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bit.ly/1vFBIMA 

조선상 노인

우거왕(右渠王) 때 조선상(朝鮮相)을 역임한 인물이며, 조선상은 위만조선의 관직 명칭
생몰년: ?-기원전 108년.

기원전 108년 조선상(朝鮮相)으로서 상(相) 한도(韓陶)・장군 왕협(王唊)・니계상(尼谿相) 참(參) 등과 함께 한(漢)에 투항을 모의하였다. 실행과정 중 사망하였으나 왕검성(王儉城)이 함락되는 데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인물이다. 조선상은 위만조선의 중요한 문제들에 대해 왕에게 조언하는 재상과 같은 직책으로 추정되며, 위만조선국의 중심부인 조선 지역을 관장하는 수장적(首長的)인 존재가 담당하였으리라는 점에서 관료적인 성격을 가진 중국의 상과는 차이가 있다.

전문정보

노인이 어떠한 인물인지를 밝힐 수 있는 자료는 많지 않다. 다만 『사기색은(史記索隱)』에서는 아무런 전거를 제시하지 않은 채 “어양현 사람(漁陽縣人)”이라 하였다. 한(漢) 시기에 성명을 지을 때는 두 자가 보통인데, 한의 장군인 이광리(李廣利)의 부장이었던 “강노도위 노박덕(彊弩都尉 路博德)”처럼 노씨(路氏)의 성이 보이므로 노인(路人)을 중국계 사람으로 볼 수도 있다. 그러나 노인의 경우 노가 성이라 했을 때 “人”은 한자식 이름으로(서)는 어색하므로, 중국계 인물로 단정하기는 어렵다.(노태돈, 2000) 

이와 유사하게 당시에 노씨 성을 가진 인물로 흉노에 사신으로 파견되었던 노충국(路充國)의 경우를 추가하면서 노인이 한(漢)계통의 사람이었을 가능성이 높지만, 그 성(姓)만으로는 구체적인 소속을 확정할 수 없다고 밝힌 견해도 있다. 이에 따르면 노인의 “인”을 이름으로 여기지 않고, 노인은 다만 “노씨 성을 가진 사람”이라는 의미 정도로 파악한 것이다.(송호정, 2003)

위만조선 시기에 왕이나 왕자 등 이름이 전해지는 이는 7명인데 그 중 4명이 상이었다. 또한 왕검성(王儉城)이 함락된 후 행해진 논공행상에서 상 2명과 상의 아들 1명이 열후(列侯)로 봉해진 점으로 미루어 “상(相)”이 당시 위만조선의 권력구조에서 중요한 위치를 점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노태돈, 2000) 조선상과 관련된 학계의 논의는 먼저 “상(相)”직(職)의 기원과 그것이 위만조선에 수용된 경위 및 위만조선에서 운용된 “상”직이 중국의 그것과 어떤 차이가 있는지를 구명하는 데 초점이 맞춰졌다. 그리고 상 앞에 조선이 관칭(冠稱)되어 조선상으로 쓰인 경우 그 성격을 파악함으로써 위만조선의 권력구조까지 추정해 보는 견해들이 제시되었다.

중국의 상은 원래 군주의 사인(私人) 또는 가신(家臣)의 위치에서 출발한 직으로 군주권이 전제화(專制化)하는 전국시대에 이르러 백관의 장으로 국정을 총괄하는 수상(首相)의 직이 되었다.(김광수, 1994) 위만조선의 국가구조는 이주민 집단인 왕권과 토착계의 제 부족집단의 타협적 결합에 의해 성립된 것이었다. 따라서 위만조선의 지배집단은 중국식 “상”직을 도입하여 위만 이전 본래의 조선부족들을 지배구조 안으로 편입시킨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당시의 역사발전단계는 아직 관료체제가 성숙될 수 있는 단계에는 미치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에 조선상의 실제 내용은 여전히 옛 전통을 유지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김한규, 1980) 

위만조선의 상제(相制)에 대해 중국의 관직제도를 모방해 설치한 것으로 조선상은 중앙의 장관이고 니계상(尼谿相)은 지방의 장관이라 하여 상의 관료로서의 성격을 강조하는 견해(이병도, 1976)가 있으나, 조선상이라는 관직명의 존재를 부인하는 견해들이 다수를 점하고 있다. 조선상의 조선은 타국과 구별하기 위한 고유한 국명 혹은 지명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김한규, 1980) 또한 선임(先任) 조선상인 역계경(歷谿卿)이 진국(辰國)으로 떠나간 후 노인(路人)이 그 자리에 등장하였을 가능성이 많다는 점을 근거로 조선상은 둘이 아니라 하나였을 것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김정배, 1986) 이러한 입장을 이어받아 상의 정원이 1명에 한정되지 않고 같은 시기에 여러 명의 상이 존재하였을 뿐만 아니라 복수의 조선상이 있었으며, 성격에 있어서 중국의 상과 같이 관료적인 존재가 아니라 수장(首長)적인 존재로 보는 견해도 제시되었다. 이에 따르면 상은 자신이 속한 집단에서는 수장이지만 조정에서는 왕의 신하로 복무하였으며, 조선상은 조선국을 구성하는 중심부인 조선 지역을 관장하는 자라고 한다.(노태돈, 2000) 조선상이라는 표현은 하나의 관직으로 사용되었다기보다 단순히 조선의 상이라는 의미일 뿐이라는 견해도 같은 취지이다. 고조선의 관직체계 중 문관직(文官職)으로서 벼슬이 높은 관리 즉 고관을 모두 상이라 불렀다는 것이다.(송호정, 2003) 그리고 중앙에 2명의 상을 둔 경우는 전국시대 이전부터 진한시대에 이르기까지 그 사례가 확인되며 특히 전국시대에는 봉군(封郡) 지역에 상을 파견하는 사례들도 확인되므로 한 나라에 여러 명의 상이 보이는 것은 위만조선에만 예외적으로 나타나는 현상이 아니라는 견해도 찾아볼 수 있다.(김남중, 2004)

기원전 108년 한(漢)과의 전쟁에서 노인은 조선상(朝鮮相)으로서 화친을 주장하고, 상(相) 한도(韓陶)・장군 왕협(王唊)과 더불어 한에 1차로 투항함으로써 왕검성(王儉城)이 함락되는 데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다른 인물들과 달리 노인은 투항하는 도중에 죽었다. 『삼국유사(三國遺事)』와 『사기(史記)』 조선전(朝鮮傳)에 의하면 노인의 아들 최(最, ?-기원전 104년)는 한에 끝까지 저항하던 대신(大臣) 성기(成己)를 우거왕(右渠王)의 아들 장항(長降)과 모의하여 성 안의 백성들로 하여금 성기를 죽이게 하였다. 『사기』 권20 건원이래후자연표(建元以來侯者年表)와『한서(漢書)』 권17 경무소선원성공신표(景武昭宣元成功臣表)에 의하면 최는 원봉(元封) 4년(기원전 107) 3월에 온양후(溫陽侯)에 봉해 졌다가 태초(太初) 원년(기원전 104)에 사망하여 무후(無後)로 국제(國除)되었다.(김한규, 1980)

최가 책봉된 온양(溫陽)지역은 건원이래후자연표와 『한서(漢書)』 지리지(地理志) 남양군(南陽郡) 속현(屬縣)에는 열양(涅陽)으로 되어 있다. 지금의 하남성 鎭平 지역으로 이해된다. 최가 제후로 봉해진 것은 원봉(元封) 4년(기원전 107) 3월이다. 우거왕이 살해되어 위만조선이 붕괴된 시점으로 알려진 된 원봉 3년(기원전 108) 6월과는 1년에 가까운 차이가 있다. 기원전 108년 6월에는 큰 공을 인정받지 못하여 제후로 제수되지 못했다가 이듬해 3월에야 제후로 봉해졌는데 그 까닭은 바로 계속 저항하던 성기를 죽이고 왕험성 함락에 공을 세웠기 때문이었다. 그것이 바로 계속 저항하던 성기를 죽이고 왕험성 함락에 공을 세웠기 때문이다.(조법종, 2006) 한은 투항세력에 대해 투항 직후 바로 제후에 봉하였다는 사실을 감안할 때 최와 장을 제후에 봉한 시점인 원봉 4년(기원전 107) 3월이 위만조선의 실질적인 붕괴시점이라 하겠다. 조선원정군 책임자인 순체(荀彘)와 양복(楊僕)에 대한 처리도 이 때 행해졌다는 사실은 이때 비로소 전쟁이 종식되었다는 의미일 것이다.(조법종, 2006)


참고문헌

이병도, 1976, 『韓國古代史硏究』, 박영사.
김한규, 1980, 「衛滿朝鮮關係 中國側史料에 대한 再檢討」『論文集』8, 부산여자대학교
김정배, 1986, 『韓國 古代의 國家起源과 形成』, 고려대학교출판부.
김광수, 1994, 「古朝鮮 官名의 系統的 理解」『歷史敎育』56.
노태돈, 2000, 「衛滿朝鮮의 정치구조 -官名 분석을 중심으로-」『단군과 고조선사』, 사계절.
송호정, 2003, 『한국고대사 속의 고조선사』, 푸른역사.
김남중, 2004, 「衛滿朝鮮의 王權과 地方統治體制」『韓國古代史硏究』33.
조법종, 2006, 『고조선고구려사연구』, 신서원.


관련원문 및 해석

(『삼국유사』 권1 기이1 위만조선)
 
魏滿朝鮮
前漢朝鮮傳云 自始燕時 <嘗>略得眞番朝鮮[師古曰 戰國時 (燕)<國>始略得此地也] 爲置吏築障 秦滅燕 屬遼東外徼 漢興 爲遠難守 復修遼東故塞 至浿水爲界[師古曰 浿在樂浪郡] 屬燕 燕王盧綰反入<匈>奴 燕人魏滿亡命 聚黨千餘人 東走出塞 渡浿水 居秦故空地上下障 稍役屬眞番朝鮮蠻夷及故燕齊亡命者 王之 都王儉[李曰 地名 臣<瓚>曰 王儉城 在樂浪郡浿水之東] 以兵滅 侵降其旁小邑 眞番臨屯 皆來服屬 方數千里 傳子至孫右渠[師古曰 孫名右渠] 眞番辰國 欲上書見天子 雍閼不通[師古曰 辰謂辰韓也] 元封二年 漢使涉何諭右渠 終不肯奉詔 何去至界 臨浿水 使<馳>刺殺送何者朝鮮裨王長[師古曰 送何者名也] 卽渡水 <馳>入塞 遂歸報 天子拜何爲遼東<東>部都尉 朝鮮怨何 襲功殺何 天子遣樓船將軍楊僕 從齊浮渤海 兵五萬 左將軍荀彘 出遼討右渠 右渠發兵距嶮 樓船將軍將齊七千人 先到王儉 右渠城守 規知樓船軍小 卽出擊樓船 樓船敗走 僕失衆遁山中獲免 左將軍擊朝鮮浿水西軍 未能破 天子爲兩將未有利 乃使衛山 因兵威往諭右渠 右渠請降 遣太子獻馬 人衆萬餘持兵 方渡浿水 使者及左將軍疑其爲變 謂太子已服 宜<毋>持兵 太子亦疑使者詐之 遂不渡浿水 復引歸 報天子誅山 左將軍破浿水上軍 迺前至城下 圍其西北 樓船亦往會 居城南 右渠堅守 數月未能下 天子以久不能決 使故濟南太守公孫遂往正之 有便宜將以從事 遂至 縛樓舡將軍 幷其軍 與左將軍 急擊朝鮮 朝鮮相路人 相韓陶 尼谿相參 將軍王唊[師古曰 尼谿 地名 四人也] 相與謀欲降 王不肯之 陶唊路人皆亡降漢 路人道死 元封三年夏 尼谿相參 使人殺王右渠來降 王儉城未下 故右渠之大臣成己又反 左將軍使右渠子長 路人子最 告諭其民 謀殺成己 故遂定朝鮮 爲眞番 臨屯 樂浪 玄菟 四郡

위만조선
『전한서(前漢書)』 조선전(朝鮮傳)에 이르기를, “처음 연(燕)나라 때로부터 일찍이 진번(眞蕃)·조선(朝鮮)을 침략해서 얻고[안사고(顔師古)가 말하기를, 전국(戰國)시대 때에 연(燕)이 처음으로 이 땅을 침략해서 차지했다고 한다], 관리를 두어 장새(障塞)를 쌓았다. 진(秦)이 연(燕)을 멸하고 요동외요(遼東外徼)에 속하게 하였다. 한(漢)이 일어났을 때에는 멀리 있어 지키기 어렵다고 하여 다시 요동고새(遼東故塞)를 수축하여 패수(浿水)까지를 경계를 삼고[안사고(顔師古)가 말하기를, 패수(浿水)는 낙랑군(樂浪郡)에 있다고 했다], 연(燕)에 속하게 하였다. 연왕(燕王) 노관(盧綰)이 배반하여 흉노(匈奴)에 들어가자 연(燕)나라 사람 위만(魏滿)은 망명하였는데, 무리 1천여 인을 모아 동쪽으로 요새를 넘어 도망하여 패수(浿水)를 건너 진(秦)의 옛 빈 땅에 있던 위 아래의 장새에 살았다. 점차 진번(眞蕃)·조선(朝鮮)의 만이(蠻夷)와 옛 연(燕)과 제(齊)의 망명자들을 복속시켜 왕이 되어 왕검(王儉)[이(李)는 지명이라 했고, 신찬(臣瓚)은 왕검성(王儉城)이 낙랑군(樂浪郡)의 패수(浿水) 동쪽에 있다고 했다]에 도읍하였다. 병사의 위력으로 그 변방 소읍을 침략하여 복속시켰고, 진번(眞番)과 임둔(臨屯)이 모두 와서 복속하니 사방이 수천 리였다. 아들에게 전하고 손자 우거(右渠)[안사고(顔師古)가 말하기를, 손자의 이름이 우거(右渠)라고 했다]에게 이르렀다. 진번(眞番)․진국(辰國)이 글을 올려 천자(天子)를 뵙고자 했으나 막아서 통하지 못하였다[안사고(顔師古)가 말하기를, 진(辰)은 진한(辰韓)을 이른다고 했다]. 원봉(元封) 2년(기원전 109)에 한나라는 섭하(涉何)로 하여금 우거를 타이르게 하였지만, 끝내 천자의 명에 따르지 않았다. 섭하가 가서 경계에 이르러 패수에 다다르자 마부를 시켜 자신을 호송하는 조선의 비왕(裨王) 장(長)[안사고(顔師古)가 말하기를, 섭하(涉何)를 호송하는 자의 이름이라고 했다]을 찔러 죽이게 하였다. 곧 패수를 건너 요새로 달려 들어가 마침내 보고하였다. 천자가 섭하를 임명하여 요동(遼東) 동부도위(東部都尉)로 삼았다. 조선은 섭하를 원망하여 습격하여 섭하를 살해하였다. 천자는 누선장군(樓船將軍) 양복(楊僕)을 보내 제(齊)로부터 발해(渤海)를 건너가게 하였는데, 병사가 5만이었다. 좌장군(左將軍) 순체(荀彘)는 요동을 나와서 우거(右渠)를 치니, 우거가 병사를 내어 험한 지형에 의지하여 막았다. 누선장군(樓船將軍)이 제(齊)의 7천인을 거느리고 먼저 왕검(王儉)에 이르렀다. 우거는 성을 지키고 있었는데 누선(樓船)의 군사가 적음을 알고 곧 나가서 누선을 치니, 누선이 패해 달아났다. 양복은 무리를 잃고 산속으로 도망하여 사로잡힘을 면했다. 좌장군(左將軍)은 조선의 패수(浿水) 서쪽 군대를 습격하였는데, 깨뜨리지 못하였다. 천자는 두 장군이 이롭지 못하다고 생각하여, 이에 위산(衛山)으로 하여금 병(兵)의 위력으로써 가서 우거를 타이르게 하였다. 우거는 항복을 청하고 태자(太子)를 보내어 말을 바치겠다고 하였다. 무리 만여 인이 무기를 쥐고 바야흐로 패수를 건너려 하는데, 사자(使者)와 좌장군은 무슨 변고가 있을까하여 태자에게 이르기를 이미 항복하였으니 무장을 풀라고 하였다. 태자 역시 사자가 속일까 의심하여 마침내 패수를 건너지 않고, 다시 이끌고 돌아갔다. 천자에게 보고하니 천자가 위산을 목 베었다. 좌장군(左將軍)이 패수(浿水)의 상군(上軍)을 깨뜨리고 곧 전진하여 왕검성 아래에 이르러 그 서북쪽을 웨워싸고 누선도 가서 (군사를) 합쳐 성 남쪽에 주둔하였다. 우거가 견고하게 지켜서 여러 달이 되도록 함락시킬 수 없었다. 천자는 (전쟁이) 오래 결말을 보지 못하자, 옛 제남태수(濟南太守) 공손수(公孫遂)를 보내어 치게 하되, 편의를 따라 처사(處事)하게 하였다. 공손도가 와서 누선장군을 잡아가두고 그 군사를 합쳐, 좌장군과 함께 급히 조선을 공격하였다. 조선상로인(朝鮮相路人), 상한도(相韓陶), 니계상참(尼谿相參), 장군왕협(將軍王唊)[안사고가 이르길, 니계(尼谿)는 지명(地名)이고, 네 사람이라 하였다]이 서로 모의하고 항복하고자 하였으나 왕이 이를 거부하였다. 도(陶)와 협(唊)과 노인(路人)은 모두 도망가 한 나라에 항복하였는데, 노인은 도중에 죽었다. 원봉 3년(기원전 112) 여름에 니계상참은 사람을 시켜 우거왕을 죽이고 와서 항복하였으나 왕검성이 항복하지 않으므로 우거의 대신(大臣) 성기(成己)가 또 배반하였다. 좌장군이 우거의 아들 장(長)과 노인의 아들 최(最)를 시켜 그의 백성들을 타일러 성기를 모살하게 하였으므로 드디어 조선을 평정하고 진번, 임둔, 낙랑, 현도 4군으로 삼았다.”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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