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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만조선과 한(漢)나라와의 전쟁
오태진의 한국사 이야기
오태진 아모르이그잼 경찰학원 한국사 강사   |  desk@lec.co.kr 승인 2014.06.18  10:51:21

2014년 6월, 신록이 푸르르고 시원한 바람이 분다. 그러나, 6월은 그저 아름답기만 한 것은 아니다. 6월 특집 영화로 각 방송사는 ‘태극기 휘날리며’, ‘포화속으로’ 등과 같은 영화를 방영해준다. 

6・25전쟁은 우리 민족끼리 싸운 너무도 가슴이 아픈 전쟁이다. 현재 한반도는 지구상에서 유일한 분단국이며 휴전 국가이다. 역사적으로, 우리 민족은 약 1,000여회에 이르는 크고 작은 외침을 받았다. 

간격으로 치자면 약 5년에 한번 꼴로 전쟁이 벌어진 셈이다. 그만큼 현재 누리는 이 평화가 건국 이래 몇 안되는 평화 시기임은 틀림 없을 것이다. 그 이전에도 있을 것이지만, 문헌에 기록되고 그 이후 역사에 많은 영향을 끼친 이민족과의 전쟁은 위만 왕조의 고조선과 중국 한무제(漢武帝) 간의 전쟁일 것이다. 

한무제의 1차 침공과 조선의 대승 

위만이 기원전 4~3세기경 이래 연(燕)과의 대결을 주도한 전기 고조선을 장악한 것은 기원전 2세기경이었다. 그런데 위만의 손자인 우거왕대에 와서 철기 문화를 기반으로 강력한 군사력을 길러 주위의 변방 집단들과 한(漢)과의 교역을 매개함으로써 중계 무역의 이익을 독점하여 무역로를 차단하였다. 

또한 우거왕은 이 일로 한무제의 정치, 군사적 압력을 견제하기 위해 흉노와 군사적 제휴 관계를 모색하였다. 이러한 조선의 정책에 한(漢)은 즉각적으로 반응하였다. 

흉노에 대한 적극적 공세를 취하여 하서사군(河西四郡)을 설치하고 조선에 섭하를 파견하여 압력을 가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회담은 결렬되고 섭하는 돌아가는 길에 조선 비왕을 살해하였다. 

섭하는 이 공적으로 ‘요동동부도위’에 임명되었다. 이에 조선은 한에 대해 공격을 감행하여 섭하를 잡아죽임으로써 양측간에는 전면전이 시작되었다.  

한은 흉노와 남월에 대한 정벌을 마치고 기원전 110년부터 전쟁을 준비하여 이듬해 가을 수륙양군을 동원하여 조선을 침공하였다. 누선장군 양복은 제나라 병사 7천을 거느리고 산동반도에서 발해를 건너 왕검성으로 진격하였고, 좌장군 순체는 연나라 병사 5만을 거느리고 출동하였다. 

한의 수군은 주력군인 육군과 합동작전을 펼치기 위해 열구에서 기다리기로 하였으나 육군의 진격이 늦어 단독으로 왕검성을 공격하다가 조선 수군에게 패배하였다. 육군의 경우 요동병이 먼저 국경인 패수 방면에서 조선 육군에게 격파되었으며 본진도 패수서군에 격퇴되었다.

단순히 멸망이라고 부를 수 없는 이유 

이러한 교착상태에서 화의가 진행되어 한무제는 위산을 파견하였으나 결렬되었으며 이에 제남태수 공손수를 파견하여 재침공을 감행하였다. 이후 1년여에 걸친 전쟁과정에서 조선 내부의 갈등은 지배층 사이의 갈등과 분열을 초래하여 우거왕의 피살 및 주화세력의 망명 등으로 이어졌다. 

이처럼 약화된 상황에서 최후까지 항전하였던 대신(大臣) 성기 등의 분전도 보람 없이 고조선은 붕괴되었다. 그런데 『사기(史記)』조선전에 나오는 전쟁 이후의 관련자 처리 내용을 살펴보면 한무제의 위만조선 공략은 사실상 실패한 원정이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즉, 원정사령관 가운데 수군을 지휘한 누선장군 양복은 참형을 간신히 면하고 서인으로 신분이 강등되었으며 좌장군 순체는 참(斬)하여 저자거리에 시신을 내버리는 기시형에 처해졌고, 화의책임자였던 위산 또한 일을 그르친 책임을 물어 참형을 당하였다.  

더욱이 마지막에 파견되어 재침공을 주도하던 제남태수 공손수의 경우도 화의를 진행하려던 누선장군을 감금하고 침공을 주도하는 과정에서 역시 참형을 당하였다. 

이 같은 한나라군의 사실상의 패배에 대하여 사마천은 위만 조선 정벌에 참가한 장군들이 모두 극형을 당하였고, 양군이 모두 욕을 당해 전투에 참가한 장수 가운데 후(侯)에 오른 이가 하나도 없었다고 확인시켜 주고 있다.  

조선 원정과 관련된 모든 책임자가 대부분 참형이라는 가장 극악한 형벌을 당하거나 서인으로 신분이 강등당하는 처벌을 받았다는 사실은, 비록 조선이 결과적으로 멸망을 당하였다고 하더라도 전투과정 및 이후 상황전개의 내용을 검토해 볼 때 결코 완전한 패배가 아니었음을 알 수 있다. 

즉, 일부 지휘부 사이의 갈등에 의해 우거왕으로 대표되는 주전파 세력이 몰락하고 조선상(朝鮮相) 노인(路人), 니계상(尼谿相) 참, 상(相) 한음, 장군(將軍) 왕협 등의 주화파 세력이 중국과의 화의를 통해 새로이 중심 세력으로 부상하여 중국의 직접적 통제를 위한 편제였던 ‘사군(四郡)’으로 조선 사회가 재편되었지만, 이는 기존의 토착적 정치 세력의 판도와 내용을 유지한 것으로 이해된다.

이후 성립된 한 군현은 초기 고조선지역 및 고구려 등의 세력에 대한 통제와 견제를 목적으로 설치되어 직접 지배를 목적하였으나 토착 사회의 반발(MBC 드라마 ‘주몽’을 보면 대략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과 공격에 의해 대부분이 축출되고 그 성격마저도 토착사회와 병존하면서 중국계 유이민의 자치 세력 또는 중계무역의 중심 지역 등과 같은 존재로 유지되었다. 

특히 후한 대에는 고구려 등의 성장에 의해 더 이상 기왕의 고조선 지역에 대한 통제력을 상실하고 한, 예, 왜 등의 세력과 조공무역 등의 중계지로서 기능하면서 점차 그 세력이 축소, 해체되었다. 

따라서 낙랑 등의 존재는 정치적 의미에서 평가되기보다는 문화중계지로서 기능했음으로 그 의미를 재설정해야 할 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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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civ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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