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1811922

공포에 떨던 선덕여왕, 김유신이 살렸다
[사극으로 역사읽기] KBS 드라마 <대왕의 꿈>, 일곱 번째 이야기
12.12.11 18:25 l 최종 업데이트 12.12.11 18:26 l 김종성(qqqkim2000)

▲  드라마 <대왕의 꿈>의 김유신(김유석 분). ⓒ KBS

660년에 백제를 멸망시키기 이전까지, 신라는 백제에 비해 군사적 열세에 놓여 있었다. 압도적 열세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당나라가 가세하고 역학구도가 바뀌지 않았다면 신라는 결코 백제를 이길 수 없었다. 

그런데 특이한 점이 있다. 신라군이 전반적인 열세에 놓여 있었던 660년 이전에도 김유신 부대만큼은 항상 승승장구했다는 점이다. '신라군'은 백제군에 밀리는데도 '김유신군(軍)'만큼은 백제군을 꺾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김유신 부대가 거둔 승리는 신라군의 승리라기보다는 김유신의 승리라고 평가하는 게 정확하다. 거의 전적으로 그의 '개인기' 덕분이었다고 해도 크게 지나치지 않아 보인다. 

김유신 부대가 승승장구한 이유 

<삼국사기> '신라 본기'나 '김유신 열전'에 묘사된 전쟁 기록을 살펴보면, 유독 김유신 부대만 승승장구한 이유를 이해할 수 있다. 이런 기록들을 읽다 보면, 그가 군사심리학의 전문가였다는 느낌을 갖지 않을 수 없다. 군사심리학 중에서도 공포심 분야가 그의 전공이었다. 그는 자기편 진영의 공포심을 통제하고 전력을 극대화시키는 방법을 잘 알고 있었다.  

사실, 전투 현장에서 진짜 무서운 것은 적군이 아니라, 아군 진영에 퍼지는 공포심이다. 적당한 공포심은 활력소가 되지만, 지나친 공포심은 전투에 지장을 초래한다. 공포심이 확산되면 사기가 바닥으로 떨어질 수밖에 없다. 

싸우지 않고 이기는 것이 최선이라면, 싸우지 않고 지는 것은 최악이다. 싸우지 않고 지는 비결은 아군 내의 공포심을 그냥 방치하는 것이다. 그래서 공포심을 관리하는 것은 군사 지휘관의 필수요건 중 하나다. 김유신은 바로 그런 능력을 갖고 있었다. 그가 승리한 사례들은 대개 다 이런 경우들이었다. 

선덕여왕의 아버지인 진평왕이 왕위에 있을 때인 629년. 김유신이 서른여섯 살 때였다. 이때 신라군이 고구려 낭비성을 공격했다. 낭비성은 지금의 충북 청주시와 청원군 일대에 있었다. 김유신은 예하 부대 지휘관이었다. 

신라군은 뜻밖의 선제공격을 당했다. 신라군은 고구려군이 성에서 갑자기 튀어나와 기습하는 바람에 큰 타격을 입었다. 전사자 규모가 상당했고, 이것은 신라군의 전의 상실로 연결됐다. 고구려군에 대한 공포심이 신라 군영에 쫙 퍼진 것이다. 이런 상태로는 전투를 계속할 수 없었다.  


▲  고대의 군대. 서울시 송파구 한성백제박물관에서 제공되는 동영상 장면. ⓒ 김종성

이때 갑작스레 김유신이 전면에 나섰다. 그는 일부러 투구를 벗고 홀로 고구려 진영으로 돌격했다. 그리고 고구려 장수의 목을 베고 돌아왔다. 이 장면을 보고 사기충천해진 신라군은 성 밖에 있던 고구려군 5천 명을 죽이고 1000명을 생포했다. 성 안의 고구려군은 이 장면을 보고 스스로 항복했다. 

김유신은 고구려 진영을 향해 투구도 없이 뛰어드는 모습을 연출함으로써 '고구려군은 무섭지 않다'는 확신을 부하들에게 전달했다. 공포의 진원지로 달려들어 공포의 근원을 직접 제거한 것이다. 

18년 뒤인 647년 연말에 벌어진 백제와의 전투에서도 김유신은 이런 방식을 응용했다. 이 덕분에 그는 패색이 짙던 전투를 뒤집을 수 있었다. 차이점이 있다면, 629년에는 본인이 직접 뛰어든 데 비해 647년에는 부하가 뛰어들도록 했다는 점이다. 629년에는 서른여섯 살이었지만 647년에는 쉰세 살이라서 그가 직접 뛰어들기는 힘들었다.

비담·염종 쿠데타, 심리전으로 제압한 김유신

647년 초반에는 이런 일도 있었다. 비담과 염종이 선덕여왕에 맞서 쿠데타를 일으켰다. 정부군과 쿠데타군이 10일간 대치하던 상태에서, 정부군 진영으로 갑자기 큰 별이 떨어졌다. 비담은 "여왕이 패할 징조"라고 선전했고, 여왕은 물론이고 정부군 병사들도 공포에 떨었다. 

이때 김유신은 선덕여왕을 만나 "길흉화복은 사람이 하기에 달린 것이니 근심하지 마십시오"라고 다독거린 뒤, 불붙은 연을 하늘에 띄우고 "어젯밤에 떨어진 별이 도로 올라갔다"고 소문을 퍼뜨렸다. 

뒤이어, 김유신은 별이 떨어진 장소에 병사들을 모아놓은 뒤 백마를 바치고 제사를 올리면서 '신하가 임금을 배반하는 것은 천도를 어기는 것이므로 하늘이 응징할 것'이라는 내용의 축문을 낭독했다. 그런 뒤에 공격 명령을 내렸다. 

여기서, 김유신은 공포에 떨고 있는 선덕여왕을 다독거림으로써 여왕이 공포심을 확산시키지 않도록 만들었다. 현대 군사심리학에서는, 공포심의 차단을 위해 병사들을 상대로 공포심의 원인에 대한 교육을 시행할 것을 권유하고 있다. 김유신도 여왕을 상대로 일종의 정신교육을 시킨 셈이다. 

여왕이 공포에 떨지 않도록 한 뒤 김유신은 병사들의 공포심을 통제했다. '떨어진 별이 도로 하늘로 올라갔다'는 선전을 통해, 공포심으로 가득한 병사들의 머릿속을 헷갈리게 만들었다. 그런 뒤 축문 낭독을 통해 승리의 당위성을 심어주었다. 이렇게 공포심을 통제한 뒤에 그는 곧바로 쿠데타군에 대한 공격을 개시했다. 결과는 정부군의 승리였다. 


▲  고대의 전쟁. 인천광역시 중구 선린동 인천차이나타운에 전시된 고대 중국군의 전투 장면. ⓒ 김종성

진덕여왕이 왕위에 있던 649년에 백제군이 신라를 공격했다. 열흘이 지나도록 결판이 나지 않고 사상자만 속출했다. 전사자의 시체가 들판에 가득할 정도였다. 지친 신라군은 도살성, 즉 지금의 충남 천안 쪽에서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이때 하늘의 물새가 김유신의 군막 위를 지나갔다. 그러자 신라군 병사들이 숙덕거리기 시작했다. 물새가 사령관의 군막 위를 지나간 것을 불길한 징조로 받아들인 것이다. 시험 직전의 수험생이 사소한 것에도 민감하게 반응하듯이, 고도의 긴장감을 느끼는 병사들도 이처럼 사소한 것에 불길함을 느낄 수 있다.

김유신은 어떻게 대처했을까? 공포심이 이미 크게 확산된 상태라면, 공포심을 제거하기 위한 작업을 벌였을 것이다. 하지만, 아직 그런 단계는 아니었다. 공포심의 초기 단계였던 것이다. 감기로 치면, 아직 기침을 하는 단계는 아니고, 몸속 어딘가가 좀 피로한 듯한 느낌이 드는 단계였다. 

김유신은 즉각 행동에 나섰다. 그는 "이것을 이상하게 생각할 이유가 없다"고 부하들을 다독거린 뒤 곧바로 전투 개시를 명령했다. 전투는 신라군의 승리로 끝났다. 

만약 공포심이 크게 확산된 뒤였다면, 김유신은 비담의 쿠데타 때처럼 쇼를 벌이고 제사를 벌였을 것이다. 하지만, 아직 초기 단계였기 때문에, 그는 병사들 앞에서 자신감을 보여주고 그들을 신속히 전투로 몰아넣었다. 

김유신은 병사들이 물새 출현의 의미를 두고 한가하게 속닥거릴 시간을 주지 않았다. 병사들의 머릿속에서 공포심이 번질 시간을 주지 않고 곧바로 전투 개시명령을 내렸다. 전투 개시로 인한 긴장감이 초기 단계의 공포심을 억누르도록 한 것이다. 

만약 김유신이 없었다면.... 

서두에서 언급했듯이, 백제 멸망 이전에 신라군은 백제군에 비해 열세에 놓여 있었다. 객관적인 전력에서는 신라군이 한 수 아래였다. 그래서 정상적인 경우라면 신라군이 밀릴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도 김유신 부대만큼은 승승장구할 수 있었던 것은 그가 자기편 진영의 공포심을 통제하는 기술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병사들 심리 속의 공포심을 없애고 그들이 물불 가리지 않고 덤벼들도록 함으로써 백제군의 우수한 전력을 무용지물로 만들었다. 

만약 김유신 같은 군사 기술자가 없었다면, 신라는 당나라군과 합세하기 전에 백제 의자왕의 공세 앞에서 쉽게 허물어졌을 것이다. 그랬다면, 의자왕과 태종무열왕 김춘추의 신세가 뒤바뀌고 오히려 '김춘추의 삼천궁녀 신화'가 오래도록 회자되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Posted by civ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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