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1841367
김구 죽인 안두희, 그가 여유만만했던 이유
[사극이 못다 한 역사 이야기⑦] 경교장에서 김구를 기억하다
13.03.07 15:41 l 최종 업데이트 13.03.07 15:41 l 김종성(qqqkim2000)
▲ 경교장. 복원작업이 진행되던 지난 1월 5일에 찍은 사진. ⓒ 김종성
서울 광화문광장 이순신 동상에서 왼쪽으로 10분 내지 15분 거리. 이곳에는 그간의 복원작업을 거쳐 지난 2일 개방된 경교장이란 2층 건물이 있다. 여기는 백범 김구가 1945년 11월 23일부터 1949년 6월 26일까지 거주했던 곳이다.
이곳의 원래 명칭은 죽첨장이었다. 일제시대에 당대 최고의 건축가인 김세연이 설계하고 자산가인 최창학이 소유했던, 당시로써는 꽤 호화스러웠던 건물이다. 김구는 일본식 이름이 싫다 해 이곳에 경교장(京橋莊)이라는 명칭을 새로 부여했다.
영국 왕립아시아협회가 소장하고 있는 1900년도 서울 지도에 따르면, 경교장 왼쪽에 남북으로 흐르는 하천이 있었고, 그 위에 경교라는 다리가 놓여 있었다. 이런 사연 때문에 그런 이름이 붙은 것이다.
김구가 경교장에 마지막으로 거주한 날이었던 1949년 6월 26일 일요일이었다. 이날 오전 11시께 30대 초반의 장교가 경교장에 나타났다. 허리에 총을 찬 군인이었다. 그는 약 세 시간 뒤 김구를 암살하게 될 육군 소위 안두희였다. 이날 그는 허리에 찬 그 총을 사용하지 못했다(이 점은 뒤에서 설명한다).
그 시각, 김구는 현관문 앞을 기준으로 2층 왼쪽 창가에 있었다. 어쩌면 창문을 통해 안두희의 모습을 봤는지도 모른다. 당시의 종합신문인 <자유신문>의 1949년 6월 28일 자 보도를 근거로 이날 상황을 정리해보자.
안두희는 관리실에 들어가 당직자인 이풍식에게 면회를 신청했다. 안두희는 김구가 위원장으로 있는 한국독립당의 당원이었다. 그래서 김구와는 이미 안면이 있었다. 그로부터 한 달 전에도 꽃병을 들고 김구를 면회한 적이 있었다. 그래서 그 누구도 안두희의 방문 목적을 의심하지 않았다.
이풍식은 안두희에게 기다려줄 것을 요청했다. 그래서 안두희는 관리실에서 한참 기다렸다. 거물급 인사를 암살하러 온 사람치고 그는 너무 담담했다. 관리실에서 잡담까지 건넬 정도였다. 잡담의 주제는 주로 군사 문제였다.
첩보 영화의 한 장면 같았던 김구 암살
▲ 김구의 사진. 경교장이 개방된 뒤인 3월 5일에 경교장 2층에서 찍은 사진. ⓒ 김종성
시간이 꽤 흘렀다. 낮 12시 50분께, 면회가 허용됐다. 누가 뭐라고 안했는데도, 안두희는 "무기를 차고 선생을 뵐 수는 없죠"라며, 허리에 찬 총을 스스로 내려놨다. 그리고는 선우진 비서를 따라 관리실을 나와 1층 홀로 들어섰다.
1층 홀의 왼쪽에는 2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이 있다. 선우진 비서는 그곳으로 안두희를 안내했다. 계단 앞에서 비서는 돌아섰다. 안두희 홀로 올라가게 한 것이다. 김구와 안면이 있을 뿐 아니라 한국독립당 당원이었기 때문에 그를 믿은 것이다. '한 달 전에도 면회한 적이 있으니, 2층까지 안내하지 않아도 혼자 잘 가겠지'라고 생각한 모양이다.
안두희는 계단을 따라 2층으로 올라갔다. 2층에 가면 긴 복도가 나온다. 복도 오른쪽(건물 밖에서 보면 왼쪽)에는 김구의 집무실과 침실이 있었다. 김구는 집무실 옆 창가의 의자에 앉아 있었다.
관리실에서 안두희는 허리에 찬 총을 스스로 내려놓고 나왔다. 그런데 2층에 올라간 뒤에 안두희의 몸속에서는 또 다른 총이 나왔다. 안두희는 방아쇠를 당겼고 김구는 쓰러졌다. 이때 김구가 입고 있었던 옷은 지난 2일부터 경교장 지하 공간에 전시되고 있다.
아래층 사람들은 2층 상황을 신속히 파악하지 못했다. 첩보 영화의 한 장면처럼, 안두희가 2층 계단을 오르자마자 경교장에 두 통의 전화가 걸려왔다. 그래서 안두희가 김구에게 접근할 때 선우진과 이풍식은 각각 전화를 받아야 했다. 하필이면 그때 라디오 소리도 매우 요란했다. 그래서 두 사람은 2층의 총소리를 전혀 듣지 못했다. 총소리가 아주 크지는 않았던 모양이다.
1층 사람들은 총성을 듣지 못했지만, 경교장 밖에서 경비를 서던 경찰관 두 명은 그 소리를 들었다. 그러나 이들이 소총을 들고 1층 홀에 뛰어들었을 때는 이미 상황이 종료된 뒤였다. 그때 안두희는 유유히 계단을 내려오고 있었다. 창문에서 뛰어내려 도주할 수 있었는데도, 안두희는 굳이 그렇게 하지 않았다. 뭔가 믿는 구석이 있었던 것이다. 그는 체포돼 헌병대에 인도됐다.
안두희의 '이중생활', 그가 충성 바친 대상은...
▲ 김구가 암살당한 장소인 2층 창가. ⓒ 김종성
안두희는 뭘 믿고 그렇게 여유만만했을까. 안두희는 육군 소위인 동시에 한국독립당 당원이었지만, 이것이 전부가 아니었다. 지난 2001년에 국사편찬위원회가 공개한 바에 따르면, 김구 피살 3일 뒤인 1949년 6월 29일 미국 육군 제1군 사령부 정보장교인 조지 실리 소령은 '김구 : 암살에 관한 배후 정보'라는 비밀문서를 작성했다. 이 문서는 7월 1일 미 육군 일반참모부 정보국장에게 발송됐다.
조지 실리가 작성한 문건에 따르면, 안두희는 우파 테러단체인 백의사의 제1소조 요원인 동시에 한국에 주재하는 미군방첩대(CIC) 요원이었다. 순수한 육군 소위가 아니라, 이것저것 많은 일을 하는 사람이었던 것이다.
안두희는 육군·한국독립당 및 백의사·미군방첩대 소속이었다. 앞의 두 조직은 양지에서 활동하는 데 반해, 뒤의 두 개는 음지에서 활동했다. 예전에 중앙정보부와 국가안전기획부는 "우리는 음지에서 일하고 양지를 지향한다"고 했다. 하지만, 음지와 양지의 양쪽에서 동시에 일하는 사람은 활동의 중점을 아무래도 음지 쪽에 둘 수밖에 없다.
동일한 사람이 공개 활동과 비밀 활동을 병행할 경우, 그 사람의 정체성은 비밀 활동 쪽에서 찾을 수밖에 없다. 외형(공개 활동)과 내면(비밀 활동) 중에서 후자가 개인의 정체성을 정확히 반영하듯 말이다.
이런 이치를 생각하면, 안두희가 진짜로 충성을 바친 대상은 육군·한국독립당이 아니라 백의사·미군방첩대였다고 봐야 한다. 그는 한국 극우파와 미국의 이익을 위해 움직이는 인물이었던 것이다.
김구의 죽음, 미국·반통일 세력에 이익
▲ 피로 얼룩진 김구의 옷. ⓒ 김종성
김구는 남한만의 단독 선거를 반대하고 통일 정부를 위한 남북협상을 추진했다. 그는 1948년에 38선 이북을 방문해서 김일성 등과 회담을 가진 적도 있다. 김구의 꿈대로 통일 정부가 수립됐다면, 가장 큰 불이익을 입을 쪽은 미국이고 그다음은 한국 내 반(反)통일 세력이었다.
안두희가 백의사와 미군방첩대 중에서 어느 쪽에 더 충성했는지는 확인할 수 없지만, 그의 김구 암살로 가장 큰 이익을 얻은 쪽은 미국이고 그 다음은 반통일 세력이었다는 점만큼은 확실하다.
김구를 암살한 직후, 안두희는 얼마든지 도주할 수 있었고 또 얼마든지 저항할 수 있었는데도 일부러 그렇게 하지 않았다. 그는 유유히 계단을 내려와서 경찰관에게 순순히 체포됐다. 믿는 구석이 있었던 것이다. 그가 믿는 구석이 무엇이었는지는, 그가 어디서 비밀활동을 했으며 그의 김구 암살로 어느 쪽이 이익을 얻었는지를 생각해보면 알 수 있다.
무료로 개방되는 경교장을 방문할 기회가 있다면, 2층으로 가는 계단을 올라 김구 피살 현장을 둘러본 뒤 계단을 다시 내려올 때 '이 계단을 오르내린 안두희의 가슴이 어느 쪽에 대한 충성심으로 뜨거웠을까?'를 고민해보는 것도 흥미로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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