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0397102

유리는 어떻게 고구려 왕이 되었을까
[방학봉 교수와 함께 한 고구려 여행③]
07.03.11 12:16 l 최종 업데이트 07.03.11 20:18 l 김기동(kimkidong)

▲ 집안 기차역. ⓒ 김기동

고구려의 두 번째 수도였던 집안은 환인의 동남쪽에 위치하며 남쪽으로 압록강이 흐르고 있어 북한의 만포시 모습을 자세히 볼 수 있다. 고구려의 제2대 유리명왕이 기원 후 3년 환인(옛지명 졸본)에서 집안(옛지명 국내)으로 수도를 옮긴 후 집안은 430년간 고구려의 도읍 역할을 하게 된다.


▲ 방학봉 교수가 직접 그린 집안에 있는 고구려 유적지. ⓒ 방학봉

집안에는 우리에게 잘 알려져 있는 광개토대왕비와 장군총이 있고 고구려의 왕릉으로 추정되는 여러 무덤 군들이 있다. 또 돌방 무덤 안에는 말타는 모습과 춤추는 모습 등 고구려인들의 생활 모습을 그린 벽화가 그려져 있다. 여행의 일정은 먼저 이곳 집안으로 수도를 옮긴 유리명왕의 흔적을 찾아보는 것으로 시작하였다.


▲ 오회분5호묘 앞에서 중국 안내원이 5호묘의 무덤 입구 철문을 열고 있는 모습과 이를 바라보는 방학봉 교수. ⓒ 김기동

중국 안내원은 오회분5호묘 입구의 철문을 열기 위해 상당한 시간을 허비했다. 처음에는 철문의 열쇠가 잘못되어 그런 줄 알았으나 자세히 살펴보니 입구에 물이 흥건하게 고여 철문의 바닥에 녹이 생겨 철문을 열기가 힘들었다. 묘실에 들어가고 나서야 무덤 입구에 물이 고여있는 이유를 알 수 있었다.

묘실 내부의 바닥, 벽, 천장 모두 습기 때문에 물이 배어 있었으며 벽화에도 물이 흐르고 있었다. 묘실 안 네 벽에 그려진 사신도는 겨우 형체만 알아 볼 수 있었고 아름다운 색채는 조금 높은 곳에 위치한 고임돌에만 남아 있다.


▲ 오회분4호묘에 있는 신선이 용을 타고 하늘로 올라가는 모습. ⓒ 고구려 고분 벽화

오회분5호묘 옆에 있는 4호묘에 그려진 신선이 용을 타고 하늘로 올라가는 모습은 벽화 전시실에서 사진으로만 확인 할 수 있다. 신선이 용을 타고 하늘로 올라갔다는 기록은 오회분묘군 옆에 위치한 광개토대왕릉비문에도 있다. 비문에는 추모왕이 왕위에 있는 것을 즐거워하지 않아서 용을 타고 승천하니, 유리명왕이 명을 받들어 왕이 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 아버지 추모왕을 만나 태자로 책봉된 유리와 예씨 부인. ⓒ 강맹산 [고구려의 발자취]

추모왕이 부여를 떠나기 전 결혼 한 예씨부인에게 태기가 있었고 추모왕이 떠난 뒤에 예씨가 아들을 낳게 되는데 이가 유리이다. 일곱 각으로 만들어진 주춧돌 아래에서 부러진 칼을 찾은 유리는 어머니 예씨와 함께 부여를 떠나 고구려에 도착한 후 아버지 추모왕을 만나게 된다.

삼국사기 고구려 본기에는 유리가 아버지 추모왕에게 부러진 칼을 보여 주자 추모왕이 자기가 가졌던 부러진 칼 조각과 붙여보니 완전한 칼로 연결되는 것을 확인한 후 기뻐하여 유리를 태자로 삼았고 그 후 왕위를 잇게 되었다고 간단하게 기록되어 있다.

유리는 기원전 19년 4월에 부여를 떠나 고구려 졸본에 도착하여 같은 해 9월에 고구려의 제2대 유리명왕으로 즉위하게 된다. 물론 유리가 부여를 떠날 때 옥지, 구추, 도조 세 사람과 함께하였다는 기록으로 볼 때 유리가 어느 정도 자신의 세력을 가지고 있었음을 짐작해 볼 수 있지만, 아무런 연고도 없는 고구려에 도착한 후 불과 5개월 만에 추모왕의 아들이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왕이 되었다는 것은 여러 가지 추측을 가능하게 한다.

고구려에 도착한 지 5개월만에 왕이 된 유리


▲ 소서노의 아들 비류와 온조가 이복 아버지 추모왕을 원망하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는 삼국사기 백제본기. ⓒ 삼국사기

삼국사기 백제본기에는 처음 추모왕이 부여를 도망하여 졸본부여에 도착하여 왔을 때 비류와 온조의 어머니 소서노가 가산을 털어서 나라를 세우는데 공로가 많았지만, 추모왕이 죽은 후 유리가 고구려의 왕이 됨에 따라 비류와 온조가 공연히 고구려에서 몸에 군더더기 살처럼 침울하게 지내기 보다는 어머니 소서노와 함께 남쪽으로 내려가 나라를 새로 만들기 위해 오간, 마려 등 열명의 신하를 데리고 떠나 백제를 건국하였다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 졸본 오녀산성에 있는 병영터 아마도 이곳에서 연타발, 소서노의 졸본부여 계루부 세력과 송양의 비류부 세력 사이에 정권 다툼이 일어나지 않았을까 추측해 본다. ⓒ 김기동

추모왕은 처음 졸본에 도착한 후 연타발, 소서노의 졸본부여와 협조하여 계루부 세력을 형성한 후 고구려를 건국하게 된다. 그 후 인근의 지역세력을 통합하는 과정에서 비류국의 송양왕과 충돌하게 되고 싸움에서 패한 송양의 비류국은 비류나부(소노부)로 고구려에 속한 하나의 귀족세력으로 밀려나게 된다.

이와 같은 사실은 기원전 19년 4월 추모왕의 아들이었던 유리가 고구려에 도착하여 같은 해 9월 왕으로 즉위하기까지 5개월 사이에 정권다툼이 발생하지 않았을까 하는 추측을 가능하게 한다.

추모왕의 아들인 유리를 중심으로 하는 송양의 비류나부 세력과 추모왕의 이복 아들인 비류, 온조를 중심으로 하는 소서노의 계류부 세력 사이에 정권다툼이 발생하게 되고 그 결과 유리를 중심으로 하는 송양의 비류나부 세력이 승리하게 되어 유리가 고구려 제2대 유리명왕으로 즉위하게 된 것으로 짐작된다. 고구려왕에 즉위한 유리명왕은 왕으로 즉위 후 송양의 두 딸과 결혼하게 되어, 송양은 유리명왕의 장인이 된다.

이러한 과정을 지켜보아야 했던 추모왕은 괴로웠을 것이며 마지막으로 소서노와 비류, 온조 세력이 남쪽으로 내려가도록 중재를 한 후 아마도 세상살이에 의욕을 잃고 같은 해 9월에 죽지 않았을까 추측된다. 광개토대왕비문에는 추모왕이 왕위에 있는 것을 즐거워하지 않아서 용을 타고 승천하니, 유리명왕이 명을 받들어 왕이 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마치 조선을 건국한 이성계가 아들 이방원이 형제와 왕위 다툼을 벌이자 고향인 함경도로 떠나 버린 상황과 유사하다. 


▲ 유리명왕이 고구려 수도를 옮긴 국내 위나암성으로 알려진 집안 환도산성. ⓒ 김기동

고구려의 제2대왕에 즉위한 유리명왕은 아버지 추모왕이 고구려를 건국하고 성으로 사용한 '고'씨를 버리고 '해'씨를 자신의 성으로 사용하게 되며 이후 제5대 모본왕까지 고구려의 왕들은 '해'씨를 성으로 사용하게 된다.

또한 계루부와의 정권다툼에서 비류나부 송양의 도움으로 왕에 즉위한 유리명왕은 본인의 왕권강화를 위하여 환인에서 집안으로 수도를 옮기지 않았을까 짐작된다. 하지만 주위 세력의 도움으로 왕위에 오른 유리명왕은 재위기간 37년 동안 개인적으로 여러 가지 어려움에 직면할 수밖에 없었다.
 

방학봉 교수와 함께 한 고구려 여행

 중국 연변대학 역사학부 발해사 연구소 제1대 소장 역임 후 현재 저술활동 중인 방학봉 교수님과 함께 2007년 1월 25일부터 2월 1일까지 7박8일 동안 중국 동북부에 위치한 고구려 유적지 연변, 이도백하, 안도, 통화, 환인, 집안를 여행 하게 되었다. 

78세의 연세와 아픈 다리에도 불구하고 저와 동행하며 많은 가르침을 주신 교수님께 다시 한번 머리 숙여 감사의 말씀을 드린다.

이 글은 방학봉, 장월영의 <고구려,발해 유적 소개 1995년>와 강맹산 편저 <고구려의 발자취 1982년>에 기초하였다.



 
Posted by civ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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