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1696890

이승만이 배달한 고종 밀서... 루스벨트 왜 거부했나
[왕관 쟁탈의 역사 4편] 한국을 일본에 주고 얻은 노벨평화상
12.02.14 10:31 l 최종 업데이트 12.02.14 10:31 l 김종성(qqqkim2000)

▲  미국인 최초의 노벨평화상 수상자인 시오도어 루스벨트 대통령. ⓒ 노벨재단

한국은 노벨평화상과 인연이 깊은 나라다. 그것도 아주 깊다. 한국과 노벨상의 인연은 20세기 초반으로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노벨평화상 수상 현장으로 가보자. 

1901년 초대 노벨평화상은 스위스인과 프랑스인이 공동 수상했다. 1902년에는 두 명의 스위스인이 공동 수상했고, 1903년에는 영국인이 수상했고, 1904년에는 국제법학회(벨기에 소재)가 수상했고, 1905년에는 오스트리아제국 사람이 수상했다. 

1906년 12월 10일에는 이변이 생겼다. 그간 유럽의 독차지였던 노벨평화상이 대서양을 건너 아메리카로 넘어간 것이다. 제26대 미합중국 대통령 시오도어 루스벨트(재임 1901~1909년)가 비(非)유럽권에서는 최초로 노벨평화상 수상자가 되었다. 뉴딜정책으로 유명한 프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재임 1933~1945)과 혼동해서는 안 된다. 

시오도어 루스벨트가 아메리카 최초의 노벨평화상 수상자가 된 것은 그의 출중한 교섭 능력 때문이었다. 노벨상 공식 사이트(www.nobelprize.org)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그는 2건의 국제문제를 해결한 공로로 이 상을 받았다. 

한 건은 알헤시라스 국제회의다. 대서양과 지중해를 잇는 모로코의 지배권을 둘러싼 독일과 프랑스의 대결. 그 승부를 가른 것이 1906년 스페인에서 열린 이 국제회의였다. 이 회의에서 오스트리아·헝가리는 독일을, 영국·러시아·미국·이탈리아·스페인 등은 프랑스를 지지했다. 결국, 이 회의는 모로코에 대한 프랑스의 권리를 인정하는 쪽으로 결론이 났다. 

루스벨트, 아메리카 최초 노벨평화상 수상은 출중한 교섭 능력 때문

루스벨트가 상을 받은 것은 이 회의의 개최에 결정적 공로를 세웠기 때문이다. 회의를 열 수 있도록 중재해 달라는 독일황제 빌헬름 2세의 요청을 받은 루스벨트가 프랑스 등을 설득한 끝에 회의가 개최될 수 있었던 것이다. 

독일의 요청으로 회의를 개최시킨 미국이 정작 회담 테이블에서는 프랑스를 지지하고 그 공로로 노벨평화상까지 탔으니, 이 뉴스를 들은 빌헬름 2세는 씁쓸한 표정을 지었을 것이다. '세상에 이런 상도 다 있나?' 했을 것이다. 


▲  포츠머스 강화협상. 오른쪽이 일본 대표단. ⓒ 출처: 위키페디아 백과사전 영문판

러·일 강화조약, 일본과 미국은 같은 편

루스벨트가 기여한 또 다른 한 건은 러·일 강화조약이다. 대서양과 접한 미국 동부의 항구도시인 포츠머스에서 체결된 조약이라 하여 흔히 포츠머스 강화조약이라 부른다. 1904~1905년 러일전쟁의 전후처리조약인 포츠머스 조약은 조선을 둘러싼 국제적 갈등을 최종적으로 정리한 협정이었다. 

1894년 청일전쟁과 그 전후처리 조약인 마관조약(시모노세키조약)이 조선을 둘러싼 청나라·일본의 이해관계를 정리한 것이었다면, 러일전쟁과 포츠머스 조약은 조선을 둘러싼 러시아·일본의 이해관계를 정리한 것이었다. 이 포츠머스 조약의 체결에서 루스벨트가 결정적 역할을 했던 것이다. 노벨상 사이트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1905년 6월, 루스벨트 대통령은 중재자로서 러시아와 일본을 중재하고, 강화조건을 교섭할 전권대사를 지명해 달라고 두 교전국에 요청했다. 그들은 8월에 뉴햄프셔주 포츠머스에서 회합을 가졌고, 몇 주간의 힘든 협상 끝에 1905년 9월 강화조약을 체결했다."

미국은 단지 협상 장소만 제공한 게 아니었다. 협상 테이블에서 조약 문구를 토의하기까지 했다. 형식상으론 러시아·일본의 회담이었지만, 실질적으론 러시아·일본·미국의 3자 회담이었던 것이다. 아니, 엄밀히 말하면 러시아 대 일본·미국의 회담이었다. 일본과 미국은 같은 편이었기 때문이다. 

1905년에 이 회의에서 성과를 낸 데 이어 1906년에 알헤시라스 회의까지 성사시켰다 하여, 루스벨트가 미국인 최초의 1906년도 노벨평화상 수상자로 결정된 것이다. 흥미롭게도, 루스벨트의 수상은 한국과 밀접하게 관련된 것이었다. 사실상 한국 덕분에 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 점은 포츠머스 강화조약에서 확인된다. 

포츠머스 조약, 한국에 대한 일본 지배권 최종적으로 승인한 조약

전문(前文)과 본문 15개 조항으로 구성된 이 조약의 핵심은 제2조다. 제1조는 그저 형식적인 미사여구에 지나지 않는다. 제1조에서는 러시아와 일본의 항구적 평화를 선언했을 뿐이다. 조약의 하이라이트인 문제의 제2조는 다음과 같다. 

"러시아제국 정부는 일본국이 한국에서 정치·군사·경제상의 최고의 이익을 갖는 것을 승인하고 일본제국 정부가 한국에서 필요하다고 인정되는 지도·보호·감리의 조치를 집행하는 데에 간섭하거나 방해하지 않을 것을 약정한다."

이 조항에서 알 수 있듯이, 포츠머스 조약은 한국에 대한 일본의 지배권을 최종적으로 그리고 국제적으로 승인하는 조약이었다. 러시아가 한반도와 만주에서 일본의 한국 지배를 방해할 만한 행동을 일절 하지 않기로 약속하는 조약이었다. 루스벨트는 이런 조약을 체결하는 데 결정적 공로를 세웠던 것이다.


▲  을사늑약(을사보호조약)의 체결 장소인 덕수궁 중명전. 원래 덕수궁 안에 있었으나, 도로가 생기면서 궁 밖으로 밀려났다. 서울 중구 정동극장 북서쪽에 있다. ⓒ 문화재 공간정보 서비스

조약 체결의 열쇠가 루스벨트의 손아귀에 있다는 점은 고종 황제도 잘 알고 있었다. 러·일 간에 강화조약이 체결되면 자신이 왕관을 벗어야 할지 모른다고 판단한 고종은 서른한 살의 청년인 이승만에게 밀서를 주어 루스벨트를 방문하도록 했다. 밀서의 요지는, 한국의 주권이 일본에 의해 침해되지 않도록 도와달라는 것이었다. 이때는 루스벨트가 중재에 착수한 직후인 1905년 7월 6일이었다.  

고종이 미국에 기대를 걸었던 것은 1882년 한미수호통상조약 때문이었다. 당시 미국은 조선 시장에 진출하는 조건으로 조선에 대해 안보 제공을 약속했다. 이 조약 제1조에서는 "만약 제3국이 일국 정부에 대해 부당하거나 억압적으로 행동할 때, 타국 정부는 그 사건의 통지를 받은 뒤에 원만한 타결을 목표로 중재를 다함으로써 우호를 표시해야 한다"고 했다. 제3국이 조선을 위협할 때는 미국이 중재에 나선다는 조항이었다. 

한미수호통상조약대로라면 루스벨트는 한·일 사이에서 중재를 개시했어야 한다. 하지만, 그는 특사 이승만이 전달한 밀서를 거부했다. 정식 문서가 아니라는 것이 이유였다. 정식 문서를 공개적으로 가져갈 수 없는 형편이라는 것을 잘 알면서도 그랬던 것이다. 

루스벨트, 일본 편든 것은 미국 국익에 부합했기 때문

루스벨트가 노골적으로 일본을 편든 것은, 그것이 미국의 국익에 부합했기 때문이다. 이승만이 미국을 방문할 당시 미·일 간에는 모종의 커넥션이 진행되고 있었다. 그 커넥션의 결과가 1905년 7월 29일 체결된 미일비밀협약이었다. 태프트-가쓰라 밀약으로 알려진 그것이다. 

밀약의 핵심은 '미국은 한국에 대한 일본의 지배권을 보장하고, 일본은 필리핀에 대한 미국의 지배권을 보장한다'는 것이었다. 루스벨트는 필리핀 지배권을 국제적으로 공인받고자 일본의 한국 지배를 열렬히 지지했던 것이다. 일본이 오키나와에 이어 대만을 점령함으로써 동아시아 해역의 제해권을 장악한 뒤였으므로, 미국 입장에서는 일본의 보장을 받는 것이 필리핀 지배에 유리했던 것이다. 

1882년 당시 고종은 국민의 반대를 무릅쓰고 미국에 문호를 개방했다. 이때 그는 청나라 외교관인 황준헌이 집필한 <조선책략>이란 논문을 근거로 미국에 대해 막연한 기대감을 갖고 있었다. "(미국은) 항상 약소국을 돕고 공의를 유지하며 유럽인들이 악을 행하지 못하도록 했다"는 문구를 근거로, 한미수호통상조약이 유사시 국가안보에 도움이 될 것이라 기대했던 것이다.

하지만 미국은 한국의 기대를 저버리고 결정적 순간에는 일본의 한국 지배를 돕는 조력자로 돌변했다. 포츠머스 강화조약 2개월 뒤인 1905년 11월 17일 을사늑약(을사보호조약)이 체결된 사실에서 알 수 있듯이, 미국과 루스벨트는 일본의 한국 지배를 도와주는 도우미 역할을 했다. 일본이 한국의 왕관을 빼앗아 보관실(보호조약 상태)에 둘 수 있도록 루스벨트가 분위기를 조성했던 것이다.

미국인으로서는 사상 처음으로 노벨평화상을 수상한 루스벨트 대통령. 당시만 해도 영국·러시아가 세계 최강이고 미국은 2위권 국가였기 때문에, 미국인들로서는 자국 대통령이 '세계평화'에 대한 공로로 노벨평화상을 수상했다는 사실을 영광스러워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 같은 미국의 영광은, 일본이 한국 왕관을 빼앗는 데 미국이 일조함으로써 가능했다. 미국 입장에서는 그것이 세계평화를 위한 길이었던 것이다. 루스벨트의 수상 소식을 들은 고종 역시 '세상에 이런 상도 다 있나?' 했을 것이다. 한국과 노벨평화상의 인연은 이처럼 아주 오래되었다.


Posted by civ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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