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db.history.go.kr/download.do?levelId=kn_074_0030&fileName=kn_074_0030.pdf
* 古代國家의 成長과 交通路 - 이도학" 중  "Ⅳ.고구려의 성장과 교통로 -  34.수상 교통로의 확보"을 가져왔습니다.

고구려 수상 교통로의 확보
이도학 1997년

고구려가 그 이전에도 황해를 이용하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31년에 압록강 하구에 자리잡은 서안평을 장악한 후에 그 선박이 황해를 활발하게 누비게 된다. 요동반도 연안에서 산동반도 연안으로 이어지는 고구려의 항해로는 남중국 연안과 그리고 한반도 서해안 일대로까지 확대되었다. 이러한 선상에서 볼 때 396년에 광개토왕이 수군에 의한 백제 왕성을 목표로 하는 대규모 군사작전을 감행할 수 있었던 배경이 풀리게 된다. 일단 조선술(造船術)을 비롯하여 지리학과 수리학(水理學)이 발전하였음을 생각하게 한다. 동시에 규모가 큰 선박과 뛰어난 항해술을 보유하였음을 알려준다. 통전(通典)에 의하면 지금의 압록강인 마자수(馬訾水)를 설명하면서 고구려에 큰 선박이 있었다고 적고 있다.103) 게다가 고구려 수군은 강성하였는데, 광개토왕릉비문 영락 14년조의 대방계(帶方界) 전투에서 보듯이 왜군을 궤멸시키는 혁혁한 전과에서 잘 나타나고 있다. 이러한 데 힘입어 고구려는 연안항로를 차단하여 백제 개로왕이 한동안 북위(北魏)에 사신을 보내기 어렵게 하였다. 476년에 남중국의 유수(劉宋)에 보낸 백제 선박이 고구려 선박의 방해로 되돌아 갈 정도였다.

고구려의 항해로 장악은 한 때 한반도의 최남단인 제주도 방면까지 미쳤다. 다음의 기사를 통해서 알 수 있는데, 가(珂)는 마(碼)를 가리키거니와104) 제주도로 비정되는 섭라에서 마노가 확인되기 때문이다.105) 정시(正始) 연간에 세종(世宗)이 동당(東堂)에서 고구려 사신 예실불(芮悉佛)을 인견(引見)하니, 실불(悉佛)이 나아가 말하기를 “고려(高麗)는 하늘과 같은 정성으로 여러 대에 걸쳐 정성을 다하여 땅에서 나거나 거두어들이는 것을 조공으로 빠뜨리지 않았습니다. 다만 황금은 부여에서 산출되고 가(珂)는 섭라(涉羅)에서 생산됩니다. 지금 부여는 물길(勿吉)에게 쫒겨났고, 섭라는 백제에게 병합되었는데, 국왕인 신(臣) 운(雲)은 끊어진 나라를 잇는다는 의리를 생각하여 모두 저희 영토로 옮겼습니다. 두 가지 물건을 왕부(王府)에 올리지 못하는 것은 실은 두 도적들 때문입니다”…106)

위의 기사는 고구려가 황해의 제해권을 장악하였음과, 육상교통로 못지 않게 수상 교통로 개척에도 주력하여 거대한 수로(水路)를 확보한 사실을 알려준다. 즉, 고구려는 백제를 외교적으로 고립시키는 동시에 종전에 백제의 영향권에 있던 도서(島嶼) 지역을 장악하여 공물을 징수하면서 얻어진 특산물을 대중국외교에 활용하였던 것이다.

고구려는 수상 교통로를 크게 이용하였던 바, 육상전과 수상전을 배합하여 전투를 펼치기도 하였다. 391년 고구려의 백제 북변 요새지인 관미성(關彌城)에 대한 공격이 대표적인 사례이다. 관미성은 사방이 절벽이요 바닷물이 둘러져 있기 때문에 광개토왕이 군대를 일곱길로 나누어 공격한 지 20일만에야 함락시킨 성이다. 관미성의 위치에 관해서는 강화도 혹은 강화도 북편의 교동도에 소재한 성으로 비정하기도 한다. 한강과 임진강이 합쳐지는 지금의 통일전망대가 자리잡은 파주의 오두산성이나 예성강 중류 남쪽 기슭에 소재한 것으로 비정하기도 한다. 그 밖에 조선 세종대에 축성 논의가 있었던 옹진성 곁의 토성을 추가할 수 있다.107) 여하간 이러한 선상에서 고구려가 396년에 지금의 충주 지역을 장악한 후 당시 수도였던 국내성(國內城)과 동일한 의미를 지닌 국원성(國原城)이라는 행정지명을 부여하여 별도(別都)를 설치한 배경은, 소백산맥 이남의 신라와 가야 지역을 경영하기 위해 대동강에서 서해연안과 한강 그리고 충주를 중간 거점으로 하여 낙동강을 연결하는 거대한 전략수로를 확보하려고 한 것이다.108) 

지금까지 살펴본 바, 고구려는 자국내에서 생산되지 않는 물자의 보충을 위해 주변 지역으로 관심을 돌리게 된 결과, 교역의 활성화와 정복전쟁을 촉진시켰다. 이는 교통로의 개척을 크게 진척시키는 요인이 되었다. 고구려의 초기 교통로는 요동 방면에서 북옥저 방면인 두만강 하류에 이르는 국토의 동서(東西)를 연결하는 도로와, 북부여 방면에서 국내성인 집안을 지나 평양성 혹은 동옥저 방면으로 미치는 남북(南北) 교통로가 개척되었다. 4세기 후반에는 별도(別都)인 평양성을 거점으로 하여 원산만에 이르는 동서(東西) 교통로와, 동해안을 따라 신라의 수도인 경주에 이르는 남북(南北) 교통로가 확보되면서 신라에 대한 영향력을 증대시켜 나갔다. 이러한 선상에서 평양에서 충주를 중간 거점으로 하여 죽령을 넘어 경주에 이르는 원대한 남진경영로가 개척되었다. 요컨대 교통로의 개척과 확대는 재부(財富)의 집중을 가져왔고, 집권국가 체제의 확립을 가능하게 해 주었다.


주석

103) 李道學, 광개토왕의 군대는 왜 강했는가 , pp.231~232.
104) 大東韻府群玉 권6, 下平聲.
105) 大東韻府群玉 권1, 上聲 및 新增東國輿地勝覽 권38, 濟州牧 土産 條.
106) 魏書 권10, 高句麗 條.
107) “옹진성은 성이 낮고 얕은 데다가 응암산이 동남쪽을 누르고 있어 적의 화살이 미칠 수가 있고, 성 밖에서도 성 안을 볼 수 있게 되었다. 그 곁에 옛 토성 자리가 있는데 3면이 바다에 닿고 지세가 험해서 의지할 만합니다. 이곳에 성을 쌓는 것이 좋겠습니다(세종실록 권5, 14년 정월 신묘일)”라는 기록이 있다. 옹진반도에 소재한 이 토성은 관미성의 지세에 대한 “그 성은 사면이 절벽이요 바다가 둘러져 있다”는 묘사에 어긋나지 않는다. 게다가 이 토성은 인천 앞바다의 덕적도 부근에서 연평도와 백령도 연안을 지나 황해도 은율 앞바다에 소재한 초도(椒島)를 중간 기항지로 하여 올라 가는 노철산수도(老鐵山水道)나, 황해연안을 따라 올라 가다가 초도(椒島)에서 꺽어져 산동반도 끝의 적산(赤山)으로 직통하는 적산항로라는 중국대륙과 통하는 양대 수로를 관장할 수 있는 요진(要鎭)이었다. 그러므로 옹진반도 끝에 축조된 이 성곽이 해도(海島)는 아니면서도 바다까지 통제할 수 있는 요진이요 군항(軍港)이었으므로 관미성일 가능성을 배제하기 어렵다(李道學, 漢城百濟의 歷史와 文化, 1995, pp.85~86).
108) 이러한 전략 통로는 그 길이를 크게 단축시키고 있는데, 이 통로에 해당되는 陸路인 嶺南大路만 하더라도 총연장이 380Km로서 조선시대에는 漢陽과 東萊를 잇는 최단 코스였으며, 현재의 京釜國道나 京釜線 鐵路보다 70~80Km나 거리가 짧다(崔永俊, 嶺南大路 1990,, p.16)는 점에 서도 그 전략적 효과를 가늠해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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