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1748395

<무신>에서 불태운 팔만대장경, 사실일까?
[사극으로 역사읽기] MBC 드라마 <무신>, 아홉 번째 이야기
12.06.25 21:06 l 최종 업데이트 12.06.25 21:06 l 김종성(qqqkim2000)


▲  몽골군에 의해 불타는 팔만대장경. 고려 스님들이 대장경과 함께 불에 타고 있다. 드라마 <무신>의 한 장면. ⓒ MBC

MBC 드라마 <무신>의 최근 방영분에서는 고려-몽골 전쟁(여몽전쟁) 중에 불교계가 국난 극복을 위해 보여준 헌신적 희생들을 보여주고 있다. 무신정권과 보조를 맞춘 불교계는 팔만대장경을 다시 만들어 서민대중에게 희망을 주고 전쟁을 승리로 이끌고자 노력하고 있다. 
무신정권과 고려 불교의 반대편에 있었던 것은 몽골 침략군이다. 몽골군은 대구 부인사에 있는 팔만대장경을 파괴했음은 물론이고, 경기도 흥왕사를 불태우고 경주 황룡사 구층탑까지 파손했다. 23일 방영된 제37부에서 몽골 진영은 "불교나 부처에 관한 것은 모두 불태워버린다는 것이 우리의 전략"이라며 위협하기도 했다. 

불교에 대한 드라마 속 몽골 사람들의 태도는 무지하고 야만스럽기 그지없다. 팔만대장경이나 사찰이 불탈 때마다 그들이 짓는 험악하고 탐욕스러운 표정은 불교나 석가모니에 대해 평생 한 번도 들어본 적 없는 야만인들의 표정과 거의 다를 바 없다. 그래서 시청자들의 눈에는 여몽전쟁이 '불교 대 야만'의 대결처럼 비쳐질 수 있다. 

하지만, 실상은 달랐다. 몽골은 고려보다 훨씬 더 끔찍하게 불교를 아낀 나라였다. 여몽전쟁 중에 있었던 역사적 사실들을 살펴보면, 그 점을 절감할 수 있을 것이다. 

13세기에 몽골족이 몽골초원의 지배자로 떠오르기 이전부터, 그러니까 그 초원이 몽골초원이라 불리기 이전부터 초원지대와 인근에서는 다양한 종교문화가 꽃을 피웠다. 이곳에서는 전통적인 샤머니즘(무속신앙) 외에 가톨릭과 불교도 상당한 영향력을 발휘했다. 

"아니, 13세기 이전에 가톨릭이 몽골초원에서?"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을 수 있다. 그러나 가톨릭은 이미 당나라(618~907년) 때 중국에까지 전파됐다. 중앙아시아와 몽골초원도 마찬가지였다. 

고려보다 끔찍하게 불교를 아낀 나라, 몽골


▲  오늘날의 몽골초원. 사진은 내몽골 초원의 모습. ⓒ 김종성

다만, 아시아에 알려진 가톨릭은 정통 가톨릭은 아니었다. 콘스탄티노플 대주교 출신인 네스토리우스(?~451?)의 성경 해석을 따르는 교파였던 것이다. 그는 '성모 마리아는 예수 그리스도의 어머니이기는 하지만, 신의 어머니는 아니다'라는 비(非)성모설을 주장했다가 로마 교황청으로부터 이단 판정을 받은 바 있다. 

유목민족의 역사에 관한 세계적 권위자인 르네 그루쎄(1885~1952)가 <유라시아 유목제국사>에서 정리한 바에 따르면, 몽골제국 등장 이전에 중국-중앙아시아 접경지대나 몽골초원에서는 전통적인 샤머니즘과 함께 불교·네스토리우스파가 영향력을 행사했다. 16세기 이전만 해도 이 지역이 초원길이나 비단길을 통해 유라시아대륙의 동서 문화교류를 주도적으로 매개했으므로, 이곳이 한반도보다 훨씬 더 빨리 가톨릭을 접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럼, 칭기즈칸이 속한 몽골족은 구체적으로 어떤 신앙을 갖고 있었을까? 몽골초원을 정복하기 이전에, 몽골족은 초원 동쪽에 있는 삼림지대에 살았다. 이들이 유목민으로 전환된 것은 초원에 진입한 이후였다. 

몽골초원 주변의 삼림민족이 초원에 진입한 뒤 유목민족으로 전환되었다가, 중국 농경지대에 진입한 뒤에는 농경민족으로 전환되는 것이 동아시아 민족이동의 일반적 패턴이었다. 이런 패턴은 박혁거세 신화나 김수로 신화 같은 한국 고대 신화에서도 곧잘 나타난다.  

전통적으로 동아시아 삼림지대에서 가장 강력했던 신앙은 샤머니즘이었다. 고대 한반도에서 무속신앙이 특히 강했던 이유 중 하나도 한반도의 지리적 특성에서 찾을 수 있다. 산악이 많은 지역은 샤머니즘의 전파에 유리한 조건을 갖추고 있었던 것이다. 

샤머니즘에서는 천신이 산을 통해 인간 세상에 하강한다고 믿는다. 그래서 산악을 신성시하고 숭배한다. 그렇기 때문에 산악지대 주민들은 샤머니즘을 수용하기가 수월했다. 삼림지대에 살던 당시의 몽골족이 샤머니즘을 숭상한 이유도 그 때문이다. 

참고로, 한국의 전설이나 설화에서 산신 할아버지가 자주 등장하는 것이나 오늘날의 무속인들이 수행을 위해 산을 찾는 것이나 한국 사찰에서 산신각을 짓는 것에서도 샤머니즘적인 산악숭배의 잔영을 찾을 수 있다. 한국인들이 전통적으로 등산을 좋아하는 것이 샤머니즘의 영향 때문이라는 분석도 있다.

몽골족은 본래 샤머니즘을 숭상했지만, 몽골초원에 진입한 뒤부터 새로운 종교와 접촉하기 시작했다. 초원과 그 주변에서 유행하던 불교나 네스토리우스파와 만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이들이 새로운 종교문화에 적응했을 뿐만 아니라 이를 적극 수용하기까지 했다는 점은, 여몽전쟁 중에 벌어진 획기적 사건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티베트불교 힘 빌려 세계정복 정당성 구축하려 하기도


▲  북경에 있는 티베트불교 사찰인 옹화궁. ⓒ 김종성

고려와의 전쟁이 한창이던 1240년, 몽골은 티베트고원에 대한 침공을 개시했다. 당시 티베트는 통일적 정치세력이 없는 상태에서 티베트불교(라마교)의 분파들이 민중에 대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다. 그래서 티베트는 군사적 측면에서는 몽골의 적수가 될 수 없었다. 

하지만 몽골군은 전쟁 초반의 승세를 오래 이어가지 못했다. 몽골 병사들이 티베트 고원의 혹독한 자연환경에 적응하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행군·작전수행·보급 등에서도 차질이 빚어졌기 때문이다. 

그래서 몽골이 창안해낸 전략은 티베트와의 타협이었다. 티베트불교의 최대 종파인 사캬파와 제휴하여 간접 지배하는 것이었다. 오늘날 티베트불교의 최대 종파는 겔룩파이고 겔룩파의 지도자는 달라이라마라고 불린다. 13세기 당시에는 최대 종파가 사캬파였고 사캬파의 지도자는 사캬라마라고 불렸다. '라마'는 스승이란 의미다. 

몽골의 전략을 구체적으로 설명하면, 몽골은 사캬파에게 티베트 전체에 대한 지배권을 보장해주는 대신, 사캬파는 몽골의 패권을 인정하고 종교적 차원에서 몽골의 세계정복에 힘을 실어주는 것이었다. 이른바 윈-윈 전략이었던 것이다. 

몽골제국은 티베트를 간접 지배하는 선에서 그치되 티베트불교의 종교적 힘을 빌려 세계정복의 이론적 정당성을 구축하고자 했다. 서로마제국이나 프랑크왕국이 로마교황청을 보호해주는 대신에 로마교황청이 이들에게 힘을 실어준 전례를 응용한 것이다. 

티베트인민출판사에서 사캬파의 세계(世系, 계보)를 정리할 목적으로 발행한 <사캬세계사>에 따르면, 몽골의 전략이 현실화된 것은 여몽전쟁이 한창이던 1247년부터였다. 1247~1259년 기간에는 몽골 지방정부와 사캬라마 사이에서 이런 제휴관계가 존재했고, 1260년 이후에는 몽골 카칸(황제·대칸·칸)과 사캬라마 사이에서 이런 관계가 존재했다. 여몽전쟁이 진행될 때 몽골과 불교의 관계가 한층 더 심화되고 있었던 것이다. 

몽골이 단순히 불교를 보호하거나 이용하는 수준에서 그치지 않고 불교국가까지 지향했다는 점은, 여몽전쟁(1231~1270)이 종반에 접어든 1260년 이후의 상황에서 확인할 수 있다. 

원나라 즉 몽골 역사서인 <원사>의 '파스파 열전'에 따르면, 몽골제국 카칸인 쿠빌라이는 1260년에 제5대 사캬라마인 파스파를 국사(國師)에 임명한 데 이어 1269년에는 그를 대보법왕(大寶法王)으로 추대했다. 사캬라마를 일종의 교황으로 만든 것이다. 이런 조치들을 발판으로 불교국가 몽골은 세계 제국으로 성장해 갔다. 

훗날 여진족이 세운 청나라가 중국을 정복한 뒤에 티베트불교를 적극 권장한 것도 몽골제국의 전례를 따른 것이었다. 티베트불교가 유목민족의 세계정복을 뒷받침했던 선례를 활용하고자 했던 것이다. 

여몽전쟁, '불교와 야만의 충돌' 아닌 '불교와 불교의 충돌'


▲  옹화궁 법륜전에 있는 불상. 사진 출처는 중국 외문출판사가 발행한 옹화궁 도록. ⓒ 중국 외문출판사

위와 같은 역사적 사실들에서 알 수 있듯이, 몽골인들은 드라마 <무신>에서 비쳐진 것처럼 불교에 대해 무지하고 몰지각한 사람들이 아니었다. 여몽전쟁 초기에 그들은 불교를 한창 알아가는 중이었고, 여몽전쟁 중반에 이르면 세상 어느 나라보다도 불교를 숭상하는 민족이 되었다. 

티베트불교는 고려 불교와 완전히 딴판이 아니었을까 하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성불(成佛)의 방법론에서만 차이를 보였을 뿐 양자는 본질적으로 똑같은 불교였다. 고려불교는 타인 구제보다는 자기 수행을 더 중시한 데 비해 티베트불교는 타인 구제를 더 중시했다는 점이 달랐을 뿐이다. 

인도에서 쇠약해진 불교를 되살리고 전 세계에 전파하는 데 크게 기여한 것은 티베트불교였고, 그런 티베트불교를 적극 보호하고 뒷받침한 것이 몽골제국이었다. 몽골민족 역시 불교 사랑에 관한 한 우리 민족 못지않았던 것이다. 

이처럼 여몽전쟁의 한쪽 당사자인 고려는 물론이고 또 다른 당사자인 몽골 역시 불교국가였다. 따라서 여몽전쟁은 종교적 시각에서 본다면 '불교와 불교의 충돌'이었던 셈이다. 불교와 야만의 충돌이 아니었던 것이다. 

물론 여몽전쟁 중에 몽골군이 고려의 불교문화를 파괴하는 만행을 저지른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런 사실만을 근거로 몽골과 불교의 관계를 판단해서는 안 된다. 어찌 보면, 이것은 20세기 세계대전에서 기독교 국가들이 상호 투쟁한 것과 동일선상에서 볼 수 있는 문제다. 기독교 국가가 기독교 국가를 침공했다고 해서 기독교에 대해 무지하다고 말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다. 


 
Posted by civ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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