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도 - 문화콘텐츠

고조선 2014. 12. 5. 18:57
출처 : http://bit.ly/1z0zsk4

한도

우거왕(右渠王) 때 위만조선의 재상(宰相)
생몰년 : ?-기원전 91년.

한도(韓陶)는 기원전 108년 한(漢)과의 전쟁 중 적에게 투항함으로써 왕검성(王儉城)의 함락을 초래한 인물이다. 원봉(元封) 3년(기원전 108) 4월에 적저후(荻苴侯)에 봉해졌다.

전문정보

한도(韓陶)는 위만조선(衛滿朝鮮)과 한(漢)이 전쟁 중인 기원전 108년 조선상(朝鮮相) 노인(路人)・장군 왕협(王唊)・이계상(尼谿相) 참(參) 등과 함께 한에 투항함으로써 왕험성(王險城)이 함락되는 데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인물이다. 이때의 공으로 원봉(元封) 3년(기원전 108) 4월에 적저후(荻苴侯)에 봉해졌다. 『사기(史記)』와 『한서(漢書)』에는 한음(韓陰)으로 되어 있다. 

『사기(史記)』 권20의 건원이래후자연표(建元以來侯者年表)에서 “조선상한음(朝鮮相韓陰)”이라고 하였음을 근거로 한음의 앞에 있는 상은 조선상을 약기(略記)한 것으로 보기도 한다. 당시 우거왕 때 조선상으로 역계경(歷谿卿)과 노인 그리고 한도 등 3명이 존재한 것으로 파악하였다. 이를 통하여 위만조선에서는 같은 시기에 여러 명의 상이 존재하였으며 또한 복수의 조선상이 있었다고 결론짓고 이는 한 명의 상이 있었던 중국의 경우와 다른 점으로 이해된다.(노태돈, 2000) 

한도의 족속계통에 관하여 한씨(韓氏)가 전국시대(戰國時代) 이래로 중국의 주요 성(姓)이었고 한씨라는 명문(銘文)이 새겨진 전(塼)이 황해도 지역에서 여러 점이 발견된 점을 지적하며 한씨가 낙랑(樂浪) 왕씨(王氏)와 함께 낙랑지역에 이주해와 토착한 중국계 호족(豪族)의 대표적인 성이었다고 주장하는 견해가 있다.(三上次男, 1966) 그러나 한도가 한계(漢系)일 가능성이 크지만 단정하기는 어렵다는 견해도 있다. 고조선계(古朝鮮系)인으로서 한씨가 존재할 가능성을 열어 둔 것이다. 『위략(魏略)』에서는 고조선의 마지막 왕인 준(準)이 남으로 한지(韓地)에 내려간 뒤 한왕(韓王)이라 칭하였으며 그 후손으로 조선 땅에 계속 머물고 있던 자들이 한씨라 칭하였다고 한다. 이에 의하면 적어도 『위략』이 저술된 무렵인 3세기 전반에는 낙랑지역에서 고조선계인으로서 한씨를 칭한 이들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한씨명이 새겨진 전은 황해도 지역에서 3세기 이후의 것이 발견되기 때문에 전에 새겨진 한씨 성만으로는 그가 원래 중국계였다고 단정하기는 어렵다고 한다.(노태돈, 2000) 

한도가 봉해진 적저후(荻苴侯)에 관해 『사기(史記)』 권20 건원이래후자연표(建元以來侯者年表)에는 적저(荻苴)로 기록되어 있고, 『한서(漢書)』 서남이양월조선전(西南夷兩粵朝鮮傳)에는 추저(秋苴)로 기록되어 있다. 한도가 봉해진 지역은 발해(渤海)이며 오늘날 하북성(河北省) 창주(滄州) 지역이다.(조법종, 2006) 앞의 사료들과 『한서』 권17 경무소선원성공신표(景武昭宣元成功臣表)에 의하면 한음은 원봉(元封) 3년(기원전 108) 4월에 봉(封)해졌으나, 19년만인 정화(征和) 2년(기원전 91) 폐후(廢侯)되었다. 

적저후가 폐지된 이유에 대해 한도가 조선인 모반사건에 연루되었기 때문으로 이해한 견해가 있다. 즉 한(漢)대에 있어서 시봉(始封) 당시에 봉작(封爵)기간을 종신으로 제한한 예는 찾기 어렵거니와 이는 봉작의 정신에도 어긋나는 일이기 때문에 한도의 생전에 모종의 사유로 인하여 대사(代嗣)가 불허되었다고 보았다. 그 사유는 기후(幾侯)로 봉해진 장(長)이 “조선의 모반을 획책한(使朝鮮謀反)” 죄로 매에 맞아 죽은 사실과 “도망한 조선포로를 숨겨주었다(匿朝鮮亡虜)”는 죄목으로 하옥되어 병사한 것으로 나타난 획청후(澅淸侯) 참(參)에 대한 기사를 통해 추정하였다. 장과 참의 사례가 모반이 이미 진행된 결과를 보여주는 것이라면 적어도 기원전 102년에서 기원전 99년 사이에 한의 군현 통치에 대한 조선인의 모종의 반항이 있었으며, 이 사건에는 왕자 장과 니계상 참 등이 깊이 관여되었고 한도 역시 이에 관계된 것으로 짐작하였다. 다만 한도의 경우 그 관여도가 깊지 못하여 기후나 획청후처럼 매에 맞아 죽거나 하옥되지는 않고 단지 “봉작기간을 마치고 대를 잇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封終臣 不得嗣)” 처분을 내린 것으로 이해한 것이다. 이러한 사정은 한의 4군이 설치된 지 불과 7년이 경과되지 아니하여 한의 군현통치가 조선인의 강력한 반발에 부딪힌 것을 추정케 하며 그러한 반발은 한(漢)에 대한 저항을 포기하고 한에 의한 군현지배를 초래한 당사자인 투항자들과 깊이 관련되어 진행되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여기에서 조선의 신하들이 투항한 이유는 그들이 한의 군현이 되기를 원했기 때문이 아니라, 처음부터 이해가 상반된 이주세력인 왕실과 토착세력인 신하들이 미숙하게 결합된 위만조선의 모순이 한의 침공으로 촉발된 것이라고 파악하였다.(김한규, 1980)


참고문헌

三上次男, 1966, 『古代東北アジア史硏究』, 吉川弘文館.
김한규, 1980, 「衛滿朝鮮關係 中國側史料에 대한 再檢討」『論文集』8, 부산여자대학교.
노태돈, 2000, 『단군과 고조선사』, 사계절.
조법종, 2006, 『고조선고구려사연구』, 신서원.


관련원문 및 해석

(『삼국유사』 권1 기이1 위만조선)
魏滿朝鮮
前漢朝鮮傳云 自始燕時 <嘗>略得眞番朝鮮[師古曰 戰國時 (燕)<國>始略得此地也] 爲置吏築障 秦滅燕 屬遼東外徼 漢興 爲遠難守 復修遼東故塞 至浿水爲界[師古曰 浿在樂浪郡] 屬燕 燕王盧綰反入<匈>奴 燕人魏滿亡命 聚黨千餘人 東走出塞 渡浿水 居秦故空地上下障 稍役屬眞番朝鮮蠻夷及故燕齊亡命者 王之 都王儉[李曰 地名 臣<瓚>曰 王儉城 在樂浪郡浿水之東] 以兵滅 侵降其旁小邑 眞番臨屯 皆來服屬 方數千里 傳子至孫右渠[師古曰 孫名右渠] 眞番辰國 欲上書見天子 雍閼不通[師古曰 辰謂辰韓也] 元封二年 漢使涉何諭右渠 終不肯奉詔 何去至界 臨浿水 使<馳>刺殺送何者朝鮮裨王長[師古曰 送何者名也] 卽渡水 <馳>入塞 遂歸報 天子拜何爲遼東<東>部都尉 朝鮮怨何 襲功殺何 天子遣樓船將軍楊僕 從齊浮渤海 兵五萬 左將軍荀彘 出遼討右渠 右渠發兵距嶮 樓船將軍將齊七千人 先到王儉 右渠城守 規知樓船軍小 卽出擊樓船 樓船敗走 僕失衆遁山中獲免 左將軍擊朝鮮浿水西軍 未能破 天子爲兩將未有利 乃使衛山 因兵威往諭右渠 右渠請降 遣太子獻馬 人衆萬餘持兵 方渡浿水 使者及左將軍疑其爲變 謂太子已服 宜<毋>持兵 太子亦疑使者詐之 遂不渡浿水 復引歸 報天子誅山 左將軍破浿水上軍 迺前至城下 圍其西北 樓船亦往會 居城南 右渠堅守 數月未能下 天子以久不能決 使故濟南太守公孫遂往正之 有便宜將以從事 遂至 縛樓舡將軍 幷其軍 與左將軍 急擊朝鮮 朝鮮相路人 相韓陶 尼谿相參 將軍王唊[師古曰 尼谿 地名 四人也] 相與謀欲降 王不肯之 陶唊路人皆亡降漢 路人道死 元封三年夏 尼谿相參 使人殺王右渠來降 王儉城未下 故右渠之大臣成己又反 左將軍使右渠子長 路人子最 告諭其民 謀殺成己 故遂定朝鮮 爲眞番 臨屯 樂浪 玄菟 四郡

위만조선
『전한서(前漢書)』 조선전(朝鮮傳)에 이르기를, “처음 연(燕)나라 때로부터 일찍이 진번(眞蕃)·조선(朝鮮)을 침략해서 얻고[안사고(顔師古)가 말하기를, 전국(戰國)시대 때에 연(燕)이 처음으로 이 땅을 침략해서 차지했다고 한다], 관리를 두어 장새(障塞)를 쌓았다. 진(秦)이 연(燕)을 멸하고 요동외요(遼東外徼)에 속하게 하였다. 한(漢)이 일어났을 때에는 멀리 있어 지키기 어렵다고 하여 다시 요동고새(遼東故塞)를 수축하여 패수(浿水)까지를 경계를 삼고[안사고(顔師古)가 말하기를, 패수(浿水)는 낙랑군(樂浪郡)에 있다고 했다], 연(燕)에 속하게 하였다. 연왕(燕王) 노관(盧綰)이 배반하여 흉노(匈奴)에 들어가자 연(燕)나라 사람 위만(魏滿)은 망명하였는데, 무리 1천여 인을 모아 동쪽으로 요새를 넘어 도망하여 패수(浿水)를 건너 진(秦)의 옛 빈 땅에 있던 위 아래의 장새에 살았다. 점차 진번(眞蕃)·조선(朝鮮)의 만이(蠻夷)와 옛 연(燕)과 제(齊)의 망명자들을 복속시켜 왕이 되어 왕검(王儉)[이(李)는 지명이라 했고, 신찬(臣瓚)은 왕검성(王儉城)이 낙랑군(樂浪郡)의 패수(浿水) 동쪽에 있다고 했다]에 도읍하였다. 병사의 위력으로 그 변방 소읍을 침략하여 복속시켰고, 진번(眞番)과 임둔(臨屯)이 모두 와서 복속하니 사방이 수천 리였다. 아들에게 전하고 손자 우거(右渠)[안사고(顔師古)가 말하기를, 손자의 이름이 우거(右渠)라고 했다]에게 이르렀다. 진번(眞番)․진국(辰國)이 글을 올려 천자(天子)를 뵙고자 했으나 막아서 통하지 못하였다[안사고(顔師古)가 말하기를, 진(辰)은 진한(辰韓)을 이른다고 했다]. 원봉(元封) 2년(기원전 109)에 한나라는 섭하(涉何)로 하여금 우거를 타이르게 하였지만, 끝내 천자의 명에 따르지 않았다. 섭하가 가서 경계에 이르러 패수에 다다르자 마부를 시켜 자신을 호송하는 조선의 비왕(裨王) 장(長)[안사고(顔師古)가 말하기를, 섭하(涉何)를 호송하는 자의 이름이라고 했다]을 찔러 죽이게 하였다. 곧 패수를 건너 요새로 달려 들어가 마침내 보고하였다. 천자가 섭하를 임명하여 요동(遼東) 동부도위(東部都尉)로 삼았다. 조선은 섭하를 원망하여 습격하여 섭하를 살해하였다. 천자는 누선장군(樓船將軍) 양복(楊僕)을 보내 제(齊)로부터 발해(渤海)를 건너가게 하였는데, 병사가 5만이었다. 좌장군(左將軍) 순체(荀彘)는 요동을 나와서 우거(右渠)를 치니, 우거가 병사를 내어 험한 지형에 의지하여 막았다. 누선장군(樓船將軍)이 제(齊)의 7천인을 거느리고 먼저 왕검(王儉)에 이르렀다. 우거는 성을 지키고 있었는데 누선(樓船)의 군사가 적음을 알고 곧 나가서 누선을 치니, 누선이 패해 달아났다. 양복은 무리를 잃고 산속으로 도망하여 사로잡힘을 면했다. 좌장군(左將軍)은 조선의 패수(浿水) 서쪽 군대를 습격하였는데, 깨뜨리지 못하였다. 천자는 두 장군이 이롭지 못하다고 생각하여, 이에 위산(衛山)으로 하여금 병(兵)의 위력으로써 가서 우거를 타이르게 하였다. 우거는 항복을 청하고 태자(太子)를 보내어 말을 바치겠다고 하였다. 무리 만여 인이 무기를 쥐고 바야흐로 패수를 건너려 하는데, 사자(使者)와 좌장군은 무슨 변고가 있을까하여 태자에게 이르기를 이미 항복하였으니 무장을 풀라고 하였다. 태자 역시 사자가 속일까 의심하여 마침내 패수를 건너지 않고, 다시 이끌고 돌아갔다. 천자에게 보고하니 천자가 위산을 목 베었다. 좌장군(左將軍)이 패수(浿水)의 상군(上軍)을 깨뜨리고 곧 전진하여 왕검성 아래에 이르러 그 서북쪽을 웨워싸고 누선도 가서 (군사를) 합쳐 성 남쪽에 주둔하였다. 우거가 견고하게 지켜서 여러 달이 되도록 함락시킬 수 없었다. 천자는 (전쟁이) 오래 결말을 보지 못하자, 옛 제남태수(濟南太守) 공손수(公孫遂)를 보내어 치게 하되, 편의를 따라 처사(處事)하게 하였다. 공손도가 와서 누선장군을 잡아가두고 그 군사를 합쳐, 좌장군과 함께 급히 조선을 공격하였다. 조선상로인(朝鮮相路人), 상한도(相韓陶), 니계상참(尼谿相參), 장군왕협(將軍王唊)[안사고가 이르길, 니계(尼谿)는 지명(地名)이고, 네 사람이라 하였다]이 서로 모의하고 항복하고자 하였으나 왕이 이를 거부하였다. 도(陶)와 협(唊)과 노인(路人)은 모두 도망가 한 나라에 항복하였는데, 노인은 도중에 죽었다. 원봉 3년(기원전 112) 여름에 니계상참은 사람을 시켜 우거왕을 죽이고 와서 항복하였으나 왕검성이 항복하지 않으므로 우거의 대신(大臣) 성기(成己)가 또 배반하였다. 좌장군이 우거의 아들 장(長)과 노인의 아들 최(最)를 시켜 그의 백성들을 타일러 성기를 모살하게 하였으므로 드디어 조선을 평정하고 진번, 임둔, 낙랑, 현도 4군으로 삼았다.”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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