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1854900

장옥정의 그늘에 갇힌 세무행정 1번지
[사극으로 역사읽기] SBS 드라마 <장옥정, 사랑에 살다>, 두 번째 이야기
13.04.15 16:37 l 최종 업데이트 13.04.15 16:37 l 김종성(qqqkim2000)

▲  <장옥정, 사랑에 살다>의 장옥정(김태희 분). ⓒ SBS

역사의 패자인 장옥정(장희빈, 희빈 장씨)은 항상 인현왕후의 뒷전으로 밀려나 있다. 하지만, 어찌 보면 장옥정이 아직도 한양 한복판에서 힘을 과시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왜냐? 한국 세무행정이 장옥정의 그늘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고 볼 여지가 있기 때문이다. 

서울 종로구 낙원상가에서 안국역 쪽으로 200미터 정도 올라가면, 도로 왼쪽에 라이온스회관 건물이 있고 그곳에 종로세무서가 있다. 한국 세무행정의 1번지로 불리는 곳이다. 하지만, 이곳은 지난 2011년부터 사용되고 있는 종로세무서의 임시 청사다.

임시 청사는 길 건너편 골목길에 있는 종로세무서 신(新)청사 공사가 마무리될 때까지 사용되는 곳이다. 낙원상가에서 안국역 쪽으로 50미터 정도 올라가면 도로 오른쪽에 첫번째 골목이 나오고 골목 입구에서 100미터 정도 들어가면 신청사가 나온다.

신청사 공사가 막바지 단계에 있는 종로구 낙원동 58번지 8호 부지는 2011년 이전까지 종로세무서 청사로 사용되었고, 종로세무서 청사로 사용되기 전에는 서울지방국세청 청사와 국세청 청사로 사용된 적이 있었다. 따라서 이곳은 한국 세무행정 역사가 살아있는 현장 중 하나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런데 이곳은 한국 세무행정 못지않게 '죽은 장옥정'과 가장 관련이 깊은 장소다. 위에서 '한국 세무행정이 장옥정의 그늘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고 볼 여지가 있다'고 말한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죽은 장옥정과 종로세무서가 무슨 관계?


▲  장옥정의 사당인 대빈궁이 있었던 곳. 철거된 곳이 대빈궁 터다. 종로세무서 신청사 공사가 한창 진행 중이던 2011년 4월 12일에 찍은 사진. ⓒ 김종성

죽은 장옥정과 가장 관련이 깊은 장소라고 하면, 이곳에 장옥정의 무덤이 있었나 하고 생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한양 사대문 안에 왕실 무덤이 세워진 예는 거의 없었다. 장옥정의 무덤인 대빈묘는 그가 죽은 1701년 이래로 경기도 양주 및 광주를 거쳐 고양으로 옮겨졌다. 현재는 고양시 서오릉 경내에 있다. 따라서 낙원동 58-8은 장옥정의 무덤과는 상관없는 곳이다. 

현대인들은 죽은 사람과 관련하여 그의 무덤을 가장 중시한다. 그런 관념의 연장선상에서 납골당도 중시한다. 하지만, 20세기 이전 사람들은 그렇지 않았다. 그들은 무덤보다는 사당을 더 중시했다. 사당에는 죽은 자의 영혼이라도 있지만, 무덤에는 껍데기밖에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조선시대 대학자이자 광해군 정권의 핵심 멤버인 어우당 유몽인이 정리한 실화집인 <어우야담>에는 "사람이 죽으면 해골은 껍데기에 불과하다. 그래서 옛날에 소중하게 여긴 것은 사당이지 무덤이 아니었다"라는 문장이 나온다. 무덤보다 사당을 더 중시한 옛날 사람들의 관념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옛날에 한국인과 중국인들이 사당을 중시했다는 점은 사서오경의 하나인 <예기>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이 책의 '곡례' 편에서는 "군자가 집을 지을 때는 사당이 가장 먼저이고, 마구간과 창고가 그 다음이며, 자기 거처는 맨 나중이다"라고 했다. 군자는 부모의 사당을 가장 먼저 짓고, 그 다음에 실용적인 건물을 지으며, 맨 나중에 자기 거처를 지어야 한다는 뜻이다. 그만큼 사당이 중요시됐던 것이다. 

경기도 광주시 남한산성에는 병자호란 때 임시 궁궐로 사용된 행궁이 복원되어 있다. 복원된 행궁의 오른편에는 왕실 사당이 있다. 한양에 있는 종묘의 복사판이 복원되어 있는 것이다. 

병자호란 때 왕실에서는 전쟁을 피해 왕궁을 옮기는 김에 사당도 함께 이곳으로 옮겼다. 급박한 상황에서도 그렇게 한 것은 왕실 사당 즉 종묘가 없어지는 것은 곧 나라가 없어지는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종묘사직이 국가의 동의어로 사용된 것도 이런 관념 때문이다. 

사람은 죽으면 껍데기에 불과... 무덤보다 소중했던 '사당'


▲  남한산성에 복원된 왕실 사당. ⓒ 김종성

이런 정서 때문에 조선시대 사람들은 '죽은 장옥정'과 관련하여 무덤보다는 사당을 훨씬 더 중시했다. 그의 흔적을 느끼고자 서오릉의 장희빈 무덤을 찾는 현대인들과는 확연히 달랐던 것이다. 

그럼, 장옥정의 사당은 어디에 있을까? 조선시대에 그의 사당인 대빈궁이 세워진 곳은 두 곳이다. 하나는 위에서 소개한 낙원동 부지였고, 또 하나는 지금의 청와대 경내다. 청와대 경내에는, 왕을 낳았지만 왕비로 인정받지 못한 여인들의 사당인 칠궁이 조성되어 있다. 이 칠궁 속에 대빈궁도 포함되어 있다. 

대빈궁이 최종적으로 안착한 곳은 청와대 경내의 칠궁이지만, 죽은 장옥정에게 훨씬 더 의미가 큰 곳은 낙원동 부지였다. 낙원동 부지에 대빈궁이 조성된 과정을 살펴보면 그 점을 이해할 수 있다. 

장옥정이 죽은 1701년 이후, 왕실에서는 오래도록 그의 사당을 세워주지 않았다. 왕실에서는 그럴 생각이 눈곱만큼도 없었다. 장옥정이 사약을 마시고 죽은 데에다가, 그를 돕는 정치세력인 남인당이 정계에서 사실상 축출됐기 때문에 사당을 만들어줄 만한 분위기도 조성되지 않았던 것이다. 

하지만, 어떤 이유로 죽었든지 간에 시신을 묻을 장소만큼은 필요했다. 그래서 대빈묘라는 무덤을 만들어준 것이다. 그러면서도 영혼을 모실 사당을 지을 필요성은 느끼지 못했다. 그래서 장옥정의 무덤은 만들어주면서도 사당은 안 만들어준 것이다. 

장옥정의 영혼이 사당을 갖게 된 것은 죽은 지 21년 뒤인 1722년이었다. 그때 장옥정의 사당인 대빈궁이 한성부 중부 경행방에 세워졌다. 지금의 낙원동 부지에 세워진 것이다. 이렇게 21년 만에 사당이 세워진 곳이니, 죽은 장옥정에게 이곳이 얼마나 중요했는지 짐작할 수 있다. 당시 장옥정을 기억하는 사람들은 죽은 장옥정을 낙원동 대빈궁과 연결했을 것이다. 

21년 만에 어머니 사당 세운 경종, 그동안 얼마나 괴로웠을까


▲  대빈궁 터. 종로세무서 신청사 공사가 막바지에 들어선 이후인 지난 14일에 찍은 사진. ⓒ 김종성

낙원동 부지가 중요했던 또 다른 이유가 있다. 그것은 이 부지에 대빈궁을 세운 사람이 장옥정의 아들인 경종 임금이었기 때문이었다. 대빈궁이 세워진 시점인 1722년은 경종이 왕이 된 지 2년 뒤였다. 

<경종실록>에 수록된 '경종대왕 묘지문'에 따르면, 대빈궁은 경종의 왕명에 의해 세워졌다. 만약 장옥정의 아들이 왕이 되지 않았다면, 왕실이나 조정에서는 장옥정의 사당을 결코 세워주지 않았을 것이다. 

일반적으로 삼년상이 끝나면 죽은 이의 영혼을 사당에 모셨다. 삼년상은 윤달을 제외하고 25개월간 치러졌다. 대체로 26개월 혹은 27개월 정도의 기간이다. 그런데 경종의 경우에는, 무려 21년 만에 어머니의 사당을 세웠다. 그가 그동안 마음 속으로 얼마나 죄스럽고 괴로웠을지 짐작할 수 있다. 

분명히, 경종은 자기가 왕이 되지 않았다면 어머니의 사당도 세우지 못했을 것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러므로 그가 낙원동 대빈궁에 대해 어느 정도의 애착을 가졌을지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다. 

이처럼 낙원동 대빈궁은 왕실에서 최초로 세운 장옥정 사당일 뿐만 아니라 그의 아들이 어렵사리 세운 사당이었다. 고종 임금 때인 1870년에 대빈궁이 지금의 청와대 경내로 옮겨지긴 했지만, 죽은 장옥정한테는 청와대 대빈궁보다는 낙원동 대빈궁이 훨씬 더 뜻깊은 장소였다. 

그런데 그런 장소에 국세청·서울지방국세청·종로세무서 등이 둥지를 틀고 살았다. 그리고 조만간 종로세무서가 그곳으로 돌아간다. 이 정도니, 주요 권력기관인 세무당국이 장옥정의 품 안에 살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4월 14일 정오 무렵에 낙원동 58-8에 가보니, 신청사 공사가 거의 마무리된 것 같았다. 한국세무행정의 1번지인 종로세무서가 장옥정의 품에 도로 안기는 상상을 해봤다.



 
Posted by civ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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