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db.history.go.kr/download.do?levelId=hn_019_0070&fileName=hn_019_0070.pdf
* "발해 城址의 조사와 연구 - 송기호" 중 "Ⅲ.도성 - 3.八連城" 부분만 가져왔습니다.

팔련성(八連城)
1989년  송기호 
 
팔련성은 고토성(古土城), 반랍성(半拉城), 팔뢰성(八磊城), 팔루성(八壘城), 반랍성자토성(半拉城子土城) 40) 등으로도 불린다. 이곳은 혼춘하(琿春河) 충적평야 지대의 서쪽 끝 지점으로 중국 길림성 혼춘현성(琿春縣城)에서 서쪽으로 약 7.5km 떨어진 삼가자향(三家子鄕)에 소속되어 있으며, 이 성에서 서쪽으로 3.5km 지점에는 두만강이 북쪽에서 남쪽으로 흐르고 있다. 이곳의 지세는 평탄하고 주위에는 여러 산들이 둘러싸고 있으며 동남쪽으로 동해에 연하고 있다.

토리야마 키이치(鳥山喜一)이 1923년과 1924년 이 성을 방문한 바 있고,41) 1937년 4월에는 궁전지와 그 동남쪽에 있는 절터를 발굴하기도 하였다.42) 그 뒤 사이토 진베에(齋藤甚兵衛)가 1941년 9월 이곳을 지표조사한 뒤 1942년 3월, 4월에 걸쳐 발굴하여 대체적인 규모와 구조를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43) 또 1942년에는 고마이 가즈치카(駒井和愛)가 이곳을 방문조사하기도 하였다.4) 2차대전 이후 중국에서 이곳을 지표조사 한 듯하나 자세한 것을 알 수 없고, 북한에서도 이곳을 답사하여 보고서를 내기도 하였다.45) 이제 이 기록들을 바탕으로 성의 규모와 구조를 설명하도록 하겠다.46) 

성은 토성으로서 방형에 가까우며, 외성과 내성47)으로 이루어져 있다. 성의 형태는 동경성이나 서고성(西古城)과 유사하며 크기는 동경성보다 작고 서고성과는 비슷하다. 성의 방향은 정북에서 동쪽으로 10° 정도 기울어졌다. 외성의 둘레는 약 2,895m로서 동벽 길이 721m, 서벽 길이 741m, 남벽 길이 705m 북벽 길이 728m 이다.48) 벽마다 가운데에는 문지(門址)인듯한 흔적이 있다.

(그림 6) 팔련성

외성 안은 북쪽 구역, 중심 구역, 동쪽 구역, 서쪽 구역의 4개 구역으로 나뉘며, 중심 구역은 다시 3개 소구역으로, 동쪽 구역과 서쪽 구역은 각기 2개 소구역으로 나뉘어진다(그림 6). 내성49)은 중심 구역에 해당하여 북성(北城:주영헌의 제1소구역), 중성(中城:제2소구역), 남성(南城:제3소구역)의 3개 소구역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 중 북성 안에 궁전터가 자리잡고 있는데 북성의 둘레는 1,068m로서 동, 서 양벽의 길이 316m, 남, 북 양벽의 길이 218m 이다. 남벽 가운데에는 너비 약 25m의 잘린 부분이 있어 이곳이 북성의 남문이 된다. 중성과 남성의 남벽에도 남문지가 있어 3개의 문이 일직선상에 배치되어 있다. 북성 남벽은 높이가 약 1.5m로서 제일 잘 남아 있다. 북성 남문에서 북쪽으로 132m 되는 곳에 동서 45m, 남북 30m의 고대(高臺)가 있어 높이가 2m 정도가 되는데, 이곳이 북성의 가운데에 해당하여 궁전유적지로 추측된다. 북성 안에서는 이를 포함하여 도합 8개의 건물지가 1942년 사이토 진베에(齋藤甚兵衛)에 의해 발굴조사되었다. 한편 그에 의하여 이 성 밖에서 3개의 절터가 확인된 바도 있다. 

이 성에서도 발해시기의 유물들이 다량 발견되었다. 유물 중에는 역시 건축재료들인 기와, 벽돌 등이 주류를 이루고 있고, 그 외에 철촉(鐵鏃), 불상 등이 발견되었다.50) 이상의 유물 중 주목되는 것으로 발해 전형의 연화문 와당이나 문자가 새겨진 기와편을 들 수 있으며 이들은 동경성 출토의 것들과 거의 동일하다. 한편 불상 중에는 석가와 다보의 두 부처를 모신 이불병좌상(二佛並座像)이 눈에 뜨이는데 이것은 고구려의 불교 전통이 발해에까지 이어지고 있음을 반영하는 것이라 한다.51)

1. 팔련성   2. 온특혁부성   3. 살기성   4. 도원동 북산성, 남산성   5. 석두하자성    6. 영성자성   8.성장랍(립)자성 

(그림 7) 훈춘현내 발해 유적

《신당서(新唐書)》발해전에 의하면 동경용원부는 예맥의 옛 땅에 두었으며 책성부(柵城府)라고도 하였는데,52) 제3대 문왕 시절에 일시적으로 도움을 정하였던 곳이기도 하다. 이러한 동경용원부 자리가 바로 팔련성이라고 주장한 사람은 도리야마 기이치(鳥山喜一)로서 김육불, 사이토 진베에(齋藤甚兵衛) 등이 그의 주장을 받아들여 정설로 굳어지게 되었다.53) 그런데 문제가 되는 것은 《요사(遼史)》지리지의 동경에 관한 기록이다. 여기에는 성을 돌로 쌓았고 주위가 20리가 된다고 하여54) 흙으로 쌓고 주위가 3km 정도가 되는 팔련성과는 부합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이 기록을 토대로 동경용원부 자리를 혼춘현(琿春縣) 내의 성장랍자성(城墻磖子城)으로 비정하는 사람도 있으나55) 일반적인 견해는 아니다.

팔련성이 위치하고 있는 혼춘현(琿春縣) 경내에서도 발해시기의 유적들이 다수 발견되었다.56) 성으로서는 온특혁부성(溫特赫部城), 영경고성(永慶古城), 성장랍자성(城墻磖子城 / 성장립자성:城墻砬子城), 도원동북산성(桃源洞 北山城), 도원동남산성(桃源洞 南山城), 사제성(沙齊城), 영성자성(營城子城 / 고려성:高麗城), 석두하자성(石頭河子城) 등이 있으며, 절터로는 신생묘지(新生廟址), 양종농장묘지(良種農場廟址), 양목림자묘지(楊木林子廟址), 마적달묘지(馬滴達廟址)57) 등이 있고, 탑지로서는 마적달탑지(馬滴達塔址)가 있다. 또 춘화향 초평촌春(化鄕 草坪村)에서는 주거지 1기와 고분군 1곳이 발견되기도 하였다(그림 7). 이 외에 동경에서 일본으로 가는 길목인 소련 연해주에서는 포시예트(Pos’yet)항만 유적지를 비롯하여 코프이토(Kopyto)절터, 아브리코스(Abrikos)절터, 코프이토 고분군, 크라스키노(Kraskino)성지 등이 발견되었다.
 


주석

40) 八連城이란 명칭의 유래에 대해서 이 성이 북대성과 7개의 성이 연결되어 있어 붙여졌다고 하였고, 이에 따라 주영헌은 팔련성이 8개의 내성으로 이루어진 것으로 설명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유래 설명은 억측으로 단지 半拉城의 발음이 변화한 데에 불과한 것이라는 견해도 있다.
鳥山喜一·藤田亮策, 《間島省古蹟調査報告》滿洲國 民生部, 1942, p.46
齋藤甚兵衛, 《半拉城―渤海の遺蹟調査―》琿春縣公署, 1942, p. 8
齋藤甚兵衛·山本守, 《琿春·敦化》滿洲事淸案內所, 1943, p. 5의 《琿春縣誌》인용 부분
주영헌, 《발해문화》사회과학출판사, 1971, p.16
金毓黻, 《東北通史》권5 洪氏出版社 1976 p. 423
또 異稱에 대해서는 다음을 참조 바람.
鳥山喜一·藤田亮策, 《間島省古蹟調査報告》滿洲國 民生部, 1942, p.4
鳥山喜一, 《渤海史上の諸問題》 風間書房, 1968, p. 217의 주51
 
41) 鳥山喜一, 《渤海史上の諸問題》 風間書房, 1968, p. 217의 주51
42) 齋藤甚兵衛, 《半拉城―渤海の遺蹟調査―》琿春縣公署, 1942, p.3
43) 齋藤甚兵衛, 《半拉城―渤海の遺蹟調査―》琿春縣公署, 1942 참조
44) 駒井和愛, 〈渤海東京龍原府宫城址考〉《中國都城·渤海研究》雄山閣, 197
45) 이 때의 답사보고서가 《중국동북지방의 고구려 및 발해유적답사보고》(사회과학원출판사, 196)인데 이 보고서률 볼 수 없어서 언제, 어느 유적을 답사하였는지는 알 수 없다. 주영헌은 그의 저서 《발해문화》에서 이것을 많이 참조하였던 것 같다.
 
46) 이외에 다음을 참조하였다.
王俠, 〈琿春的渤海遺迹與日本道〉《學習與探索》1982―4, 앞논문
李殿福·孫玉良, 《渤海国》文物出版社, 1987
 
47) 이 성의 구조를 설명하는 용어가 필자마다 다르다. 즉 鳥山喜一은 팔련성의 성벽을 외성, 외성 북쪽 중앙에 있는 구역을 내성이라 부르고 있는 반면, 齋藤甚兵衛는 팔련성 밖에 절터가 나타나는 사실등을 들어 조산희일의 외성을 내성,내성(팔련성)을 궁성이라 하고 내성 밖에 다시 외성이 존재한다고 하였다. 현재는 팔련성 밖의 외성 존재는 별로 인정하지 않고 있어 팔련성의 성벽이 외성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그러나 팔련성 안의 어느 부분을 내성으로 지칭할 것이냐는 또 필자마다 다른 형편이다. 이 문제에 대해서는 주49를 참조바란다. 
 
48) 성벽의 길이는 필자마다 다른데 큰 차이는 없어 여기서는 잠정적으로 왕협의 글을 따른다.
王俠, 〈琿春的渤海遺迹與日本道〉《學習與探索》1982―4, 앞논문 p. 122

49) 필자마다 내성의 개념이 다른데 주영헌은 외성 안의 각 소구역을 각각의 내성으로 보아 내성이 8개 있다고 하면서 여기에서 팔련성이란 이름이 유래한 것으로 설명하고 있으나, 왕협은 중심 구역의 3개 소구역만을 내성으로 보아 3개 내성이 있다고 하였다. 여기에서는 발해시기 다른 성들의 설명 예를 참조하여 후자를 따른다.
 
50) 鳥山喜一·藤田亮策, 《間島省古蹟調査報告》滿洲國 民生部, 1942, pp.46∼50
齋藤甚兵衛, 《半拉城―渤海の遺蹟調査―》琿春縣公署, 1942, 앞책
주영헌, 《발해문화》사회과학출판사, 1971, p.16
 
51) 왕승례 저·송기호 역, 《발해의 역사》한림대학 아시아문화연구소 번역총서 1,1987 참고자료 1, p.236
鳥山喜一, 《渤海史上の諸問題》 風間書房, 1968, p. 96
三上次男, 〈半拉城出土の二佛并座像とその歷史的意義〉 《朝鮮學報》49, 1968
이밖에도 다음의 글이 있다.
駒井和愛, 〈渤海國の二佛並座石像〉《中國都城·渤海研究》雄山閣, 197
 
52) 《新唐書》권219 발해전
『▼(豸+歲)貊故地爲東京 曰龍原府 曰柵城府』

53) 齋藤甚兵衛, 《半拉城―渤海の遺蹟調査―》琿春縣公署, 1942, p.2
鳥山喜一, 《渤海史上の諸問題》 風間書房, 1968, pp. 217∼218의 주 51
 
54) 《遼史》권 38 地理志 東京道 開州 『開州 ……本濊貊地 高麗爲慶州 渤海爲東京龍原府 ……疊石爲城 周圍二十里』
 
55) 孫進己, 〈渤海疆域考〉《北方論叢》1982―4 p. 83
丹化沙, 〈渤海歴史地理研究情況述略〉 《黑龍江文物叢刊》 1983―1, p.20,  1983 p. 18
 
56) 鳥山喜一·藤田亮策, 《間島省古蹟調査報告》滿洲國 民生部, 1942, 
齋藤甚兵衛·山本守, 《琿春·敦化》滿洲事淸案內所, 1943
王俠, 〈琿春的渤海遺迹與日本道〉《學習與探索》1982―4
張錫瑛, 〈琿春馬滴達渤海塔基清理簡報〉《博物館研究》1984―2
李健才, 〈樺甸蘇密城考〉《黑龍江文物叢刊》1983―2
 
57) 이건재가 보고한 龍王廟址가 이와 동일한 것 같은데 확인할 수 없어 따로 주에 밝혀 놓는다.
李健才, 〈琿春渤海古城考〉《學習與探索》1985―6, p. 1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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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civ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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