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www.kookje.co.kr/news2011/asp/newsbody.asp?code=2500&key=20080229.22016202103

이영식교수의 이야기 가야사 여행 <54> 임나일본부란 무엇인가 (하)
'임나 =가야' '일본=왜의 사신'이라는 해석 점차 설득력
사신들 가야의 후예 아라국 이익 대변
국호, 왜 대신 일본 일본서기서 바꿔 써
국제신문디지털뉴스부 inews@kookje.co.kr2008-02-28 20:21:53/ 본지 16면

일본 오사카 남부 카와치(河內)에 있는 카라쿠니(가라국)신사. 아라일본부로 표기된 가야계 도래인 하내직(河內直)의 고향이다.

임나일본부의 실체

지난 주에는 과거 한일학계가 임나일본부에 대해 얼마나 허망한 해석을 해왔던가를 아주 간단하게 말씀드렸고, 이도 저도 다 아니라고 했습니다. 그러니 이제 제가 생각하는 임나일본부의 실체를 이야기 할 차례입니다. 우선 글자풀이부터 하겠습니다. 임나일본부는 임나+일본+부의 합성어입니다. 임나(任那)를 백제·신라·가야를 아울러 신하의 나라로 취급하기 위한 일본서기의 창작 또는 일본의 오카야마나 대마도로 보는 생각도 있습니다만, 그나마 사실이 반영되어 있는 부분은 가야를 가리킵니다. 임나는 일본서기뿐만 아니라, 고구려와 신라의 광개토왕릉비(400년), 삼국사기 강수전(7세기), 창원 봉림사 진경대사탑비(932년)에도 보이기 때문입니다. 광개토왕의 대군을 맞아 싸운 임나도 가야였고, 신라의 외교문장가로 유명한 강수의 출신지 임나도 가야였으며, 속세의 성이 김해 김씨였던 신라의 진경대사는 임나왕족의 후예로 기록되었습니다. 이 임나 모두를 가야로 보는 데에는 다른 해석이 있을 수 없습니다. 다시 일본(日本)은 당시의 용어가 아닙니다. 일본이란 국호가 처음 확인되는 것은 660년입니다. 작다는 뜻의 왜(倭)를 꺼려, 해 뜨는 곳의 일본으로 바꾸었답니다. 그 어원이 된다는 일출처(日出處)도 600년 이전에는 없었습니다. 그런데도 임나일본부는 562년까지 보이니까, 원래 왜였던 것을 732년에 편찬되는 일본서기가 일본으로 바꿔 쓴 것입니다. 결국 문제는 아무리 봐도 관청을 뜻하는 것 같은 부(府)입니다.

일본 지도교수의 과제

저도 처음에는 그런 줄 알고 일본유학을 시작했습니다. 임나일본부의 문제를 해결하고 가야사를 복원하겠다고 와세다 대학 도서관 서고에서 7년 반의 세월을 보냈습니다. 미즈노유우(水野祐)라는 할아버지 지도교수를 처음 만났을 때였습니다. 일본서기를 공부하러 왔다하니, 인쇄된 책 말고, 필사본과 주석서를 살펴보라는 겁니다. 732년의 원본은 없지만, 9세기 이후의 것들이 여러 곳에 흩어져 있었습니다. 그런데 교통비가 좀 비싸야지요. 저는 도쿄에 있었지만 책은 후쿠오카, 오사카에도 있었습니다. 지도교수가 처음 내준 과제라 안 할 수도 없고 해서, 가난한 고학생 주머니 사정에 집사람 눈치를 보아가며 찾아다녔습니다. 그러다 부(府)의 실체를 풀 수 있는 실마리가 잡힌 겁니다. 보통 일본어에서 관청을 뜻하는 부(府)는 '후'로 발음됩니다만, 필사본과 주석서에는 '미코토모찌(御事持)'로 읽으라고 되어있었습니다. 찹쌀모찌도 아니고 무슨 모찌라고? 가나의 뜻은 몰랐습니다만, 임금 어(御), 일 사(事), 잡을 지(持)가 눈에 확 들어왔습니다. 임금의 일을 받드는 사람? 학교로 돌아와 '미코토모찌'를 찾아보니, 645년 이전까지는 왕이 지방에 보내는 단순한 일회성의 사신이었습니다. 결국 562년까지 보이는 임나일본부는 '임나=가야'에 파견된 '일본=왜의 사신'으로 밝혀지게 되었고, 점차 한일양국의 공통된 해석으로 되어 가고 있습니다.

가야 이해관계의 대변자

이제 일본부가 걸어서 백제와 신라에 왕래하고, 외교활동에만 보이는 이유를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들의 활동변화는 과거처럼 왜나 백제 중심으로는 도저히 설명되지 않습니다. 이들의 활동은 백제의 하동진출(529년)과 신라의 김해통합(532년)을 전후로 완전히 뒤바뀝니다. 이전에는 친백제·반신라, 이후에는 반백제·친신라의 외교를 전개합니다. 백제의 군사령관이 반(反) 백제할리도 없고, 이러한 외교노선의 변화가 왜왕에게 도움 되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신라가 낙동강을 건너 서진할 때는 백제와 가깝게, 다시 백제가 섬진강을 건너 동진할 때는 친(親) 신라외교를 전개합니다. 이러한 외교노선의 변화는 왜도 백제도 아닌, 가야의 독립유지라는 이해관계로만 설명될 수 있습니다. 이 외교활동의 중심에는 일본부 즉, 왜의 사신들이 머물고 있던 아라국(安羅國)이 있었습니다. 낙동강 건너 김해·창원은 함안 아라국의 바로 앞이고, 섬진강 건너 진주는 바로 뒤입니다. 일본부들이 아라국왕의 말만 듣는다는 백제왕의 불평이나, 가야제국이 아라국을 형님처럼 여겼다는 기술은 아라국 중심으로 전개되었던 가야독립유지의 치열한 노력을 보여줄 뿐입니다. 왜의 사신인 일본부들이 어째서 가야를 위해 활동하고, 왜왕이 아닌 아라국왕을 따르게 되었던 가는 출신으로 설명됩니다. 조상대에 일본에 건너간 가야의 후예들이 가야의 언어와 풍습에 익숙한 장점에서 왜왕의 외교사절로 파견되었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가야를 대변하게 되었고, 아라국왕은 왜의 사신을 내세워 신라와 백제의 침입을 막아보려 하였습니다.

인제대 인문사회대학 학장, 역사고고학과 교수


 
Posted by civ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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