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2062319
보안사, 아직 끝나지 않은 이야기
군사독재시절 여러 공안사건 조작... 국가배상금·재심 판결 잇따라
14.12.13 18:01 l 최종 업데이트 14.12.13 18:01 l 박소희(sost)
▲ 1990년 10월 4일 윤석양 이병이 폭로한 보안사 민간사찰 자료 ⓒ 연합뉴스
군사독재정권시절 수많은 불법을 저지르며 공안사건을 조작했던 군 보안사령부(아래 보안사)를 다시 한 번 짚어볼 판결들이 최근 연이어 나왔다.
서울중앙지방법원 민사합의23부(부장판사 우라옥)는 11월 26일 재일교포 김정사씨와 그의 어머니가 국가를 상대로 낸 손해배상소송에서 피고 대한민국은 이들에게 1억 9700여만원을 지급하라고 했다. 1977년 보안사 소속 수사관들이 당시 서울대로 유학 온 김정사씨를 불법 체포·감금한 상태에서 고문 등 가혹행위를 가해 허위자백을 유도, 그를 간첩으로 몰았던 일에 국가가 책임져야 한다는 취지였다.
1948년 세워진 육군정보국 정보처 특별조사과가 모체인 보안사의 현재 이름은 기무사다. 육군 소속에서 1977년 해군 방첩대와 공군 특별수사대가 국군 보안사령부로 합쳐지면서 보안사는 명실상부하게 대한민국 군 관련 정보를 수집하고 방첩, 범죄 수사를 맡는 대표기관으로 자리매김했다. 하지만 군사정권시절 보안사의 핵심 업무는 정권을 뒷받침하는 일이었다. 당시 보안사는 여러 간첩사건을 조작했고, 많은 피해자를 낳았다. 김정사씨는 그 중 하나였다.
특히 재일교포들을 눈여겨 본 보안사
보안사는 특히 재일교포들을 눈여겨봤다. 재일교포 사회에선 북한과 교류하는 조총련계가 활동하고 있는데다 사람들이 한국 사정에 어두웠기에 여러 조건을 짜 맞추기 좋은 '먹잇감'이었다. 김순일씨도 그랬다. 1981년 서울대 재외국민교육원을 다니던 김씨는 그해 7월 오스트리아 빈에서 항공편을 이용, 평양에 도착했다. 북에 살고 있는 외가 친지들을 만나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1986년 6월 28일, 갑자기 들이닥친 수사관 4~5명이 김씨를 보안사로 끌고 갔다. 이들은 김씨의 간첩 혐의를 추궁하며 그의 무릎 양 뒤편에 두꺼운 나무 원목을 끼운 다음 올라탔다. 김씨가 실신하면 뺨을 때렸고, 원하는 답변을 얻을 때까지 잠을 재우지 않았다. 김순일씨는 결국 수사관의 요구에 따라 혐의를 인정하는 369장짜리 진술서를 작성했고, 법원에서 징역 12년에 자격정지 12년 확정판결을 받았다. 그는 1990년 5월에야 가석방으로 풀려났다.
김순일씨는 지난해 3월 법원에 재심을 청구했다. 심리를 맡은 서울고등법원 형사3부(부장판사 강영수)는 11월 27일 그가 허위자백을 강요받았고, 고문 등 가혹행위를 당했다며 진술서 등의 증거능력을 인정하지 않았다. 김씨가 북한을 다녀오긴 했지만, 재일교포로서 정체성을 고민해온데다 친척들이 살고 있는 곳이기에 특별한 목적의식 없이 방북한 것으로 봤다. 결론은 증거 부족, 그리고 무죄였다.
재일교포는 아니지만, 김용태씨 역시 비슷한 사례다. 1971년 어로저지선을 넘어 조업하다 북한 경비정에게 납치당했던 김씨는 이듬해 남쪽으로 돌아왔다. 12년 뒤인 1984년 4월, 그는 보안사 수사관들에게 체포됐다. 이번에도 수사관들은 간첩 혐의를 인정하라면서 수시로 김용태씨를 각목으로 때렸다. 책상 사이에 걸쳐놓은 각목에 그의 몸을 묶은 다음 코 주위에 물을 부어 수차례 기절시키기도 했다. 지친 김씨는 결국 '납북됐을 때 사상교육을 받고 포섭된 뒤 귀환, 국가기밀을 탐지·수집하는 등 간첩활동을 했다'고 허위자백했다.
1970~80년대 간첩사건 234건 중 재일교포·일본관련 간첩은 73건
지난 1월 법원은 불법 구금과 고문 등의 결과이므로 김씨의 자백은 증거능력이 없고, 다른 증거들로는 공소사실을 인정하기 부족하다고 선고했다. 6월 판결이 확정되자 김씨는 국가배상금 청구소송에 들어갔다. 11월 21일 서울중앙지법 민사합의17부(부장판사 송경근)는 국가의 책임을 인정, 김씨와 그 가족 등 6명에게 10억 2800여만 원을 지급하라고 했다. 재판부는 ▲ 김용태씨가 이 일로 무려 12년 8개월이나 복역했고 ▲ 수감 도중 가정이 깨진 점 등도 고려했다.
2007년 국방부 과거사진상규명위원회는 1970~80년대 간첩사건 중 보안사가 수사한 것은 234건이며, 이 가운데 재일교포·일본관련 간첩은 73건이라고 밝혔다. 과거사위원회는 이 가운데 자료 조사 등이 가능한 사건 16개를 조사한 결과 보안사가 ▲ 수사권을 남용하고 ▲ 영장 없는 체포와 불법감금, 밀실에서 밤샘수사 등 반인권적 수사를 벌인데다 ▲ 과도한 접견 금지 등으로 변호인의 조력을 받을 권리를 침해했다고 지적했다.
보안사 피해자들은 국방부 과거사위원회 등의 자료를 바탕으로 자신들의 명예회복을 위해 지금도 싸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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