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1965697
한명회는 왜 신숙주를 죽이지 않았나
[참모열전 13회: 한명회 3부] 한명회의 굵고 길게 사는 방법
14.03.07 20:57 l 최종 업데이트 14.03.07 20:57 l 김종성(qqqkim2000)
▲ 드라마 <한명회>의 한 장면. ⓒ KBS
하급 궁지기에서 계유정난(수양대군의 쿠데타) 주역으로 뛰어오른 한명회. 그는 단계적이면서도 신속하게 관직 품계를 높여 갔다. 쿠데타가 벌어진 1453년에 한명회는 39세 나이로 정8품을 받았다가 4품으로 승진했고, 이듬해에 승정원(비서실)에 들어가면서 정3품으로 올라갔다.
1457년(43세)에는 장관급인 이조판서(정2품)가 됐고, 1462년(48세)에는 부총리급인 우의정(정1품)이 됐고, 1466년(54세)에는 총리급인 영의정(정1품)이 됐다. 권력 핵심부에 진입한 때인 1453년(39세)부터 관직에서 물러날 때인 1474년(62세)까지 그는 25년간 권력의 심장부에 있었다. 1487년에 그는 75세의 나이로 눈을 감았다. 하지만 그 눈은 다시 떠지게 된다. 뒷부분에서 그 이야기가 나온다.
대단한 것은 수양대군(세조)에서 예종으로, 예종에서 성종으로, 왕이 바뀔 때마다 한명회의 권세가 한층 더 강해졌다는 점이다. 그의 부귀영화가 어느 정도였는가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있다. 그는 예종(수양대군의 차남)과 성종(수양대군의 장남의 차남)의 장인이었다. 연속으로 두 왕의 장인이 된 사례는 조선왕조에서 한명회뿐이다. 그만큼 그에 대한 정치적 견제가 취약했던 것이다.
한명회의 정치 인생에 고비가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다. 가장 자존심 상하는 악몽은 자기보다 26세 어린 남이 장군한테 정치적 주도권을 내준 일이다. 한명회의 주군인 수양대군은 왕이 된 뒤의 어느 순간부터 한명회를 멀리했다. 그래서 수양대군은 막판에 이준(조카)과 남이 같은 20대 청년들에게 영의정·병조판서 직책을 주고 이들을 신주류로 만들었다.
이 때문에 한명회는 권력 중심에서 밀려났다. 하지만, 수양대군이 죽은 뒤 남이를 역모죄로 몰아 처형하는 등 신주류를 탄압하는 과정에서 한명회는 권력을 회복하고 제2의 전성시대를 열었다. 뒤이은 성종 때는 제3의 전성시대를 구가했다.
성종 집권기 때 폐비 윤씨(연산군의 생모)를 죽이는 데 찬동했다는 이유로 한명회는 사망 30년 뒤인 1504년에 부관참시를 당했다. 위에서, 한명회가 죽은 뒤에 그의 눈이 다시 떠졌다고 한 것은 이것을 두고 하는 말이다.
하지만 그것은 죽은 뒤의 일이다. 계유정난 이후의 한명회는 대체로 탄탄대로를 달렸다. 그는 굵고 길게 살았다. 조선시대 참모들 중에서 이렇게 안정적인 정치인생을 산 사람은 없었다. 그래서 15세기 중반은 '명회의 전성시대'였다.
한명회가 권력을 오래 가질 수 있었던 이유
한명회가 권력 정상에서 오래 버틴 비결 중 하나는 탁월하고 감각적인 두뇌였다. 한 번은 이런 일이 있었다. 조선시대 통역관인 조신이 지은 <소문쇄록>이란 실화집에 나오는 이야기다.
수양대군이 왕이 된 뒤 수양대군·한명회·신숙주가 술자리를 가진 적이 있다. 한명회와 신숙주는 친구 사이였다. 이 자리에는 수양대군의 세자도 동석했다. 술에 취한 수양대군이 신숙주의 팔목을 잡으면서 "경도 내 팔을 잡으시오"라고 말하자, 만취한 신숙주는 수양대군의 소매 속으로 손을 쑥 집어넣고 팔목을 꽉 잡았다. 수양대군이 "아! 아파!" 하고 외칠 정도였다. 지켜보던 세자의 표정이 싹 바뀌었다.
수양대군은 아무렇지도 않은 듯 술자리를 이어갔지만, 한명회의 머릿속에는 핏빛이 떠올랐다. 팔목을 잡힌 직후에 수양대군이 세자에게 "나는 이렇게 해도 되지만, 너는 이렇게 하면 안 돼"라고 나지막하게 말하는 것을 들었기 때문이다.
술자리는 기분 좋게 끝났지만, 한명회는 수양대군이 신숙주를 의심하고 있다는 것을 간파했다. 밤중에 귀가한 그는 집사한테 "신숙주의 집에 가서 오늘은 불을 끄고 일찍 잠자라고 알려줘"라고 지시했다.
공부벌레인 신숙주는 평소 술을 마신 뒤에도 잠깐 수면을 취했다가 다시 일어나 등불을 켜고 독서하는 습관이 있었다. 집사가 달려가 보니, 신숙주는 이미 술을 깨고 독서하는 중이었다. 신숙주는 한명회의 연락을 받고 즉시 불을 껐다. 그 직후였다. 궁에서 나온 내시 하나가 신숙주의 집을 둘러보고 돌아갔다.
그날 저녁 술자리에서 신숙주가 팔목을 힘껏 잡자 수양대군은 신숙주의 충심을 의심했다. 그래서 내시를 보내 신숙주를 염탐했던 것이다. 신숙주가 평소처럼 독서하고 있다면 자기 팔목을 고의로 꽉 잡은 것이고, 평소와 달리 잠들어 있다면 취중에 벌어진 실수가 되는 것이다. 한명회는 이런 기운을 감지하고 신숙주에게 미리 귀띔을 했던 것이다.
"화려한 걸 좋아했고, 재물을 탐하고 여자를 좋아했다"
한명회의 두뇌를 보여주는 또 다른 사례는 1456년에 사육신의 수양대군 암살 계획을 거사 직전에 차단한 일이다. 사육신 세력은 창덕궁 광연전(경훈각 1층)에서 열린 명나라 사신을 위한 연회에서 수양대군을 죽이기로 계획했다. 왕의 호위 무사인 별운검에 이들이 포함되어 있었기에 그런 계획이 가능했다.
▲ 창덕궁 경훈각(왼쪽). 세조 당시에는 2층 건물이었다. ⓒ 김종성
행사 직전이었다. 실학자 이긍익의 <연려실기술>에 따르면, 한명회는 왠지 섬뜩했다. 잠시 뒤 칼을 든 별운검이 수양대군을 호위하게 될 상황을 상상하자 불길한 예감이 들었던 것이다. 그래서 그는 수양대군에게 "오늘은 별운검을 들이지 마시지요"라고 제안했다. 별운검의 입장은 갑자기 취소됐고, 내부자 고발로 사육신 세력의 계획은 세상에 드러났다(사육신 사건). 한명회의 감각적인 두뇌가 없었다면, 수양대군은 입속에 술과 안주가 들어 있는 상태에서 등에 칼을 맞았을 것이다.
한명회가 권력을 유지한 또 다른 비결은 '꿈의 하향 조정'이다. 계유정난 전후만 해도 한명회는 세상을 뒤엎겠다는 열망이 강했다. 하지만 권세가 안정되면서 그는 꿈을 접었다. 부귀영화 쪽으로 눈길을 돌린 것이다. 그는 먹고 마시고 즐기고 권력을 휘두르는 삶을 일생토록 추구했다.
<성종실록>에 수록된 '한명회 졸기'에서는 "성격적으로 화려한 것을 좋아하고 과시하기를 좋아했으며, 재물을 탐하고 여자를 좋아했다"고 했다. 별서(별장+농장)인 압구정에서 그가 화려한 삶에 탐닉했다는 것은 잘 알려진 이야기다.
한명회가 꿈을 하향 조정할 수밖에 없었던 데는 사정이 있었다. 계유정난을 전후한 시기만 해도 그는 수양대군의 일급 참모였다. 그런데 정권이 안정되면서 제3의 인물이 일급 참모로 부각되기 시작했다. 그가 바로 신숙주다.
신숙주는 계유정난에는 가담하지 않았지만, 수양대군으로서는 놓칠 수 없는 인재였다. 자타가 공인하는 천재요 능력자였기 때문이다. 비록 술자리에서는 정신줄을 놓는 때도 있었지만, 신숙주는 수양대군의 천하에 꼭 필요한 인물이었다. 나라를 빼앗는 데는 한명회가 필요해도, 빼앗은 나라를 지키는 데는 신숙주가 필요했던 것이다.
그래서 수양대군은 한명회보다 신숙주를 중용했다. 이 때문에 신숙주는 단순한 참모가 아니라 소통령 혹은 공동 대통령의 위상을 차지했다. 외교나 군사 문제에서는 신숙주의 동의 없이 그 어떤 국가정책이 나올 수 없을 정도였다.
신숙주는 한명회의 친구였다. 만약 친구가 아니었다면 신숙주는 한명회의 정치공세를 받았을 것이다. 신숙주는 한명회처럼 부귀영화에 탐닉하는 사람은 아니었다. 한명회에 비하면 상당히 고상한 인물이었다. 덕분에 두 사람 사이에는 공존 관계가 성립할 수 있었다. 똑같이 권력의 정상에 있었지만, 신숙주는 자기 나름의 정치적 이상을 추구하고 한명회는 부귀영화를 추구했다. 만약 두 사람이 똑같이 고상했거나 똑같이 속물이었다면, 둘은 필시 치열한 권력투쟁을 벌였을 것이다.
소설이나 텔레비전의 단골소재, 한명회
▲ 경기도 의정부시 고산동에 아름답게 조성된 신숙주의 무덤. ⓒ 김종성
일생동안 부귀영화를 누리다 보니, 한명회한테는 엄청난 정치자금이 모여들었다. 위에서 소개한 '한명회 졸기'에서는 "땅과 노비와 보물이 많이 들어왔고, 주택을 많이 점유하고 애첩을 많이 두었다"고 했다. 이런 자금으로 그는 명나라에까지 연줄을 만들어놓았다. 이것은 한명회의 정치적 장수를 가능케 했던 요인 중 하나였다.
감각적 두뇌, 꿈의 하향 조정, 막강한 자금력에 이어 혼맥의 형성이라는 요소도 한명회의 장수를 이해하는 데 빼놓을 수 없다. 한명회는 딸 하나를 수양대군의 차남인 예종에게 시집보내고 또 다른 딸을 수양대군의 손자(장남의 차남)인 성종에게 시집보냈다. 무슨 이런 콩가루 같은 족보가 다 있나 하는 느낌이 들 정도다. 한편, 그는 신숙주와도 사돈을 맺었다.
한명회가 유학 이념에 충실한 선비였다면, 그렇게까지 혼맥을 만드는 데 열중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한명회는 고상한 유학 이념을 실천하는 인물이 아니었다. 이런 세속적인 가치관 덕분에 그는 혼맥을 활용해서 왕실을 자기 손아귀에 둘 수 있었다.
하지만 혼맥은 결국 걸림돌로 작용했다. 성종 때였다. 자기 딸인 공혜왕후가 사망한 1474년부터 한명회는 끈 떨어진 연 신세가 되었다. 이때부터 내리막길이었다. 감각적 두뇌, 꿈의 하향 조정, 막강한 자금력이라는 특장점에도 불구하고 혼맥의 손상이라는 상황에 직면하자, 천하의 한명회도 왕실을 더 이상 마음대로 다룰 수 없었던 것이다.
한명회는 훌륭한 정치인이 아니었다. 그의 시대에 조선사회의 양극화가 심해져서 이것이 훗날 홍길동의 반란 같은 민중반란으로 이어지고, 이런 분위기 속에서 재야세력인 사림파가 정치적 도전을 개시한 사실에서 알 수 있듯이, 한명회는 자신의 권력은 잘 지켰지만 조선이란 나라를 질적으로 발전시키지는 못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명회는 소설이나 텔레비전에서 끊임없이 단골 소재가 되고 있다. 이것은 그가 오래도록 정권을 잡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하급 궁지기에서 권력 핵심부에 진입한 입지전적인 참모였기 때문이라고 평가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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