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www.lec.co.kr/news/articleView.html?idxno=34827
발해의 대외 관계에 대하여
오태진의 한국사 이야기
오태진 아모르이그잼 경찰 한국사 | gosilec@lec.co.kr 승인 2014.10.29 10:20:28
1. 발해의 대외 관계
발해가 교섭하였던 주변 왕조는 당과 일본, 신라, 돌궐 등이었다. 기록에 나타난 교류를 보면, 당나라와는 130여 회, 일본과는 48회였으며 신라와는 양국에서 각각 두 차례씩이 있었다.
이를 통해서 알 수 있는 것은 당나라와 가장 많은 접촉이 있었고 다음으로는 일본, 그리고 신라와는 가장 소원한 관계를 유지하였던 것으로 나타난다. 즉, 왕조적인 차원의 교섭면에서는 실질적으로 신라가 가장 소원했다고 인정할 수 있겠다.
물론 이것은 기록에 나타난 정황으로 추론한 사실이며, 발해와 신라 사이에 있었던 ‘신라도’를 통해 민간 사이에서는 비공식적으로 많은 교류가 있었음을 유추할 수 있다.
2. 발해와 신라
앞서 말한 대로 양국 관계에 대한 기록이 없다고 해서 남북의 교섭과 대립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또한 기록이 없었다고 해서 발해와 신라가 대립만이 지속되었다고 결론 내리는 것도 문제점이 있을 수 있다.
‘신라도’가 있었다는 것과 신라 천정군(현재 함남 덕원)에서 발해 책성부(간도 훈춘)로 가는 길 가운데 39개의 역이 있었으며 양국의 국경 관문으로 탄항관문이 설치되어 있었던 것도 확인되기 때문이다.
228년 동안 지속되었던 남북국의 관계는 교섭과 대립이라는 측면에서 대개 다섯 시기로 나눌 수 있다.
① 발해가 건국하는 과정에서 20여 년간의 남북교섭기(698~713),
② 발해의 정복 사업 추진기로서 제2대 무왕과 제3대 문왕 집권 중기까지 60여 년간의 남북 대립기(713~785),
③ 원성왕과 헌덕왕의 정변이 중요한 계기가 되어 형성된 30여 년간의 남북 교섭기(785~818),
④ 발해국의 고구려땅 회복 정책과 신라, 당의 밀착으로 전개되기 시작한 남북 대립기(818~905),
⑤ 멸망 위기에서 전개되는 발해 멸망기의 남북교섭기(906~926)가 그것이다.
② 발해의 정복 사업 추진기로서 제2대 무왕과 제3대 문왕 집권 중기까지 60여 년간의 남북 대립기(713~785),
③ 원성왕과 헌덕왕의 정변이 중요한 계기가 되어 형성된 30여 년간의 남북 교섭기(785~818),
④ 발해국의 고구려땅 회복 정책과 신라, 당의 밀착으로 전개되기 시작한 남북 대립기(818~905),
⑤ 멸망 위기에서 전개되는 발해 멸망기의 남북교섭기(906~926)가 그것이다.
이처럼 한국사학계 내부에서는 발해와 신라의 관계를 남북국시대로 설정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 학계 이외의 다른 나라에서는 남북국 시대의 설정을 부정적으로 파악하고 있다. 중국 학계에서는 아예 발해와 신라 사이의 관계를 논의하는 것 자체를 터부시하고 있는 형편이다.
그러나 신라와 발해가 삼국과 같이 통일을 이룩하기 위한 정치적, 군사적 노력을 하지 않았거나 미미하였다고 할지라도 양국 관계를 남북국시대로 보는 가장 큰 이유는 발해가 바로 고구려를 계승한 국가였기 때문이다.
문화적으로 발해인들이 고구려 문화를 계승하였고, 고구려, 백제, 신라의 삼국이 서로 상쟁하며 통일을 꾀했던 역사시기를 삼국시대로 부를 수 있다면, 고구려를 계승한 발해와 백제 및 신라의 후신인 통일신라(대신라, 후기 신라)의 관계를 남북국으로 부르는 데에는 문제가 있을 수 없다.
3. 발해와 당(唐)
발해는 어느 나라보다 당과 빈번하게 접촉했다. 양국은 전쟁을 포함해서 ‘조공외교’로 표현되는 정치, 경제적 교섭을 빈번히 하였기 때문이다. 발해국의 대외관계에서 가장 중요한 사실은 발해가 당나라에 대해서 자주적이었는가 하는 문제이다.
발해가 당나라의 지방정권이었다면 발해의 대외 관계란 큰 의미가 없다. 당나라 외교에 종속적일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발해는 자주적인 왕조였다. 당시의 국제 질서가 당나라 중심이었음은 인정되는 바이나 발해가 당나라의 지방 정권은 아니었다.
중국 정부와 학계에서 주장하는 기본적인 논리는 조공, 책봉 관계와 속지주의(屬地主義)적 관점에서 역사를 파악하는 것이다. 전자에 따른다면 동아시아 역사 뿐만 아니라 서아시아와 동남 아시아의 모든 왕조의 역사도 중국사 되는 것이다.
그럼 아시아인 = 중국인으로 귀결이 되는 말도 되지 않는 논리가 성립된다. 후자의 주장에 따르면 현재 중국 영토에 있었던 모든 역사는 중국사라는 말이 되는데, 한국 역시 함경도와 평안도 지역이 발해의 영토였기 때문에 우리 역시 발해에 대한 정당성을 주장할 수 있다.
4. 발해와 일본
발해와 일본 사이에는 동경용원부의 한 곳에서 일본까지를 잇는 ‘일본도’가 있었다고 신당서에 기록될 정도로 공식적인 교역로가 있었다. 남북국시대에 발해와 일본의 관계는 신라보다 더 빈번한 접촉이 있었던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즉 발해가 일본에 34차례, 일본이 발해에 13차례에 걸쳐 사신을 파견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삼국사기에서 신라 1천 년 역사를 기록하면서 10차례도 일본에 사신을 파견하지 않은 것으로 기록한 것과는 매우 대조적이다.
발해가 일본에 처음 사신을 파견한 것은 2대 무왕 인안 9년(727)이었다. 발해사신 영원장군 낭장 고인과 고제덕 등 24인이 일본에 파견되었다. 그런데 발해가 일본에 사신을 파견한 것은 신라를 견제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후 발해와 일본과의 관계는 일본의 발해 사신 억류로 소원해지다가 일본의 신라 공격 계획에 따라 다시금 활발해졌다. 이른바 일본의 ‘신라정토계획’을 실천하기 위해 발해를 끌어들이기 위한 양국간의 교섭이 이루어진 것이다.
그러나 당시 일본은 신라를 치기 위해 군사를 낼 만한 형편이 못되었다. 일본의 신라 정벌 계획은 바로 ‘에미’정권의 위기를 밖으로 돌리기 위한 전략이었던 것이다. 일본과 발해의 신라 협공 계획은 발해의 도중하차와 당을 중심으로 한 국제 정세(안녹산의 난) 및 일본 내부의 사정으로 그 계획이 무산되었다.
발해가 도중하차를 한 이유는 당의 안사의 난을 계기로 변방의 요동, 이른바 ‘소고구려’ 지역에 신경을 쓰고 있는 입장이어서 일본의 신라 공격 제안을 끝까지 도울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이후의 양국 교섭은 모두 발해가 일본에 먼저 사신을 파견하였던 것으로 나타나 건국 초기와 같은 형식이 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건국 초기의 목적이 정치, 군사적이었다면 이후의 것은 경제, 문화적인 면이 강했다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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