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www.okpedia.kr/Contents/ContentsView?contentsId=GC05311870&localCode=krcn
신빈 영릉진 고성 (新賓 永陵鎭 古城)
중문 : 新宾永陵镇古城
유형 : 평지성
현 소재지 : 요령성 무순시 신빈만족자치현 영릉진
정의
요령성(遼寧省) 무순시(撫順市) 신빈만족자치현(新賓滿族自治縣) 영릉진(永陵鎭)에 있는 고구려의 평지성.
개설
동남 1㎞ 이도하(二道河)의 서안에 위치한 평지성으로, 제2 현도군(玄菟郡) 군치로 추정된다. 고구려가 현도군을 혼하(渾河) 유역으로 몰아낸 뒤에도 사용되었다.
위치
신빈 영릉진 고성은 무순시 신빈현 영릉진의 동남쪽, 소자하(蘇子河)와 이도하가 합류하는 곳의 남안에 자리잡고 있다. 고성의 동쪽으로 이도하가 북쪽으로 흐르다가 동벽 북단 부근에서 서쪽으로 방향을 바꾸어 서북단을 지나쳐 소자하로 들어간다. 북쪽으로 이도하자 건너편에 소자하가 서쪽으로 흐르고 있으며, 소자하 건너편 북쪽에도 지류들이 소자하로 흘러든다. 이처럼 영릉진 일대는 소자하와 그 지류들이 만나면서 비교적 넓은 충적 평지를 이루고 있으며, 그 한복판의 평지에 고성이 자리잡고 있다.
고성의 서쪽에는 환인(桓仁)∼영릉진 옛 도로가 지나가고 있으며, 그 서쪽으로 연통산(煙筒山) 산줄기가 동서로 길게 놓여 있다. 동쪽으로 이도하자 건너편에 건주 여진(建洲女眞)의 도성이었던 노성(老城) 즉, 혁도아라성(赫圖阿拉城)이 있다. 남쪽으로 이도하자촌 동남쪽에는 고구려 산성이며 건주 여진이 사용했던 이도하자 구노성(舊老城)이 자리잡고 있다. 북쪽으로 소자하 북안을 따라 신빈-심양(瀋陽) 도로가 지나간다.
고성이 있는 이 지역은 소자하 연안 교통로에서도 중요한 위치에 해당한다. 여기에서 소자하 하류를 따라가면 혼하를 거쳐 요동 평원에 나아갈 수 있다. 소자하를 거슬러 올라가면 부이강(富爾江)을 거쳐 환인이나 통화(通化) 일대로 나아갈 수 있다. 또 남쪽으로 이도하를 거슬러 횡도하자(橫道河子) 관애(關隘)를 통과하면 환인으로 들어갈 수 있다. 한(漢) 이래 중국 군현 세력이나 요동 진출을 꾀한 고구려의 입장에서나 모두에게 중요한 전략적 요충이었다.
현황
성터는 이미 경작지로 개간되었지만, 성벽의 윤곽은 분명하게 남아 있는 편으로 지표면에서 1~2m 높게 형성되어 있다. 북쪽 성벽은 이미 완전히 훼손되었으며, 동벽은 부분적으로 보존되어 있다. 남벽과 서벽은 상태가 비교적 양호한 편이다. 동벽의 남은 길이는 83.5m, 남벽 108m, 서벽 151m, 방위는 182도이다.
신빈 영릉진 고성은 강변에 자리잡고 있어 성벽 일부가 유실되었을 뿐 아니라 경작과 벽돌 제조용 흙 채취 등으로 성벽이 파괴되어 본래의 모습을 많이 상실하였다. 이에 한동안 성의 구조는 북쪽의 작은 토성과 남쪽의 큰 토성이라는 2개의 성곽으로 이루어졌다고 이해되기도 하였다. 그 뒤의 조사 결과 경작지로 개간되는 과정에서 중앙 부분이 절개되어 남북의 2개 성으로 오해하게 되었던 것이 밝혀졌고, 각 성벽은 거의 직선으로 전체적으로 동서가 좁고 남북이 긴 장방형으로 추정되었다.
이후 2004~2008년의 5년 동안 본격적인 발굴 조사가 실시되어 신빈 영릉진 고성에 대한 새로운 사실들이 밝혀졌다. 우선 성의 평면이 장방형이라는 사실이 확인되었다. 성벽이 안쪽에서 바깥쪽으로 토질과 색깔이 서로 다른 3종류의 판축흔이 확인되었다. 이로써 3차례의 성벽 축조가 있었다고 추정되고 있다.
동·서·남의 3면에 대한 조사 결과, 성의 북쪽으로 넓은 평야 하곡 지대가 형성되고 있어 북벽에 성문이 한 곳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동벽과 서벽에서는 문지가 발굴되었다. 동문지에서는 장부와 지도리 세트가 나오기도 하였다. 남문이 있었을 것으로 보았던 과거의 견해는 부정되었다. 또한 지층의 퇴적 상황으로 보아 문화층은 모두 3시기로, 한대와 고구려 시기 그리고 요금(遼金) 시기라고 보고 있다.
성 안 동북쪽과 중앙부에서 대형 건물터들이 나왔고, 주거지는 주로 성 안 동남쪽에 분포되었다. 주거지에는 모두 온돌이 설치되었고 구들을 갖추고 있었다. 건물터들을 중심으로 한 일대에서 채색된 사계격연화문(四界格蓮花紋) 와당을 비롯한 권운문(卷雲紋) 와당이 대량으로 발견되었다. 한편 성 안에서는 봉니(封泥) 1점이 나왔는데 남아 있는 글자로 보아 '고구려승(高句驪丞)'으로 추정되고 있다.
의의와 평가
신빈 영릉진 고성은 발견 초기부터 고구려에 의해 현도군이 소자하 연안으로 퇴축한 시기의 제2 현도군 군치로 여겨져 왔고 1∼2세기 이후에는 고구려가 연용했다는 것이 학계의 공통된 인식이었다.
그런데 2000년대의 발굴 결과를 토대로 후한 말 공손씨(公孫氏) 세력이 이 성을 상당 기간 사용했다는 주장이 최근 나온 바 있다. 구체적인 글로 발표된다면 그 이해의 문제점을 두고 논쟁이 불가피할 것으로 보인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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