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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백제 漢城都邑期 연구 동향과 과제 - 김기섭" 중 "
Ⅱ.국가 형성" 내용만 가져왔습니다.

백제의 국가 형성
2011.1. 김기섭

백제는 언제 만들어진 나라일까? 누가 백제를 세웠을까? 묻기는 쉽지만, 관련자료가 턱없이 모자라기에 대답하기는 까다롭다. 자연히 논쟁점이 형성되었다. 

삼국사기(三國史記)는 백제의 건국시조 온조왕이 전한 성제(前漢 成帝)의 홍가(鴻嘉) 3년(서기전 18)에 하남위례성(河南慰禮城)에서 나라를 세웠다고 전하였다.2) 이 기록은 韓末까지 추호의 의심도 없이 존중되었다. 그런데 일제 때 츠다 소우키치[津田左右吉]가 일본서기(日本書紀) 기사를 근거로 온조왕(溫祚王)부터 계왕(契王, 344~346)까지의 왕실 계보를 전설이라고 주장하였다.3) 그 뒤 일본 역사학자들이 삼국사기의 신빙성을 본격적으로 의심하고 부정하였다. 대신 그들은 삼국지 한전(三國志 韓傳)에 더욱 주목했다. 이마니시 류[今西龍]는 삼국지 한전에 열거된 마한(馬韓) 54국 중 백제국(伯濟國)에 주목함으로써 백제의 기원을 3세기말경으로 파악하고, 4세기의 백제에 대해서는 일본서기(日本書紀)와 광개토왕릉비문(廣開土王陵碑文)을 통해 재구성하려 했다.4) 삼국사기를 통해서는 백제사의 실상을 파악하기 어렵다고 본 것이다. 

삼국사기 초기 기사를 통째로 믿지 않게 되자 사료 부족 현상이 더욱 심해졌다. 이에 몇몇 중국사서의 간단한 기록을 징검다리 삼아 작가적 상상력으로 여백을 메우려는 시도가 나타났다. 오타료[太田亮]는 삼국사기의 백제 왕실계보가 조작되었다는 전제 하에 고이왕부터 계왕까지의 이른바 고이왕계(古爾王系)는 왕이 아닌 왕족이며 근초고왕(近肖古王) 이전 왕들의 재위년수는 근초고왕부터 구이신왕까지의 재위년수를 기초로 조작 산출한 것이라고 주장하였다.5) 시라토리 쿠라키치[白鳥庫吉]는 서기 285년경에 모용씨(慕容氏)가 부여(夫餘)를 격파하자 왕족 일부가 남하해 한(韓)의 백제(伯濟)와 연합함으로써 백제(百濟)를 만들었다고 추론하였다.6) 이노우에 히데오[井上秀雄],7) 카사이 와진[笠井倭人],8) 사카모토 요시타네[坂元義種]9) 등은 아예 4세기초까지의 백제사를 거론하지 않거나 생략하였다. 이들은 중국사서에 기재된 중국왕조와 동이(東夷)의 교섭기사에 주목하고 그를 통해 백제의 역사를 전설시대와 역사시대로 나눔으로써 근초고왕 이전의 계보는 허구라는 인식에 암묵적으로 동의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인식은 적극적인 삼국사기 사료 비판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한일관계사를 통해 일본의 왕계(王系)를 복원하려는 연구방법론의 일환이었기 때문에 처음부터 한계를 안고 있었다.

이병도(李丙燾)는 삼국사기의 초기 기록을 무시하는 일본인 학자들의 사료관에 의문을 제기하고 처음으로 대안을 제시하였다. 그는 주서(周書)를 비롯한 중국사서에 백제의 시조로 나오는 구태(仇台)의 고음(古音)이 고이(古尒)와 같다는 사실에 착안하여 고이왕(古爾王, 234~286)이야말로 백제의 실질적 시조라고 보았다. 서기 246년에 한(韓)이 대방군의 기리영(崎離營)을 공격하자 낙랑군과 대방군이 함께 한(韓)을 토벌했다10)는 삼국지의 기록은 고이왕 13년(246)에 낙랑군과 대방군이 고구려를 치는 사이 백제가 낙랑의 변방주민을 습격해 빼앗았다가 낙랑태수가 분노하자 돌려주었다11)는 삼국사기의 기록과 같은 사건을 달리 표현한 것이라고 단언하였다. 그리고 고이왕 27년조에 실린 6좌평(佐平)·16관품(官品) 제정 기사를 근거로 삼아 국가조직 정비를 유추하였다.12) 이와 같은 이병도의 사료관은 이후 한국고대사학계의 큰 줄기가 되었다. 특히, 백제 고이왕이 기리영(崎離營) 침공 주체였다는 해석은 백제가 늦어도 3세기 중엽에 상당한 세력을 형성했다는 시각으로 이어졌다.13)

이기백(李基白)은 백제 왕실계보를 검토함으로써 이병도의 사료관을 입증하려 하였다. 그리하여 제8대 고이왕(古爾王)부터 제12대 계왕(契王)까지는 형제상속으로 왕위가 계승되었고, 제13대 근초고왕(近肖古王)부터 제17대 아신왕(阿莘王)까지는 과도기이며, 제18대 전지왕(腆支王)부터 부자상속제가 확립되었다고 추정하였다. 그리고 부자상속으로 왕위를 계승했다고 기록된 시조 온조왕(溫祚王)부터 제6대 구수왕(仇首王)까지의 계보는 조작된 것이라고 결론지
었다.14)

고이왕대를 백제사의 획기로 간주하는 시각은 김철준(金哲埈)과 이기동(李基東)에게로 이어졌다. 다만, 국가 형성 과정에 대한 해석은 저마다 조금씩 달라서 2~3세기경 유이민이 남하하여 건국하기까지의 과정을 시대상황 속에서 추론해보는가 하면,15) 이른바 기미민족설(騎馬民族說)과 왕실교대론(王室交代論)에 입각해 백제의 단계적 발전을 구체적으로 왕실 계보에 적용하기도 하였다.16) 특히, 이기동은 고이왕이 재위하던 3세기 중엽에 마한족의 백제국(伯濟國)이 성읍국가에서 연맹왕국 단계로 비약하였고, 4세기 무렵에는 다시 고구려계통의 온조집단이 남쪽으로 내려와 백제국을 정복하였을 것으로 추론하였다.17)

기마민족설의 영향은 이도학(李道學)의 만주백제설(滿洲百濟說)로 이어졌다. 그는 백제가 정복국가적 성격을 띠었으며 1세기경과 4세기경 2차례에 걸쳐 정복세력이 국가를 세우고 왕실을 교체했다고 추론하였다. 특히 4세기에는 아직 만주지역에 남아있던 일파가 남쪽으로 이동해 백제의 새로운 왕실로 거듭났다고 주장하였다. 백제의 연원을 부여(夫餘)에서 찾고 만주지역에서의 활동을 구체적으로 상정한 점이 이기동 및 일본학계의 시각과 다르다.18)

이처럼 한국고대사학계는 3세기의 고이왕대에 주목함으로써 일본서기에 근거해 4세기의 근초고왕대를 백제사의 실질적 기점으로 삼은 일본학계의 편견을 비판하였다. 그러나 기본적으로 연구방법이 같고 주로 이용하는 사료가 같은 상태에서 약간의 관점 차이만으로는 기존의 편견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었다. 그런 점에서 김원룡(金元龍)의 고고학적 고찰은 내용의 시비(是非)를 떠나 연구사적 의의가 크다.

김원룡(金元龍)은 고구려·백제·신라 삼국이 서기전 1세기에 건국되었다는 삼국사기 기록을 믿고 싶어 했다.19) 그는 낙랑(樂浪)․대방군(帶方郡)의 세력범위를 종래 과대평가하였다면서 낙랑군 영역을 대동강유역에 한정하였다. 낙랑․대방군은 일종의 조계지(租界地)에 불과했으므로 삼한에 대한 정치·군사적 구속력을 가지거나 삼국이 성장하는 데 큰 걸림돌이 될 정도로 힘세지는 못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서울의 풍납토성(風納土城) 내부에서 무문토기(無文土器)가 다량 출토되었으므로 성벽 축조시기를 기원 전후까지 올려볼 수 있다고 하였다. 백제의 수도 부근에 있던 둘레 3.5km의 평지토성을 기원 전후에 쌓았다면 서기전 18년에 건국했다는 삼국사기 「백제본기」의 기록을 못 믿을 이유도 없다는 논리이다.

김원룡은 이후 삼국 및 백제의 건국시기에 대해 견해를 특별히 밝히지 않았다. 다만, 그의 대표적인 저서20) 목차를 구석기문화, 신석기문화, 청동기문화, 초기철기문화, 낙랑군(樂浪郡)의 문화(文化), 원삼국문화(原三國文化), 삼국시대 묘제 및 부장품, 통일신라시대 등으로 구성함으로써 낙랑군의 영향력에 대해 재평가하는 듯한 인상을 주었으며, 그의 창안인 원삼국시대(原三國時代)도 삼한시대(三韓時代)와 등치하려는 움직임을 보였다.

그런데 삼국사기에 대한 김원룡의 호의적인 태도는 1960년대 말부터 한국고고학 및 백제고고학에 큰 영향을 미쳤다. 일본 식민지의 잔흔을 덜어내려는 민족주의·애국주의 시대 분위기와 맞물려 탈식민사학(脫植民史學)의 한가지 방법으로서 고고자료․문화재를 대하였고, 고고자료로 삼국사기 기록을 입증하려는 노력도 강해졌다. 정부의 문화재관련 부서 및 연구기관의 편년관(編年觀)에 영향을 미쳤으며, 백제의 건국 및 도읍 위치와 관련한 극도의 삼국사기 긍정론21)을 거쳐 최근 풍납토성 발굴을 통해 강력한 논쟁점을 만들어냈다.22) 특히, 그 과정에서 불굴의 의지로 풍납토성 발굴을 이끌어낸 기형구(李亨求)의 노력23)은 문화재 보존 및 지역사회에 큰 영향을 미치면서 식민사학에 대한 대중적 관심을 더욱 촉발시키는 계기가 되었다.24)

삼국사기 초기 기록에 대한 한국고고학계의 긍정적인 태도는 문헌사학계의 연구방법론과 관점 변화에 영향을 주었다. 천관우(千寬宇)는 천편일률적인 접근법과 선입견에서 벗어날 것을 촉구하며 온조왕대의 영역 획정기사25)를 입증하려 하였다. 그리고 세심한 분석을 통해 백제의 왕실 계보를 우태(優台)-비류(沸流)-고이계(古爾系)와 주몽(朱蒙)-온조(溫祚)-초고계(肖古系) 두 집단으로 나눈 다음 왕실이 교체되었거나 경쟁했을 가능성이 있다고 지적하였다.26) 온조왕 때의 강역이 지금의 경기지역을 넘어섰으며, 기마병(騎馬兵)과 새로운 철기문화가 그 기반이었다는 논리는 이후 박찬규(朴燦圭)27)·김병남(金秉南)28) 등에게로 이어졌다. 그리고 박현숙(朴賢淑)29)·최범호(崔氾鎬30)·오순제(吳舜濟)31)·이용빈(李容彬)32) 등에게는 추론의 기초를 제공하였다. 

이종욱(李鍾旭)은 인류학의 신진화주의(新進化主義)를 원용해 삼국사기의 편년을 입증하려 하였다. 국가발전단계론(國家發展段階論)에 따라 서기전 1세기에 부여·고구려방면에서 이주해온 온조집단이 한강유역에 자리잡아 십제(十濟)를 건국하였으며 곧 미추홀(彌鄒忽)의 소국을 병합한 뒤 백제(百濟)로 나라 이름을 바꾸고 주변의 여러 소국들을 거느리는 정치세력으로 성장했다고 보았다.33) 이러한 해석의 배경에는 삼국지 한전에 담긴 중화주의(中華主義)가 삼국시대 초기의 역사를 제대로 전달하지 못했다는 시각,34) 그리고 한군현(漢郡縣) 때문에 오히려 삼한지역에서 국가가 더 빨리 성장했다는 시각이 작용한다. 한군현이 백제의 국가성장을 촉진했다는 관점에는 신형식(申瀅植)이 동의하였다.35)

백제의 국가 형성 및 성장에 관한 논의가 이어지는 동안 연구자들의 관점이 더욱 뚜렷하게 두 가지로 갈라졌다. 하나는 삼국사기를 기반으로 삼고 삼국지를 의심하는 관점이며, 다른 하나는 삼국지의 시대상에 따라 삼국사기 이용을 최소화하려는 관점이다. 한동안 둘 사이의 거리는 점점 더 멀어져 갔다. 그러나 곧 절충점이 제시되었다. 

노중국(盧重國)은 삼국지와 삼국사기가 각기 장점을 갖고 있지만 한계도 명확하므로 어느 한쪽에 치우치면 실상을 파악하기 어렵다고 보았다. 그는 두 사서의 시대상으로부터 조금 더 자유로워지자고 제안하고, 대신 인류학의 연구성과인 국가발전단계론에 따라 두 사서의 내용을 재배치하는 방법을 택하였다. 그리하여 읍락(邑落)단계→소국(小國)단계→소국연맹(小國聯盟)단계→부체제(部體制)단계→고대국가(古代國家)단계라는 발전과정을 설정한 다음 그에 맞추어 삼국사기 초기 기사를 재편성하였다.36) 스스로 삼국사기 분해론(分解論)으로 명명한 이 방법은 바야흐로 국가발전단계론이 우리 학계에서 비교적 안정적인 이론으로서 인정받았음을 의미한다. 그러나 이미 김철준·이기백·천관우·이종욱·김정배37) 등이 나름의 방식으로 한국사에 적용하였던 만큼 얼마든지 자의적 변용이 가능한 이론으로 평가될 여지도 남겼다.

자의적 판단의 범위가 비교적 넓다는 지적에도 불구하고 노중국의 제안은 큰 반향을 일으켰다. 구체적인 해석은 다소간 차이가 있지만, 기본적으로 이도학(李道學)38)·김기섭(金起燮)39)·문안식(文安植)40)·강종원(姜鍾元)41) 등도 분해론의 범주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했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경향은 고고학 쪽으로도 확산되었다. 그리하여 삼국사기 초기 기록에 긍정적이던 기존의 태도와 사뭇 다른 해석들이 제출되었는데, 한강유역에서의 백제의 출발점을 대략 3세기 무렵으로 본다는 공통점이 있다.42)

분해론은 삼국사기 초기 기록을 신뢰하려는 시각에도 영향을 미쳤다.43) 건국시기는 대략적으로 인정하고 내용만 조금 조정하자는 것이다. 이종욱은 삼국사기 「백제본기」와 삼국지 동이전은 편찬 동기와 목적이 서로 다르므로 삼국사기에서는 초기 백제사의 줄거리를 취하고 삼국지에서는 한반도의 사회상과 대(對)중국외교사를 취해 보완 연결하자고 제안하였다.44)

돌이켜보면 백제의 건국시기에 관한 논쟁은 치열했다. 그리고 지금도 여전히 계속되고 있다. 그런데도 여전히 터널의 끝이 보이지 않는 것은 국가의 개념을 정의하고 각종 사료에 적용하는 작업이 더디게 진행된 데다 자의적인 해석도 적지 않았기 때문이다. 새로운 연구방법론과 관점을 확보하지 못하고 인접학문의 이론과 연구성과를 나름대로 원용하는 데에만 관심을 기울인 점도 문제이다. 

긍정적인 관점에서 보면, 백제의 국가형성 연구사는 한국사학계의 발전과정이랄까 진화과정을 고스란히 옮겨놓은 일종의 축소판이다. 백제 역사․문화를 의도적으로 왜곡하거나 무의식적으로 폄훼하던 식민사학에서 벗어나 사실을 밝혀내려는 노력들이 차곡차곡 쌓여 어느덧 작지 않은 산을 이룬것이다. 간혹 편년관(編年觀)을 두고 식민사학 잔재 운운하는 감정대립도 있었지만, 크게 보면 학계의 뜨거운 연구열과 학자의 소신을 부추긴 작은 불꽃에 지나지 않았다. 
 

주석

2) 百濟始祖溫祚王 其父鄒牟 或云朱蒙 自北扶餘逃難 至卒本扶餘 扶餘王無子 只有三女子 見朱蒙 知非常人 以第二女妻之 未幾扶餘王薨 朱蒙嗣位 生二子 長曰沸流 次曰溫祚[或云 朱蒙到卒本 娶越郡女 生二子] 及朱蒙在北扶餘所生子來爲太子 沸流溫祚 恐爲太子所不容 遂與烏干-馬黎等十臣南行 百姓從之者多 遂至漢山 登負兒嶽 望可居之地 沸流欲居於海濱 十臣諫曰 惟此河南之地 北帶漢水 東據高岳 南望沃澤 西阻大海 其天險地利 難得之勢 作都於斯 不亦宜乎 沸流不聽 分其民 歸彌鄒忽以居之 溫祚都河南慰禮城 以十臣爲輔翼 國號十濟 是前漢成帝鴻嘉三年也 沸流以彌鄒土濕水鹹 不得安居 歸見慰禮 都邑鼎定 人民安泰 遂慙悔而死 其臣民皆歸於慰禮 後以來時百姓樂從 改號百濟 其世系與高句麗同出扶餘 故以扶餘爲氏.(三國史記 권23 百濟本紀 溫祚王 즉위년)
3) 津田左右吉, 1921, 百濟に関する日本書紀の記載 , 満鮮地理歷史研究報告8, 東京帝国大学文学部.
4) 今西龍, 1934, 百濟略史 , 朝鮮及滿洲1929-6 ; 百濟史硏究, 近澤書店.
5) 太田亮, 1928, 日本古代史新硏究, 磯部甲陽堂.
6) 白鳥庫吉, 1970, 百濟の起源について , 歷史 創刊號, 1947 ; 朝鮮史硏究-白鳥庫吉全集3-, 岩波書店.
7) 井上秀雄, 1972, 古代朝鮮, 日本放送出版協會. 
8) 笠井倭人, 1975, 中國史書における百濟王統譜 , 日本書紀硏究8, 塙書房.
9) 坂元義種, 1978, 百濟史の硏究, 塙書房.
10) 部從事吳林 以樂浪本統韓國 分割辰韓八國 以與樂浪 吏譯轉有異同 臣幘沾韓忿攻帶方郡崎離營 時太守弓遵樂浪太守劉茂 興兵伐之 遵戰死 二郡遂滅韓.(三國志 권30 魏書 東夷傳 韓)
11) 秋八月 魏幽州刺史毌丘儉與樂浪太守劉茂朔方太守王遵伐高句麗 王乘虛 遣左將眞忠襲取樂浪邊民 茂聞之怒 王恐見侵討 還其民口.(三國史記 권24 百濟本紀 古爾王 13년)
12) 李丙燾, 1936, 三韓問題의 新考察 , 震檀學報6 ; 1976, 韓國古代史硏究, 博英社.
13) 千寬宇, 1989, 馬韓諸國의 位置試論 , 東洋學9, 단국대학교 동양학연구소, 1979 ; 古朝鮮史․三韓史硏究, 일조각 ; 李基東, 1990, 百濟國의 成長과 馬韓 倂合 , 百濟論叢2, 백제문화개발연구원 ; 李基白, 1996, 3세기 東아시아 諸國의 政治的 發展 , 韓國古代政治社會史硏究, 일조각 ; 李賢惠, 1997, 3世紀 馬韓과 百濟 , 百濟의 中央과 地方, 충남대학교 백제연구소 ; 김수태, 1998, 3세기 중․후반 백제의 발전과 馬韓 , 馬韓史硏究, 충남대학교 백제연구소 ; 鄭載潤, 2001, 魏의 對韓政策과 崎離營 전투 , 中原文化論叢5, 충북대학교 중원문화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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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金哲埈, 1982, 百濟建國考 , 百濟硏究 특집호, 충남대학교 백제연구소.
16) 李基東, 1987, 馬韓領域에서의 百濟의 成長 , 馬韓․百濟文化10, 원광대학교 마한백제문화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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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 金元龍, 1967, 三國時代의 開始에 關한 一考察 , 東亞文化7, 동아문화연구소.
20) 金元龍, 1986, 韓國考古學槪說, 일지사. 
21) 崔夢龍․權五榮, 1985, 考古學的 資料를 통해 본 百濟初期의 領域考察 , 千寬宇先生還曆紀念 韓國史學論叢, 정음문화사 ; 崔夢龍, 1985, 漢城時代 百濟의 都邑地와 領域 , 震檀學報60 ; 權五榮, 1986, 初期百濟의 성장과정에 관한 一考察 , 韓國史論15, 서울대학교 국사학과. 다만, 권오영은 기존의 입장에서 후퇴하여 3세기 후반에야 비로소 伯濟國이 비약하고 4세기에 百濟로 성장했다는 관점을 취하고 있다. 권오영, 2001, 백제국(伯濟國)에서 백제(百濟)로의 전환 , 역사와 현실40, 한국역사연구회.
22) 신희권, 2002, 風納土城 발굴조사를 통한 河南慰禮城 고찰 , 鄕土서울62 ; 申鍾國, 2002, 百濟土器의 形成과 變遷過程에 대한 硏究 , 성균관대학교 석사학위논문.
23) 李亨求, 1997, 서울 풍납토성[백제왕성]실측조사연구, 백제문화개발연구원.
24) 김태식, 2001, 풍납토성, 500년 백제를 깨우다, 김영사.
25) 八月 遣使馬韓告遷都 遂畫定彊域 北至浿河 南限熊川 西窮大海 東極走壤.(三國史記 권23 백제본기 溫祚王 13년)
26) 千寬宇, 1976, 三韓의 國家形成(下) , 韓國學報3, 一志社.
27) 朴燦圭, 1995, 앞의 박사학위논문.
28) 金秉南, 2001, 앞의 박사학위논문.
29) 朴賢淑, 1997, 앞의 박사학위논문.
30) 崔氾鎬, 2001, 앞의 박사학위논문.
31) 吳舜濟, 2001, 앞의 박사학위논문.
32) 李容彬, 2002, 백제 지방통치제도 연구, 서경문화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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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 李鍾旭, 1996, 三國志 韓傳 정치관계 기록의 사료적 가치와 그 한계 , 吉玄益敎授停年紀念史學論叢, 간행위원회.
35) 신형식, 1992, 백제사, 이화여자대학교 출판부 ; 2003, 百濟前期社會의 性格 , 先史와 古代19, 한국고대학회.
36) 盧重國, 1988, 百濟政治史硏究, 일조각.
37) 金貞培, 1986, 韓國古代의 國家起源과 形成, 고려대학교 출판부.
38) 이도학, 1995, 앞의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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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 林永珍, 1995, 앞의 박사학위논문 ; 2003, 積石塚으로 본 百濟 建國集團의 南下過程 , 先史와 古代19, 한국고대학회 ; 朴淳發, 2001, 漢城百濟의 誕生, 서경문화사 ; 成正鏞, 2000, 앞의 박사학위논문.
43) 鄭載潤, 2001, 魏의 對韓政策과 崎離營 전투 , 中原文化論叢5, 충북대학교 중원문화연구소 ; 정재윤, 2007, 初期百濟의 成長과 眞氏勢力의 動向 , 歷史學硏究29, 호남사학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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