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sunday.joins.com/article/view.asp?aid=33739

[다시 쓰는 고대사] 246년은 백제 융성기 …『삼국지』선 ‘멸망’ 엉터리 기록
<9> 고려 『삼국사기』와 중국 『삼국지』
이종욱 교수 leejw@sogang.ac.kr | 제370호 | 20140413 입력  

2000년 국립문화재연구소에서 발표한 서울 풍납토성 출토 자료에 대한 연대측정에 따르면 성 안에서 출토된 자료로는 기원전 199±50년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이는 『삼국사기』의 백제 건국 연대인 기원전 18년보다 훨씬 앞서 백제가 건국됐음을 의미한다. 대방태수 궁준(왕준)을 전사케 한 고이왕도 풍납토성을 왕성으로 삼았다. 사진은 현재 남아있는 풍납토성 전경. [사진 권태균]

임진왜란을 엊그제 벌어진 낭만의 전쟁으로 여기는 일본인들은 지금도 일제의 한국 강점에 대한 망상을 키워간다. 그런데 2014년 현재, 우리는 일제의 한국사 폐멸 흔적을 모두 청산했을까? 아니다.

지난 호에서 황국사관으로 무장된 쓰다 소키치(津田左右吉)가 1919년 발표한 ‘『삼국사기』 ‘신라본기’에 대하여’(『진전좌우길전집』, 별권 1)라는 논문에서 ‘신라 건국신화부터 16대 흘해왕(訖解王·310~356)까지 역사는 사료에 따른 게 아니라 편자의 머릿속에서 구상된 것’이라는 주장을 보았다. 일왕을 옹호하고 일본 단일민족설을 지키려고 쓴 이 논문은 한국인을 폐멸시키는 도구로 사용됐다. 내물왕 이전의 역사를 허구로 만들어 일선동조론이나 창씨개명의 고속도로를 뚫었다.

쓰다는 신라·백제의 고대사를 말살하는 근거를 중국의 『삼국지(三國志)』 ‘한전’에서 끌어왔다. 그래서 ‘한전’과 우리 손으로 신라·백제의 역사를 쓴 『삼국사기』와 비교해보려 한다. 

1145년 왕명에 의해 김부식 등이 편찬한 『삼국사기』는 신라·고구려·백제의 역사를 기록했다. 중국 진(晋)나라의 진수(陳壽)가 쓴 『삼국지』는 위·촉·오 삼국의 역사(220~265)를 다룬다. 그중 위나라를 다룬 ‘위지(魏志)’ 끝에 ‘동이전’이 있고 그 안에 부여·고구려·동옥저·읍루·예·한에 대한 ‘전(傳)’이 있다. 그 ‘한전’에는 삼국시대와 그 이전인 기원전 190년대에 위만에게 쫓겨난 고조선의 마지막 왕 준왕에 대한 이야기도 나온다. 따라서 『삼국지』 ‘한전’의 기록으로 한반도 삼국의 역사를 이야기할 수 있다고 생각할지 모른다. 

그러나 거듭 말하지만 ‘한전’은 인문지리서여서 신라·백제 역사를 다룰 중심 자료가 될 수 없다. 1919년 쓰다의 사료 비판이 있기 전까지는 내물왕 이전 역사는 당연히 『삼국사기』로 다루는 것이 정통이었다. 

백제의 고대사가 담겨 있는 『삼국사기』‘백제본기’.
 
이제 『삼국사기』 ‘신라본기’와 『삼국지』 ‘한전’의 차이를 볼 순서다. 마침 두 사서에 하나의 전쟁에 대한 서로 다른 기록이 나온다. 『삼국사기』 24, ‘백제본기’ 2에 나오는 고이왕 13년(246)의 기록이다.

“8월에 위(魏)나라 유주자사 관구검이 낙랑태수 유무, 삭방(朔方)태수 왕준(王遵)과 함께 고구려를 치므로 왕(고이왕)은 낙랑의 허술한 틈을 타서 좌장(左將) 진충을 보내어 낙랑 변방의 백성들을 빼앗았다. 유무는 이 소식을 듣고 노하므로 왕은 침범당할까 두려워서 그 백성들을 돌려보냈다”라고 나온다.

『삼국지』 ‘한전’은 이렇게 기록한다. 

“부종사 오림은 낙랑이 본래 한국을 통할했기에 진한 8국을 분할하여 낙랑에 속하게 했다. 그때 통역하는 관리가 말을 전하는 과정에 잘못이 있어, 신지(『삼국지』에 나오는 관직명)가 한인(韓人)들을 격분시켜 대방(帶方)의 기리영을 공격했다. 이때 대방태수 궁준(弓遵)과 낙랑태수 유무가 군사를 일으켜 이들을 정벌하였는데, 궁준이 전사하였다. 2군(낙랑과 대방)이 마침내 한(韓)을 멸했다”고 나온다.

여기서 삭방과 대방은 대방군이고 왕준은 궁준과 같은 인물이다. 그런데 이 246년의 전쟁을 놓고 두 사서의 기록에 차이가 난다.

첫째, 『삼국지』와 달리 『삼국사기』엔 궁준의 전사에 대한 내용이 없다. 백제군은 대방의 태수인 궁준의 전사 사실을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다. 백제인들은 그들이 아는 전쟁만 충실히 기록했다. 그래서 『삼국사기』의 사료적 가치를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둘째, 『삼국지』는 “궁준이 전사했다. 낙랑과 대방이 현재 황해도 지역에 있는 기리영을 공격해온 한(韓, 백제)을 낙랑군과 대방군의 2군이 멸(滅)했다”고 한다. 거짓된 기록이다. 백제는 246년에 망하지 않고 더 강성해지는 단계에 있었기 때문이다.

셋째, ‘한전’은 백제(百濟)를 삼한 수십 개 소국 중의 하나인 백제국(伯濟國)으로 기록한다. 그렇다면 그렇게 작은 백제국이 대방군 기리영으로 쳐들어가 낙랑과 대방의 군대와 전투할 수 있었을까? 불가능한 이야기다. 실제 백제는 『삼국사기』의 기록대로 기원전 1세기 말부터 마한의 여러 소국을 정복하기 시작했고, 246년 당시에는 이미 현재의 경기도와 충청도를 정복한 커다란 왕국으로 성장해 있었다.

『삼국지』의 찬자인 진수는 백제나 신라에 대한 제대로 된 자료도 구할 수 없어 그런 엉터리 얘기를 기록한 것이다. 그래서 ‘한전’을 높이 평가하는 것은 위험하다. 그러나 ‘한전’에는 중국과의 관계, 그들이 파악한 한의 정치조직, 한의 습속, 산물 등에 대한 기록도 나온다. “귀신을 믿어 국읍(國邑)에 각기 한 사람을 세워 천신에 제사를 주관하게 했는데 이를 천군(天君)이라 부른다” “꼬리가 긴 닭이 나는데 그 길이가 5척 남짓 된다” “국(國)에서 철이 생산되는데 한(韓)·예(濊)·왜인(倭人)들이 모두 와서 사간다. 시장에서의 모든 매매는 철로 이루어져서 마치 중국에서 돈을 쓰는 것과 같다”는 기록도 있다. 『삼국사기』에는 없어 당시 한반도 남부의 사회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자료다. 그런데 거기까지다.

백제의 정치사나 사회사를 재구성할 때 『삼국지』 ‘한전’은 도움이 안 된다. 신라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신라 내물왕 이전의 역사도 ‘한전’이 아니라, 신라인 스스로가 기록한 『삼국사기』 ‘신라본기’로 다뤄야 한다.

‘한전’과 달리 실제로 『삼국사기』나 『삼국유사』엔 전혀 다른 신라의 모습이 풍성하게 기록돼 있다. 유리왕 19년(42) 이서국(伊西國, 현재 청도)을 정복한 이래 탈해왕 대(57~80)에는 우시산국(현재 울산)과 거칠산국을 병합했다. 그리고 파사왕 대(80~112)에는 음즙벌국·실직곡국·압독국(현재 경산)·다벌국·비지국·초팔국을 병합했다. 벌휴왕 2년(185)에는 조문국(현재 의성), 조분왕 2년(231)에는 감문국(현재 김천), 첨해왕 대(247~261)에 사벌국(沙伐國, 현재 상주)을 병합함으로써, 즉 1세기 중반에 시작된 신라의 진한 소국 정복이 3세기 중반 일단락된 것을 알 수 있다.

이렇게 풍성한 한국 고대사를 쓰다는 폐멸시켰다. 그런데 현재 한국 역사가, 그리고 그들이 만들고 있는 한국사는 그와 무관할까? 아니다. 1945년 8월 일본 패망 뒤 한국에는 정체성과 자긍심을 일으킬 수 있는 제대로 된 한국사 개설서가 한 권도 없었다. 당시 한국사의 교육과 연구를 주도한 역사가는 쓰다가 교수로 있던 와세다대를 졸업한 이병도(1919년 졸업)와 손진태(1927년 졸업)였다.

실증사학의 태두로 불렸던 이병도는 1930년대 중반에 ‘삼한문제의 신고찰’(『진단학보』 1·3·4·5, 1934~36)이라는 논문으로 내물왕 이전 역사를 『삼국사기』가 아니라 『삼국지』 ‘한전’으로 다루며 삼한론을 폈다. 그는 『한국사』(고대편, 1959)에서 “‘백제본기’에 열재(列載)된 고이(왕) 이전의 제왕(諸王) 기사를 어떻게 볼 것이냐…그들은 대개 부락국가 시대의 세습적 거수로, 개국 후에 추존된 왕들이거나 혹은 진위반잡(眞僞半雜)의 세계(世系)를 후세의 사가가 개국 이래의 왕통과 같이 윤색한 바일 것이다. 따라서 그들에 관한 『삼국사기』의 기재는 신용을 둘 수 없는 것이 많다”고 했다. “(신라) 내물 이전의 세차(世次)가 얼마만큼 확실성을 가진 것인가 하는 의문은 역시 백제를 고이왕 이전의 그것에 대한 의문과 마찬가지여서 담보하기 어려운 문제이다…그대로 신용하기는 어렵다…원시국가로서의 지지(遲遲)한 걸음을 걸어온 신라가 부근의 군소 제국을 병합하여 중앙집권의 정치체제로 발전하기는, 전술한 바와 같이 마립간 칭호를 사용하기 시작한 내물왕(제17대)시로 보지 않으면 아니 되겠다”고 했다.

소위 한국 실증사학의 뿌리는 쓰다의 한국사 폐멸 사학에 닿아 있음을 알 수 있다. 그 결과 해방이 돼도 내물왕 이전 역사는 또 축소·은폐됐다.

손진태는 “민족을 발견했다”며 단군을 시조로 한다는 순수 혈통의 한민족을 주장했다(『조선민족사개론』, 1948). 단군은 20세기 들어 대종교에서 받들기 시작했고 임시정부에서 개천절을 기념하다가, 대한민국 정부에서 1949년 양력 10월 3일을 국경일인 개천절로 정하며 민족의 시조로 공식화됐다. 개천절을 만드는 데 손진태의 역할이 무엇이었는지는 알 수 없다. 그런데 단군은 한국 사상 최초의 국가인 고조선을 세운 건국세력일 뿐이다. 고조선의 멸망과 더불어 단군을 시조로 하는 씨족이 사라져 현재 한국인과 단군의 연결고리는 일찍이 끊겼다. 

쓰다에서 시작된 신라 역사 왜곡은 지금도 한국사 교과서에 이어지고 있다. 2002년 편찬된 국정교과서 고등학교 『국사』에는 ‘신라는 진한 소국의 하나인 사로국에서 출발하였는데, 경주 지역의 토착민 집단과 유이민 집단이 결합해 건국됐다(기원전 57)…유력 집단의 우두머리는 이사금(왕)으로 추대되었고, 주요 집단은 독자적 기반을 유지하고 있었다. 4세기 내물왕 때, 신라는 활발한 정복활동으로 낙동강 동쪽의 진한 지역을 거의 차지하고 중앙집권 국가로 발전하기 시작했다’고 나온다. 고등학교 『한국사』(2014) 중 하나는 ‘신라는 진한의 한 소국에서 출발했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박혁거세가 신라를 건국했다(기원전 57년). 초기의 신라는 6부족 연맹체였는데, 박·석·김의 세 성씨가 연합하여 이사금을 선출했다. 4세기 후반 내물왕은 밖으로 활발한 정복활동을 벌여 낙동강 동쪽의 진한 지역을 장악하였다”고 했다(주 미래앤컬쳐). 모두 내물왕 이전의 역사를 의미 있게 보지 않는다. 현대 한국사학은 식민사학의 청산을 외쳐왔지만 스스로 일본의 한국사 폐멸 사학(소위 식민사학)의 틀 속에 머물며 교과서까지 왜곡시키고 있는 중이다. 그래서 필자는 일본의 한국 고대사 연구자인 다케다 유키오(전 도쿄대), 기무라 마코토(도쿄 도립대학), 이성시(와세다대) 교수에게 제국 일본의 선학이 날조한 한국사를 비판하고 넘어서라고 주문했었다.


이종욱 서강대 사학과 졸, 문학박사, 서강대 사학과 부교수, 교수, 서강대 총장 역임, 현재 서강대 지식융합학부 석좌교수. 『신라국가형성사연구』 등 22권의 저서와 다수의 논문이 있음.


 
Posted by civ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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