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bit.ly/15M7cqQ

태자 장
생몰년 : 미상

위만조선의 마지막 왕인 우거왕(右渠王)의 아들로, 그 이름이 장(長) 또는 장항(長降)으로 나타나고 있다.

전문정보

위만조선의 마지막 왕인 우거왕(右渠王)의 아들로, 그 이름에 대하여 안사고(顔師古)는 『한서』 주석에서 장(長)이라고 하였으나, 『사기』 조선열전(朝鮮列傳)에서는 “장항(長降)”으로 읽었다. 그런데 『사기』 건원이래후자연표(建元以來侯者年表)와 『한서』 경무소선원성공신표(景武昭宣元成功臣表)에 “장각(長珏)”으로 기록되어 있으므로, “장항(長降)”이나 “장각(長珏)”이 옳은 것으로 생각된다.

『사기』에서 위만조선(衛滿朝鮮)의 왕위 계승권자를 세자(世子)가 아닌 태자(太子)로 지칭하였다는 사실은 당시 한제국(漢帝國)이 위만조선을 보는 시각을 파악하는 데 많은 시사점을 던져 주고 있다. 또 위만조선 스스로가 자기들의 왕위 계승권자를 태자(太子)라 지칭하고 있음을 그대로 기술한 것이라면, 이 사실을 통하여 강력한 군사역량을 바탕으로 집요한 화전양면(和戰兩面)의 대한정책(對漢政策)을 구사해 나갈 수 있었던 위만조선의 자존의식(自尊意識)을 엿볼 수도 있다. 당시 위만조선은 한(漢)에 대한 평화 교섭을 원만히 진행시키기 위하여 일시에 말 5천 필과 상당한 양에 달하는 군량 및 1만여 명에 이르는 태자의 무장 호위 병력을 파견하였다. 그런데 이러한 마필과 군량, 그리고 병력이 위만조선이 보유한 군사역량의 전부가 아니었을 것임은 충분히 상정할 수 있다. 따라서 당초부터 적극적 군사행동에 의하여 성립되어 시종일관 정복국가로서의 기본적 성격을 유지하여 온 위만조선의 군사역량은 매우 강력하였음을 짐작할 수 있다.(김정배, 1986)

한(漢)과의 전쟁 과정에서 항복한 위만조선인에는 상(相),장군(將軍) 등 고위직에 있던 자들뿐만 아니라 우거(右渠)의 아들인 장항(長降)도 포함되어 있었다. 위만조선에는 전쟁 초기부터 화친을 추진한 이들이 있었는데, 한(漢)에 항복한 이들 주화파(主和派)의 중심에 태자 장항(長降)이 있었던 것이다. 전쟁 후에 한은 그를 기후(幾侯)로 임명하였는데,『한서』 권17 경무소선원성공신표(景武昭宣元成功臣表) 5에 의하면 현손(玄孫)이 하동(河東)에 거주하였던 것으로 보아 기후(幾侯)의 영지(領地)는 하동(河東) 지역에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는 한(漢) 경기통치책(京畿統治策)의 결과로 보인다. 한은 국초부터 옛 제후의 후손이나 각지의 유력 세력들을 수도 부근인 삼보(三輔),삼하(三河) 지역으로 옮겼다. 한이 장각(長珏)을 하동(河東)으로 천사(遷徙)시켰다는 점에서 그의 지위가 다른 항한(降漢) 대신들보다 특출하였음을 알 수 있다.

기후(幾侯)에 봉해졌던 우거왕의 아들 장항(長降)은 『한서』 권17 경무소선원성공신표(景武昭宣元成功臣表)5에 부가된 내용에 의할 때, 위만조선 붕괴 이후 3년 뒤인 원봉 6년(기원전 105)에 모반사건을 진행하여 죽임을 당한 사실이 기록되어 있다. 이를 통해 볼 때, 장기간 한과의 전쟁과정에서 모종의 타협이 이루어졌고, 기왕의 정치적 지위와 영향력 등이 보장되는 협상이 진행되었을 가능성을 볼 수 있다. 또 기원전 108년 이후 한의 군현이 설치된 이후에도 지속적인 저항과 군사적 충돌이 유지되었음을 확인시켜주는 내용이다. 이는 한군현이 설치되고 기존의 위만조선 영역을 이들 세력이 바로 장악한 것으로 파악되었던 기왕의 인식에 큰 변화가 필요함을 보여준다.(조법종, 2006)

참고문헌

김정배, 1986, 『韓國古代의 國家起源과 形成』, 고려대학교출판부.
조법종, 2006, 『고조선 고구려사 연구』, 신서원.

 
관련원문 및 해석
(『삼국유사』 권1 기이1 위만조선)

魏滿朝鮮
前漢朝鮮云: 自始燕時, 常{嘗}略得眞番朝鮮[師古曰: 戰國時, <燕>國始略得此地也.]爲置吏築障. 秦滅燕, 屬遼東外徼, 漢興, 爲遠難守, 復修遼東故塞, 至浿水爲界[師古曰, 浿在樂浪郡.]屬燕. 燕王盧綰反入匈奴. 燕人魏{衛}滿亡命, 聚黨千餘人, 東走出塞, 渡浿水, 居秦故空地上下障. 稍役屬眞番朝鮮蠻夷, 及故燕齊亡命者, 王之, 都王儉. [李曰: 地名. 臣讚曰: 王儉城, 在樂浪郡浿水之東.] 以兵滅, 侵降其旁小邑, 眞番, 臨屯, 皆來服屬, 方數千里. 傳子至孫右渠. [師古曰: 孫名右渠.] 眞番, 辰國, 欲上書見天子, 雍閼不通. [師古曰: 辰謂辰韓也.]. 元封二年, 漢使涉何諭右渠, 終不肯奉詔. 何去至界, 臨浿水, 使馭刺殺送何者, 朝鮮裨王長[師古曰: 送何者名也.]卽渡水, 馭{馳}入塞, 遂歸報. 天子拜何爲遼東之{東}部都尉, 朝鮮怨何, 襲功殺何. 天子遣樓舡{船}將軍楊僕, 從齊浮渤海, 兵五萬, 左將軍荀彘, 出遼討右渠, 右渠發兵距嶮. 樓舡{船}將軍將齊七千人, 先致王儉. 右渠城*<需,守>, *規{窺}知樓*舡{船}軍*小{少}, 卽出擊樓*舡{船}, 樓*舡{船}敗走, 僕朱衆, 遁山中獲免. 左將軍擊朝鮮浿水西軍, 未能破. 天子爲兩將軍未有利, 乃使衛山, 因兵威往諭右渠, 右渠請降, 遣大{太}子獻馬, 人衆萬餘, 持兵, 方渡浿水, 使者及左將軍, 疑其爲變, 謂: “*大{太}子已服, 宜毋持兵.” *大{太}子亦疑使者詐之, 遂不渡浿水, 復引歸. 報, 天子誅山. 左將軍破浿水上軍, 迺前至城下, 圍其西北, 樓舡亦往會居城南, 右渠堅守, 數月未能下. 天子以久不能決, 使故濟南*大{太}守公孫遂往*正{征}之, 有便宜將*{得}以從事. 遂至, 縛樓*舡{船}將軍, *<幷,並>其軍, 與左將軍, 急*<襲,擊>朝鮮, 朝鮮相路人, 相韓陶, 尼谿相參, 將軍王唊[師古曰: 尼谿, 地名, 四人也.], 相與謀欲降, 王不肯之, 陶唊, 路人, 皆亡降漢, 路人道死, 元封三年夏, 尼谿相參, 使人殺王右渠來降. 王儉城未下, 故右渠之大臣成己又反, 左將軍使右渠子長, 路人子最, 告諭其民, 謀殺成己. 故遂定朝鮮, 爲眞番/臨屯/樂浪/玄菟四郡.  

위만조선
『전한서(前漢書)』 조선전(朝鮮傳)에 이르기를, “처음 연(燕)나라 때로부터 일찍이 진번(眞蕃)·조선(朝鮮)을 침략해서 얻고[안사고(顔師古)가 말하기를, 전국(戰國)시대 때에 연(燕)이 처음으로 이 땅을 침략해서 차지했다고 한다], 관리를 두어 장새(障塞)를 쌓았다. 진(秦)이 연(燕)을 멸하고 요동외요(遼東外徼)에 속하게 하였다. 한(漢)이 일어났을 때에는 멀리 있어 지키기 어렵다고 하여 다시 요동고새(遼東故塞)를 수축하여 패수(浿水)까지를 경계를 삼고[안사고(顔師古)가 말하기를, 패수(浿水)는 낙랑군(樂浪郡)에 있다고 했다], 연(燕)에 속하게 하였다. 연왕(燕王) 노관(盧綰)이 배반하여 흉노(匈奴)에 들어가자 연(燕)나라 사람 위만(魏滿)은 망명하였는데, 무리 1천여 인을 모아 동쪽으로 요새를 넘어 도망하여 패수(浿水)를 건너 진(秦)의 옛 빈 땅에 있던 위 아래의 장새에 살았다. 점차 진번(眞蕃)·조선(朝鮮)의 만이(蠻夷)와 옛 연(燕)과 제(齊)의 망명자들을 복속시켜 왕이 되어 왕검(王儉)[이(李)는 지명이라 했고, 신찬(臣瓚)은 왕검성(王儉城)이 낙랑군(樂浪郡)의 패수(浿水) 동쪽에 있다고 했다]에 도읍하였다. 병사의 위력으로 그 변방 소읍을 침략하여 복속시켰고, 진번(眞番)과 임둔(臨屯)이 모두 와서 복속하니 사방이 수천 리였다. 아들에게 전하고 손자 우거(右渠)[안사고(顔師古)가 말하기를, 손자의 이름이 우거(右渠)라고 했다]에게 이르렀다. 진번(眞番),진국(辰國)이 글을 올려 천자(天子)를 뵙고자 했으나 막아서 통하지 못하였다[안사고(顔師古)가 말하기를, 진(辰)은 진한(辰韓)을 이른다고 했다]. 원봉(元封) 2년(기원전 109)에 한나라는 섭하(涉何)로 하여금 우거를 타이르게 하였지만, 끝내 천자의 명에 따르지 않았다. 섭하가 가서 경계에 이르러 패수에 다다르자 마부를 시켜 자신을 호송하는 조선의 비왕(裨王) 장(長)[안사고(顔師古)가 말하기를, 섭하(涉何)를 호송하는 자의 이름이라고 했다]을 찔러 죽이게 하였다. 곧 패수를 건너 요새로 달려 들어가 마침내 보고하였다. 천자가 섭하를 임명하여 요동(遼東) 동부도위(東部都尉)로 삼았다. 조선은 섭하를 원망하여 습격하여 섭하를 살해하였다. 천자는 누선장군(樓船將軍) 양복(楊僕)을 보내 제(齊)로부터 발해(渤海)를 건너가게 하였는데, 병사가 5만이었다. 좌장군(左將軍) 순체(荀彘)는 요동을 나와서 우거(右渠)를 치니, 우거가 병사를 내어 험한 지형에 의지하여 막았다. 누선장군(樓船將軍)이 제(齊)의 7천인을 거느리고 먼저 왕검(王儉)에 이르렀다. 우거는 성을 지키고 있었는데 누선(樓船)의 군사가 적음을 알고 곧 나가서 누선을 치니, 누선이 패해 달아났다. 양복은 무리를 잃고 산속으로 도망하여 사로잡힘을 면했다. 좌장군(左將軍)은 조선의 패수(浿水) 서쪽 군대를 습격하였는데, 깨뜨리지 못하였다. 천자는 두 장군이 이롭지 못하다고 생각하여, 이에 위산(衛山)으로 하여금 병(兵)의 위력으로써 가서 우거를 타이르게 하였다. 우거는 항복을 청하고 태자(太子)를 보내어 말을 바치겠다고 하였다. 무리 만여 인이 무기를 쥐고 바야흐로 패수를 건너려 하는데, 사자(使者)와 좌장군은 무슨 변고가 있을까하여 태자에게 이르기를 이미 항복하였으니 무장을 풀라고 하였다. 태자 역시 사자가 속일까 의심하여 마침내 패수를 건너지 않고, 다시 이끌고 돌아갔다. 천자에게 보고하니 천자가 위산을 목 베었다. 좌장군(左將軍)이 패수(浿水)의 상군(上軍)을 깨뜨리고 곧 전진하여 왕검성 아래에 이르러 그 서북쪽을 웨워싸고 누선도 가서 (군사를) 합쳐 성 남쪽에 주둔하였다. 우거가 견고하게 지켜서 여러 달이 되도록 함락시킬 수 없었다. 천자는 (전쟁이) 오래 결말을 보지 못하자, 옛 제남태수(濟南太守) 공손수(公孫遂)를 보내어 치게 하되, 편의를 따라 처사(處事)하게 하였다. 공손도가 와서 누선장군을 잡아가두고 그 군사를 합쳐, 좌장군과 함께 급히 조선을 공격하였다. 조선상로인(朝鮮相路人), 상한도(相韓陶), 니계상참(尼谿相參), 장군왕협(將軍王唊)[안사고가 이르길, 니계(尼谿)는 지명(地名)이고, 네 사람이라 하였다]이 서로 모의하고 항복하고자 하였으나 왕이 이를 거부하였다. 도(陶)와 협(唊)과 노인(路人)은 모두 도망가 한 나라에 항복하였는데, 노인은 도중에 죽었다. 원봉 3년(기원전 112) 여름에 니계상참은 사람을 시켜 우거왕을 죽이고 와서 항복하였으나 왕검성이 항복하지 않으므로 우거의 대신(大臣) 성기(成己)가 또 배반하였다. 좌장군이 우거의 아들 장(長)과 노인의 아들 최(最)를 시켜 그의 백성들을 타일러 성기를 모살하게 하였으므로 드디어 조선을 평정하고 진번, 임둔, 낙랑, 현도 4군으로 삼았다.”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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