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www.kookje.co.kr/news2011/asp/newsbody.asp?code=2500&key=20080314.22016200032

이영식교수의 이야기 가야사 여행 <56> 경남 고성의 가야국 (하)
서울 풍납토성의 가야토기 출토는 고자국 위상 증거물
5세기경 백제-왜 초기 외교교섭에 매개자 역할
국제신문디지털뉴스부 inews@kookje.co.kr2008-03-13 20:01:25/ 본지 16면

고성송학동 1B-1호분 돌방무덤. 왜 계통 문물과 천정에 주칠이 선명하게 보인다.

고성에서 서울까지

서울에서 경남 고성스타일의 가야토기가 출토되었다면 믿으시겠습니까? 근년 유적의 보존문제와 개발논리의 첨예한 대립으로 화제가 되기도 했던 서울 한강 가의 풍납토성에서 가야토기 5점이 출토되었습니다. 완형은 아니지만, 그릇받침과 뚜껑의 파편은 누가 봐도 고성스타일이 분명합니다. 그동안 우리가 둘러보았던 김해 고령 창녕 함안 등의 가야토기에 있었던 뚜렷한 지역적 컬러처럼 고성 가야국만의 특징이 있습니다. 고성·사천식 또는 소가야식으로 불리는 토기입니다. 가운데가 둥글게 부풀어 오른 뚜껑, 수평의 입가장자리나 뚜껑턱받침, 다리부분에 삼각 또는 사각으로 길게 뚫은 창문, 부드럽게 퍼져 내리던 다리를 크게 한번 접어 넓은 단을 지운 굽이 특징입니다. 이러한 토기가 초기 백제의 왕성으로 생각되는 풍납토성에서 출토되었다는 것은 고성의 가야왕권과 서울의 백제왕권 사이에 일정한 교류가 있었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가야토기와 출토되었던 유구에 대한 연대추정을 통해 5세기경의 역사적 사실로 생각되고 있습니다.

고자국의 전성시대

5세기대의 고자국과 한성백제의 교류를 전하는 문자기록은 전혀 없습니다. 그러나 전후의 관련사실에서 교류의 가능성은 충분히 점쳐질 수 있습니다. 한 때 고대 한일관계사의 최대 쟁점이었던 칠지도 명문과 일본서기의 관련기술을 통해, 4세기 후엽에 백제(서울)가 일본열도의 왜와 왕권차원의 교류를 시작했던 일은 유명하고, 6세기 백제(부여)의 성왕이 남부가야에서 왜와 외교교섭을 전개하고 있었던 것 또한 일본서기에 상세하게 나옵니다. 4세기후엽에는 창원의 탁순국이, 6세기에는 함안의 아라국이 각각 매개자로 기술되고 있습니다. 결국 신라에 통합될 때까지 백제와 왜의 외교교섭은 남해안 가야국들의 중간자적 역할로 원만히 진행될 수 있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5세기대 고성의 가야토기가 한성시대의 백제 왕성에서 출토되는 것을 가지고, 백제와 왜의 초기교섭에 남해안의 고자국이 깊이 관여하고 있었던 증거로 해석하는 데는 별 무리가 없을 겁니다. 5세기대의 고자국은 그럴만한 실력이 있었습니다. 5세기에서 6세기 전반에 걸치는 고성 스타일의 토기는 북으로 의령(천곡리고분군)·합천(저포리·삼가고분군)으로 뻗치고, 북서쪽으로는 진주(가좌동·우수리·귀곡동고분군)로 진출하여, 경호강을 따라 산청(중촌리·명동·묵곡리·옥산리고분군)·함양(손곡리고분군)을 거쳐, 남원(월산리·건지리)·장수(삼고리고분군)의 전북지역까지 북상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지역 모두를 고자국의 영역으로 생각할 수는 없겠습니다만, 5세기경에 보여주고 있었던 고자국의 높은 위상을 짐작하기에는 충분하다고 생각됩니다.

고성 송학동고분군

5세기후반이 되면 대가야(고령)의 팽창으로 위축되기도 하지만, 6세기 전반까지도 동쪽으로 마산을 건너다보는 동해면(내산리고분군), 서쪽으로 영오면(연당리·영대리고분군)·사천(예수리고분군)·하동(고이리고분군)까지에도 그 세력을 유지하고 있습니다. 특히 진주에서는 남강을 경계로 북쪽의 수정봉·옥봉고분군이 대가야 일색으로 바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강 남쪽의 가좌동고분군은 여전히 고성적 색채를 유지하고 있습니다. 바로 이 시기 고자국 왕권의 실재와 위상을 보여주는 것이 고성읍내에 위치한 송학동고분군입니다. 말끔하게 정비된 3개의 거대한 봉분은 보는 이들을 압도하고 있습니다. 고분군 옆에서 공사 중인 박물관이 완성되면 여러분들도 쉽게 그 내용을 살펴보시게 되겠지만, 1999년부터 2002년까지 진행되었던 발굴조사는 이 고분군을 둘러싼 그동안의 논쟁과 국제적이었던 고자국 최고지배자의 모습을 보여주게 되었습니다. 읍내에서 바라보는 고분군의 외형이 일본의 왕릉 같다는 추정과 그에 따른 과장된 해석이 말끔하게 해소되었고, 인공의 산을 먼저 만들어 필요할 때마다 다시 파들어가면서 무덤을 만들었던 고성만의 축조방법도 확인되었습니다. 천정에 붉은 칠을 한 돌방무덤과 거기에서 출토된 유물들은 강한 왜 계통의 색채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발굴단은 출토된 유리구슬과 목걸이들로부터 여성의 무덤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고자국왕에게 시집왔던 왜의 여인이 아니었을까 생각해 봅니다. 

인제대 인문사회대학 학장·역사고고학과 교수


 
Posted by civ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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