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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4>초원 공작
당나라 굳히기냐… 고구려 뒤집기냐…
2012. 06. 27   00:00 입력 | 2013. 01. 05   08:07 수정

요동성 점령·주필산서 대승 고구려땅에 주요 거점 마련   “오르도스 공격땐 당군 철수” 돌궐족 설연타 칸 매수나서

건안성 내부의 전경, 건안성에는 5만으로 추산되는 병력이 건재해 있었다. ‘큐비앤맘’ 김기동 제공

645년 6월 23일 주필산에서 고구려군이 대패한 직후 연개소문은 특단의 조치를 취해야 했다. 가능한 모든 귀금속과 보석 등 현금을 끌어모았다. 평양에 있던 말갈인들이 연개소문에게 소환됐다. 그들은 누대로 몽골고원과 인연이 있었던 초원 정책 전문가들이었다.

연개소문은 그들에게 현금을 주면서 설연타의 진주 칸을 매수하라고 명령을 내렸다. 누구도 거부할 수 없는 액수였다. 설연타가 장안의 정북(正北) 수백㎞ 떨어진 오르도스를 공격하면 요동에 있는 당군은 철수하지 않을 수 없다는 계산에서였다.

설연타의 칸을 설득하는 그 중요한 과업을 연개소문이 말갈인들에게 맡겼다. 우리는 여기서 문화가 다른 여러 민족과 공존하지 않으면 생존할 수 없었던 고구려의 다문화국가적인 면을 볼 수 있다. 말갈인들은 고구려의 중요한 기병자원이자 대북방 외교·교역의 첨병이기도 했다. 

평양을 출발한 말갈인들은 말을 갈아타며 국내성과 신성을 거쳐 몽골초원으로 나아갔다. 7월 초순께 말갈사신들이 몽골초원의 울둑군산 아래에 위치한 설연타 칸의 천막궁정에 나타났던 것으로 보인다. 

그곳은 전통적으로 돌궐 제부족의 중심지였다. ‘자치통감’은 그곳의 지리적 위치에 대해 이렇게 묘사하고 있다. “(628년 설연타의 진주 칸이) 울독군산(鬱督軍山) 아래에 아기(牙旗)를 세우니 동쪽으로는 말갈에 이르고 서쪽으로는 서돌궐에 이르렀으며 남쪽으로는 사막에 접하였으며, 북쪽으로는 구륜수(九倫水) 회흘(몽고 합이화림 시 서쪽), 발야고(내봉고 호륜호 서쪽), 아질(울란바트로 서북), 동라(봉고 북쪽), 복골(몽고 동쪽), 습(요하 이북)의 여러 부(部)가 모두 속하게 되었다.” 

말갈 사신은 진주 칸을 독대했고, 그 자리에서 연개소문의 메시지를 전했다. 연개소문의 당을 치라고 하는 서신을 받은 진주 칸은 놀랐다. 그는 641년 당군과 싸우다가 호되게 당한 경험이 있었다. 나이도 들었고, 몸에 병마가 똬리를 틀었다. 다시 당과 전쟁을 할 수 있는 기력이 없었다. ‘자치통감’은 전한다. “고구려는 주필산에서 패배하자 막리지는 말갈로 하여금 진주 칸에게 유세하여 많은 이익을 가지고 유혹하였지만 진주 칸은 감히 움직이지 못하였다.” 

앞서 641년 당 태종이 자신의 딸을 진주 칸에게 시집보내겠다는 약속을 해 놓고, 이상한 이유를 대고 파혼을 했다. 이는 중국의 어린아이들도 다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황제의 약속이 무가치하다는 인식이 퍼져 있었고, 당사자 설연타인들은 크게 분개했다. 사기를 당한 진주 칸의 체면이 구겨졌고, 그는 화병으로 누웠다. 

연개소문은 이러한 설연타 전체의 속내를 파고들었다. 현실적으로도 타당성이 있었다. 당 태종과 그 휘하의 거의 모든 병력이 고구려에 들어와 있으니 설연타에 대한 당군의 수비가 계획돼 있었다고 해도 완벽하지 않다. 복잡한 말도 필요 없이 절호의 기회가 온 것을 상기시키기만 하면 된다. 진주 칸은 병들었지만 병력을 실질적으로 장악하고 있는 것이 그의 두 아들이었다. 

한편 주필산에서 대승을 한 당 태종은 태자와 여러 신하들에게 역마로 서신을 띄웠다. 그리고는 사흘의 축제를 병사들에게 베풀었다고 ‘전당문’은 기록하고 있다. 승전 소식을 들은 장안의 당 조정도 축제 분위기였으리라. 요동성을 점령해 고구려에 거점을 마련했고, 고구려군의 주력을 주필산에서 격파했다. 

하지만 단 2개의 관문을 넘었을 뿐이었다. 바다에서 보급을 담당하고 있는 장량(張亮)의 해군과 안시성 앞에 있는 당 태종의 군대가 연결되지 않고 있었다. 요하 입구를 장악하고 있는 건안성이 당 보급선을 막고 있었고, 안시성이 버티고 있었다. 

건안성에 대한 초전 공격은 645년 4월 5일에서 10일 사이에 실시됐다. 장검의 거란ㆍ말갈ㆍ해 기병이 성 앞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고구려군 수천을 참획하고 주변의 제륙권(制陸權)을 장악했다. 5월 2일 비사성을 점령한 직후 해군제독 장량은 함대를 이끌고 출발해 건안성 앞에 상륙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5월 10일 당 태종이 고구려에 도착하면서 건안성을 공격하던 장검의 기병이 요동성 전투에 투입됐다. 여기서부터 당군의 작전은 비틀어지기 시작했다. 장량 수군의 건안성 앞 상륙은 연기됐고 대신 오골성에 있는 고구려 병력이 당 태종이 있는 요동성 앞으로 몰려가는 것을 붙잡아 놓기 위해 압록강 입구로 함대를 이끌고 가서 무력시위를 했다. 
 
건안성에 대한 당군의 공략은 6월 23일 즈음에 가서야 이뤄졌던 것 같다. 장량의 병력 가운데 비사성에 잔류 병력과 함대 운영병력을 제외한 대부분이 이 전투에 투입됐을 것이다. 장검의 기병도 건안성 전투에 가세한 것으로 추측된다. 장량은 건안성 주변 보루와 작은 성들을 점령했다. 

하지만 이내 상황이 반전됐다. ‘자치통감’은 전한다. “장량의 군대가 건안성 아래에서 (점령한) 성과 보루의 수비가 단단하지 못한데 사졸들이 대부분 나가서 풀을 뜯어 말먹이를 준비하자 고구려의 군사들이 습격하여 군대 안에서 놀라고 소란스러웠다. 장량은 겁이 많아서 호상(胡床)에 걸터앉아 곧게 앞을 보고도 입이 닫혀 말도 하지 못했다.”

장량은 고구려군의 역습을 받아 건안성 앞에서 쩔쩔매고 있었다. 당 태종의 안전을 우선하는 작전은 건안성을 살아남게 했고, 이제 그 존재는 초반 승리를 거머쥔 당 태종에게 어두운 그림자를 던졌다.

<서영교 중원대 박물관장> 


Posted by civ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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