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ko.wikipedia.org/wiki/%EC%9D%98%EC%9E%90%EC%99%95
치세
의자왕
백제의 31대 국왕
본명 : 부여의자(扶餘義慈)
재위 : 641년 ~ 660년
의자왕(義慈王, 597년? ~ 660년, 재위: 641년 음력 3월 ~ 660년)은 백제의 제31대 국왕이며 백제의 왕이다. 성은 부여(扶餘), 휘는 의자(義慈)이며 시호는 없다. 태자 때부터 아우들과 우애가 깊고 사려가 깊어 ‘해동증자’(海東曾子)로 칭송을 받았다.
641년부터 660년까지 재위하는 동안 친정하였고 백제가 멸망하기 직전인 660년 부여 융(扶餘 隆)과 부여 효(扶餘 孝) 두 왕자와 함께 도성 바깥으로 도피하는 사이에 왕자 부여 태(扶餘 泰)가 사비성을 걸어막아 실권을 탈취하였다.
치세
즉위와 정변설(說)
무왕의 첫째 아들로 태어나 동왕 33년(632년) 정월에 태자로 책봉되었다.(이때 그의 아들 융은 17세였다) 641년 3월에 아버지 무왕이 승하하자 그 뒤를 이었고, 당으로부터 주국(柱國) 대방군왕(帶方郡王) 백제왕으로 책봉되었다. 《삼국사기》에는 용맹하고 결단력도 있다는 평가와 함께 총명하고 우애가 깊어서 '해동증자(海東曾子)' 또는 '해동증민(海東曾閔)'이라는 찬사도 따라다녔다고 하고[1], 그의 아들 부여융의 묘지(墓誌)에도 의자왕을 가리켜 "과단성이 있고 침착하고 사려 깊어서 그 명성이 높았다."[2]라고 평가되고 있다. 최근 일부 학자들은 의자왕을 ‘개혁 군주’로 재평가하고 있다. [3]
한편, 《일본서기》에는 다음과 같이 의자왕대에 있었던 모종의 정변에 대한 기록이 실려 있다.
을유에 백제에 보냈던 사신 대인(大仁) 아즈미노무라치(阿曇連) 히라후(比羅夫)가 쓰쿠시 국(筑紫國)에서 역마를 타고 와서 말했다.
"백제국은 천황(天皇)께서 붕어하셨다는 말을 듣고 조문 사절[弔使]을 보내 왔습니다. 신은 조문 사절을 따라 함께 쓰쿠시 국에 왔습니다. 신은 장례에 참석하고자 먼저 혼자 왔습니다. 그리고 지금 저 나라는 대란(大亂)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2월 정해 초하루 무자(2일)에 아즈미노 야마베노무라지 히라후와 쿠사카베노키시(草壁吉士) 이와카네(磐金), 야마도노아야노 후미노아타이(倭漢書直) 아가타(縣)를 백제의 조문 사절이 머무는 곳에 보내어 사정을 물었다. 조문 사절이 대답했다.
"백제국주가 신에게 말하기를 '새상(塞上)은 항상 나쁜 짓만 일삼는다. 귀국하는 종자에게 딸려서 돌려보내 달라 청해도, 천조(天朝)는 허락치 않으리라'라 말하셨습니다."
백제 조사의 종자들이 말했다.
"지난해 11월에 대좌평(大佐平) 지적(智積)이 돌아가셨습니다. 또 백제의 사신이 곤륜의 사자를 바다에 처넣었습니다. 금년 정월에, 국주모(國主母)께서 돌아가셨습니다. 또한 제왕자인 교기(翹岐) 및 동모매(同母妹) 여자 네 명과 내좌평(內佐平) 기미(岐味), 마흔 명 정도의 고명한 사람이 섬으로 쫓겨났습니다."[4]
이에 대해, 기록에 실려있는 대로 고교쿠(皇極) 원년(642년)[5]으로 해석하여, 의자왕이 즉위한 직후에 대규모의 정치적 숙청을 단행하여 동생(대체로 이복동생)인 부여교기를 비롯해 교기의 동복 여동생까지 모조리 추방한 사실을 《일본서기》가 수록한 것으로 보는 것이 지배적이다. 나아가, 선화공주가 죽자마자 의자왕은 기다렸다는 듯이 동생을 포함한 대대적인 숙청을 단행했고, 이것은 의자왕과 선화공주 간의 갈등 관계와 비교적 늦은 나이에 태자로 책봉된 이유를 암시한다는 주장도 있다. [6]
하지만 이러한 통설과는 반대로, 같은 책의 같은 해 4월에 앞서 백제에서 바닷섬으로 추방되었다던 왕자 교기가 불과 2,3달만에 백제의 대사(大使)로서 왜국에 파견되었다[7]고 적고 있어, 두 기록 사이에 다소 부자연스러운 면이 있다는 지적이 있다. 의자왕이 부여교기를 숙청하고자 했다면 이미 바닷섬으로 추방한 교기를 왜국에 '대사(사신단의 수장)'의 자격으로 파견할 까닭이 없다는 것이다. 또한 《삼국사기》의자왕 2년(642년) 정월조에는 사신을 보내어 당에 조공하고,[8] 2월에는 주·군을 돌며 죄수를 재심하여 사형죄 말고는 모두 풀어주는 등[9], 정변이 발생하고 불과 한 달도 되지 않은 만큼 불안한 정국이 아직 가라앉지도 않은 시점에서 수도를 떠나 지방을 순시한다는 것은 어렵다는 분석도 있다.
또한 앞의 기록에서 641년 11월에 사망했다고 전하는 대좌평 지적이 사망 이듬해인 642년 7월 왜의 왕궁에서 백제사인(百濟使人)의 자격으로 나타나 왜국 조정의 향응을 받고 있다.[10] 부여에서 발견된 『사택지적비(沙宅智積碑)』의 사택지적과 《일본서기》에 나오는 대좌평 지적이 동일인물이라면, 일러도 『사택지적비』가 세워진 갑인년(654년)까지는 지적 즉 사택지적이 생존해 있었다는 이야기가 된다. 이러한 근거를 들어《일본서기》의 황극기 원년(642년)에 나오는 정변기사는 실은 654년 말에서 655년 초에 벌어진 일로 해석해야 합리적이라는 것이다. 실제로 655년은 고토쿠(孝德) 천황의 죽음와 함께, 앞서 퇴위했던 고교쿠 천황이 사이메이(齊明) 천황으로 즉위한 원년이기도 한데, 고교쿠 천황과 사이메이 천황은 사실 동일인물이라는 점에서 사서 편찬시 착오가 발생할 소지가 있었고, 실제로는 사이메이 원년에 있었던 일을 고교쿠 원년의 일로 기록하는 실수가 생길 수도 있다는 것이다.[11] 앞의 기록에서 천황의 상이라고 한 것도 실은 조메이(舒明) 천황(고교쿠 천황의 남편이자 고교쿠 천황 선대왕)이 아니라 고토쿠 천황의 상을 말한 것으로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12]
신라 공격
2년(642년)에는 친히 군사를 이끌고 신라의 미후성(獼猴城)을 비롯한 40여 성을 빼앗았다. 이어 장군 윤충(允忠)이 신라의 옛 가야 지역에 두었던 최대 거점인 대야성(大耶城)을 함락시키고 주민 1천여 명을 사로잡아 백제의 서부 지역 고을에 나누어 살도록 했는데, 이때 대야성 성주로서 성이 함락되자 처자와 더불어 스스로 목숨을 끊은 김품석과 그 아내 고타소랑은 신라의 유력자였던 김춘추(金春秋)(훗날의 태종 무열왕)의 사위와 딸이었다. 윤충(允忠)은 이 공으로 말 스무 필과 곡식 1천 섬을 하사받았으며, [13]의자왕은 대야성을 함락시킨 그 달에 다시 한 번, 신라의 대당 교통로였던 당항성(黨項城)을 공격하여 당이 신라에 개입하는 것을 원천봉쇄하려 했지만, 신라의 구원요청을 받은 당의 항의를 받고 철수, 당에 사죄문을 보냈다.
한편 백제를 칠 원병을 청하려 고구려로 향했던 김춘추는 그곳에서 고구려가 신라를 도울 마음이 없다는 것만 확인한 채 돌아와야 했다. 이후 의자왕은 3년(643년)에는 고구려에 사신을 보내어 화친하였는데, 이후 고구려와 백제는 서로 연합 내지는 각자의 군사작전으로 신라를 압박하였다.(다만 이러한 고구려와 백제의 신라에 대한 양동공격을 두 나라 사이의 동맹으로 볼 수 있을지에 대해서는 의문이 있다.) 신라는 백제에 대한 반격을 단행해 백제의 7개 성을 공취했지만,[14] 이듬해(645년) 당 태종(재위: 626년 ~ 649년)이 고구려를 치고자 신라에서 3만의 원군을 징발한 틈을 노려 의자왕은 다시 신라의 7성을 빼앗았다. [15] 647년에는 장군 의직(義直)이 지휘하는 3천의 정예 보기가 무산성 아래에 주둔하면서 감물성·동잠성을 비롯한 지금의 김천·구미 등지를 습격했고, [16]이듬해에는 다시 신라의 서쪽 변경인 요거성을 비롯한 10여 성을 빼앗기도 했다.[17] 그리고 좌장 은상이 정병 7천으로 신라의 석토산성을 비롯한 7성을 쳐서 차지했다. (649년) [18]
한편 그 해 겨울에 신라의 김춘추는 당으로 건너가 당 태종의 신임을 얻고, 649년 당 고종이 즉위했을 때 진덕여왕이 태평송을 써서 보내는 등 당과의 외교를 긴밀히 하였다. 백제도 조공 사절을 보내(651년) 관계개선을 시도했으나, 당이 신라로부터 빼앗은 땅을 반환하라고 하자[19] 12년(652년)이후로는 당과의 교섭을 중단했다. 이후 백제와 당의 외교관계는 멸망시까지 단절되었다. 당과의 관계가 악화된 대신 고구려나 왜국과의 관계는 상대적으로 완화되어, 13년(653년)에는 왜와 우호를 통하고 [20] 동왕 16년(656년)과 17년(657년)에는 왜국에 앵무새·낙타·당나귀 등의 희귀품을 선물하고 있다.
신라에 대한 백제의 공세는 계속되어 동왕 15년(655년)에는 고구려·말갈과 연합해 신라의 북쪽 변경지대의 33성을 빼앗고,[21] 19년(659년) 4월에는 다시 신라의 독산성과 동잠성을 쳐들어오는 등 맹렬하게 밀어붙였다.[22] 신라는 대야성 함락 이후 옛 가야 지역을 대부분 잃어, 방어 거점을 낙동강 동쪽의 압량주(押梁州, 경산)로 옮길 정도로 줄곧 백제에게 밀리는 형국이었고, 빈번한 백제의 침공을 견디지 못한 신라는 마침내 당에 사신을 보내어 군사를 청할 생각을 굳힌다.
나당 연합군의 공격 개시
의자왕의 정치는 재위 15년(655년)을 기점으로 조금씩 변화를 보이기 시작했다. 태자궁을 화려하고 사치스럽게 지은 것을 시작으로[23], 16년(656년) 3월에는 궁인과 더불어 밤낮으로 사치스러운 잔치를 매일 열면서, 이에 대해 간하는 좌평 성충(成忠)을 옥에 가둬버리기까지 한다. 옥사하면서 성충은 앞으로 반드시 큰 전쟁이 일어날 것이라며 “육로는 탄현(炭峴)에서, 수로는 기벌포(伎伐浦)에서”막으라는 말을 왕에게 올렸지만 왕은 듣지 않았다.[24] 17년(657년)에는 서자 41명을 모두 좌평으로 임명하고 식읍을 내린다.[25] 오늘날 이것은 기왕의 귀족들이 전국 각지에 소유하고 있던 토지를 왕토사상의 명분을 들어 몰수해 왕자의 식읍으로 재편함으로써, 귀족 소유의 재산을 왕실 소유로 전환시키고 왕자 중심의 친위체제 구축을 추구한 것이라는 분석이 있다.
19년(659년)부터 백제에는 온갖 괴변이 잇따라 일어났다.[26][27] 거듭된 당의 경고를 무시하고 신라를 압박하자 마침내 당과 신라는 밀계하여 동왕 20년(660년) 마침내 수륙(水陸) 18만 연합군으로 백제를 협공하였다. 즉, 당 고종은 조서를 내려 좌무위대장군(左武衛大將軍) 소정방(蘇定方)을 신구도행군대총관(神丘道行軍大摠管)으로 삼아 좌효위장군(左驍衛將軍) 유백영(劉伯英)•우무위장군(右武衛將軍) 풍사귀(馮士貴)•좌효위장군(左驍衛將軍) 방효공(龐孝公)을 거느리고 군사 13만 명을 통솔하여 와서 정복하게 하고, 아울러 신라 태종무열왕을 우이도행군총관(嵎夷道行軍摠管)으로 삼아 신라의 군사를 거느리고 당나라 군사와 세력을 합하게 하였다. 소정방이 군사를 이끌고 성산(城山)에서 바다를 건너 백제 서쪽의 덕물도(德物島)에 이르렀다. 신라 왕은 김유신 장군을 보내 정예 군사 5만 명을 거느리고 백제 방면으로 나아가게 하였다. [28]
나당 연합군에 대한 대책
일단 '망국의 군주'라는 평가와 함께 나·당 연합군의 침공에 제대로 대처하지 못하고 나라를 내주었다는 혹평이 '황음무도하여 놀기만 했다'는 혹평과 함께, 의자왕에 대한 대부분을 차지한다. 대표적인 것이 나·당 연합군을 맞아 적들을 막을 수 있는 최고의 요새인 백강과 탄현에 군사를 배치할 수 있는 기회마저도 자신의 기득권에 집착한 나머지 그것을 내버린 채 헛다리만 짚다가 끝내 멸망에 이르고 말았다는 《삼국사기》의 해석은 오랫동안 백제 멸망에 대한 주요 사관(史觀)으로서 존재하며 백제 멸망과 그 주역인 의자왕에 대한 비판에 힘을 실어주었다. 《삼국사기》나 《삼국유사》에는 처음 나·당 연합군의 침공을 맞아 백제 조정에서 어떤 논의가 있었는가에 대해서 기록하고 있다. 이 기록들은 대체로 중국의 《구당서》와 《신당서》를 참조한 것이다.
나당 연합군이 들이닥치자 의자왕은 대신들을 불러모아 작전회의를 열었지만, 대신들은 멀리서 와서 백제의 지리를 잘 모르는 당병을 먼저 치자는 쪽과 오랫동안 백제와의 전쟁에서 치른 패배로 백제에 대해 은연중 두려움을 품은 신라군부터 먼저 치자는 쪽으로 나뉘어 팽팽하게 맞섰다.[29] 이 기록은 나·당 연합군의 침공이라는 국난을 눈앞에 둔 상황에서도 국론이 제대로 통일되지 못해 우왕좌왕하는 백제 조정의 모습을 그린 것으로 오랫동안 해석되어 왔지만, 사실 적이 쳐들어오는 와중에 여는 회의인 만큼 그에 맞설 전략을 논의하는 자리인데, 여러 사람을 모아놓고 의견을 듣다 보면 다양한 의견이 제시되고 그것이 쉽게 통일되지 못해 싸우는 것은 당연한 일로, 기록을 보면 그들 개인의 사리사욕 때문에 전혀 타당성이 없는 전략을 제시해놓고 고집을 부린 것이다.
우선 의직의 경우 멀리서 바다를 건너와 지친 상태의 당병을 치자는 것이 그의 전략의 핵심인데, 무모하기는 하지만 성공만 한다면 나·당 연합군의 주력인 10만 이상의 당병을 꺾어놓아 앞으로의 전쟁에서 백제가 우세할 수 있다는 기대를 얻어 사기를 진작시키는 효과를 거둘 수 있다. 당과 백제의 병력 차이를 감안하더라도 백제가 당에 비해 훨씬 수적으로 열세라 당병을 모두 막아내기엔 힘이 부친다는 지적이 있지만, 몇십 척의 소수 함대도 아니고 2천 척에 달하는 대함대가 해안을 따라 이동해온다면[30] 해안에 감시 초소 몇 개만 설치해도 그 이동상황을 일일이 파악해, 상륙에 대비할 시간을 벌 수 있다. 무엇보다 상륙 과정에서 서해안의 개펄과 모래밭 등을 지나야 하는 당병으로서는 운신의 폭이 제한될 수밖에 없으며, 상륙하는 동안에는 별다른 방어구도 갖추지 못하고 거의 일방적으로 방어측의 쇠뇌와 화살 공격에 노출될 수밖에 없다. 즉 상륙해오는 공격측이 가장 취약해질 수밖에 없는, 상륙이 개시되어 교두보를 확보할 때까지의 타이밍만 노리면 백제로서는 상당한 전과를 노릴 수 있다.
하지만 적의 함대의 동향을 파악했다고는 해도 상륙 부대가 방어선을 우회하여 전혀 엉뚱한 곳에 상륙하는 곳까지는 막을 수 없다는 점에서 이 전략은 한계를 보인다.(실제로 당병은 백제군의 방어선을 우회하여 상륙했다.) 당병의 상륙 자체를 막는다는 의직의 전략을 보완하기 위한 목적이 아니더라도 당병이 가지고 있는 기본적인 약점 즉 보급의 약점을 노릴 수 있는 다른 전략이 요구되는데, 여기서 상영이 주장한 전략의 목적을 찾을 수 있다. 일단 상륙에 성공한다고 해도 당병의 주요 공격목표인 사비성을 함락시키는 데는 시간이 소요될 것이므로, 사비성이 버틸 때까지 버티는 동안 일부 부대를 움직여 당병의 보급 즉 신라병의 움직임을 차단하자는 것이 상영의 전략이었다. 보급은 일단 전적으로 신라의 몫이었고, 한반도 지리에 어두운 당병이 백제 땅을 통과하면서 신라 땅에서 물자를 나르는 데에도 난점이 많았다. 신라병만 격파하면 당군에 대한 보급을 원천적으로 차단할 수 있고, 굳이 싸울 필요도 없이 농성하면서 당군이 알아서 철수할 때까지 기다리면 되는 것이다. 더욱이 '신라 사람은 예전에 우리에게 여러 번 패해서 우리를 보면 일단은 겁부터 먹는다'고 한 상영의 주장도, 10만에 달하는 당군과 맞서는 것보다는 차라리 전투 경험이 있는 상대인 신라와 싸우는 것이 심적으로도 부담이 적다는 점에서 일리가 있다.
다시, 왕은 고마미지현에서 귀양살이하고 있던 흥수(興首)에게 사신을 보내 계책을 묻자 흥수는 성충과 같은 계책을 일러주었고, 이 계책은 흥수를 시기하던 간신들에 의해 결국 채택되지 못하였다. [31] 보통 이것은 백제가 백강과 탄현이라는 최적의 요충지, 외적의 침입을 막을 수 있는 천연의 요새를 가지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제대로 쓰지 못했고, 그 이유는 자신의 기득권을 뺏길 것을 두려워하고 쫓겨난 신하가 조정에 복귀하는 것에 시기심을 품은 간신들의 몽니 때문이었으며 결국 이러한 지도층의 한심한 생각 때문에 백제는 멸망해버리고 말았다는 내용으로 해석되어 왔다. 다만 오늘날에는 어느 쪽의 계책이라 해도 모두 그들 나름의 근거와 허점이 존재했으며, 백제는 어느 한쪽의 의견을 버리고 우왕좌왕한 것이 아니라 여러 주장들을 절충해 작전을 세웠던 점이 지적되고 있다. 그리고 이 기록에서는 황산벌 전투 이후 백제군이 다시 웅진강(백강)으로 투입되었음을 시사하는 대목이 있다. 더구나 이는 소정방의 당병이 상륙한 뒤가 아니라 상륙하기 전의 일이라는 점은 '백강 지역의 방어를 소홀히 했다'는 기존의 해석과는 서로 맞지 않는다. 따라서 백제 지배층의 분열로 요충지인 백강을 막지 못했다는 내용은 사실과 다른 것으로 봐야 한다. 더욱이 백제 지도부는 백강과 탄현을 주요 요충지로 지목하고 이곳을 중심으로 방어 전략을 짜야 한다는 성충·흥수의 주장을 아주 간과하지는 않았음을 확인할 수 있다. '조롱 속의 닭을 죽이고 그물에 걸린 물고기를 잡듯' 백제 지도부는 백강과 탄현의 험한 지형지물을 이용해, 나·당 연합군이 이곳을 모두 통과하기 전에 가두어 놓고 처치하자는 것이었는데, 성충이나 흥수의 주장과 비교하면 이곳을 나·당 연합군이 통과하기 전에 처음부터 진입 자체를 막는 '원천봉쇄'를 주장했던 점이 서로 다를 뿐, 이곳을 적이 '지나가지 못하게' 한다는 발상의 기본 베이스는 다르지 않다.
무작정 백강이나 탄현이라는 요충지를 믿을 수만도 없다는 딜레마도 있다. 후대의 사례이기는 하지만 병자호란 때의 청(淸)의 조선 침공 루트에서도 보이듯, 주도권을 가지고 있는 공격측에서 수비측이 기껏 형성한 방어 라인을 우회하여 치는 경우도 상정해야 하며, 만약(성충이나 흥수의 주장대로) 백제군이 탄현에 진을 쳤다 해도 신라측에서 탄현이라는 요충지가 백제에게 가져다주는 강점과 약점을 간과했을 리가 없으며, 실제로 탄현을 거치지 않고 우회할 경우에는 오히려 탄현의 험한 지형 때문에 그곳에 병력을 배치했다가 빼내는 시간에 신라가 거의 '무저항' 상태로 수도 사비성까지 진군할 수 있다는 지적이 있다.(더욱이 신라군은 백제의 전략 거점을 공격해 점령하는 것이 아니라 당군에게 군량을 보급하는 것이 주요 목적이었으므로 백제와 굳이 험한 전투를 벌여야 할 이유가 없었다) 현대전과는 달리 전체 전선에 병력을 배치하여 적군의 모든 진격루트를 봉쇄하는 식으로 1차 저지를 하는 것이 불가능한 고대의 전투양상에서 백제로서는 방어거점들을 이리저리 우회해 빠져나갈 신라군을 마냥 백강이나 탄현 같은 요충지 한 군데만 지키면서 기다리는 것보다는 신라군의 주력을 포착하는 즉시 그 방면으로 달려가 방어하는 것이 훨씬 합리적이고 현실적인 판단인 것이다. 백강의 경우도 마찬가지로 정확히 백강의 어느 지점에 상륙할 것이냐를 예측할 수 없다는 점에서 맹점이 있다.
수도 함락과 항복
의자왕은 황산벌 전투에서 계백(階伯)에게 5천의 군사를 주어 막게 했지만, 백제군의 열 배나 되는 신라군의 수적 열세를 극복하지 못하고 결국 계백은 죽고 그의 군사는 전멸하였다. 백강 어귀에서 당군의 상륙을 저지하려던 백제군은 대패하였다. [32]
마침내 8월 22일(음력 7월 11일)에 신라군과 합류한 당병은 백제의 수도 사비성(泗沘城)을 향해 육박해왔다.
“其大將禰植 又將義慈來降
그 대장 예식이 의자왕을 거느리고 항복하게 하였다. ”
—《구당서》, 〈소정방전〉
“其將禰植 與義慈降
그 장군 예식이 의자왕과 함께 항복하였다. ”
—《신당서》, 〈소정방전〉
사비성 부근에서도 결전이 벌어졌으나 백제군 1만이 전사하며 대패하고[33] 수도인 사비성이 포위되자, 백제는 군사작전을 포기하고 대신 제사에 쓰는 소와 많은 음식들을 당군 진영에 보내기도 하고, 백제 태자가 직접 소정방에게 나아가 철군해줄 것을 요청하는 등의 외교전으로 선회했지만 모두 실패했다. 결국 왕은 태자 융과 함께 8월 24일(음력 7월 13일)에 웅진성(熊津城)으로 피난했으며, [34] 사비에는 둘째 아들 태가 남아 왕을 자처하며 항전하다가 곧 항복했다. 그 후 8월 29일(음력 7월 18일)에 의자왕도 항복했다. [35]
중앙군의 전멸과 왕성이 무너지며 거의 모든 왕족과 의자왕의 측근 최고 지배층들이 모조리 포로가 되자 가망없다고 여기고 의자왕을 배신한 웅진성 방령 예식(禰植, 예식진祢寔進)에 의해 항복이 진행되었다는 견해도 있지만, 《삼국사기》 태종무열왕본기는 의자왕이 태자 및 웅진방령군을 거느리고 스스로 웅진성을 나와 항복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의자왕이 너무 쉽게 항복한 것에 대해서는 오늘날 의자왕에 대한 재조명 차원에서 여러 가지 분석이 시도되었는데, 의자왕의 성격으로 미루어보아 이미 패배한 전쟁을 계속한다는 것은 백성들의 희생만 커지게 만든다고 생각했을 것이라는 설이 있다. 당은 이후 부여융을 웅진도독, 신라왕을 계림주대도독으로 삼아 동맹을 맺게 하는 의식을 웅진의 취리산에서 행한 바 있다. 즉, 당은 동아시아 국제질서를 회복하고자 했던 것이라고 보는 견해도 있다.[36] 당으로서는 백제에 친당정권을 수립하여 고구려 정벌을 위한 전초기지로서 활용하고자 했으며, 이에 당군의 철수를 담보로 당과의 새로운 관계를 닦고 국가의 활로를 트고자 했던 것이 의자왕의 본래 목적이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당은 이후 의자왕에게 전승축하연에서 술을 치게 하기도 하고, 군사를 풀어 사비도성을 크게 약탈하여 젊고 건장한 백제인들을 살육하면서 백제 땅에 설치한 웅진도독부를 통해 백제 땅을 당의 치하에 두고 직접지배하려 했다. 이것은 백제인들을 자극해 3년에 걸친 백제흥복운동의 불길을 지핀 계기가 되었다.
그 후 왕자들과 대신 88명을 포함하여 백성 1만 2천 명과 함께 당의 낙양으로 압송되었고, 11월 1일에 낙양의 조당에 포로로서 바쳐져 당 고종 앞에서 문책을 들어야 했다.(측천문루 앞에서 이루어진 이 자리에서 고종은 의자왕과 태자, 백제의 여러 신료들을 꾸짖은 뒤 용서했는데, 이것은 그들의 죄를 사함으로써 당의 신민으로 받아들이는 의례 절차이기도 했다.) 의자왕은 그 해에 병으로 죽었고, 금자광록대부(金紫光錄大夫)·위위경(衛尉卿)의 벼슬을 추증받고 낙양의 북망산에 손호(孫皓)·진숙보(陳叔寶) 옆에 묻혔다.[37][38] 이때 당 고종은 그의 장례에 백제에서 끌려온 옛 신하들이 참석하는 것을 허락했다고 전한다.
낙화암과 3천 궁녀
백제 멸망 당시 의자왕이 술과 여흥에 빠져 국사(國事)를 돌보지 않아 나라를 멸망시켰다는 상징적 존재로 낙화암에서 투신한 3천 궁녀가 거론되곤 하지만, 지도층의 분열과 학민자(虐民者)의 최후를 역사의 필연성으로 기술했던 《삼국사기》에는 의자왕이 마지막까지 군대를 보내어 싸웠다고 하고 있으며 술과 여흥에 빠졌다는 이야기는 없다.
낙화암에 대해 언급한 최초의 기록은 일연이 쓴 《삼국유사》 권1 태종춘추공조인데, "궁녀들이 왕포암(王浦巖)에 올라 물로 뛰어들어 자살하여 타사암(墮死巖)이라는 이름이 붙여졌다."라고 쓰여 있다. 이후 고려 시대에 낙화암이라는 이름이 나오고, 안정복의 《동사강목》 권2에는 "여러 비빈(諸姬)"이라고 표현하고 있다.
3천 궁녀를 맨 처음 언급한 글은 윤승한(尹昇漢)이 지은 소설 《김유신》(野談社, 1941년)이고, 최초의 공식 기록은 이홍직(李弘稙)이 쓴 《국사대사전》(지문각, 1962년)의 "낙화암" 조항이다.[39]
가계
부왕 : 무왕(武王)
모후 : 선화공주(善花公主)
동생 : 부여교기(扶餘翹岐)
사촌동생 : 귀실복신(鬼室福信)
왕후 : 군대부인(君大夫人) 은고(恩古)
아들 : 부여효(扶餘孝)
손자 : 부여문사(扶餘文思)
아들 : 부여태(扶餘泰)
아들 : 부여융(扶餘隆)
아들 : 부여궁(扶餘躬) 의자왕의 서자
아들 : 부여충(扶餘忠) 의자왕의 서자
아들 : 임정태자(臨政太子)
손자 : 부여문선(扶餘文宣)
손자 : 부여덕장(扶餘德璋)
증손자 : 부여경(扶餘敬)
증손녀 : 부여태비(扶餘太妃)[37]
외고손 : 이거, 이승소, 이승희, 이승준, 이승질[40]
아들 : 부여연(扶餘演)
아들 : 부여풍(扶餘豊, 부여풍장扶餘豊璋)
아들 : 부여용(扶餘勇, 부여선광扶餘善廣)
딸 : 부여계선(扶餘契宣)
관련 작품
드라마
《삼국기》(KBS, 1992년~1993년, 배우:길용우)
《연개소문》(SBS, 2006년~2007년, 배우:문회원)
《계백》(MBC, 2011년~2011년, 배우:조재현, 노영학, 최원홍)
《대왕의 꿈》(KBS, 2012년~2013년, 배우:이진우)
영화
《황산벌》2003년, 배우 : 오지명
주석
[1] 김부식 (1145). 〈본기 권28 의자왕〉, 《삼국사기》 “義慈王 武王之元子 雄勇膽決 武王在位三十三年 立爲太子 事親以孝 與兄弟以友 時號海東曾子(의자왕(義慈王)은 무왕의 맏아들이다. 웅걸차고 용감하였으며 담력과 결단력이 있었다. 무왕이 재위 33년(632)에 태자로 삼았다. 어버이를 효성으로 섬기고 형제와는 우애가 있어서 당시에 해동증자(海東曾子)라고 불렀다. )”
[2] 종이비행기 편집부 (2011). 《너희들은 무엇을 외칠래》. 롯데백화점, 106~107쪽. ISBN 9788996235019 “아들 부여융의 묘지(墓誌)에도 의자왕을 가리켜 ‘과단성이 있고 침착하고 사려 깊어서 그 명성이 높았다.’라고 하였다.”
[3] 종이비행기 편집부 (2011). 《너희들은 무엇을 외칠래》. 롯데백화점, 106~107쪽. ISBN 9788996235019 “최근 일부 학자들은 의자왕을 ‘개혁 군주’로 재평가하고 있다.”
[4] (720) 〈卷第廿四 皇極天皇〉, 《일본서기》 “元年...乙酉、百濟使人大仁阿曇連比羅夫、從筑紫國、乘驛馬來言、百濟國、聞天皇崩、奉遣弔使。臣隨弔使、共到筑紫。而臣望仕於葬。故先獨來也。然其國者、今大亂矣。二月丁亥朔戊子、遣阿曇山背連比良夫・草壁吉士磐金・倭漢書直縣、遣百濟弔使所、問彼消息。弔使報言、百濟國主謂臣言、塞上恆作惡之。請付還使、天朝不許。百濟弔使傔人等言、去年十一月、大佐平智積卒。又百濟使人、擲崐崘使於海裏。今年正月、國主母薨。又弟王子兒翹岐及其母妹女子四人、內佐平岐味、有高名之人卌餘、被放於嶋。”
[5] 실제로 고교쿠 원년은 641년에 해당되지만, 《삼국사기》에 따르면 의자왕의 즉위는 642년에 있었다. 《삼국사기》와 《일본서기》의 기록은 통상 하나의 사건이 일어난 시점을 두고 1,2년 정도의 차이가 나는 경우가 많으며, 이 경우에는 《일본서기》의 기록을 《삼국사기》의 기년에 맞추어 수정한다.
[6] 이덕일 (2003). 《이덕일의 여인열전》. 김영사, 193쪽. ISBN 8934912375 “‘국왕의 어머니’, 즉 선화공주가 죽자마자 의자왕은 기다렸다는 듯이 동생을 포함한 대대적인 숙청을 단행한 것이다. 이는 의자왕이 왜 무왕 재위 33년째에야 태자로 책봉되었는지를 짐작하게 해 주는 구절이다. 의자왕이 모후 선화공주와 상당한 갈등관계에 있었음을 뜻하는 것이다.”
[7] (720) 〈卷第廿四 皇極天皇〉, 《일본서기》 “元年...夏四月丙戌朔癸巳、太使翹岐、將其從者拜朝。”
[8] 김부식 (1145). 〈본기 권28 의자왕〉, 《삼국사기》 “武王薨 太子嗣位 太宗遣祠部郞中鄭文表 冊命爲柱國帶方郡王百濟王 秋八月 遣使入唐表謝 兼獻方物(무왕이 죽자 태자가 왕위를 이었다. [당나라] 태종(太宗)은 사부랑중(祠部郞中) 정문표(鄭文表)를 보내 왕을 책봉하여 주국(柱國) 대방군왕(帶方郡王) 백제왕(百濟王)으로 삼았다. 가을 8월에 사신을 당나라에 보내 감사의 뜻을 표하고 아울러 토산물을 바쳤다. )”
[9] 김부식 (1145). 〈본기 권28 의자왕〉, 《삼국사기》 “二年 ... 二月 王巡撫州郡 慮囚除死罪 皆原之 ... (2년(642) ... 2월에 왕은 주·군(州郡)을 순행하면서 위무하고 죄수를 살펴서 사형할 죄[死罪] 이외에는 모두 용서해 주었다. ...)”
[10] (720) 〈卷第廿四 皇極天皇〉, 《일본서기》 “元年...秋七月甲寅朔壬戌、客星入月。乙亥、饗百濟使人大佐平智積等於朝。”
[11] 실제 사이메이 천황의 원년 기사를 보면 정월 갑술의 즉위 기록에서부터 4월 말까지의 기록이 비어 있다. 사이메이 원년인 655년 1월 14일의 간지는 을유로서 기록과 일치한다. 다만 2월 무자일의 간지는 655년 2월중의 달력에서 확인하기 어렵다.
[12] 이 경우 『사택지적비』가 654년 정월에 세워진 것과 《일본서기》황극기에서 교기 등이 사신으로서 왜국을 방문하고 있는 것과 모순되지 않고 이어진다. 새상의 환국을 요구한 것에 대해서도 앞서의 정변에 관련해 그의 귀국을 요구한 것이며, 왜 조정이 송환을 막고 있는 상황이므로 고교쿠 원년이 아닌 사이메이 원년으로 기록을 옮길 때 전후 내용이 매끄럽게 이어지게 된다.
[13] 김부식 (1145). 〈본기 권28 의자왕〉, 《삼국사기》 “二年 ... 秋七月 王親帥兵侵新羅 下獼猴等四十餘城 八月 遣將軍允忠 領兵一萬攻新羅大耶城 城主品釋與妻子出降 允忠盡殺之 斬其首 傳之王都 生獲男女一千餘人 分居國西州縣 留兵守其城 王賞允忠功 馬二十匹·穀一千石 (2년(642) ... 가을 7월에 왕은 친히 군사를 거느리고 신라를 쳐서 미후성(獼猴城) 등 40여 성을 함락하였다. 8월에 장군 윤충(允忠)을 보내 군사 1만 명을 거느리고 신라의 대야성(大耶城)을 공격하였다. 성주 품석(品石)이 처자와 함께 나와 항복하자 윤충은 모두 죽이고 그 머리를 베어 서울[王都]에 전달하고, 남녀 1천여 명을 사로잡아 나라 서쪽의 주·현(州縣)에 나누어 살게 하였다. [그리고] 군사를 남겨 두어 그 성을 지키게 하였다. 왕은 윤충의 공로를 표창하여 말 20필과 곡식 1천 섬을 주었다. )”
[14] 김부식 (1145). 〈본기 권28 의자왕〉, 《삼국사기》 “四年 ... 秋九月 新羅將軍庾信領兵來侵 取七城 (4년(644) ...가을 9월에 신라 장군 유신(庾信)이 군사를 거느리고 쳐들어 와서 일곱 성을 빼앗았다. )”
[15] 김부식 (1145). 〈본기 권28 의자왕〉, 《삼국사기》 “五年 夏五月 王聞太宗親征高句麗 徵兵新羅 乘其間 襲取新羅七城 新羅遣將軍庾信來侵 (5년(645) 여름 5월에 왕은 [당나라] 태종이 친히 고구려를 정벌하면서 신라에서 군사를 징발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그 틈을 타서 신라의 일곱 성을 습격하여 빼앗았다. 신라는 장군 유신을 보내 쳐들어 왔다. )”
[16] 김부식 (1145). 〈본기 권28 의자왕〉, 《삼국사기》 “七年 冬十月 將軍義直帥步騎三千 進屯新羅茂山城下 分兵攻甘勿·桐岑二城 新羅將軍庾信親勵士卒 決死而戰 大破之 義直匹馬而還 (7년(647) 겨울 10월에 장군 의직(義直)이 보병과 기병[步騎] 3천명을 거느리고 신라의 무산성(茂山城) 아래로 나아가 주둔하고, 군사를 나누어 감물성(甘勿城)과 동잠성(桐岑城) 두 성을 공격하였다. 신라 장군 유신이 친히 군사를 격려하여 죽기를 결심하고 싸워 크게 깨뜨리니 의직은 한 필의 말을 타고 혼자 돌아왔다. )”
[17] 김부식 (1145). 〈본기 권28 의자왕〉, 《삼국사기》 “八年 春三月 義直襲取新羅西鄙腰車等一十餘城 夏四月 進軍於玉門谷 新羅將軍庾信逆之 再戰大敗之 (8년(648) 봄 3월에 의직이 신라의 서쪽 변방의 요거성(腰車城) 등 10여 성을 습격하여 빼앗았다. 여름 4월에 옥문곡(玉門谷)으로 군사를 나아가게 하니 신라 장군 유신이 맞아 두번 싸워 크게 이겼다. )”
[18] 김부식 (1145). 〈본기 권28 의자왕〉, 《삼국사기》 “九年 秋八月 王遣左將殷相 帥精兵七千 攻取新羅石吐等七城 新羅將庾信·陳春·天存·竹旨等逆擊之 不利收散卒 屯於道薩城下再戰 我軍敗北... (9년(649) 가을 8월에 왕은 좌장(左將) 은상(殷相)을 보내 정예 군사 7천 명을 거느리고 신라의 석토성(石吐城) 등 일곱 성을 공격하여 빼앗았다. 신라 장군 유신(庾信)· 진춘(陳春)· 천존(天存)·죽지(竹旨) 등이 이를 맞아 치자, [은상은] 이롭지 못하므로 흩어진 군사들을 수습하여 도살성(道薩城) 아래에 진을 치고 다시 싸웠으나 우리 군사가 패배하였다....)”
[19] 김부식 (1145). 〈본기 권28 의자왕〉, 《삼국사기》 “十一年 遣使入唐朝貢 使還 高宗降璽書 諭王曰 海東三國 開基日久 並列疆界 地實犬牙 近代已來 遂構嫌隙 戰爭交起 略無寧歲 遂令三韓之氓 命懸刀俎 築戈肆憤 朝夕相仍 朕代天理物 載深矜憫 去歲高句麗·新羅等使並來入朝 朕命釋玆讎怨 更敦款睦 新羅使金法敏奏言 高句麗·百濟脣齒相依 竟擧干戈 侵逼交至 大城重鎭並爲百濟所倂 疆宇日蹙 威力並謝 乞詔百濟 令歸所侵之城 若不奉詔 卽自興兵打取 但得古地 卽請交和’ 朕以其言旣順 不可不許 昔齊桓列土諸侯 尙存亡國 況朕萬國之主 豈可不恤危藩 王所兼新羅之城 並宜還其本國 新羅所獲百濟俘虜 亦遣還王 然後解患釋紛 韜戈偃革 百姓獲息肩之願 三蕃無戰爭之勞 比夫流血邊亭 積屍疆埸 耕織並廢 士女無聊 豈可同年而語哉 王若不從進止 朕已依 法敏所請 任其與王決戰 亦令約束高句麗 不許遠相救恤 高句麗若不承命 卽令契丹諸藩度遼 深入抄掠 王可深思朕言 自求多福 審圖良策 無貽後悔 (11년(651)에 사신을 당나라에 보내 조공하였다. 사신이 돌아올 때 [당나라] 고종(高宗)이 조서[璽書]를 내려 왕을 타일러 말하였다.『해동(海東)의 삼국이 나라를 세운지 오래며, 경계를 나란히 하나 땅은 실로 들쭉날쭉하다[犬牙]. 근대 이래로 마침내 의혹과 틈새가 생겨 전쟁이 번갈아 일어나서 거의 편안한 해가 없었고, 마침내 삼한(三韓)의 백성으로 하여금 목숨을 칼과 도마[刀俎] 위에 올려놓게 하고, 무기를 갖고 분풀이를 하는 것이 아침 저녁으로 서로 이어졌다. 짐은 하늘을 대신하여 만물을 다스리므로 심히 긍휼히 여기고 민망해 하는 바이다. 지난해에 고구려와 신라 등의 사신이 함께 와서 조공하자 짐은 이러한 원한을 풀고 다시 화목을 돈독히 하도록 명령하였다. 신라 사신 김법민(金法敏)이 상주하여 아뢰었다. ‘고구려와 백제가 입술과 이빨[脣齒]과 같이 서로 의지하여 마침내 무기를 들고 번갈아 침략하니 큰 성과 중요한 진(鎭)들이 모두 백제에게 병합되어 영토는 날로 줄어들고 위력도 아울러 쇠약해지게 되었습니다. 바라건대 백제에 조서를 내려 침략한 성을 돌려주게 하소서. 만약 조서를 받들지 않으면 곧 스스로 군대를 일으켜 쳐서 빼앗을 것이되 다만 옛 땅을 얻으면 곧 서로 화호를 청할 것입니다.’ 짐은 그 말이 순리에 맞으므로 허락하지 않을 수 없었다. 옛날 제(齊)나라 환공(桓公)은 제후의 반열에 있으면서도 오히려 망한 나라를 존속시켰는데 하물며 짐은 만국의 임금으로 어찌 위기에 처한 번국(藩國)을 구휼하지 않으리요. 왕이 겸병한 신라의 성은 모두 마땅히 그 본국에 돌려줄 것이며 신라도 사로잡은 백제의 포로들을 또한 왕에게 돌려보내야 할 것이다. 그러한 연후에 환난을 풀고 분규를 해결하고, 무기를 거두어들이고 전쟁을 그치면 백성은 짐을 내려 어깨를 쉬는 소원[息肩之願]을 이루게 되고 세 번국들은 전쟁의 수고로움이 없을 것이다. [이는] 저 변경의 부대에서 피를 흘리고 강토에 시체가 쌓이고 농사와 길쌈이 모두 폐(廢)하게 되여 사녀(士女)가 의지할 것이 없게 된 것과 어찌 같은 상황이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 왕이 만약 나아가고 머무는 것[進止]을 따르지 않는다면 짐은 이미 법민(法敏)이 청한 바대로 왕과 승부를 결정하도록[決戰] 내맡길 것이고, 또 고구려와 약속하여 멀리서 서로 구원하지 못하게 할 것이다. 고구려가 만약 명령을 받들지 않으면 즉시 거란(契丹)과 여러 번국(蕃國)들로 하여금 요하(遼河)를 건너 깊이 들어가 노략질하게 할 것이다. 왕은 짐의 말을 깊이 생각하여 스스로 많은 복을 구할 것이며, 좋은 계책을 살펴 도모하여 후회함이 없도록 하라!』 )”
[20] 김부식 (1145). 〈본기 권28 의자왕〉, 《삼국사기》 “十三年 ...秋八月 王與倭國通好 (13년(653) ... 가을 8월에 왕은 왜(倭)와 우호를 통하였다. )”
[21] 김부식 (1145). 〈본기 권28 의자왕〉, 《삼국사기》 “十五年 ... 八月 王與高句麗·靺鞨攻破新羅三十餘城 新羅王金春秋遣使朝唐 表稱 百濟與高句麗·靺鞨侵我北界 沒三十餘城 (15년(655) ... 8월에 왕은 고구려와 말갈과 더불어 신라의 30여 성을 공격하여 깨뜨렸다. 신라 왕 김춘추(金春秋)는 당나라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고 표를 올려 『백제가 고구려와 말갈과 함께 우리의 북쪽 경계를 쳐들어 와서 30여 성을 함락시켰다.』고 하였다.”
[22] 김부식 (1145). 〈본기 권28 의자왕〉, 《삼국사기》 “十九年 ... 夏四月 ... 遣將侵攻新羅獨山•桐岑二城 ...(19년(659) ... 여름 4월에 ... 장수를 보내 신라의 독산성(獨山城)과 동잠성(桐岑城)의 두 성을 쳤다.... )”
[23] 김부식 (1145). 〈본기 권28 의자왕〉, 《삼국사기》 “十五年 春二月 修太子宮極侈麗 立望海亭於王宮南 (15년(655) 봄 2월에 태자궁(太子宮)을 극히 사치스럽고 화려하게 수리하였다. 왕궁 남쪽에 망해정(望海亭)을 세웠다. ... )”
[24] 김부식 (1145). 〈본기 권28 의자왕〉, 《삼국사기》 “十六年 春三月 王與宮人淫荒耽樂 飮酒不止 佐平成忠或云淨忠極諫 王怒囚之獄中 由是無敢言者 成忠瘐死 臨終上書曰 忠臣死不忘君 願一言而死 臣常觀時察變 必有兵革之事 凡用兵 必審擇其地 處上流以延敵 然後可以保全 若異國兵來 陸路不使過沈峴 水軍不使入伎伐浦之岸 擧其險隘以禦之 然後可也 王不省焉(16년(656) 봄 3월에 왕은 궁녀와 더불어 주색에 빠지고 마음껏 즐기며[淫荒耽樂] 술마시기를 그치지 아니하였다. 좌평성충(成忠)<혹은 정충(淨忠)이라고도 하였다.>이 극력 간언하자 왕은 분노하여 그를 옥에 가두었다. 이로 말미암아 감히 간언하는 자가 없었다. 성충이 옥중에서 굶어 죽었는데[瘐死] 죽음에 임하여 글을 올려 말하였다. “충신은 죽어도 임금을 잊지 않는 것이니 원컨대 한 말씀 올리고 죽겠습니다. 신이 늘 때[時]를 보고 변화를 살폈는데 틀림없이 전쟁이 있을 것입니다. 무릇 군사를 쓸 때에는 반드시 그 지리를 살펴 택할 것이니, [강의] 상류에 처하여 적을 맞이한 연후에야 가히 보전할 수 있을 것입니다. 만약 다른 나라의 군사가 오면 육로로는 침현(沈峴)을 넘지 못하게 하고, 수군은 기벌포(伎伐浦) 언덕에 들어오지 못하게 하고서 험난하고 길이 좁은 곳[險隘]에 의거하여 적을 막은 연후에야 가할 것입니다.”왕은 살펴보지 않았다. )”
[25] 김부식 (1145). 〈본기 권28 의자왕〉, 《삼국사기》 “十七年 春正月 拜王庶子四十一人爲佐平 各賜食邑 (17년(657) 봄 정월에 왕의 서자(庶子) 41명을 좌평으로 삼고 각각에게 식읍(食邑)을 주었다. )”
[26] 김부식 (1145). 〈본기 권28 의자왕〉, 《삼국사기》 “十九年 春二月 衆狐入宮中 一白狐坐上佐平書案 夏四月 太子宮雌雞與小雀交 ... 五月 王都西南泗沘河 大魚出死 長三丈 秋八月 有女屍浮生草津 長十八尺 九月 宮中槐樹鳴 如人哭聲 夜鬼哭於宮南路(19년(659) 봄 2월에 여러 마리의 여우가 궁궐 안으로 들어왔는데 흰 여우 한 마리가 상좌평(上佐平)의 책상[書案] 위에 앉았다. 여름 4월에 태자궁의 암탉이 참새와 교미했다. ...5월에 서울[王都] 서남쪽의 사비하(泗沘河)에 큰 물고기가 나와 죽었는데 길이가 세 장(丈)이었다. 가을 8월에 여자의 시체가 생초진(生草津)에 떠올랐는데 길이가 18자이었다. 9월에 궁중의 홰나무[槐樹]가 울었는데 사람이 곡하는 소리 같았다. 밤에는 귀신이 궁궐 남쪽 길에서 울었다. )”
[27] 김부식 (1145). 〈본기 권28 의자왕〉, 《삼국사기》 “二十年 春二月 王都井水血色 西海濱小魚出死 百姓食之不能盡 泗沘河水赤如血色 夏四月 蝦蟆數萬集於樹上 王都市人無故驚走 如有捕捉者 僵仆而死百餘人 亡失財物不可數 五月 風雨暴至 震天王•道讓二寺塔 又震白石寺講堂 玄雲如龍 東西相鬪於空中 六月 王興寺衆僧皆見 若有船 楫隨大水入寺門 有一犬 狀如野鹿 自西至泗沘河岸 向王宮吠之 俄而不知所去 王都羣犬集於路上 或吠或哭 移時卽散 有一鬼入宮中 大呼 百濟亡 百濟亡 卽入地 王怪之 使人掘地 深三尺許有一龜 其背有文曰 百濟同月輪 新羅如月新 王問之 巫者曰 同月輪者滿也 滿則虧 如月新者未滿也 未滿則漸盈 王怒殺之 或曰 同月輪者盛也 如月新者微也 意者國家盛 而新羅寖微者乎 王喜 (20년(660) 봄 2월에 서울[王都]의 우물물이 핏빛이 되었다. 서해 바닷가에서 조그마한 물고기들이 나와 죽었는데 백성들이 다 먹을 수가 없었다. 사비하(泗沘河)의 물의 붉기가 핏빛과 같았다. 여름 4월에 두꺼비와 개구리 수만 마리가 나무 위에 모였다. 서울의 저자 사람들[市人]이 까닭없이 놀라 달아났는데 마치 붙잡으려는 사람이 있는 것처럼 하여 넘어져 죽은 자가 100여 명이나 되었고 재물을 잃은 것은 헤아릴 수 없었다. 5월에 바람과 비가 갑자기 불어 닥쳤고 천왕사(天王寺)와 도양사(道讓寺) 두 절의 탑에 벼락이 쳤으며, 또 백석사(白石寺) 강당에도 벼락이 쳤다. 검은 구름이 용과 같이 공중에서 동과 서로 [나뉘어] 서로 싸웠다. 6월에 왕흥사(王興寺)의 여러 승려들 모두가 배의 돛과 같은 것이 큰물을 따라 절 문으로 들어오는 것을 보았다. 야생의 사슴과 같은 모양의 개 한 마리가 서쪽으로부터 사비하(泗沘河)의 언덕에 이르러 왕궁을 향하여 짖더니 잠깐 사이에 간 곳을 알 수 없었다. 서울[王都]의 여러 개들이 길가에 모여 혹은 짖고 혹은 울고 하다가 얼마 후에 곧 흩어졌다. 귀신 하나가 궁궐 안으로 들어와 “백제가 망한다. 백제가 망한다.”고 크게 외치고는 곧 땅으로 들어갔다. 왕이 괴이히 여겨 사람을 시켜 땅을 파보게 했더니 세 자[尺] 가량의 깊이에서 한 마리의 거북이 있었다. 그 등에 글이 씌어 있었는데 『백제는 보름달과 같고 신라는 초생달과 같다.』라고 하였다. 왕이 이를 물으니 무당[巫]이 말하였다. “둥근달과 같다는 것은 가득 찼다는 것입니다. 가득 차면 기울 것입니다. 초생달과 같다는 것은 아직 차지 않은 것입니다. 차지 않으면 점점 가득 차게 될 것입니다.” 왕이 노하여 그를 죽였다. 어느 사람이 말하기를, “보름달과 같다는 것은 왕성하다는 것이요, 초생달과 같다는 것은 미약하다는 것입니다. 생각하기로는 우리 나라는 왕성하게 되고 신라는 점차 미약해진다는 뜻이 아닐까 합니다.” 왕이 기뻐하였다. )”
[28] 김부식 (1145). 〈본기 권28 의자왕〉, 《삼국사기》 “六月… 高宗詔 左武衛大將軍蘇定方爲神丘道行軍大摠管 率左驍衛將軍劉伯英•右武衛將軍馮士貴• 左驍衛將軍龐孝公 統兵十三萬以來征 兼以新羅王金春秋 爲嵎夷道行軍摠管 將其國兵 與之合勢 蘇定方引軍 自城山濟海 至國西德物島 新羅王遣將軍金庾信 領精兵五萬以赴之 ([당나라] 고종(高宗)이 조서를 내려 좌무위대장군(左武衛大將軍) 소정방(蘇定方)을 신구도행군대총관(神丘道行軍大摠管)으로 삼아 좌효위장군(左驍衛將軍) 유백영(劉伯英)•우무위장군(右武衛將軍) 풍사귀(馮士貴)•좌효위장군(左驍衛將軍) 방효공(龐孝公)을 거느리고 군사 13만 명을 통솔하여 와서 정복하게 하고, 아울러 신라 왕 김춘추(金春秋)를 우이도행군총관(嵎夷道行軍摠管)으로 삼아 그 나라의 군사를 거느리고 [당나라] 군사와 세력을 합하게 하였다. 소정방이 군사를 이끌고 성산(城山)에서 바다를 건너 우리 나라 서쪽의 덕물도(德物島)에 이르렀다. 신라 왕은 장군 김유신을 보내 정예 군사 5만 명을 거느리고 [백제 방면으로] 나아가게 하였다. )”
[29] 김부식 (1145). 〈본기 권28 의자왕〉, 《삼국사기》 “六月…王聞之 會羣臣 問戰守之宜 佐平義直進曰 唐兵遠涉溟海 不習水者在船必困 當其初下陸 士氣未平 急擊之 可以得志 羅人恃大國之援 故有輕我之心 若見唐人失利 則必疑懼 而不敢銳進 故知先與唐人決戰可也 達率常永等曰 不然 唐兵遠來 意欲速戰 其鋒不可當也 羅人前屢見敗於我軍 今望我兵勢 不得不恐 今日之計 宜塞唐人之路 以待其師老 先使偏師擊羅軍 折其銳氣 然後伺其便而合戰 則可得以全軍而保國矣 王猶豫 不知所從 (6월에 … 왕이 이를 듣고 여러 신하들을 모아 싸우는 것이 좋을지, 지키는 것이 좋을지를 물었다. 좌평 의직(義直)이 나와서 말하였다.
“당병(唐兵)은 멀리 바다를 건너왔으므로 물에 익숙지 못한 자는 배 안에서 반드시 지쳤을 것입니다. 처음 육지에 내려서 병사들의 기운이 안정치 못할 때에 급히 치면 뜻을 얻을 수 있습니다. 신라 사람은 대국(大國)의 후원을 믿어 우리를 가벼이 여기는 마음이 있을 것인데, 당병이 불리하게 된 것을 보면 반드시 의심하고 두려워하여 감히 기세 좋게 진격하지는 못할 것입니다. 그러니 먼저 당병과 승부를 결정하는 것이 좋을 줄로 압니다.”
달솔(達率) 상영(常永) 등이 말하였다.
“아닙니다. 당병은 멀리서 와서 빨리 싸울 생각만 하고 있으니 그 예봉(銳鋒)을 감당하지 못할 겁니다. 신라 사람은 전에도 우리 병사에게 여러 번 패한 적도 있으니, 지금 우리 군사의 위세를 바라보면 두려워하지 않을 수 없을 겁니다. 오늘의 계책은 마땅히 당병의 길을 막아 그 군사가 지치기를 기다리면서, 먼저 일부 군사로 신라병을 쳐서 그 예봉을 꺾은 다음에 형편을 봐서 세력을 합쳐 싸우면 군사도 보전하면서 국가도 보전할 수 있습니다.”
왕은 주저하여 어느 쪽의 말을 따라야 할지 알지 못했다. )”
[30] 당시의 항해술은 바다를 가로지르는 원양항해가 아니라 해안을 따라 이동하는 연안항해였다.
[31] 김부식 (1145). 〈본기 권28 의자왕〉, 《삼국사기》 “ 二十年 … 六月… 時佐平興首得罪 流竄古馬彌知之縣 遣人問之曰 事急矣 如之何而可乎 興首曰 唐兵旣衆 師律嚴明 況與新羅共謀掎角 若對陣於平原廣野 勝敗未可知也 白江或云伎伐浦•炭峴或云沈峴 我國之要路也 一夫單槍 萬人莫當 宜簡勇士往守之 使唐兵不得入白江 羅人未得過炭峴 大王重閉固守 待其資粮盡士卒疲 然後奮擊之 破之必矣 於時 大臣等不信曰 興首久在縲紲之中 怨君而不愛國 其言不可用也 莫若使唐兵入白江 沿流而不得方舟 羅軍升炭峴 由徑而不得幷馬 當此之時 縱兵擊之 譬如殺在籠之雞•離網之魚也 王然之 ... (20년(660) 6월…이 때에 좌평 흥수(興首)가 죄를 얻어 고마미지현(古馬彌知縣)에 유배되어 있었다. 사람을 보내 그에게 물었다.
“사태가 위급하니 이를 어쩌면 좋겠느냐?”
흥수가 말하였다.
“당병은 수도 많거니와 군율도 엄하고 분명한데, 더구나 신라와 모의하여 앞뒤로 호응하는 형세를 이루고 있으니, 평탄한 벌판이나 너른 들에서 마주 보고 진을 친다면 승패를 알 수 없을 것입니다. 백강(白江)【혹은 기벌포(伎伐浦)라고도 하였다.】과 탄현(炭峴)【혹은 침현(沈峴)이라고도 하였다.】은 우리 나라의 요충지라, 장부 한 사람이 창 한 자루만 가지고도 1만 명을 당해내는 곳입니다. 마땅히 용사를 뽑아 가서 지키게 하여, 당병이 백강에 들어오지 못하게 하고 신라병은 탄현을 넘지 못하게 하여, 대왕은 여러 겹으로 막아서 굳게 지키시다가 적의 군량이 다 떨어지고 사졸이 지치기를 기다려 힘을 떨쳐 치면 반드시 깨뜨릴 것입니다.”
이 때에 대신들은 믿지 않고 말하였다.
“흥수는 오랫동안 갇혀있던 몸이라 임금을 원망하고 나라를 사랑하지 않을 것인데 그 말을 쓸 수가 없습니다. 당병을 백강으로 들어오게 하여 물의 흐름을 따라 배를 나란히 하지 못하게 하시고, 신라병을 탄현으로 올라오게 하여 좁은 길을 따라 말을 가지런히 하지 못하게 하는 것이 낫습니다. 이 때 군사를 내어 치면 조롱 안의 닭을 죽이고 그물에 걸린 물고기를 잡는 것과 같을 겁니다.”
왕은 그럴 듯이 여겼다. ...)”
[32] 김부식 (1145). 〈본기 권28 의자왕〉, 《삼국사기》 “ 二十年 … 六月… 又聞唐羅兵已過白江•炭峴 遣將軍堦伯 帥死士五千 出黃山 與羅兵戰 四合皆勝之 兵寡力屈竟敗 堦伯死之 於是合兵禦熊津口 瀕江屯兵 定方出左涯 乘山而陣 與之戰 我軍大敗 (20년(660) 6월… 또 당과 신라의 병사가 이미 백강과 탄현을 지났다는 말에 장군 계백(堦伯)을 보내어 사사(死士) 5천을 거느리고 황산(黃山)에 나아가 신라병과 싸우게 하였다. 네 번을 크게 붙어 싸워서 모두 이겼으나 군사가 적고 힘도 꺾여서 끝내는 패하고 계백도 죽었다. 이에 군사를 합쳐 웅진강(熊津江) 입구를 막고 강변에 군사를 둔치게 하였다. 정방(定方)이 왼편 물가로 나와 산으로 올라가서 진을 치자 그들과 더불어 싸웠으나 우리 군사가 크게 패하였다.)”
[33] 김부식 (1145). 〈본기 권28 의자왕〉, 《삼국사기》 “ 二十年 … 六月… 王師乘潮 舳艫銜尾進 鼓而譟 定方將步騎 直趍其都城 一舍止 我軍悉衆拒之 又敗死者萬餘人 (20년(660) 6월… 당나라 군사[王師]를 실은 배들은 조수를 타고 꼬리에 꼬리를 물고 나아가며 북을 치고 떠들어댔다. 정방이 보병과 기병[步騎]을 거느리고 곧장 그 도성(都城)으로 나아가 30리[一舍]쯤 되는 곳에 머물렀다. 우리 군사는 모든 병력을 다 모아 이를 막았으나 또 패하여 죽은 자가 1만여 명이었다. )”
[34] 삼국사기 본기에는 이와 다른 기록이 있다. : 김부식 (1145). 〈본기 권28 의자왕〉, 《삼국사기》 “ 二十年 … 六月… 唐兵乘勝薄城 王知不免 嘆曰 悔不用成忠之言 以至於此 遂與太子孝走北鄙 (20년(660) 6월… 당나라 군사가 승세를 타고 성으로 육박하자 왕은 면하지 못할 것을 알고 탄식하며 “성충(成忠)의 말을 쓰지 않아 이 지경에 이른 것을 후회한다.” 고 말하고는 드디어 태자 효(孝)와 함께 북쪽 변경으로 달아났다. )”
[35] 김부식 (1145). 〈본기 권28 의자왕〉, 《삼국사기》 “ 二十年 … 六月… 定方圍其城 王次子泰自立爲王 率衆固守 太子子文思謂王子隆曰 王與太子出 而叔擅爲王 若唐兵解去 我等安得全 遂率左右縋而出 民皆從之 泰不能止 定方令士超堞 立唐旗幟 泰窘迫 開門請命 於是 王及太子孝與諸城皆降 (20년(660) 6월… 정방이 [사비]성을 포위하니 왕의 둘째 아들 태(泰)가 스스로 왕이 되어 무리를 거느리고 굳게 지켰다. 태자의 아들 문사(文思)가 왕자 융(隆)에게 말하였다. “왕과 태자가 [성을] 나갔는데 숙부가 멋대로 왕이 되었습니다. 만일 당나라 군사가 포위를 풀고 가면 우리들은 어찌 안전할 수 있겠습니까?” [그들은] 드디어 측근들을 거느리고 밧줄에 매달려 [성밖으로] 나갔다. 백성들이 모두 그들을 따라 가니 태(泰)가 말릴 수 없었다. 정방이 군사로 하여금 성첩(城堞)에 뛰어 올라가 당나라 깃발을 세우게 하였다. 태는 형세가 어렵고 급박하여 문을 열고 명령대로 따를 것을 요청하였다. 이에 왕과 태자 효가 여러 성과 함께 모두 항복하였다. )”
[36] 양종국, 충청남도지, 4 웅진,사비 백제와 충남 180쪽
[37] 가 나 김지원 기자. "의자왕 증손녀, 당 황족과 혼인했다 (한글)" (HTML), 《한국일보》, 2008년 11월 15일 작성. 2008년 11월 25일 확인.
[38] 손호와 진숙보는 주색에 빠져 나라를 돌보지 않다가 멸망을 자초한 암군으로 역사에 기록된 왕이라는 점에서 의자왕에 대한 의도적인 모욕을 엿볼 수 있다.
[39] 신복룡 (2001년 12월 20일). 《한국사 새로 보기》, 초판 2쇄, 도서출판 풀빛, 52~60쪽. ISBN 89-7474-87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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