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goo.gl/rj3s34 (문서파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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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해사와 연구쟁점 - 한규철" 중에서 "Ⅳ.남북국시대의 신라와 발해"만 가져왔습니다.

남북국시대의 신라와 발해
 
한국사에서 신라와 발해가 양립하던 시기는 조선시대 유득공(柳得恭, 1749~1807) 이래 ‘삼국시대’에 이은 ‘남북국시대’로 규정하고 있다. 남북국시대론의 가장 큰 이유는 고구려가 발해를 계승했다는 것이다. 나아가 삼국의 상쟁이 삼국시대로 여길 수 있게 한 이유가 되듯이 남북국의 교섭과 대결이 갖는 애증의 양면적 관계 역시 남북국시대로서의 의미를 갖는다. 인접국간 교섭과 대결은 하나의 역사가 되기 위한 ‘역사공동체’의 요건이다. 때문에 역사에서 교섭뿐만 아니라 적대적인 주변국과의 전쟁까지도 ‘적극교섭’의 일환으로 볼 수 있는 것이다.

남북국의 관계에 관한 기록은 아주 적다. 그러나 기록이 없다고 해서 남북의 교섭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특히 피지배 주민들의 경우에는 더욱 그러했을 것이다. 남북 왕조가 교섭했던 기록이 '삼국사기'에 남아 있고, 발해에서 신라로 통하는 ‘신라도(新羅道)’인 신라 천정군(泉井郡;함남 덕원)으로부터 발해의 책성부(柵城府; 간도 훈춘)까지에 걸쳐 39개의 역도 있었다.

신라와 발해 왕실이 첫 접촉을 가졌던 시기는 발해가 왕실을 개창한 지 2년째가 되던 
발해 대조영 고왕 2년(70)이었다. 발해가 당의 방해를 받으면서 나라를 세우고 신라의 도움을 청하기 위해 사신을 파견한 일이 있었다. 과거 신라와 당의 연합으로 고구려가 멸망한 사실을 교훈으로 삼아 이를 사전에 막기 위해서였다. 최치원이 당에 보낸 편지글은 “(발해가) 처음 거처할 고을을 세우고 와서 인접하기를 청하였기에 그 추장 대조영에게 비로소 신라의 제5품 대아찬의 벼슬을 주었다”고 전한다. 신라가 발해건국을 묵인하는 명분은 신라의 대아찬 벼슬을 대조영이 받는 것이었다. 그러나 발해가 신라에 조공이나 어떠한 정치적 배려를 하였다는 기록은 없다.

신라와 발해가 직접적으로 충돌하게 되었던 계기는 발해의 당나라 공격(732)에 신라가 
개입한 사건에서 비롯한다. 발해와 당은 발해 건국 과정에서부터 대립적이었다. 발해가 당을 공격하게 된 배경은 당이 발해 견제를 위해 흑수말갈과의 관계를 긴밀히 한 이후였다. 발해의 당나라 공격은 732년, 해륙 양면으로 결행되었다. 이럴 즈음 신라는 당나라를 돕기 위해 신라군을 발해의 남쪽 국경 지역에 파견하기도 하였다. 마침 일기상의 이유로 신라군이 철수하였으나 이 사건 이후 남북국은 더욱 대결하게 되었다.

남북국은 일본과 발해가 신라를 협공하려 했던 발해 3대 문왕(737~793) 때도 적대적
이었다. 일본 내부의 문제로 일본이 신라를 발해와 협공하려 했던 이른바 ‘신라협공계획’ (758~764)에서 더욱 그러했다. 이 계획은 발해의 중도 포기와 안사의 난(75~763년)에 따른 국제정세의 변화 그리고 일본의 정세변화로 무산되었으나 이것은 양국의 대결관계가 있었기에 일본이 이를 이용하려 한 사례였다.

남북국이 대결에서 교섭으로 변화하는 국면은 신라의 정치 변화에서 비롯되었다(제3기). 
'삼국사기'는 신라가 원성왕 6년(790)과 헌덕왕 4년(812)에 각각 ‘북국(北國)’ 즉 발해에 6두품급의 사신을 파견하였다고 전한다. 왜 신라가 북국에 사신을 파견하였고 그 경과와 결과 등에 대해서는 기록이 없어 알 수 없지만 당시 신라정세를 통해 일정하게 추측이 가능하다. 원성왕과 헌덕왕 모두가 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왕들이었다는 것이다. 이들 왕들은 신라하대의 위기 상황을 극복하기 위해 발해와의 교섭을 시도했던 것으로 분석되고 있다.

신라 하대 정치 세력의 이해관계 하에서 이루어진 남북국의 교섭은 발해의 영토 확장과 
신·당의 군사 협력을 계기로 대결하게 되었다. 신라와 발해가 결정적으로 교섭에서 대결로 상황이 바뀌게 된 동기는 당 내부의 문제로 신라에 군사적 도움을 청하고부터였다. 당나라는 그들 내부에서 819년 이사도(李師道)가 반란을 일으키자 신라에 도움을 청하였고 신라 또한 이에 응해 신라군 3만을 파병하였다고 전한다. 그런데 이사도는 본래 고구려계 사람으로서 고구려가 멸망하고 당에 강제 이주되었던 이정기(李正己)의 손자였다. 따라서 당이 이사도 반란 토벌에 도움을 청하였던 것은 이사도를 발해계로 생각하여 남북국의 대결관계를 이용하려 하였다고 할 수 있다.

이 사건은 신라와 당이 가까워지는 계기는 되었으나 남북국의 관계는 오히려 더 악화
되었다. 신라쪽 기록만 남아 있지만 이 사건이 있고나서 3년째가 되던 해에 헌덕왕은 김헌창의 반란 세력 239명을 과감히 처형하였으며(822), 발해와의 북쪽 경계에다 일만 여명의 한산 북쪽 주민들을 동원하여 긴 성을 쌓았다(826). 당의 영향력을 믿었던 헌덕왕의 대내외적 자신감이 그렇게 표현된 것이었다고 본다.

신라와 발해가 대립적이었다는 사실은 일본 승려 에닌[圓仁]의 기행문에서도 확인된다. 신라인들이 발해와 싸워 이긴 날을 기념하기 위해, 8월 15일이 되어서 백가지 음식을 차려 
놓고 3일 동안 밤낮으로 춤과 노래를 부르며 놀았다고 한다. 한민족의 추석 명절이 여기에서 비롯되었다거나, 이로써 더욱 성대하게 되었다는 이야기다.

당 조정에서 신라와 발해사신들이 자리다툼을 하였던 사실도 기록에 남아 있는가 하면 
당에서 유학하던 양국의 학생들도 경쟁하였다. 당이 외국인들을 위해 설치한 빈공과(賓貢科) 시험에서 875년 발해의 오소도(烏昭度)가 신라의 이동(李同)보다 높은 점수를 얻어 수석의 영광을 차지하자, 최치원은 이 사건이야말로 “일국의 수치로 영원히 남을 것이다”라고 치욕스럽게 여기었다. 또한 906년에는 신라의 최언위(崔彦撝)가 오소도의 아들인 오광찬(烏光贊)보다 상위에 합격하자, 당에 있던 오소도가 자기 아들의 순위를 최언위보다 올려 달라고 요구하였다가 거절당했던 사건 등이 그것이다.

신라와 발해의 대립관계가 또 다시 교섭의 분위기로 바뀌게 되었던 시기는 발해가 
멸망의 위기에 처해 있던 10세기 무렵이었다. 당시 남북국이 교섭하였음을 알려주는 '거란국지'는 발해의 마지막 왕 대인선(大諲譔)이 거란의 팽창을 두려워한 나머지 은밀히 ‘신라(후삼국)의 여러나라’들에 구원을 요청하여 이것을 약속받았다는 내용을 전하고 있다. 그러나 발해의 은밀한 도움 요청을 받고 돕기를 약속하였던 신라제국(新羅諸國)들이 발해를 돕지 않고 결국에는 거란을 도왔다고 한다. 오히려 신라는 이 일로 인해 거란으로부터 고마움에 대한 선물까지 받았다고 한다.

요컨대, 남북교섭에서 신라는 그들 특정 정치집단의 이해관계 아래에서 발해와 그리고, 
발해는 고구려멸망에 대한 대립감정으로 인해 안정이 아닌 위기하에서만 신라와의 교섭을 시도했었다. 그리고 남북국의 교섭이 성공적일 수 있었던 것은 양국이 서로가 당과의 관계에서 자주적이었을 때였다. 그러나 두 나라는 각기 당과 일본과의 관계를 우선적으로 생각하고 남북교섭은 그들의 필요에 의한 차선책에서 행해졌다. 이러한 한계는 결국 신라와 발해가 문화적 이질성의 심화, 대결이 현상고착되는 결과를 낳아, 신라 중심의 고려후손들이 발해와 그 후손인 거란 속의 발해인과 여진을 이민족으로 보는 원인이 되었다.




Posted by civ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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