영조를 대신해서 국정을 수행하던 대리청정 13년 기간(1749~1762) 동안에 영조는 물론이고 외척·노론당도 세자를 그냥 지켜봐야 했다. 영조 역시 사도세자가 외척·노론당과 갈등을 빚어 임금의 처지를 곤란하게 만드는 게 못마땅했지만, 그래도 참는 수밖에 없었다. 사도세자 외에는 대안이 없었기 때문이다.
사도세자가 13년간이나 대리청정을 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그런 상황 때문이었다. 이런 상황이 그대로 쭉 이어졌다면, 사도세자가 그 무슨 문제를 일으킨다 해도 그가 뒤주에 갇히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변수의 등장, '영조의 장수'와 '정조의 출현'
▲ 정조의 초상화. 경기도 수원시 화성행궁 옆의 화령전에서 찍은 사진. ⓒ 김종성
그런데 변수로 등장한 것이 있었다. '대안의 출현'과 '영조의 장수'가 그것이다. 사도세자 못지않게 영특한 왕세손인 정조 이산(사도세자의 아들)이 착실히 후계자 수업을 받아온 데에다가, 정조의 성장을 기다려줄 수 있을 정도로 영조가 장수한 것이 사도세자의 신변에 위험을 초래하는 요인으로 작용하기 시작했다.
갓난아이 때부터 특수교육을 받은 왕족들은 열 살 정도만 되면 일반인보다 우월한 지적 능력을 보유했다. 10대 초반의 왕자들이 대비의 수렴청정을 조건으로 왕이 됐던 것은, 10대 초반이면 왕이 돼도 무방하다는 인식이 존재했기 때문이다.
사도세자를 못마땅하게 생각하는 사람들은 정조 이산이 후계자로 성장할 때까지 참고 기다렸다. 영조와 외척·노론당은 정조가 여덟 살 나이로 왕세손에 책봉됨으로써 예비 후계자가 되는 모습을 지켜봤다. 그로부터 3년 뒤인 1762년에 이들은 행동을 개시했다. 이때 정조는 열한 살이었다. 이 해에 영조·외척·노론당은 사도세자를 뒤주에 가둬 죽임으로써 분란의 씨앗을 제거했다. 그로부터 14년 뒤에 정조는 영조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올랐다.
만약 정조라는 특출한 대안이 등장하지 않았거나 영조가 장수하지 못했다면, 사도세자가 죽고 그 아들이 아버지를 대신하는 위와 같은 불행은 발생하지 않았을 것이다. 이 점을 보면, 정조 역시 본의는 아니었지만 결과적으로 아버지의 비극에 가담했다고 볼 수 있다.
▲ 뒤주. 화성행궁에서 찍은 사진. ⓒ 김종성
사도세자가 이런 점을 예견하고 있었다는 사실이 혜경궁 홍씨의 회고록인 <한중록>에 나타난다. 다가오는 비극을 예견한 세자는 부인인 혜경궁에게 "아마도 무사하지 못할 듯하니 어찌할꼬"라고 하소연했다. 혜경궁이 "(아바마마께서) 설마 어찌하시리까"라고 말하자, 세자는 "세손(정조)은 귀하게 여기시니, 세손이 있는 한 나를 없앤들 상관있을까?"라고 대답했다.
혜경궁이 얼른 수긍하지 않자 사도세자는 "자네는 모르네. (아바마마의) 미움이 너무 심해서 점점 어려워지니, 나는 폐하고 세손을 효장세자의 양자로 삼는다면 어쩔 건가"라고 다시 강조했다.
영조가 사도세자를 죽인 뒤 정조를 효장세자의 양자로 만든 다음에 후계자로 세울 것이라고 예견한 것이다. 사도세자의 말은 얼마 안 있어 그대로 현실이 됐다. 이 점은 사도세자가 정조의 성장을 지켜보면서 자신의 죽음을 예견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처럼, 사도세자 못지않게 총명한 정조가 할아버지를 계승할 수 있을 정도가 됐다는 것이 사도세자를 죽음으로 내몬 요인 중 하나였음은 부정할 수 없다. 결과적으로 보면, 정조는 자기 아버지를 죽이고 후계자 자리에 오른 불행한 인물이었다. 물론 정조 자신은 그것을 조금도 의도하지 않았지만, 이처럼 운명은 정조를 불효자로 만들어 놓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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