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48366
장당경 [藏唐京]
집필자 윤명철
고조선시대 단군(檀君)의 도읍지.
『삼국유사(三國遺事)』 기이(紀異) 제1 고조선조에는 『고기(古記)』를 인용하여 “요(堯) 임금이 즉위한 지 50년인 경인에 평양성에 도읍하고 비로소 조선이라 칭하였다. 또, 도읍을 백악산 아사달에 옮겼는데 그곳을 궁홀산 또는 금미달이라고도 한다. 나라를 다스리기를 1,500년이 되어 주(周)의 무왕(武王)이 즉위한 기묘년에 기자를 조선에 봉하매, 단군은 곧 장당경으로 옮겼다. 뒤에 아사달로 돌아와 은거하다가 산신이 되었는데, 나이 1,908세였다(以唐高卽位五十年庚寅都平壤城 始稱朝鮮 又移都於白岳山阿斯達又名弓忽山 又今彌達 御國一千五百年 周虎王卽位己卯 封箕子於朝鮮 壇君乃移藏唐京 後還隱於阿斯達 爲山神 壽一千九百八歲).”고 기록되어 있다.
이 기록에 의하면, 단군이 최초로 정한 도읍은 평양성이고 뒤에 아사달로 옮겨 약 1,500년간 지속되었다. 그러나 주의 무왕이 즉위하여 기자를 조선에 봉함으로써 단군은 도읍을 장당경으로 옮겼다. 그러므로 장당경은 세 번째 도읍이다. 장당경으로의 천도는 단군을 수장(首長)으로 하는 고조선내에 큰 역사적 사건이 일어났음을 알려준다.
장당경의 위치는 정확하지 않다. 다만, 역사지리서에 단편적으로 기록되어 있으며, ‘당장경(唐藏京)’으로도 표기되어 있다. 『고려사』 지리지에는 유주(儒州) 장장평(庄庄坪)은 “세상에서 전하기를 단군이 도읍한 곳이다. 즉, 당장경의 잘못이다(世傳檀君所都 卽唐藏京之訛).”라고 하였다.
또, 『세종실록』 지리지 황해도 문화현조(文化縣條)에는 “장장평은 현 동쪽에 있고 세상에서 전하기를 단군이 도읍한 곳으로서, 즉 당장경이 잘못 전해진 것이다(庄庄坪在縣東 世傳檀君所都 卽唐藏京之訛).”라고 기록되어 있다.
또,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권42 문화현조에도 “장장평은 현 동쪽 15리에 있으며, 세상에서 전하기를 단군이 도읍한 곳으로서 그 터가 아직 남아 있다. 『고려사』에 장장평이라 하였는데, 이것은 당장경이 잘못 전해진 것이다(莊莊坪在縣東十五里 世傳檀君所都 其址尙存 高麗史以爲莊莊坪 乃唐藏京之訛).”라고 하였다.
이들 기록에 의하면 장당경의 위치는 황해도 문화현이 된다. 그러나 위의 기록들은 단편적이고 구체성이 결여되어 있으며 논리적 연관성도 부족하므로 사실성이 희박하다. 설령, 문화현이 도읍지였다 하더라도 『삼국유사』에 기록된 당시의 수도라고 단정지을 수는 없다.
[참고문헌]
『삼국유사(三國遺事)』
『고려사(高麗史)』
『세종실록지리지(世宗實錄地理志)』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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