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2024314
광해군이 불행해진 건 이 남자 때문이었다
[참모열전 20회: 이이첨 3부] 개혁 의지 없는 참모의 최후
14.08.20 12:06 l 최종 업데이트 14.08.20 12:06 l 김종성(qqqkim2000)
서자 출신인 광해군은 선조 임금의 세자가 되어 임진왜란을 총지휘하면서 '포스트 선조'의 입지를 다져나갔다. 하지만 광해군은 전쟁 8년 뒤인 1606년에 복병을 만났다. 선조의 적장자인 영창대군의 울음소리가 대궐에 울려 퍼진 것이다. 선조의 후처이자 광해군의 새 엄마인 인목왕후가 아들을 낳은 것이다. 광해군(당시 31세)은 이때부터 갓난아이 영창대군과 대권 경쟁을 벌어야 했다.
하마터면 자리를 빼앗길 뻔했던 광해군을 구원한 인물 중의 하나가 이이첨(1560~1623년)이다. 이이첨은 의병장 출신의 거물급 학자 겸 정치인인 정인홍이 광해군을 지지하는 상소문을 올리도록 막후에서 역할을 했다. 그렇게 해서 1608년 광해군 정권의 출범에 기여한 이이첨은 1623년에 정권이 붕괴할 때까지 광해군과 정치적 운명을 함께했다.
▲ 드라마 <왕의 여자>의 이이첨(배우 임혁 연기). ⓒ SBS
광해군 정권이 존속한 15년이란 햇수는 결코 짧지 않은 시간이다. 광해군의 여당인 북인당이 서인당(노론당의 뿌리)에 비해 사회적 기반이 얇았다는 점을 고려하면, 그런 소수파 정권이 15년간이나 유지된 것은 대단한 일이다. 여기에는 이이첨의 공로가 적지 않았다. 김개시·유희분·정인홍 등의 공도 컸지만, 이이첨처럼 '정권 안보'에 심혈을 기울인 인물도 없었다.
이이첨은 광해군의 반대파나 잠재적 위협세력을 제거하는 데 주력했다. 이이첨은 1613년 조령(충북과 경북을 잇는 고개)에서 발생한 강도 사건을 일곱 서자들의 역모 사건(이른바 '칠서의 옥사')으로 확대해서 영창대군을 죽이고 인목왕후(당시는 대비)를 후궁으로 격하 시켰다. 이이첨은 강도 사건 가담자로부터 영창대군을 왕으로 추대하려 했다는 진술을 받아냈다. 이로써 이이첨은 광해군을 위협할 가능성이 있는 세력을 사전에 약화 시키는 데 성공했다.
이이첨의 역모 사건, 광해군 정권을 약화시키다
이이첨은 칠서의 옥사 외에도, 1612년 김직재 옥사와 1617년 경운궁(덕수궁) 투서 사건 같은 역모 사건을 주도적으로 해결했다. 이를 통해 그는 광해군 정권을 공고히 만들어 나갔다.
그런데 이런 방법은 당장에는 광해군 정권을 안정 시켰지만 장기적으로는 정권을 불안정하게 만들었다. 이이첨이 주도한 사건들이 정말로 역모 사건이었는지에 관해서는 논란이 많다. 논란이 생길 수밖에 없었던 것은 역모의 근거가 불명확했기 때문이다. 명확한 근거도 없이 역모 사건을 일으키다 보니, 광해군 정권의 인기는 떨어질 수밖에 없었다. 이것은 광해군 정권을 약화 시키는 결과를 초래했다.
이런 과정에서 이이첨은 광해군의 젊은 계모인 인목대비의 안전까지 위협했다. 영창대군은 몰라도 인목대비까지 건드린 것은 광해군의 정통성을 뒤흔드는 부작용을 낳았다. 충효가 핵심 이념인 조선 사회에서 임금이 어머니를 후궁으로 격하 시키고 경운궁에 유폐 시킨 것은 임금의 자질을 의심케 만드는 일이었다. 이것은 1623년에 인조 쿠데타가 발생하도록 만든 핵심 원인 중 하나였다. 광해군 정권을 안정 시킬 목적으로 벌인 일들이 결과적으로 정권을 불안정하게 만든 것이다.
연이은 역모 사건을 통해 이이첨은 많은 것을 얻었다. 이를 통해 광해군의 신임을 높이고 실력자 유희분과의 경쟁에서 우위를 차지한 것이다. 광해군 정권 초기에는 유희분의 권세가 이이첨을 능가했지만, 이이첨발(發) 역모 사건들이 정국을 강타하면서 이이첨이 유희분을 능가하게 되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보면 이이첨은 잃은 게 많았다. 수많은 사람들을 자신과 광해군의 적으로 돌렸던 것이다.
▲ 광해군 시대의 주요 궁궐인 경운궁(덕수궁)의 내부 모습. ⓒ 김종성
광해군 아닌 광해군 '정권'에 충성한 이이첨
이이첨은 충성스러운 신하였다. 그가 역모 사건을 일으킨 것은 과잉충성 때문이었다. 그런데 그가 바친 충성의 의미에 대해 곰곰이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엄밀히 말하면 그는 '광해군'이 아니라 광해군 '정권'에 충성하는 사람이었다.
이이첨이 광해군 정권이 영원하기를 바랐을 것이라는 점에 대해서는 의심의 여지가 적을 듯하다. 이이첨처럼 광해군 정권을 지키기 위해 온갖 머리를 다 쓴 사람은 드물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광해군 정권에 대한 그의 충성심은 의심하지 않아도 무방할 듯하다.
그런데 이이첨은 광해군이라는 인물 자체에 대해서는 절대 충성을 바치지 않았다. 그는 광해군이 추진하는 주요 개혁에 대해 번번이 제동을 걸었다.
텔레비전 사극에는 일반 백성들이 포졸에게 호패를 제시하는 장면이 자주 등장한다. 하지만, 그런 제도가 실제로 시행된 기간은 그리 길지 않았다. 조선왕조가 세워진 뒤부터 광해군 정권이 출범하기까지의 216년 동안에 호패 제도가 시행된 기간은 14년간밖에 안 됐다.
16세 이상의 백성에게 호패 착용을 의무화하고 이 과정에서 백성들의 신상을 파악하는 것은 왕권을 강화 시키는 효과가 있었다. 이것은 백성 개개인에 대한 왕의 장악력이 높아지고 중앙정부의 조세 징수 능력이 높아지는 것을 의미했다. 1610년에 광해군이 호패제도를 추진한 것은 이런 이유 때문이었다.
하지만, 귀족들은 호패제도를 싫어했다. 왕권이 강해지는 것을 탐탁지 않게 여겼기 때문이다. 이이첨도 그런 귀족이었다. 그는 임진왜란 때 모집한 의병들을 사병으로 거느리고 있었다. 그는 사병들이 중앙정부에 의해 파악되는 것을 원치 않았다. 그래서 호패제도를 반대했다. 광해군의 호패제도는 이런 장애물을 극복하지 못하고 2년 만인 1612년에 좌절되고 만다.
이이첨은 광해군의 실리외교 혹은 중립외교도 반대했다. 1616년에 누르하치가 여진족을 규합해서 후금을 건국하자, 1618년에 명나라는 '악의 축'을 토벌하자면서 조선에 파병을 요청했다. 광해군이 이 요청을 얼른 수락하지 않자, 광해군 윤4월 24일자(1618년 6월 16일자) <광해군일기>에 따르면 이이첨은 명나라에 대한 의리를 지킬 것을 촉구하며 광해군을 압박했다.
최측근인 이이첨마저 실리외교를 반대했기 때문에 광해군은 이를 비밀리에 추진할 수밖에 없었다. 그는 '명나라의 파병 요청을 수락하되 전투 도중에 후금(청나라)에 항복한다'는 비밀 계획을 세운 뒤 이것을 파견군 사령관인 강홍립에게 은밀히 지시했다.
이이첨은 광해군의 개혁정책인 대동법에 대해서도 모호한 입장을 나타냈다. 찬성도 반대도 하지 않는 어중간한 태도를 취한 것이다. 이런 방식으로 불만을 표출한 것은, 대동법 시행이 서민층에게는 유리하고 특권층에게는 불리한 세제 개혁이었기 때문이다.
개혁 의지 없이 군주의 참모가 된 이이첨
▲ 광해군의 무덤. 경기도 남양주시 진건읍에 있다. ⓒ 김종성
이처럼 이이첨은 광해군의 핵심 개혁들을 반대하는 입장을 취했다. 광해군 정권을 지키고자 역모 사건을 일으키고 손에 피를 묻히면서도, 정작 광해군의 개혁 의지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었던 것이다. 이이첨이 광해군에게 원한 것은 '자리를 지키시되 복잡한 일은 만드시지 말라'는 것이었다.
최측근 참모인 이이첨마저 광해군의 개혁 의지를 몰라 주었으니, 광해군이 얼마나 고독하고 힘들었을지 짐작할 수 있다. 이렇게 정권 핵심부에서도 의견이 일치하지 않았기 때문에 광해군 정권은 그만큼 쿠데타에 취약할 수밖에 없었다.
주군의 정권은 어떻게든 지켜주지만, 주군의 개혁 의지엔 무관심했던 이이첨. 그는 광해군 무덤 앞의 석상처럼 광해군의 정치적 열망에 대해 돌멩이처럼 무관심했다. 그는 광해군의 개혁에 도움이 되기는커녕 장애가 되었다.
참모가 주군의 앞길에 걸림돌이 되는, 이 같은 불상사가 발생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이이첨이 개혁 의지도 없이 개혁 군주의 참모가 되었기 때문이다. 권력을 잡겠다는 마음이 앞서, 뜻이 다른 사람을 주군으로 모시다 보니 이런 모순이 생길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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