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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문화사 - [가야] 가야 문화" 중 가야의 문화 내용을 가져왔습니다.  

가야 사회와 문화

우리 조상의 형질

우리 나라는 토양의 특질때문에 고인골(古人骨)이 거의 남아 있지 않으므로 우리 조상의 형질인류학적인 연구가 잘 이루어지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었다. 그러나 다행히도 우리 박물관에서 발굴한 김해 예안리유적, 삼천포 늑도유적에서 잔존 상태가 매우 양호한 고인골이 많이 출토되어 이 분야 연구에 상당히 중요한 자료를 제공하고 있다. 특히 예안리 출토 고인골의 연구를 통해 가야인의 형질적 특징이 차츰 밝혀지고 있는데, 이에 의하면 예안리인의 평균 신장은 남성이 164.7cm, 여성이 150.8cm이며, 12세 이하의 사망자가 전체의 1/3이상이나 되어 당시의 유아 사망률이 높았음을 알게 해 준다.

또한 4세기 전반이라는 일정한 시기에 묻힌 예안리 여성의 30% 정도가 편두(初頭)라는 사실을 확인하였는데, 편두는 신생아 때부터 나무 또는 돌로써 눌러 이마 쪽을 납작하게 만드는 일종의 두개골 변형 풍습으로,삼국지위서동이전 한전(韓傳), 변진조(弁辰條)의 "어린아이가 출생하면 돌로 머리를 눌러 납작하게 하기 때문에 지금도 진한 사람은 모두 편두이다. (兒生 便以石壓其頭 欲其編 今辰韓人皆初頭)"라는 기사와 부합되어, 이것이 변, 진한의 특징적인 습속의 하나였음을 알 수 있다. 


고대의 장신구

고령 지산동 32호분 출토 금동관

고대의 장신구는 소유자의 신분 규정의 척도가 되는 산물이다. 종류로는 관모(冠帽), 허리띠장식(帶金具), 신발(飾履), 귀걸이, 목걸이, 팔지, 반지 등이 있으며, 재질은 주로 금, 은, 금동 등 금속과 유리, 수정, 마노, 호박 등 보석 광물들을 사용하였다. 재질, 또는 세공 수준에 따른 장신구의 질과 양은 소속 계층의 성격에 따라 소유의 정도가 결정되어지므로 주로 상위지배계층의 무덤에 화려한 장신구류가 풍부하게 부장되어 있다. 가야의 장신구는 대체로 5세기를 기점으로 하여 그 성격이 크게 달라진다. 삼한 시대부터 4세기 대까지에는 수정, 마노, 비취, 유리 등으로 만든 주옥(珠玉)류를 선호한 반면 금, 은, 금동 등 소위 귀금속에 대한 관념은 없었던 것으로 보이는데 이러한 사실은 중국 역사서인 삼국지위서 동이전 한전(韓傳)의 기록에서도 일부 뒷받침되고 있다.

그러다가 5세기 대에 들어서면서 소위 귀금속으로 만든 금속 공예품이 나타나기 시작하는데 이러한 변화의 직접적인 요인은 신라로부터의 영향에서 찾을 수 있다. 즉 4세기 후엽 이후 신라는 고구려와의 적극적인 교섭에 의해 국력이 급성장하였고 그 영향은 영남 전지역에 확산되기 시작한다. 가야 지역의 귀금속제 장신구 출현도 이러한 당시 국제 정세 변동의 연장선상에서 이해할 수 있다.
 

가야인의 주거 생활

지금까지 가야의 주거 형태를 해명할 만한 자료는 아직 충분하게 제시되어 있지 않지만 거창 대야리와 김해 봉황대 유적의 조사 예를 통하여 그 일단(-端)을 엿볼 수 있다. 가야 초기에 속하는 거창 대야리 주거지는 평면 타원형으로 수혈 바깥에 기둥을 배치, 실내 공간을 보다 넓게 사용할 수 있도록 하였으며, 난방용의 화덕과 별개로 취사용의 부뚜막 시설을 같이 갖추고 있어 앞 시기보다는 한층 발전된 가옥 구조를 보이고 있다.

가야 거의 전 기간에 걸쳐 조성된 것으로 보이는 봉황대 유적에서는 대, 소형의 주거지와 공방지(工房址) 또는 창고 시설 등이 확인되었다. 그 중 바닥(床面)을 흙으로 다진 후 불로 구워 단단하게 만들고, 수혈 내부에 넓은 도랑(周溝)을 돌린 후 그 안쪽에 별개의 벽을 설치하여 실내 공간을 구분하는 시설을 갖춘 큰 수혈주거지가 확인됨으로써, 금관가야의 중심 지역에 걸맞는 대형 가옥이 있었음을 확인 할 수 있었다. 또, 지상 가옥의 것으로 보이는 정연하게 배열된 기둥구멍(柱穴)도 확인되어 이 지역의 가옥 형태가 점차 지상식(地上式)으로 전환되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Posted by civ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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