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s://mirror.enha.kr/wiki/%EC%9D%98%EC%9E%90%EC%99%95 
* "7. 백제 의자왕과 발음의 유사성을 이용한 별명 椅子王"은 좀 동떨어진 내용이라 제외했습니다.

의자왕

왕호 : 의자왕(義慈王)[1]
성 : 부여(扶餘)
휘 : 의자(義慈)
생몰년도 : 음력 ?[2] ~ 660년
재위기간 : 음력 641년 3월 ~ 660년 (약 19년)

백제의 제31대 건길지이자 마지막 왕.

30대 무왕의 장자로, 632년에 태자가 되었으며 641년에 즉위하였다. 삼천궁녀를 들였다는 루머가 있지만 이것은 사실이 아니며, 오히려 당시 당나라에 치여 국력이 쇠퇴해가던 고구려보다 더 융성하게 백제의 국력을 신장시키고 백제를 7세기 중반 삼국 중 최강국으로 만들어군림하였다. 그러나 더욱 더 강력한 당나라의 비위를 거슬려서 순식간에 멸망했다 ㅎㄷㄷ

예로부터 평가가 심히 엇갈렸던 왕으로, 재위 중반기 까지만 해도 숙적인 신라를 몰아 붙이며 아버지 무왕의 뒤를 이어 백제의 마지막 중흥기를 이끌었던 명군이었으나, 재위 15년(655)에 접어들어서는 주색을 탐하는 혼군으로 전락하여 백제를 망하게 하였다는 오명을 쓰게 되었다. 그러나 이것은 승자의 역사. 즉 당나라와 신라에 의해서 의자왕의 업적이 많이 곡해된 것으로 많은 역사학자들이 보고 있다.

백제 역사 상 가장 기록이 많이 남은 왕 중 한 명이며,《삼국사기》에서 백제의 왕들 중 유일하게 한 권을 모두 장식한 왕이다.[3]《삼국사기》에서 백제 본기는 총 6권임을 생각해보면 그 분량이 어마어마하다.
 

1. 이름에 대해 

의자왕의 '의자'를 시호라 착각하기도 하는데 사실 시호가 아닌 그냥 그의 이름이다. 절대 착각하면 안 된다. 당연하겠지만 사람이 앉는 그 의자는 아니고.(...)[4] 마지막 왕(달리 말하면 일부러 그런 것은 아니지만, 어쨌든 왕조를 망하게 한 왕)한테 "의롭고 자비롭다"라는 시호를 줄리가 없다. 한국의 어린이 잡지 "위즈키즈"에서는 시호와 이름을 헷갈려서 한때 역사 코너에서 의자왕을 옹호하는 떡밥으로 쓰였다.

또한 EBS에서 방영되고 있는 "지식채널e"와 형식이 같은 "역사채널e"라는 프로그램에서도 "의자"를 이름이 아닌 시호로 생각해서 의자왕은 방탕한 왕이 아닌 "의롭고 자애로운 왕" 이라고 설명했는데 위에서 말했다시피 의자는 후세 사람들이 붙여준 시호가 아니라 분명히 이름이다. 이름의 뜻이 "의롭고 자애롭다" 인데 이걸 가지고 의자왕을 옹호하는 떡밥으로 쓰다니(그것도 교육방송에서) 이뭐병. 아니 마지막 왕이면 보통 시호를 내릴 정부 자체가 안 남아있는 것이 보통이다. 하지만 인터넷이나 SNS에서 해당 역사채널e 편이 짤방으로 제작되어 아직도 유포되고 있는 모습을 많이 볼 수 있다.
 

2. 생애 

2.1. 초기일생

(1) 출생

의자왕은 30대 무왕의 맏아들로 태어났다. 삼국사기의 기록에 따르면 그 성품은 용맹스럽고 담이 크며 결단력이 있었다고 한다. 또한 어버이를 효로써 섬기고 황제와 우애롭게 지내므로 사람들로부터 '해동증자'라고 불릴 정도 였다고 한다. 이러한 의자왕의 유교적 성향은 당나라의 국학에 자제를 보내어 입학시키는 등 유학에 대한 깊은 관심을 가졌던 부왕인 무왕의 영향이 컸던 것으로 보인다.

의자왕이 태어난 시기는 확실히 알 수 없다. 다만 의자왕의 맏아들로 알려진 부여융이 615년에 태어났음은 부여융 묘지명에서 확인된 바 있다. 만약 의자왕이 20세를 전후하여 부여융을 낳았다면, 의자왕은 대략 595년 경에 태어난 것으로 볼 수 있다.

(2) 모계의 의문 

한편 의자왕은 그 어머니가 누구인지 정확히 알 수 없다. 때문에 의자왕의 출생은 베일에 싸여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닌데, 이는 출생의 미스테리를 지니고 왕위에 오른 부왕인 무왕과 흡사한 점이라고 할 수 있다.

삼국유사의 서동요 설화를 들어 의자왕의 어머니가 신라의 선화공주라는 설이 제기되기도 하였으나 이 역시 확실하지 않다. 더욱이 미륵사 보수 공수 중에 석탑 안에서 발견된 사리 봉안기에 따르면 무왕 때에 '백제의 왕후는 좌평 사택적덕의 딸'이었다고 명백히 기록되어 있기 때문에 무왕이 선화공주와 실제로 혼인했다는 설은 신빙성이 매우 떨어진다. 따라서 의자왕의 생모가 선화공주일 가능성은 매우 희박하다.

다만 정황상으로 볼때 의자왕은 무왕의 정비가 아닌 다른 왕후에게서 태어났을 가능성이 크다. 삼국사기의 기록에 따르면 의자왕은 무왕의 맏아들임에도 불구하고 거의 40세에 이른 장년의 나이가 되어서야 태자로 책봉될 수 있었다. 의자왕의 생모가 무왕의 정비인 '사택적덕의 딸'에게서 태어났다면 그토록 태자 책봉을 늦게 받을 이유가 없다. 이로 미루어보아 의자왕의 모계는 그 세력이 상당히 미약했음을 추측할 수 있다.

또한 앞에서도 서술했듯이 의자왕이 595년 경에 태어났다고 가정하면 의자왕은 무왕이 즉위한 600년 이전에 태어났다고 할 수 있는데, 당시 무왕은 기반이 없어 왕위 계승권이 없는 듣보잡 왕족에 불과했다. 이로 추측하건데, 의자왕은 무왕이 왕위에 오르기 전에 혼인한 아내로부터 태어났으나, 이후 무왕이 즉위하면서 고위 귀족의 딸을 새로 왕비로 맞으며 그 기반이 취약해졌다고 볼 수도 있다.

문학적 상상력을 더해 의자왕은 선화공주의 아들이나 선화공주가 죽고 사택적덕의 딸이 새 왕비가 되면서 적국 신라의 피를 이어받은 의자왕의 입지가 좁아졌다고 보는 창작물도 있다.

(3) 태자가 되다

의자왕은 632년에 태자로 책봉되었다. 이는 무왕 재위 33년으로, 당시에 의자왕은 이미 40세를 바라보는 장년의 나이였다. 의자왕이 이처럼 태자 책봉을 늦게 받은 이유는 출생 부분에서도 볼 수 있듯이 그 모계의 힘이 미약해 지지기반이 튼튼하지 못했기 때문인 것으로 짐작할 수 있다.

이러한 출생의 한계를 의자왕은 인내력과 노련한 처신으로 극복하여 태자가 될 수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의자왕이 부모를 효도로 섬기고 형제들과 우애가 있어 해동증자로 불렸음은 그의 유교적 사상의 영향일 가능성도 있으나 또한 그의 처세술의 일환으로도 볼 수 있는 것이다. 지지기반이 허약했던 의자왕은 이미 젊은 시절부터 품행을 단정히하여 귀족 사회로부터 좋은 평판을 얻어 지지를 얻고 몸가짐을 조심히하여 함부로 주위에 정적을 만들지 않으려 노력했을 가능성이 크다.

한편 의자왕이 이처럼 늦게 태자가 된 것을 무왕의 왕권 강화책 때문인 것으로 보는 시각도 있다. 무왕이 일부러 태자 책봉 시기를 늦추면서 귀족 세력 간의 분쟁을 조성하고 이를 통해 더욱 왕권을 강화하려 했다는 것이다.[5]

2.2. 치세와 백제 중흥

(1) 즉위

641년 3월, 아버지 무왕이 승하하자 태자인 의자가 마침내 그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르니 그가 바로 의자왕이었다. 이에 당태종은 사육낭중 정문표를 백제로 보내 의자왕을 주국 대방군왕 백제왕(柱國帶方郡王百濟王)으로 책봉하였는데 이로써 의자왕은 정통성을 확보하였다. 그해 8월에 의자왕은 사신을 당나라에 파견하여 사의를 표하고 방물을 바침으로써 자신이 백제의 왕이 되었음을 사방에 알렸다.

이듬해인 642년 정월에 의자왕은 당나라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였으며, 또한 해동증자라는 평에 걸맞게 유교 정치사상을 강조하며 취약한 왕권을 강화하는데 힘썼다. 그해 2월에 의자왕은 직접 궁성에서 나와 여러 주(州)와 군(郡)을 순무하고 죄수를 재심사하여 사형수를 제외하고는 모두 방면하는 등 민심수습에 나섰는데 이 역시 유교정치의 일환으로 볼 수 있다.

한편 즉위한 뒤에는 관산성(管山城)에서의 패전 이후 귀족 중심의 정치 운영 체제에 일대 개혁을 단행하였는데, 즉 642년(의자왕 2)에 제왕자(弟王子: 손아래의 왕자)의 아들 교기(翹岐)를 비롯하여 모매여자(母妹女子: 같은 어머니에서 태어난 형제자매의 딸) 4명과 내좌평(內佐平) 기미(岐味) 등 고명인사(高名人士) 40여명을 섬으로 추방한 것이 그것이다. 다만 이 사건이 642년이 아니라 의자왕 15년인 655년에 벌어진 사건이라는 주장이 있는데, 이는 아래의 항목에서 더욱 자세히 설명하기로 한다.

위와 같은 조치로 인해 왕권강화를 위한 노력으로 귀족세력에 대한 왕권의 통제력이 보다 강화되었다. 대좌평(大佐平) 사택지적(砂宅智積)이 나지성(奈祗城)으로 은퇴한 것도 이때의 정변과 관련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대외관계에 있어서는 지금까지 고구려와 중국에 대하여 취해온 양면적인 외교노선을 수정하여 친고구려정책으로 돌아섰다.

(2) 신라 정벌과 대야성 함락

아버지 무왕 대에 걸쳐 백제가 확장한 영토[6]
 
민심 수습에 나서 나라의 형편을 살핀 의자왕은 마침내 친히 군사를 이끌고 신라 정벌에 나섰다. 당시 왕의 자질로써 가장 중요시되었던 것 중 하나가 외부의 적과 싸워 이기는 것임을 고려해보면 의자왕은 신라 정벌을 통해 자신의 역량을 과시하고 왕의 권위를 드높이려 했던 것 같다. 부왕인 무왕만해도 수차례 신라와 싸워 이겨서 영토를 넓힘으로써 왕권을 강화했던 것을 생각해보면 이는 당연한 일이라 할 수 있다.

642년 7월에 의자왕이 직접 군사를 지휘하여 신라를 쳐서 낙동강 서편에 위치한 미후성 등의 40여 성을 획득하는 큰 전과를 올렸다. 왕이 직접 지휘하였던 만큼 그 군세가 크며 또한 대대적인 정벌전이었을 것이다. 이로써 백제는 신라가 점령한 옛 가야지역 대부분을 점령하는데 성공하였다. 이는 의자왕의 아버지인 무왕 때부터 꾸준히 시도해왔던 가야의 고토에 대한 영향력 회복의 숙원을 이룬 것이다.

이어 8월, 의자왕은 장군 윤충에게 명하여 1만 군사로 하여금 신라의 대야성(경남 합천)을 공격하였다. 오늘날의 경남 합천에 위치한 대야성은 신라가 옛 가야지역을 통치하던 거점이자 신라의 내륙지방으로 통하는 중요 요충지였다. 당시 대야성의 중요성은 대야성의 성주가 신라의 실권자였던 김춘추의 사위인 김품석이었다는 사실로도 알 수 있다.

윤충은 대야성주 김품석에게 아내를 빼앗겨 불만이 크던 막객 검일과 내통하여 마침내 대야성을 함락시키고 성주 김품석과 그의 아내인 김춘추의 딸 고타소랑, 그리고 그 자식들을 모두 목베어 살해했으며 시신은 백제의 도성인 사비성으로 보냈다.[7] 이에 의자왕은 그 공로를 치하하여 윤충에게 말 20필과 곡물 1천 석을 상으로 내렸다.

이처럼 재위 초의 의자왕은 내부적으로는 온화한 정치로 민심을 얻었으며 외부적으로는 백제인들의 숙적이었던 신라를 정벌하여 막대한 전승을 거두고 영토를 확장하며 그 정치적 위상을 드높임으로써 왕권 강화에 부단히 힘을 썼다.

(3) 당항성 공격

그 이듬해인 643년 정월에 의자왕은 당나라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는 한편, 11월에는 고구려와 화친을 맺었다. 당시 고구려의 실권자로 행세하던 연개소문은 대야성 함락 후에 찾아온 김춘추를 내치고 백제와 화친하여 후방의 안전을 도모하려 하였다.

고구려와 화친을 맺은 의자왕은 신라가 당나라와 통하는 교통의 요충지 당항성(黨項城)을 공격하였다. 당항성은 오늘날의 경기도 화성시 남양에 위치한 곳으로, 의자왕은 이 곳을 점령하여 신라가 당나라에 입조하는 길을 끊어버리고자 했던 것이다. 이에 신라의 선덕여왕은 급히 당나라에 구원을 요청했고, 의자왕은 이를 알고는 공격을 멈추고 물러났다.

결국 당항성 공격은 당의 개입으로 실패했으며, 이는 신라가 당나라에 의지하게 되는 결정적인 계기를 제공했다. 이 때 백제와 고구려의 합공은 고등학교 국사 교과서에는 7세기 초기에 그저 '한강 유역에서 좀 세게 밀어붙였다' 정도로 나와 있으나[8], 이때의 신라는 의자왕의 백제군에 의해 멸망 직전이었다. 신라가 당에 구원을 요청하자 당 태종은 644년 고구려에 사신을 보내어 고구려와 백제의 신라 공격을 멈추라고 요구하였다.

(4) 신라와의 혈전

신라 사신 김법민(金法敏)[9]이 말하기를 "고구려와 백제는 긴밀히 의지하면서 군사를 일으켜 번갈아 우리를 침략하니, 우리의 큰 성과 중요한 진은 모두 백제에게 빼앗겨서, 국토는 날로 줄어들고 나라의 위엄조차 사라져갑니다. 원컨대 백제에 조칙을 내려 빼앗아 갔던 성을 돌려 주게 하소서. 만일 명령에 복종하지 않는다면 즉시 우리 스스로 군사를 동원하여 잃었던 옛 땅만을 되찾고 즉시 화친을 맺겠습니다."라고 하였다. 그의 말이 순리에 맞았기 때문에 나는 승낙하지 않을 수 없었다. 
- 三國史記 卷第二十八 百濟本紀 第六 (삼국사기 권제이십팔 백제본기 제육)의 당에서 백제에 보낸 서신의 일부[10]

의자왕은 고구려와 화친을 맺은 후로도 수차례 군사를 보내 신라와 전쟁을 벌였다. 싸움은 거의 해마다 일어나서 백제와 신라 사이에는 피비린내나는 다툼이 그칠 날이 없을 지경이었다.

644년 9월에 신라의 명장인 김유신이 군사를 거느리고 와서 백제를 쳐서 7성을 빼앗아갔다. 그러자 이듬해인 645년 9월, 의자왕은 당 태종이 고구려를 침략하고자 신라에서 3만 명의 원군을 징발하자 그 서쪽 방어선이 취약해진 틈을 타서 반격에 나섰다. 백제군은 신라를 공격해 7개 성을 빼앗았다.[11]

647년 10월에 의자왕은 장군 의직에게 군사 3천 명을 주어 신라의 무산성, 감물성, 동잠성 등 3성을 포위 공격하였다. 이때 김유신이 1만 군사를 이끌고 백제군과 싸웠다. 이때 백제군은 수가 적음에도 불구하고 신라군을 몰아붙였으나, 김유신의 수하에 있던 비녕자와 그 아들이 목숨을 바쳐 싸우며 신라군의 사기를 진작시킨 덕분에 전세가 역전되었다. 이에 의직은 크게 패하여 단기로 돌아왔다.

이듬해인 648년 3월에 의직은 다시 군사를 거느리고 신라 서쪽 변경의 요거성[12] 등 10여성을 함락시켰다. 백제군은 승세를 몰아 4월에 옥문곡까지 진격했으니 그곳에서 또다시 김유신의 역습에 당해 패하고 돌아왔다.

649년 8월, 의자왕은 좌장 은상을 보내 정병 7천 명으로 신라를 쳐서 석토성 등 7성을 빼앗았다. 이에 신라에서는 김유신, 진춘, 천존, 죽지 등의 장수들로 하여금 역습해왔다. 백제군은 잠시 물러나 도살성[13] 밑에서 다시 싸웠으나 이번에는 백제군이 패하고 은상이 전사하였다.

이처럼 삼국사기의 기록에는 백제가 수차례 신라를 침공할 때마다 김유신이 이를 모두 막아냈다고 하였으나 이를 모두 사실로 보기에는 무리가 있다. 이후에 신라가 당나라에 보낸 서신에 따르면 당시 신라가 백제의 맹공에 크게 밀리고 있는 당시의 상황이 여과없이 잘 드러나고 있기 때문이다. 때문에 실상은 신라가 백제에게 일방적으로 밀리고 있었을 가능성이 크다.

비록 김유신이 백제군을 막아내어 승리했다고 하여도 모든 싸움에서 승리하기는 힘들었을 것이다. 이런 기록이 남아있는 것은 후대에 삼국의 역사를 재정립한 신라인들이 삼국 통일의 일동 공신이었던 명장 김유신을 띄워주기 위해 자신들에게 불리했던 기록을 윤색했기 때문일 것이다.

(5) 외교 노선의 변화 

1) 당과의 대립 

고구려와 백제의 협공에 밀려 큰 위기를 겪게 된 신라는 이후로 당과 동맹을 맺어 이를 이겨내려 노력하였다. 648년 겨울에 신라의 김춘추는 당나라로 건너가 당 태종의 신임을 얻었으며, 649년 당 고종이 즉위했을 때 진덕여왕이 태평송을 써서 보내는 등 중국과 외교관계를 긴밀히 하였다.

그러나 백제 역시 당과 오래전부터 가까운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던 중이었다. 이는 무왕이 수차례 당에 사신을 보내 조공한 사실과 의자왕이 즉위 직후에 정통성 확보를 위해 당에 조공사를 파견하고 작위를 책봉받았던 사실을 봐도 알 수 있다. 그러나 당이 백제의 원수인 신라와 더욱 친밀해지면서 백제와 당의 관계는 크게 악화되었다.

651년에 의자왕은 당나라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였는데, 이때 당나라 조정에서는 백제로 귀국하려는 사신에게 국서를 보내 더이상 신라를 공격하지 말 것과 그동안 빼앗아간 신라의 영토를 반환할 것을 요구하였다. 이후로 백제는 당과의 관계를 단절하고 독자노선을 걷기 시작하였다. 이듬해인 652년 정월에 당에 사신을 파견한 것을 마지막으로 더이상 의자왕은 당나라에 사신을 파견하지 않았다.

당시 의자왕은 비록 당 조정의 견재가 있더라도 신라에 대한 공격을 멈출 생각이 없었거니와 무엇보다 고당전쟁에서 당나라가 번번히 고구려에게 패하는 것을 보고는 당이 백제와 신라 사이에 군사적으로 개입할 가능성이 없다고 생각했기에 이런 돌발 행동을 보인 것으로 보인다.

2) 고구려와 왜와의 연계 

본래 의자왕은 부왕인 무왕과 마찬가지로 중국과 고구려가 싸우는 가운데 중립을 지켜서 북변의 침공 위협을 최소화하고 그 대신 남아도는 힘으로(...) 신라를 지속적으로 침공하여 그 영토를 빼앗는 외교 전략을 구사하였다. 그러나 의자왕은 당과 신라가 동맹을 맺자 고구려와 중국에 대하여 취해온 양면노선을 버리고 친고구려정책으로 돌아선 것이다.

또한 의자왕은 653년 8월에 왜국에 사신을 보내 수호를 통하는 등 지속적으로 "왜"와 교류하였다. 보다 자세한 기록이 남은 일본서기의 기록에는 의자왕이 650년에서 656년까지 해마다 사절단을 파견했다고 하였으니 의자왕 또한 역대의 백제 왕들과 마찬가지로 왜국과의 관계를 중시했음을 알 수 있다. 의자왕은 특히 신라를 견재하기 위해 동해 너머의 "왜"와의 연계를 더욱 강화하였던 것이다.

이처럼 고구려와 화친을 맺고 왜와의 관계도 돈독히 한 의자왕은 곧 고구려 - 백제 - 왜로 이어지는 연계 전선을 형성하여 당의 개입을 막고 신라를 더욱 압박해왔다. 655년 7월에 이르어서 의자왕은 마천성을 수리하여 외침에 대비하는 한편, 그해 8월에는 고구려, 말갈 등과 연합하여 신라의 북쪽 변경을 침략하여 성 30여 개를 빼앗았다. 이듬해인 656년 4월에 다시 군사를 보내 신라의 변경을 재차 공격하는 등 신라에 대한 공세를 늦추지 않았다.

(6) 백제의 중흥 

이처럼 당시에 고구려는 신라를 공격하여 현재의 강원도에 해당하는 지역을 지속적으로 침략하였고, 현재의 경북 지방까지 치고 들어왔다. 신라의 서남쪽 지방도 백제가 밀어붙이면서 40여성을 빼앗았다.[14]

10여 년 동안 수백 넘는 단위의 전투가 수십번 벌어지는 등 제일 치열했던 전투 지역이 바로 그 당시의 경상남도-전라남도 지역. 진흥왕 때의 영토만 보고 백제 국경선을 천안 - 경남 라인을 생각하기보단 오히려 수도권 - 충주 - 광양으로 이어지는 라인이 더 가깝다. 신라는 간신히 한강라인만 지킬 정도였다.

잇단 신라에 대한 공격으로 신라는 나라가 망할지도 모른다는 위기감을 가지게 될 정도였다. 당시 즉위하고 있던 선덕여왕의 무능 때문이라는 일각의 인식으로 반란까지 일어날 정도였다(그런데 민간 설화 등을 보면 오히려 선덕여왕은 예지 능력도 있는 등 능력자로 나온다. 그 당시 권력을 잡고 있던 김춘추 일파의 조작이라는 주장도 있다[15]).

물론 전쟁 과정에서 신라가 전술적 승리를 거둔 경우도 많고, 일본서기에 따르면 신라군이 김제평야까지 급습한 적도 있었으며 김유신의 활약으로 위의 40여성의 상당부분을 회복하기도 했다.[16] 따라서 신라가 멸망직전까지 몰렸다고 보기에는 좀 무리가 있다. 하지만 신라의 승리는 대개 방어전에 국한되어 있었던데다 655년 고구려-말갈 연합군에 의해 큰 피해를 입은 이후부터는 신라는 서서히 국력의 한계를 느끼고 이러한 위기감이 더욱 고조되었음은 사실이고, 나제 전쟁에서 백제가 유리한 전략적 위치를 차지한 것도 사실이다.

위에서 살펴본 것과 같이 백제는 의자왕 대에 이르러 다시 한 번 중흥기를 맞았고 신라는 백제에게 공세적인 위치를 상실하고 수세에 몰려 국가적 위기감을 느끼게 되었다. 아버지인 무왕이 백제의 중흥을 이끌어, 두번째 전성기를 열고, 이는 의자왕 때 절정을 맞이했다. 두번째 리즈시절을 맞은 백제는 다시 고대의 영광을 되찾는듯 했다...

그리고 백제는 멸망했다.

2.3. 친위 쿠데타 

(1) 백제의 대란

“백제국이 천황이 죽었다는 말을 듣고 조문사(弔問使)를 받들어 보냈는데, 저는 조문사를 따라 함께 츠쿠시노쿠니(筑紫國, 축자국)에 도착하였습니다. 그러나 저는 장례식에 봉사(奉仕)하고자 하여 혼자서 먼저 왔습니다. 그런데 그 나라는 지금 매우 어지럽습니다”
-日本書紀 (일본서기) 권24 天豐財重日足姬天皇[17] 皇極天皇 (황극천황) 정월

2월 정해(丁亥) 초하루 戊子 阿曇山背連比羅夫, 草壁吉士磐金, 倭漢書直縣을 백제 조문사의 處所에 보내어 그 쪽 소식을 물었다. 조문사가 대답하기를 “백제국왕이 저희들에게‘새상(塞上)은 항상 나쁜 짓을 하므로 돌아오는 사신에 딸려 보내주기를 청하더라도 일본 조정에서 허락하지 마십시오’라고 하였습니다”라고 하였다.[18]
백제 조문사의 從者 등이 “지난 해 11월 대좌평 지적(智積)이 죽었습니다. 또 백제 사신이 곤륜(崑崙)의 사신을 바다에 던졌습니다. 금년 정월에 국왕의 어머니가 죽었고, 또 아우 왕자의 아들 교기(翹岐)와 누이동생 4명, 내좌평 기미(岐味) 그리고 이름높은 사람 40여 명이 섬으로 추방되었습니다”라고 하였다.
-日本書紀 (일본서기) 권24 天豐財重日足姬天皇 皇極天皇 (황극천황) 2월조

655년 정월, 백제에서는 정치적 대란이 일어났다. 의자왕이 '어머니'가 죽은 틈을 타서 일종의 친위 쿠데타를 일으킨 것이다. 어떤 이유에서인지 이 기록은 삼국사기 등 국내의 사서에는 없으며 오로지 일본서기에서만 찾아 볼 수 있다. 일본서기에서는 백제에 다녀왔던 조문사와 백제에서 온 사신의 입을 빌어 당시 백제에서 일어났던 사건을 서술하고 있다.

기록에 따르면 의자왕은 '어머니'가 사망하자 일본에 가서 머물고 있던 아우 새상의 귀국을 막았으며, 조카인 교기와 모매여자(母妹女子: 같은 어머니에서 태어난 형제자매의 딸) 4명과 내좌평 기미 등 고명인사(高名人士) 40여명을 섬으로 추방하였다. 당시 권력층의 핵심이라 할 수 있는 왕의 혈족들과 대신들이 한순간에 백제 조정에서 사라진 것이다.

이 기록에 나타난 '의자왕의 어머니'란 곧 무왕의 정비를 말하는 것이며, 의자왕의 친모가 아닌 계모일 가능성이 크다. 또한 추방당한 왕의 혈족인 새상, 교기, 4명의 누이동생 등은 아마 의자왕의 계모의 자손들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내좌평 기미 등을 비롯한 40여인은 의자왕의 정적들이었을 것이다.

이를 통해 의자왕이 효성과 형제들간의 우애로 명성이 높아 해동증자라 불렸던 것은 사실 세력이 미약했던 자신의 위치를 지키기 위한 방책이었던 것을 알 수 있다. 의자왕의 초기일생을 살펴볼때, 의자왕은 태자책봉을 무척 늦게 받는 등 지지세력이 미약한 탓에 그 기반이 취약했으나 의자왕은 이를 노련한 처세술로 극복하고 기회를 노리고 있었던 것이다.

의자왕은 아버지인 무왕이 죽은 이후로도 아직 큰 권세를 지니고 있었던 계모를 지극정성으로 모시는 한편, 배다른 형제들에게 견제를 받으면서도 이를 묵묵히 받아들이며 인고의 세월을 보내었다. 그러다가 계모가 죽자 마침내 일을 저질렀던 것이다. 게다가 이즈음에 의자왕은 이미 수차례 신라와 싸워 이기고 민심을 얻으며 힘을 키우고 튼튼한 지지 기반을 구축하고 있었다. 의자왕이 갑작스레 사람이 변한 것이 아니라 바로 자기 자신을 회복한 것이다.[19]

이는 의자왕이 선대인 성왕과 위덕왕 부자가 관산성(管山城) 싸움에서 패전한 이후로 형성된 대성팔족으로 대표되는 귀족 중심의 정치 운영 체제에 대한 일대 개혁을 단행하고 전제 왕권을 수립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이 사건은 이후 백제의 정국에 큰 파장을 불러일으켰거니와, 백제의 멸망에도 어느정도 원인이 되었다.

(2) 정치세력의 변화와 친위 세력 

의자왕이 일으킨 친위 쿠데타는 이후 백제 정치세력의 변화에 끼친 영향이 매우 컸다. 쿠데타가 일어난 655년 즈음에 백제 최고위직에 있었던 좌평들의 신변에 이상이 생기는 등 정치적 변고가 일어났던 것으로 이를 알 수 있다.

사택지적비에 따르면 당시 백제의 대좌평이었던 사택지적은 654년에 은퇴하여 낙향하였으며, 삼국사기의 김유신 열전에 따르면 655년에 좌평 임자가 김유신과 내통을 시도하였다. 656년 3월에는 좌평 성충이 의자왕에게 간언을 하였다가 옥에 갇혀 죽었으며, 좌평 흥수는 죄를 지어다하여 고마미지현으로 귀양을 가야 했다. 이러한 일련의 사건들은 의자왕이 친위 쿠데타를 통해 정적을 제거하는 과정에서 기존의 집권 세력들과 마찰을 일으켰음을 시사하는 것이다.

이처럼 백제의 정국이 급변하는 가운데 정치세력의 주류는 기존의 고위 귀족들로부터 친위 쿠데타에 동조한 왕의 친위 세력들에게로 옮겨갔을 가능성이 크다. 당시 의자왕의 친위 세력에 대한 기록은 남아있지 않아 그들이 누구인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오늘날 사학계에서는 당시 고위 귀족의 세력에 눌려 좌평직에 오르지 못하고 한직에 머물렀던 신흥 귀족 세력들이 의자왕의 친위 쿠데타에 동조한 친위 세력으로 보는 견해가 대두하고 있다.

의자왕 대에 장군으로써 수차례 신라 공격을 주도하다가 훗날 벼슬이 좌평에 이른 의직이나 벼슬이 달솔에 머물렀던 계백, 흑치상지 등이 그러한 세력으로 여겨지기도 한다. 또한 일본서기 및 부여 정림사지 오층석타의 명문의 기록에 의자왕의 말년에 권력을 휘어잡고 전횡을 일삼았다는 '의자왕의 부인'도 정황상 의자왕의 주요 지원 인물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이 '의자왕의 부인'은 의자왕의 비인 은고로 여겨진다.

또한 의자왕은 644년에 장자인 부여융을 태자로 세운바 있었으나 백제 멸망 당시의 기록에는 부여효로 태자가 바뀐 모습을 확인할 수 있는데, 이는 의자왕의 친위 쿠데타 성공 이후로 막강한 발언권을 지니게 된 대부인이 자신의 소생인 부여효로 하여금 부여융을 밀어내고 태자로 만들었을 것이라는 추측이 있다.

(3) 언제 일어났는가? 

사실 일본서기 황극 원년조는 이 사건을 서기 642년, 즉 의자왕 재위 2년의 일로 전하고 있다. 이를 그대로 따르면 의자왕은 641년 겨울에 즉위하고나서 불과 몇달도 되지 않은 이듬해 1월에 친위 쿠데타를 일으킨 것이다. 그러나 이는 이치에 맞지 않는 구석이 있다. 의자왕은 애초부터 그 세력 기반이 취약한 탓에 태자 책봉도 40세에 가까운 나이에 받았을 정도였는데, 그런 그가 왕위에 오른 직후에 외척과 고위 인사를 대규모로 숙청할 정도로 강력한 힘을 지니고 있었는지는 의문이다.

더욱이 의자왕은 즉위 초에는 정통성을 확보하고 민심을 수습하기 위해 당에 조공사를 파견하며 전국의 주/군을 순행하는데에 힘을 썼는데, 그처럼 혼란한 정국에 이런 활동을 하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무엇보다 친위 쿠데타 직후의 위험천만한 상황에 왕이 궁성을 비우고 국토를 순행한다는 것은 앞뒤가 맞지 않는 행위이다.

또한 같은 기록에 작년(641년) 11월에 죽었다던 대좌평 사택지적은 정작 642년 7월에 멀쩡히 살아서 일본으로 파견되었고 사택지적비에 따르면 654년에 정계에서 은퇴하였음이 확인된바 있다(...). 게다가 섬으로 추방당했다던 교기가 그해에 일본으로 파견되어 일본대신의 집에 머무르는 등 전혀 앞뒤가 맞지 않는 기록이 연이어 나오고 있다. 때문에 이 기록은 필시 일어난 시기가 잘못 기록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때문에 최근에 이르어서는 이를 의자왕 재위 15년인 655년의 일, 즉 일본서기의 황극천황 원년조가 아닌 제명천황 원년조의 기록으로 보는 것이 맞다고 보는 설이 대두하고 있다. 이는 사실상 국내 사학계에서도 정설로 취급되고 있다.

일본서기의 기록에 따르면 일본의 황극천황(고교쿠 덴노)은 642년에 즉위하였으며, 재위에서 잠시 물러났다가 655년에 제명천황(사이메이 덴노)라는 이름으로 다시 즉위한 바 있다. 후대에 일본서기의 편찬자들이 동일한 두 왕의 기록을 다루는 과정에 실수를 했을 가능성이 큰 것이다.

더욱이 655년을 기점으로 하여 의자왕이 점차 향락에 빠져들고, 성충이나 사택지적 등 여러 좌평들이 해를 입는 등 백제 정국의 변화가 극심해졌으므로 의자왕의 친위 쿠데타는 642년이 아닌 655년 정월의 일로 보는 것이 보다 합리적이다.

2.4. 말년의 쇠락 

(1) 향락에 빠지다 

16년 봄 3월에 왕이 궁녀들을 데리고 음란과 향락에 빠져서 술 마시기를 그치지 않으므로 좌평 성충(成忠, 혹은 정충淨忠이라고도 한다)이 적극 말렸더니, 왕이 노하여 그를 옥에 가두었다. 이로 말미암아 감히 간하려는 자가 없었다.
- 三國史記 卷第二十八 百濟本紀 第六 (삼국사기 권이십팔 백제본기 제육)

친위 쿠데타 이후로 정적을 숙청하고 왕권을 더욱 강화한 의자왕은 점차 과거의 총명하고 결단성있던 모습을 잃어버리고 향락에 빠져들기 시작했다. 왕권을 견제할 수 있는 귀족 공동체를 와해시킨 의자왕은 본격적인 권력 독주를 시작한 것이다. 의자왕이 후대에 폭군이나 암군으로 인식되기 시작한 것도 이때부터다.

사실 의자왕은 왕자 시절은 물론이고, 심지어 왕위에 오른 이후로 15년간 재위에 있으면서도 미약한 세력 기반 때문에 긴장된 생활을 해야 했다. 그런 의자왕이 나라의 권력을 독점하게 되자 갑작스레 풀린 긴장으로 인해 향락에 빠지는 것은 갑작스러운 타락이 아닌 충분히 이해할만한 일이었다. 더욱이 당시 의자왕의 나이는 60세 정도로, 이미 해동증자 행세를 하며 살기에는 지칠만한 나이였다. 그러나 이로 인해 국정이 크게 문란해졌음은 삼국사기의 기록에 확연히 드러난다.

655년 2월에 의자왕은 태자궁을 극히 사치스럽게 수리한 왕궁 남쪽에 망해정을 세웠다. 이는 정월에 친위 쿠데타를 일으킨 직후의 일로, 전제 왕권을 확립한 의자왕의 사치 행각이 이로써 시작되었다. 이후로 궁인과 더불어 날마다 술을 마시고 놀며 음란하고 탐락한 생활을 하였다. 656년 3월에 좌평 성충이 이를 그만 둘것을 간언하였으나, 이미 두려울것이 없었던 의자왕은 벌컥 화를 내며 성충을 옥에 가두어버렸다.

657년 정월에 의자왕은 41명의 서자를 모두 좌평으로 삼고 각기 식읍까지 내려주었다. 백제에 좌평직은 6명으로 한정되어 있었음을 고려할때 이는 명예직에 불과할 가능성이 크지만 이로 말미암아 백제의 중앙 관직 체계를 비롯한 국가 조직 전반에 모순과 문란함이 야기되었을 가능성은 충분히 있다.

한편 삼국사기의 이러한 기록은 의도적인 의자왕 악마 만들기라고 보는 의견도 있다. 그리고 신라 입장에서는 의자왕은 악마가 맞았다.[20] 그러나 의자왕을 깎아내릴 필요가 없는 일본서기에도 비슷한 기술이 있다는 점에서 승리자인 신라가 날조했다고 하기는 어렵다. 의자왕은 외부적으로는 신라를 공격하는 한편으로, 내부적으로는 왕권을 강화했는데 이 과정에서 백제 내부의 귀족들과 갈등이 빚어졌다. 이런 백제 내부의 권력투쟁이 백제 멸망에 한 요인이 되었을 것은 분명하다. 이 백제 내부의 반대세력이 의자왕을 깎아내린 주체였다고 보는 견해도 있다.[21]

(2) 대부인 세력의 대두와 태자 교체 

백제(百濟)는 스스로 망하였다. 임금의 대부인(君大夫人)이 요사스럽고 간사한 여자로, 무도하여 마음대로 국가의 권력을 빼앗고 훌륭하고 어진 신하들을 죽였기 때문에 이러한 화를 불렀다. 삼가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22]
- 일본서기 권 26 天豐財重日足姬天皇 齊明天皇 6년 7월 조 中

황차 밖으로는 곧은 신하를 버리고 안으로는 요부를 믿어 형벌이 미치는 것은 오직 충신에게 있으며, 총애와 신임이 더해지는 것은 반드시 아첨꾼이 먼저였다.
- 부여 정림사지 오층탑신 명문 中

백제 말기의 의자왕 때와 관련된 기록에는 공통적으로 '대부인' 혹은 '요녀' 등으로 표현되는 여자가 나타나 전횡을 일삼아 백제가 멸망하는 원인이 되었다는 점이 언급된다. 정황상으로 볼때 의자왕의 대부인이란 백제가 멸망할 당시에 의자왕 및 백제 대신들과 함께 당나라로 압송되었던 의자왕의 처인 은고로 추정하는 견해가 있다.

대부인은 그 출신이나 내력이 어떠한지 알 수 없으나, 의자왕이 말년에 이르어 노쇠하고 향략에 빠져들자 나라의 정권을 쥐고 전횡을 일삼았다. 이는 655년 정월에 있었던 의자왕의 친위 쿠데타 당시에 대부인이 이끄는 일단의 세력이 큰 역할을 했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의자왕이 국가의 전권을 장악한 가운데, 의자왕의 절대적인 신임을 얻은 대부인 또한 막강한 힘을 지니게 됨은 당연한 일이었다.

이는 백제의 태자 교체 기록을 통해서도 알 수 있다. 의자왕은 분명 재위 초인 644년에 장자인 부여융을 태자로 책봉한 바 있으나, 백제 멸망 당시의 기록에는 이상하게도 부여융은 왕자로 격하되었고 대신 부여효라는 왕자가 태자가 되어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비록 직접적인 기록은 남아있지 않으나, 이러한 기록을 통해 의자왕이 태자를 교체했을 가능성이 충분히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부여효는 사실 대부인의 아들일 가능성이 높다. 친위 쿠데타가 성공한 이후로 대부인의 세력이 나라의 정권을 잡게 되자 부여융의 태자위 또한 자연스레 부여효에게로 옮겨갔을 것이다.

한편 대부인을 왕의 어머니로 보고 선화공주가 바로 백제를 망하게 한 대부인이라는 추측도 있었으나 미륵사지 발굴 이후 거의 사장되다시피 했다.

(3) 내부의 분열 

이처럼 의자왕이 대규모 숙청을 감행한 후에 과거의 열정과 결단력을 상실하고, 사치와 향략에 빠져들며 점차 노쇠해가자 그의 세력을 등에 업은 세력들이 나라의 정치를 멋대로 좌지우지하게 되었다. 특히 일본서기 등 여러 기록에 나타나는 '왕의 대부인'이 거느리는 세력이 크게 대두하였으며 이는 심지어 태자 교체로까지 이어졌다.

이러한 일련의 상황은 곧 정치적 혼란으로 이어져 당시 백제 지배계층의 분열을 가져왔던 것으로 보인다. 이로 인하여 백제는 급격히 쇠락해갔으며, 정치나 사회적 분야 전반에 모순과 혼란이 야기되었던 듯 하다. 이는 곧 중앙 귀족과 지방 지배 세력 간의 불화로까지 번져갔다.

백제가 나당 연합군의 공격에 속수무책으로 당했던 것도 당시 분열과 혼란으로 몸살을 앓던 백제 조정의 상태와 무관하지 않았을 것이다. 더욱이 중앙 세력과 지방 세력의 불화로 인하여 백제의 도성인 사비성이 공격당하는 와중에도 지방 세력들은 이를 수수방관하며 구경만 할 따름이었으니, 이는 곧 백제 멸망의 큰 원인이 되었을 것으로 여겨진다.

2.5. 백제의 멸망 

(1) 멸망의 조짐 

삼국사기의 백제본기에 따르면 의자왕 말년에 이르러서 다음과 같은 변고가 있었다고 한다. 이러한 기록들은 신라 측에서 백제를 공격하기 위해 유언비어를 퍼뜨린 것으로 보거나 신라의 백제 점령을 정당화하기 위해 날조한 것으로 보는 견해가 대다수이다.

한편 이러한 일련의 변고가 백제 내부의 권력다툼과 그러인해 흉흉해진 민심을 우회적으로 표현한 것이라는 견해도 있다. 다만 백제에서 내전이나 격심한 권력다툼이 있었다면 삼국사기에 이에 대한 언급이 없는 점이 의문으로 남는다. 이에 대해서 삼국사기에 기재된 의자왕대의 변고들이 권력투쟁이나 대숙청 혹은 내전을 암시한다고 보기도 한다.

19년(659) 봄 2월, 여우떼가 궁중에 들어 왔는데 흰 여우 한 마리가 상좌평의 책상에 올라 앉았다.[23]

여름 4월, 태자궁에서 암탉이 참새와 교미하였다.

5월, 서울 서남쪽 사비하에서 큰 고기가 나와 죽었는데 길이가 세 발이었다.

가을 8월, 여자 시체가 생초진에 떠내려 왔는데 길이가 18척18척귀신(= 5.4m...)이었다.

9월, 대궐 뜰에 있는 홰나무가 사람이 곡하는 소리처럼 울었으며 밤에는 대궐 남쪽 행길에서 귀신의 곡소리가 들렸다.

20년(660) 봄 2월, 서울의 우물이 핏빛으로 변했다. 서해에 조그만 물고기들이 나와 죽었는데 백성들이 모두 먹을 수 없이 많았다. 사비천(백마강/금강) 물이 핏빛처럼 붉었다.

여름 4월, 두꺼비 수만 마리가 나무 꼭대기에 모였다. 서울 시민들이 까닭도 없이 놀래 달아나니 누가 잡으러 오는 것 같았다. 그러다가 쓰러져 죽은 자가 1백여 명이나 되고 재물을 잃어버린 자는 셀 수도 없었다.

5월, 폭풍우가 몰아치고 천왕사와 도양사의 탑에 벼락이 쳤으며, 또한 백석사 강당에도 벼락이 쳤다. 검은 구름이 용처럼 공중에서 동서로 나뉘어 서로 싸우는 듯하였다.

6월, 왕흥사의 여러 중들이 모두 배의 돛대와 같은 것이 큰 물을 따라 절 문간으로 들어 오는 것을 보았다. 들사슴 같은 개 한 마리가 서쪽으로부터 사비하 언덕에 와서 왕궁을 향하여 짖더니 잠시후에 행방이 묘연해졌다. 서울의 모든 개가 노상에 모여서 짖거나 울어대다가, 얼마 후 흩어졌다. 귀신이 하나 대궐 안으로 들어와 "백제가 망한다. 백제가 망한다."고 크게 외치다가 곧 땅 속으로 들어갔다. 왕이 이상하게 생각하여 사람을 시켜 땅을 파게 하였다. 석자 가량 파내려 가니 거북이 한 마리가 발견되었다. 그 등에 "백제는 보름달 같고, 신라는 초승달 같다.(百濟同月輪, 新羅如月新)"라는 글이 있었다. 왕이 무당에게 물으니 무당이 말하기를 "보름달 같다는 것은 가득 찬 것이니, 가득 차면 기울며, 초승달 같다는 것은 가득 차지 못한 것이니, 가득 차지 못하면 점점 차게 됩니다."고 하니 왕이 노하여 그를 죽였다. 어떤 자가 말하기를 "보름달 같다는 것은 왕성하다는 것이요, 초승달 같다는 것은 미약한 것입니다. 생각컨대 우리 나라는 왕성하여지고 신라는 차츰 쇠약하여 간다는 뜻이 아닌가 합니다."라고 하니 왕이 기뻐하였다.

변고에 대한 기록이나 대부인에 대한 언급과 연관되는지는 확실하지 않지만,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 대신들인 좌평들을 자신의 아들들로 모두 교체해버렸고 이것이 결국 화를 불렀다고 보는 역사학자들이 많다. 대야성을 함락시키는 등 신라를 멸망 직전까지 몰아넣은 자신감의 발로였겠지만, 결과적으로 귀족들의 반발을 불러 일으켰다는 것이다. 좌평 성충이 옥에 갖혀 옥사했다는 것과 흥수가 유배되었다는 기록은 이런 분열상을 암시한다는 시각이 지배적.[24]

백제에 나당연합군이 쳐들어왔을 때도 이러한 분열이 분명 큰 역할을 한 것으로 보인다. 나당연합군 파병시 실질적으로 군세를 보유한 기존 귀족들은 거의 오지 않고 단 한명 계백만이 자신의 병사들을 데리고 왔다는 것. 하지만 수도만을 노린 작전에 백제가 당했다고 보기도 한다.[25]

(2) 나당 연합군의 침공 

의자왕이 열정을 잃고 향락에 빠져들어 나라가 어지러워진 와중에 신라의 태종무열왕은 당나라와 연합군을 이루어 백제 공격에 나섰다. 660년 7월 9일, 소정방이 이끄는 13만 당군이 기벌포에 상륙하였고, 김유신이 이끄는 5만 신라군은 백제 동부전선을 돌파하여 황산벌[26]에 이르었다.

백제 조정에서는 나당 연합군의 공격에 크게 당황하여 이에 어떻게 대응할지를 놓고 의견이 분분하였다. 특히 당군이 육지에 상륙할때를 노려 이를 먼저 공격하자는 좌평 의직의 의견과 약한 신라군을 먼저 막아야 한다는 달솔 상영의 의견이 충돌하였다. 과단성있기로 정평이 났던 의자왕도 향략에 빠져들고 노쇠한 탓인지 머뭇거리며 결정을 내리지 못하였다.

한편 이전에 죽은 좌평 성충과 고마미지현에서 귀양가있던 좌평 흥수가 주장했듯이 백강(금강) 입구를 막아 적의 해군이 진입하지 못하도록 하는 한편 육로로는 탄현을 봉쇄하자는 등 적군의 요충지 진입을 사전에 차단하자는 의견이 제기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또다른 대신들은 적군을 요충지로 진압하게 한 뒤에 말이나 배가 나란히 횡대를 지어 나아갈 수 없는 좁은 진격로의 중간에서 적군을 요격하자는 주장이 나오기도 하였다.

그만큼 당나라 군대의 개입은 당시 백제 조정에서는 생각치도 못한 갑작스러운 일이었기 때문이다. 아마도 백제 조정은 당나라가 고구려와의 싸움에만 메달린 나머지 백제와 신라 사이에 개입할줄은 꿈에도 모르다가 창졸간에 당군의 공격을 받자 패닉 상태에 빠졌던 것으로 보인다. 이전에 의자왕이 신라와 화친하라는 당나라의 요구를 거절하고 당에 보내던 조공사마저 단절해 버린 일 또한 이러한 자만과 확신이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3) 황산벌 전투와 백강의 싸움 

이처럼 백제 조정에서 선뜻 결론을 내리지 못하고 격론을 벌이는 와중에 나당 연합군은 매우 빠른 속도로 진격하여 백제의 숨통을 조여왔다. 백제 조정에서는 급한대로 달솔 계백으로 하여금 5천 결사대를 이끌고 황산벌에서 신라군을 막도록 하니 이것이 그 유명한 황산벌 전투였다.

계백은 싸움에 임하기에 앞서 처자식을 손수 죽여 결사의지를 표명하고는 5천 군사를 이끌고 황산벌로 진격해서는 험한 지형에 의지하여 3개의 진영을 설치하고는 쳐들어오는 신라군과 맞서 싸웠다. 계백의 분전에 힘입어 백제의 5천 군사는 희대의 명장인 김유신이 지휘하는 5만 군사와 싸워 4번이나 이기는 기염을 토했다. 그러나 결국 압도적인 병력차를 극복하지 못하고 5번째 싸움에서 신라군에게 패하였고, 계백은 장렬히 전사하였다.

한편 백강에서는 수만명의 백제군이 당나라 해군을 맞아 강의 입구를 막고 강변에 주둔하여 길목을 막고 있었는데, 이에 당군은 강의 왼편 기슭으로 상륙하여 산 위로 올라가 진을 쳤다. 이어 양군 사이에 접전이 벌어졌으나 백제군이 크게 패하였다. 마침 만조 때가 되자 당나라 해군은 일제히 강을 거슬러 진격하여 백제의 도성인 사비성 부근으로 나아갔다. 거침없이 진격해들어온 신라군과 당군은 7월 11일, 사비성 부근에 집결하여 합류하였다.[27]

(4) 웅진성으로의 피난 

7월 12일에 나당 연합군이 사비성을 포위하고 소부리 들판에 지을 치자 다음날인 13일에 의자왕은 태자인 부여효와 함께 웅진성으로 달아났다. 웅진성이 산간에 위치한 만큼 개활지에 위치한 사비성보다는 방어에 유리했기 때문일 것으로 여겨진다. 아무래도 웅진성에 주둔하며 싸움을 장기전으로 끌고 가려는 의도였던 것 같다.

하지만 장기전을 위해서는 지방 세력들과의 연대가 필수적인데, 위에서 살펴보듯 당시에 의자왕이 지방의 귀족세력들과 우호적인 관계에 있었다고 보기는 어렵다. 오히려 의자왕은 당의 침략 직전까지만 해도 왕권강화 과정에서 귀족 세력과 분쟁을 일으켰고 멸망 직전까지 이들과 화해하지 않았다. 또한 당과 신라의 공세가 임박했다는 성충의 경고도 무시했고 심지어 당의 공세가 고구려를 향한 것인지, 백제를 향한 것인지조차 판단하지 못하고 있었다.

여기에 의자왕의 웅진 도피는 중앙군이 괴멸한 이후에나 이루어지고 있었으므로 능동적이라고 보기도 어렵고, 또한 백제 부흥군이 되는 지방세력은 의자왕의 항복 당시에도 적극적 움직임은 없었으며 한참 뒤에야 제대로 움직이기 시작한다. 결국 의자왕은 지방 세력과 연대하여 장기전으로 끌고갈만한 상황도 아니었고 그럴 계획이 있었다고 볼만한 상황적 근거도 부족하다. 설령 그럴 의도가 있었다고 해도 전쟁 초기부터 계획된 플랜이었다기보다는 위기 상황이 닥치니 급박하게 이루어졌을 가능성이 높다.

(5) 사비성 함락

의자왕의 진정한 의도는 알 수 없으나, 당시 대세는 이미 기울어져 있었다. 사비성을 지키고 있던 의자왕의 둘째 아들인 부여태는 끝까지 적과 대항하려고 했던 것 같으나, 의자왕의 장자인 부여융과 대좌평 사택천복 등은 상황이 이미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악화된 것을 알고 성 밖으로 나와 항복하였다.

사비성에 남아있던 부여태는 스스로 왕위에 올라 즉위하려 하였으나, 태자 부여효의 아들인 문사는 이를 보고 불안을 느껴 성문을 열고 항복하였다. 이윽고 당군이 성안으로 들이닥쳐 사비성벽 위에는 당군의 깃발이 휘날리게 되었다. 결국 더 버티기 힘들어진 부여태 또한 항복함으로써 7월 13일에 사비성은 나당 연합군에게 함락당하고 말았다.

(6) 의자왕과 항복과 백제 멸망 

사비성이 함락된지 얼마 지나지 않아 7월 18일에 웅진성으로 달아났던 의자왕과 태자 부여효 또한 항복하였다. 이로써 백제는 개국한 지 678년 만에 망하게 되었다. 당군이 기벌포에 상륙한 7월 9일로부터 고작 10일만이었다(...).

그런데, 구당서의 기록에 따르면 당시에 '대장 예식(禰植)'이라는 인물이 의자왕과 함께 항복하였다고 하였다. 오늘날의 사학계에서는 웅진 방령이었던 이 예식이라는 인물이 의자왕과 태자를 사로잡아 놓고 당군에 항복한 것으로 보고 있다. 더욱이 최근에 예식과 동일인물로 여겨지는 예식진의 묘지명이 발굴되었는데, 그 내용을 통해 예식이 왕을 붙잡아 항복했다는 사실이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하지만 이런 주장에는 결정적인 결함이 하나 있는데, 삼국사기를 비롯한 일본서기, 구당서와 신당서 등 중국측 역사서에는 이러한 내용이 일절 없다는 것이다 [28]. 이들 기록에는 '於是 王及太子孝與諸城皆降'. 즉 '이에 이르러 왕과 태자 효, 여러 성이 항복하였다' 라고만 되어 있을 뿐 [29], 예식이라는 이름 자체가 보이지 않는 것. 물론 예식진 묘지명의 내용을 무시할 수는 없겠으나 이것을 달리 해석할 여지는 충분하며, 삼국사기 등의 역사서에는 왜 누락되었는지 하는 의문도 현재로서는 해결할 수 없다.

한편 신채호의 조선상고사에서는 당시 웅진의 수비대장이 의자왕을 잡아 항복하라 이르었는데, 이때 의자왕이 자살하려고 스스로 칼로 목을 찔렀으나 동맥이 끊지지 않아서 죽지 못하고 소정방에게 끌려갔다고 하였다. 여기서 등장하는 웅진 수비대장 또한 예식진과 동일 인물로 여겨진다.

이어 8월 2일에 나당 연합군은 전승을 기념하는 대연회를 열었다. 이때 신라의 무열왕과 소정방 등이 당상에 앉고, 의자왕과 부여융 등은 당하에 앉았는데, 이윽고 의자왕으로 하여금 술을 따르게 하니 이 기막한 광경을 지켜보던 백제의 군신들은 모두 눈물을 흘리며 통곡하였다고 한다.

2.6. 죽음과 사후 

660년 9월 3일, 의자왕은 처인 은고와 아들인 부여융, 부여효, 부여태, 부여연, 대좌평 사택천복 및 93명의 신하 및 장수와 1만 2천여명의 백성들과 함께 당나라로 압송되어 당나라의 수도인 장안에 이르었다.

그해 11월 1일, 당나라의 서울인 장안에 도착한 의자왕은 부여융을 비롯한 13명의 왕자, 대좌평 사탠천복과 국변성 등 37명 등과 함께 조당에 나아가 당고종과 측천무후를 만났다. 당고종은 이들의 잘못을 한차례 꾸짖은 후에 이들 모두를 그 자리에서 사면하였다.

그러나 의자왕은 한순간에 나라를 잃고나서 심한 충격을 받았던 것 때문인지 며칠 만에 망국의 회한 속에 결국 세상을 떠났다. 멀고 먼 이역땅에서의 비참한 죽음이었다. 이후 부여융이나 부여풍을 비롯한 몇몇 예외를 제외하고는 의자왕의 후손들은 모두 영영 고국에 돌아오지 못했다. 의자왕과 그의 후손들은 낙양 북쪽의 북망산에 묻혔다.[30] 당 고종은 의자왕이 죽자 금자광록대부위위경을 추증하고, 의자왕의 옛 신하들로 하여금 조상하게 하였다.

그러나 의자왕 입장에서 더더욱 안습한 것은 망국 군주 3종 세트라고 삼국지에 나오는 오나라 마지막 황제 손호와 남북조시대 진나라 마지막 황제 진숙보와 함께 묻힌 사실이다. 의자왕에게는 정말 억울한 일인데 손호나 진숙보는 정말로 나라를 망쳐놓은 인물들이고 나라에 아무런 기여를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31] 공교롭게도 이 묘역에는 멸망한 나라의 왕들만 모아서 매장했다.

의자왕은 재위초부터 최선을 다했지만 국제정세가 워낙 불리하게 돌아가는데다 고구려도 망해가는 상황이라 어쩔 수 없는 측면이 더 강하기 때문이다. 더구나 손호는 겉으로나마 귀명후라는 후작 작위를 받아 대접받았고 진숙보는 장성공이라는 공작 지위를 받아 죽을 때까지 술에 떡이 되어 산 것에 비하면 의자왕은 최후마저도 비참하다. 물론 의자왕은 말년에 향락에 빠져들고 자만심에 빠져 당의 침략을 예방하지 못하는 실책을 저질렀지만 이는 비극적인 일이 아닐 수 없는 것이다.
 

3. 삼천궁녀 설화의 허구 

흔히 의자왕 하면 삼천궁녀를 떠올리지만, 삼천궁녀는 진짜 삼천명의 궁녀를 거느렸다는게 아니라 문학적인 수사에 불과하다. 애당초 삼천궁녀가 처음으로 언급되는 것도 조선 초기에 와서의 일이며, 《삼국사기》에는 낙화암에 대해 아예 언급이 없고 《삼국유사》에서도 단지 의자왕과 후궁들이 뛰어내렸다는 이야기가 있다고 할 뿐이다. 조선 시대의 문인들이 낙화암과 백제를 소재로 한 글을 쓰면서 '백제가 멸망하면서 삼천궁녀들이 이 낙화암에서 떨어져 죽었구나'와 같은 표현을 남긴 사례가 많은데, 이러한 문학적 수사를 진짜로 오해한 결과로 의자왕은 오늘날까지 색욕의 화신으로 낙인찍혔으니 참 안타까운 일이다. 
백제 말기의 사비의 인구가 대략 12000명 내외로 추정되는데, 상식적으로 생각해 보아도 한반도의 고대 국가에서 한 도시에 삼천명이라는 비노동 인구를 먹어살릴수 있을 능력이 있을 리가 만무하다.

이와는 별개로 《삼국사기》에 서자 41명을 좌평으로 임명했다는 기사가 있다. 좌평으로 임명할 만큼 장성한 아들이 41명이나 있었다면 실제로 색욕 쪽으로 충분히 발달했을 수도? 다만 이 경우엔 양자나 친족 등 왕족을 비롯해 왕의 친위 세력의 인사들을 중용한 것을 표현했다는 해석도 있다. 역대급 호색한이었던 고려 충혜왕은 궁녀수가 100명을 조금 넘긴 숫자라고 한다. 의자왕의 삼천궁녀가 뻥인 이유

삼천궁녀 설화의 허구성을 지적하면서 엉뚱하게도 일제의 식민사관(나라가 멸망한 원인을 국제적인 정세에서 보지않고 왕 개인의 타락에 귀속시켰다는 점에서)탓으로 돌리는 경향도 있다. 하지만 백제의 멸망원인을 왕 개인의 부도덕에 귀속시키는 점은 당대의 《일본서기》부터 조선시대 각종 문인(황엄, 김흔, 조위 등)의 평가까지 거의 일관되게 표현되고 있다. 나라의 멸망을 왕 개인의 부덕에 귀인하는 것이 식민사관으로 간주되는 입장도 의문스럽다. 보통 식민사관으로 지목되는 각종 학설(조선시대 붕당망국론, 반도의 지정학적 약점, 유교망국론 등)을 보면 개개인의 역량이 아니라 오히려 체제 내부의 근본적인 모순점이 있으며 이의 회복불가능성을 강조하고 있기 때문이다 조선시대 문인의 평가중에는 '백제의 기운은 이미 쇠했으며 그 결정체가 의자왕이라는 암군'이라는 식으로 언급하는 경우도 있다. 이런 견해는 백제의 운명이 이미 빼도박도 못하게 멸망할 예정이라고 보기 때문. 의자왕의 책임은 덜어지겠지만 대신 백제는 구제불능 국가가 되었다.

또한 일제가 식민사관을 의도적으로 주입하기위해 '삼천궁녀'설화를 기정 사실화했는지에 대한 증거도 없다. 삼천궁녀 설화가 근대에 처음 등장하는 것은 1941년 윤승한의 역사소설 '김유신'인데 여기에 조선총독부의 의중이 숨어 있었다고 볼 수는 없기 때문이다.

삼천궁녀가 떨어졌다고 전해지는 낙화암.[32]

그럼에도 일반 대중의 머릿속에 '삼천궁녀는 사실'이라는 개념이 널리 퍼진 것은 그냥 역사공부를 깊게 하지않아 생긴 문제다. 더 큰 문제는 교과서에도 삼천궁녀가 실려있기 때문에 이건 그냥 정책방향이 잘못됐다고 보는게 맞다. 이렇게 대중의 역사상식과 실제 역사가 일치하지 않는 경우가 유일한 것도 아니다. 예를 들어 각종 드라마, 소설, 상식(?)등을 통해서 당나라 태종의 공격을 방어한 고구려의 장수는 양만춘이라고 많이들 알고 있지만 실제 정사에는 양만춘이라는 이름은 언급되지 않으며 그냥 안시성주라고만 언급될뿐이다. 또다른 예로 명량해전에서 이순신장군이 철쇄를 사용하여 왜군을 격퇴했다는 대중의 상식(?)에 비해 그 역사적 근거는 매우 빈약하며 오히려 불가능에 가깝다는 것이나...

다만 중국 서진의 무제 사마염의 1만 궁녀는 실제 《진서》에 기록되어 있다.
 

4. 그 외 

충청남도 부여군 백제왕릉원(능산리 고분군)[33]에는 의자왕과 그의 태자 융의 가묘가 있다. 부여군에서는 중국 뤄양(낙양)시와 함께 1995년부터 북망산에 묻힌 의자왕의 무덤을 찾아 유해를 수습해 오려고 노력했다. 그러나 북망산 일대에 오랫 세월동안 도굴로 엉망진창이었기 때문에 그의 무덤을 찾을 수 없었다. 땅을 더 파면 찾을 지도 몰랐지만 시간, 인력, 비용이 만만치 않았고 결국 그의 무덤으로 추정되는 지역의 흙을 퍼와 2000년 이 곳에 가묘를 세웠다.

이름에 '의자'가 들어가는 탓에 그 앉는 도구 '의자'가 연상돼서인지, 이름에 대해서 '하라는 일은 안하고 어디 앉아서 노닥거리기만 해서 의자왕이다'는 농담도 있다. 다만 몇몇은 진짜 저렇게 믿는 모양.

3천 궁녀... 즉 (낭설이지만) '여자가 많았다'는 점으로 인해 한국 한정으로 하렘의 대명사로 통하고 있다. 뭐 역대 왕조국가 왕들 중에서 후궁을 만든 왕은 여럿 있었지만(대표적으로 왕건), 의자왕은 '3천'이라는 경이적인 숫자에다 한 왕조의 종점(…), 그리고 그 이유가 매우 불건전하다!하여 의자왕은 하렘의 대명사 자리를 꿋꿋히 지키고 있다.

참고로 서동요의 내용을 적용해 생각해보자면 그가 백제 땅 넓히는 걸 혈연보다 더 우위에 뒀다는 해석이 나온다. 일반적으로 서동은 무왕이고 선화공주는 신라의 공주이자 무왕의 왕비로 의자왕의 모친으로 간주되는데, 그러면 그는 이모에게 계속 싸움 걸었다는 소리가 되기 때문이다.[34] 하지만 최근 미륵사지 석탑 복원 공사중 나온 책에서 무왕의 왕비가 선화공주가 아닌, 백제 귀족가의 딸임이 밝혀지면서 관련 학설에 대해 이론(異論)이 나오기도 했다(학계에서는 귀족가의 딸을 후처로 보는 등 기존의 주류 학설을 수정하는 쪽이 힘을 얻고 있다고 한다).

어떻게 보면 아버지인 무왕과 함께 신라를 거의 멸망에 이르기까지 몰아 세웠지만 마지막에 온갖 원인으로 인하여 신라에게 나라를 빼앗기고 말년에는 당나라까지 끌려가 그 곳에서 죽었으니 참 비참한 운명의 왕인 듯....

견훤이 후백제를 일으키면서 "의자왕의 원수를 갚자!"는 구호를 내걸었던 것을 보면, 그로부터 200년 뒤에도 옛 백제 지역 사람들은 의자왕을 동정한 것으로 보인다.


4.1. 평행이론?

의자왕과 흥선대원군 사이에는 재미있게도 여러 공통점이 많다. 단순히 망테크 나는 나라의 지도자들의 공통점이라고만은 하기 어려운.... 일단 둘다 권력의 주류에서 배제되어있는 상황에서 집권했으며 중장년층에 집권기를 보냈다. 또한 왕권 강화를 위해 노력했고 그를 위해 토목공사(태자궁,망해정과 경복궁)를 벌이기도 한 점, 각자 당시의 대세이던 세력(당과 서양)에게 고립주의를 고집하다 나라 말아먹은점한 점, 정계에 간섭하는 왕후(군대부인과 명성황후)와 반목했던 점, 중국에게 끌려가는 것으로 최후를 맞이한 점 ,부여융,이명복등 주변 왕족들이 하나같이 덜 떨어진 점,[35][36] 주변에 매국노들이 널린 점, 성충 흥수,개화파 같은 현실적인 충신을 씹은것[37][38], 역사적 평가가 애매한 점 등 비슷한 점이 많다. 이것 때문인지 몰라도 MBC 드라마 계백에서는 의자왕이 왕에 오르기 전에 흥선대원군이 집권하기 이전의 행동처럼 경쟁세력를 기만하기 위해 일부러 덜 떨어진놈 코스프레를 하는것으로 나오기도 했다. 가히 평행이론 다른 공통점 추가바람


5. 각종 미디어에서의 의자왕 

창작물 등에서는 사치와 향락의 대명사 격인 암군으로 묘사되는 경우가 많았지만 이후에 나오는 창작물일수록 영명했던 시절의 모습도 부각되고 있다.

5.1. 삼국기

KBS에서 방영하였던 사극 삼국기에서는 배우 길용우가 열연하였다.

서인석이 연기한 김유신, 유동근이 연기한 계백과 함께 작중 주인공이라 할 만한 행보를 보인다. 특히 태자 시절부터 직접 군사를 이끌고 신라와 싸우며 전공을 세우는 등 열정적인 모습으로 묘사된다.

이는 중반까지 이어지나, 중후반에 들어서 왕비를 잃고 슬픔에 잠겼다가 신라에서 왕비와 꼭 닮은 여인[39]을 보내는 미인계를 쓰는 바람에 점차 주색에 빠지게 되는 것으로 묘사된다. 또한 그 여인이 좌평 임자와 조미압을 통해 신라와 내통을 하면서 백제 멸망의 계기가 된다.

5.2. 천년지애

백제 멸망기를 다룬 괴작 드라마 천년지애에서는 의외로 직접적인 출연은 없고 등장인물의 언급을 통해 설정상으로만 존재하는 콜롬보의 아내형 캐릭터로 나온다. 설정상으로 주색을 탐하다 나당연합군이 처들어오자 왕성을 버리고 도망간 것으로 나온다. 드라마 안에서는 백제 멸망의 징조인 암탉과 참새의 교미 등등 삼국사기의 기록이 언급되기는 했다.

5.3. 황산벌


영화 황산벌에서 오지명이 분하여 감칠맛 나는 연기를 해준 바 있다.

작중에는 구수한 전라도 사투리를 구사하며, 능글맞으면서도 왠지 세상사에 지친 피로한 모습으로 묘사된다. 특히 스스로 인생에 회한이 많은듯한 모습으로 자주 묘사되는데,

여기서는 왕권을 바로 세우기 위해 아들 41명의 아들들을 모조리 최고위직인 좌평에 임명해버리는 바람에 신하들과 사이가 멀어져 결국 군사도 제대로 내지 못하고 당나라와 신라에게 나라를 빼앗기는 것으로 묘사되었다.

결국 백제가 망할 것을 미리 알고는 계백에게 명하여 신라군과 싸우며 시간을 끄는 동안에 당군 장수 소정방과 '쇼부(...)'[40]를 쳐서 백제 왕실을 건질 계획을 짜게 된다.

5.4. 연개소문

SBS 사극인 연개소문에서는 안습 배역 전문 문회원이 연기하였다.

이웃 신라의 공세에 안절부절 못하며 막강한 고구려의 힘에 의지하려 데꿀멍하는 모습으로 등장했다. 드라마상에서는 주로 재위 말기의 모습이어서인지 전형적인 암군에 가깝다.

합판소문 항목에 있는 전설의 발 CG 그야말로 꽃들이 떨어지고 있구나[41]가 나오고 바로 다음에 신하들과 함께 도망치는 장면이 나오는데 워낙 그 전의 발 CG의 임팩트가 강해서 묻혔다.

5.5. 계백


드라마 계백에서는 조재현이 연기했다. 살아남기 위해서 일부러 멍청이 짓을 하면서도 뒤로는 일을 꾸미는 캐릭터로 등장한다. 현명한 군주였지만 귀족 세력으로부터 자신의 힘을 기르기 위해 왕비인 은고에게 의존하는 모습을 보였고, 결국 계백과의 삼각관계 끝어 얻은 왕비 은고가 흑화함으로써 백제가 쇠퇴하는 것으로 묘사된다.

5.6. 대왕의 꿈


담당 배우는 이진우

드라마 중반의 보스. 일반적으로 알려진 사치향락의 대명사이자 폭군으로 간주되는 의자왕과는 달리, 즉위 전에는 예의가 반듯하며 매우 신중하고 사려 깊은 성격을 보여주는데다 부왕인 무왕 못지 않게 정치적인 식견 또한 높은 '해동증자'로서의 이미지를 보여주었고, 즉위 후에는 그야말로 사서에 기록된 재위 초 폭풍간지 의자왕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이제까지 의자왕을 다룬 미디어들 중 가장 실제에 근접한 모습을 보여주는 중.

태자 시절에는 신라와의 친선을 긍정적으로 생각하여 우호적 입장을 희망하고 있었으나, 비담의 간계 때문에 양국 관계가 틀어진 후로는 신라를 멸망시키기로 작심하게 된다.

즉위 후에는 신라에 대한 대대적 공세를 펼치고 대야성을 점령해서 김춘추의 아버지 김용춘을 죽였고 딸과 사위까지 죽게 했으며 백제의 중흥을 떨치려 했으며, 김춘추가 왜국에 갔을 때도 흥수와 계백을 왜로 파견해 잡아들이려 했지만 결국 김춘추를 놓아보내고 만다. 그러나 나당 동맹으로 당나라를 끌어들이는 김춘추를 매우 우습게 보고 자만에 빠졌고 급기야는 말년에 타락해서 놀자판 왕으로 변신. 흥수와 성충도 쫓아내고 아들 부여융의 간언도 듣지 않았다.

결국 나당연합군의 대대적 공세가 터지자 이를 막으려 했지만 백강에서 당군에게 패했고, 계백도 김유신에게 패하자 웅진성으로 도망쳤으나 이어지는 나당연합군의 공세에 전의를 상실하고 결국 김춘추와 소정방에게 항복하고 역사에서처럼 김춘추와 소정방 등에게 술을 따르는 치욕을 겪는다. 김춘추와 김유신, 법민에게는 그냥 정상적으로 따라주지만 소정방에게는 고의로 술을 넘치게 따라서 화가 난 소정방에게 밀침을 당하기까지 한다. 이후 당으로 압송되던 중에 병을 얻게 되었고 당 고종 앞에서 사면령을 받던 도중 피를 토하고 쓰러져 비참한 최후를 맞았다.

5.7. 삼천


뮤지컬 삼천에서 정상윤[42]이 역을 맡았다. 여타 미디어에서의 의자왕보다 신라나 당나라와 당당히 맞설 백제를 꿈꾸던 강인한 왕으로 표현된다. 그러나 이런 의자왕의 야심을 두렵게 여기던 예식장군[43]과 백제 왕실에 원한을 품고 있던 신녀 화야의 계략으로 인해 궁녀 연화에게 연심을 품게 되고, 결국 궁녀의 말만 믿고 정치를 한다는 소문이 돌아 백성들의 민심을 잃게 된다. 어머니가 선화공주인 것에 대해서 컴플렉스를 가지고 있으며, 작중 그것이 중요한 소재로 언급된다.
 

6. 삼국사기 기록 

一年春三月 의자왕의 즉위
一年秋八月 당에 사절을 파견하다
二年春一月 당에 사절을 파견하다
二年春二月 주군을 순행하여 백성을 위무하다
二年秋七月 미후성 등을 공격하다
二年秋八月 윤충이 대야성을 함락하다
三年春一月 당에 사절을 파견하다
三年冬十一月 고구려와 화친을 맺다
四年春一月 당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다
四年 융을 태자로 책봉하다
四年秋九月 김유신이 일곱 성을 빼앗다
五年夏五月 신라를 공격하여 일곱 성을 차지하다
七年冬十月 의직이 감물과 동잠 두 성을 공격하다
八年春三月 의직이 요차성 등을 함락하다
八年夏四月 옥문곡으로 진격하다
九年秋八月 은상이 신라의 석토성 등을 공격하다
九年冬十一月 겨울에 물이 얼지 않다
十一年 당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다
十二年春一月 당에 사절을 파견하다
十三年 가뭄이 들어 백성이 굶주리다
十三年秋八月 왜국과 우호관계를 맺다
十五年春二月 태자의 궁을 수리하다
十五年夏五月 붉은 말이 오함사에 들어와서 울부짖다
十五年秋七月 마천성을 중수하다
十五年秋八月 고구려, 말갈과 함께 신라의 성을 공격하여 함락시키다
十六年春三月 왕이 향락에 빠지다
十七年春一月 왕의 서자 41명을 좌평으로 임명하다
十七年夏四月 큰 가뭄이 들어 농토가 황폐화되다
十九年春二月 여우 떼가 궁중에 들어오다
十九年夏四月 태자궁에서 암탉과 참새가 교미하다
十九年夏五月 사비하에서 큰 고기가 나와 죽다
十九年秋八月 여자 시체가 떠내려오다
十九年秋九月 대궐 남쪽 도로에서 귀신의 곡소리가 들리다
二十年春二月 서울의 우물이 핏빛으로 변하다
二十年夏四月 두꺼비 수 만 마리가 나무 꼭대기에 모이다
二十年夏五月 천왕사와 도양사의 탑에 벼락이 치다
二十年夏六月 백제 멸망의 여러 징후가 나타나다
二十年 당나라와 신라가 연합군을 편성하여 백제를 공격하다

백제 망국의 왕 답게 믿기 힘든 기록이 많이 보인다(…)

이후로는 의자왕과 관련 없지만, 《삼국사기》 백제본기 의자왕 기록에 계속 써 있는 기록들

二十年 복신이 부흥운동을 일으키다
二十年 도침과 복신이 여러 무리를 모아 세력을 확장하다
唐 高宗 龍朔二年秋七月 풍왕이 복신을 살해하고 부흥운동은 종말을 고하다
唐 高宗 麟德二年 부여융과 신라왕이 웅진성에서 맹약을 맺다



주석
 
[1] 시호가 아니다. 이름 + 왕을 붙인것. 마지막 왕이라 시호가 없다.
[2] 의자왕의 출생년도는 정확히 알 수 없다. 그러나 의자왕의 맏아들로 여겨지는 부여융이 615년생이므로 의자왕은 대략 595년경에 태어난 것으로 여겨진다.
[3] 다른 왕들은 여러명이 모여 한 권이 완성된다.
[4] 아래에서 설명하듯이 개그의 소재로 많이 이용된다.
[5] 비록 시기와 상황은 많이 다르지만 당쟁을 이용해 왕권을 튼튼히 한 조선시대의 숙종이나 선조를 생각해보면 이해하기 쉬울 것이다.
[6] 전투가 있던 지역으로 표시되는 곳들 중 일부는 결국 의자왕 때에 잠시나마 백제 영토가 된다. 게다가, 당항성,가잠성,대야성같은 중요 거점 지역에 있는 성들 외에도 죽령 이남의 신라 북방 영토에 해당되는 크고 작은 40여개의 성을 함락시켰다. 의자왕 대의 백제의 최대 영토는 지도에 나와 있는 것보다 더 컸단 얘기다. 당나라로 갈 수 있는 한강길(당항성-가잠성 라인) 외교라인이 완전히 끊길 위험에 처하자 신라는 더욱더 필사적으로 당나라에 메달리게 된다
[7] 한편 이 일로 사위와 딸을 잃은 김춘추는 의자왕에게 깊은 원한을 품게 된다.
[8] 이에 대한 설명이 부실해서 '신라의 삼국 통일은 진흥왕 때의 기세를 타고 7세기까지 백제, 고구려가 관광당한 것이다'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상당히 많다.
[9] 훗날 신라의 문무왕으로, 태종무열왕 김춘추의 아들이며 김인문의 조카이다.
[10] 이는 651년에 당에서 백제로 보낸 서신의 일부이다.
[11] 이때 신라는 김유신을 보내 백제군이 내륙으로 파고드는 것을 견재하였다.
[12] 오늘날의 상주 부근.
[13] 오늘날의 천안 부근
[14] 40여 성이 마치 중국 대륙의 40여성인양 취급하고는 대륙설의 근거로 주장하는 자들이 있으나 여기서의 40여성은 "보루"와 같은 작은 요새들도 다 합쳐서 기록한 것으로 여겨진다.
[15] 이 부분이 신라의 위기가 잘 드러나지 않는 또 하나의 이유이다. 선덕여왕은 능력자이고, 김유신은 다 이겼다고 나오고, 진덕여왕은 이미지가 흐릿하고 무열왕 대에는 백제가 망한다. 완벽한 연결고리. 신라가 승자라서 그런 것도 있지만, 열전에서 장편판타지 소설을 집필한 김유신의 영향도 크다.
[16] 그러나 이 부분은 백제본기가 아닌 김유신 열전에서 주로 나오는 부분이다. 신빙성이 조금 떨어지는 편.
[17] 고교쿠 덴노의 야마토식 시호인 '아메토요타카라이카시히타라시히메노스메라미코토'.
[18] 새상은 의자왕의 동생으로, 새성(塞城)과 동일 인물로 여겨진다.
[19] 국방일보에서 <고대 동아시아 세계 대전>를 집필한 서영교 교수의 평으로, 실로 의미심장한 평이라 할 수 있다.
[20] 순식간에 성 40개를 빼앗기고, 왕의 사위와 딸이 골로 갔다. 원수가 아니고 무엇이리오(...). 게다가 백제가 더 파고들어왔다면 신라는 멸망했을지도 모를 상황이었다,
[21] 백제가 멸망한 뒤에 백제의 여러 귀족들이 일본으로 망명하였는데, 이들이 백제 멸망의 책임을 의자왕에게 지우는 기록을 남겼다는 견해가 바로 그것이다.
[22] 이는 의자왕이 향락에 빠져 백제가 망했다는 삼국사기의 기록과 비슷하다고 볼 수 있지만, 임금의 대부인이 국가의 권력을 빼앗아서 나라를 망쳤다고 서술한 점은 특기할 만하다. 《삼국사기》 등에는 군대부인에 대한 언급이 없다. 이러한 백제를 망하게 만든 주체에 대한 설명의 차이가 정확하게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권력을 횡탈했다는 표현이 왕을 등에 업고 신하들의 권한을 빼앗았다는 말인지 왕의 권력에 맞섰다는 말인지에 따라서 완전히 의미가 정반대로 뒤집힐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일단 백제 내부의 갈등과 권력투쟁을 반영한다는 정도로 볼 수 있을 것이다.
[23] 이는 간신배가 상좌평의 직책을 차지해 나라를 어지럽혔다는 뜻으로 해석되기도 한다.
[24] 거기다 현재의 장관급인 좌평 중 한 사람인 임자라는 인물은 조미압이라는 세객을 통해 김유신과 내통하기까지 하였다.
[25] 이준익 감독의 영화 황산벌에서도 이를 반영한 장면이 나온다. 의자왕이 귀족들과 병력 차출문제로 다투자 계백이 칼을 빼들어 귀족들에게 겨누는 장면이 그것.
[26] 지금의 논산 일대
[27] 본래 양군은 7월 10일에 합류하기로 하였으나 계백에 황산벌에서 신라군을 수차례 무찌르는 바람에 길이 막혀 일자가 하루 늦어졌다.
[28] 구당서 소정방 열전에는 기록되어 있다(其大將禰植 又將義慈來降)고 하나, 그 역시 달리 해석할 여지('그 대장 예식. 그리고 우두머리 의자왕이 와서 항복하였다')가 있다
[29] 삼국사기 백제본기 의자왕편의 내용
[30] 그의 증손녀는 당나라 황족과 결혼했다.
[31] 다만 손호는 초기에는 나름 명군이었으며 그나마 기울어져 가는 나라를 살리려는 의지가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초기 한정이었으며 결국 폭군이 되었다. 더구나 진숙보는 그냥 까방권 없는 암군으로 어쨌든 둘 다 나라를 망친 건 똑같다.
[32] 이름 부터가 떨어질 낙(落),꽃 화(花), 바위 암(巖). 꽃이 떨어진 바위이다.
[33] 백제 후기 왕들의 무덤으로 추정되는데 인근 정림사 터에서 백제금동대향로가 1993년 발견되었고 여러 정황으로 보아 왕릉군이 분명하다. 그러나 능산리 고분군은 백제 멸망 이 후 당나라 군대에게 도굴되고 세월이 흐르면서 여러 번 도굴당해 현재는 남아 있는 유물이 매우 적다. 따라서 묘들의 주인들을 알 수 없다. 성왕부터 법왕 때까지 왕, 왕비, 왕족들의 무덤으로 추정되는데 성왕은 송산리 고분군에 묻혔다는 설도 있다. 백제 중기 왕들의 무덤인 송산리 고분군은 문주왕 때부터 무령왕 때 까지 무덤으로 보이는데 무령왕릉이 여기 있다.
[34] 선화공주는 진평왕의 셋째딸로 알려져 있다. 그러니까 그가 신라에 쳐들어갔을 때 당시 신라 왕이었던 선덕여왕은 그의 이모가 된다.
[35] 게다가 부여융은 의자왕의, 이명복은 이하응의 아들이다...
[36] 고종(조선)에 대한 재평가로 이 부분은 상당히 약해졌다. 애초에 이름을 이명복이라고 적어놓은 것도 그렇지만, 고종과 흥선대원군은 살아생전 상대를 극 디스하였고 이는 현대의 지지파들도 마찬가지다.
[37] 성충과 흥수에 대해서는 의자왕을 비판하기 위해서 들어가 있다는 이야기도 있고, 실제로는 성충과 흥수의 의견을 따랐는데도 시간 문제 등으로 실패했다는 이야기도 있으며, 성충과 흥수 문제를 의자왕과 지방귀족의 대립과정으로 이해하기도 한다. 성충과 흥수의 주장을 따르기 위해서는 의자왕이 지방귀족들에게 숙이고 들어가는 모습이 반드시 필요해지기 때문.
[38] 개화파에 대해서는 자세한 것은 생략한다 지만, 흥선대원군 못지 않게 과대평가 되어있다는 것은 확실하다. 광무개혁 시기 독립협회에서 벌인 뻘짓이나 갑신정변 과정과 이후 전개 등이 대표적.
[39] 여담이지만 천년지애에서는 김사랑이 이 역할을 맡아 성유리와 함께 쌍벽을 이루는 발연기를 보여줬다.
[40] 작중 의자왕이 직접 사용하는 표현이다(...).
[41] 낙화암에서 궁녀들이 뛰어내리는 장면
[42] 오페라의 유령(뮤지컬)에서 라울 드 샤니 역을 맡았고, 겨울왕국 한국어 더빙판에서 크리스토프의 노래를 맡기도 한 배우다.
[43] 실존인물인 예식진을 삼천에서는 '예식'과 '진', 두 인물로 나누고 있다.



 
Posted by civ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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