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생과 결혼한 우씨왕후, 미실에 뒤지지 않네
[사극으로 역사읽기] 특집 '한국 고대사의 속속들이', 두 번째 이야기
10.12.21 09:20 l 최종 업데이트 10.12.21 09:20 l 김종성(qqqkim2000)

▲  MBC 드라마 <선덕여왕>의 미실(고현정 분). ⓒ MBC

MBC 드라마 <선덕여왕>에 등장한 미실(고현정 분)은 카리스마 넘치는 정치력뿐만 아니라 화려한 남성 편력으로도 시청자의 주목을 끌었다. 풍월주(화랑의 수장)인 세종·설원과 결혼한 미실은 진흥왕·진지왕과도 관계를 맺었을 뿐만 아니라 진평왕의 왕후가 되려다가 실패한 적도 있다. 

드라마 속의 상황은 시청자들을 당혹게 할 만했다. 남편'들'을 두고 있는 여인이 왕의 후궁이 되는 것도 모자라서, 한 명도 아니고 여러 명의 왕과 대대로 관계를 가졌다니, 입을 벌리고 경악하다 못해 아예 입을 다물어버릴 정도였다. 

<선덕여왕>의 바탕이 된 필사본 <화랑세기>에 기록된 미실의 남성편력은 드라마보다 훨씬 더 화려하다. 진위 여부를 둘러싸고 학술적 공방이 진행되고 있는 필사본 <화랑세기>에 따르면, 미실은 진흥왕과 그 아들인 동륜태자·진지왕뿐만 아니라 동륜태자의 아들인 진평왕과 관계를 가졌을 뿐만 아니라 세종·설원·사다함 같은 화랑들과도 관계를 가졌다. 

남성 입장에서는 약간 불쾌하고 여성 입장에서는 동경의 대상일 수 있는 미실의 삶. 그런 미실 못지않게, 아니 미실보다 한 술 더 뜬 고구려 여인이 있었다. 이른바 '고구려판 미실'이라 할 수 있는 이 여인은 우씨 왕후다. 

카리스마 넘치는 남성편력의 소유자, '우씨 왕후' 

우씨 왕후는 본래 고구려 고국천왕(재위 179~197년)의 부인이었다. 우씨는 고구려를 구성한 5부 중 하나인 제나부(절노부) 소속이었다. 중국 역사서인 <삼국지> '위서' 동이전에 따르면, 제나부(절노부)는 왕비족이었다. "절노부는 대대로 왕과 혼인했다"(絶奴部世與王婚)고 <삼국지>는 말하고 있다. 

고구려에 왕비족이 존재했다는 점에 대해 "믿을 수 없다"는 반응을 보이는 학자들도 있지만, <삼국지> 기록을 뒤집을 만한 뚜렷한 논거가 제시된 것은 아니다. 따라서 현재로서는 <삼국지> 기록을 토대로 우씨 왕후를 왕비족 소속 여인으로 보아도 무방하다. 

한국 역사서인 <삼국사기> '고구려 본기'를 살펴보면, 우씨 왕후 역시 미실과 마찬가지로 카리스마 넘치는 정치력과 화려한 남성편력의 소유자였음을 알 수 있다. 그 내용을 요약하면 아래와 같다. 

왕비족 소속으로서 고국천왕 2년 2월(180.3.14~4.12)에 왕후가 된 우씨는 고국천왕 19년 5월(197.6.3~7.2)에 남편을 잃었다. 고국천왕이 죽은 것이다. 왕의 죽음을 비밀에 부친 우씨는 그날 밤 곧바로 후계자 물색에 나섰다. 급히 후계자를 찾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은 고국천왕에게 아들이 없었기 때문이다. 

우씨가 처음 찾아간 곳은 왕의 첫째 동생인 고발기의 집이었다. 남편의 죽음을 숨긴 상태에서 우씨는 고발기에게 "왕에게 후계자가 없으니, 당신이 왕위를 계승해야 한다"고 말했다. 한밤중에 형수가 찾아와서 다짜고짜 "당신이 왕이 되라"고 하니, 고발기로서는 형수를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형수가 혹시라도 자신을 끌어들여 쿠데타라도 벌이려는 게 아닐까 하고 의심했던 것이다. 그래서 고발기는 "이런 이야기는 함부로 하는 게 아니다"라며 형수를 돌려보냈다. 그러면서 "부인이 이렇게 밤늦게 돌아다니는 것은 예법에 어긋난다"는 말도 잊지 않고 덧붙였다. 

▲  안악 3호 무덤의 벽화에 그려진 고구려인들의 모습. 황해도 안악군 소재. ⓒ 출처: 고등학교 <역사부도>

왕후가 되길 바랐던 미실, 그녀를 뛰어넘는 왕후 우씨

고발기에게 무안을 당한 우씨는 왕의 둘째 동생인 고연우의 집으로 발길을 돌렸다. 고연우의 태도는 고발기와는 정반대였다. 그는 한밤중에 은밀히 찾아온 형수를 매우 환대했다. 심지어는 술까지 대접했다.  

고연우의 태도가 고발기와 달리 '우호적'이라고 판단한 우씨는 그제야 속사정을 털어놓았다. 고발기에게는 알리지 않은 왕의 죽음을 고연우에게는 솔직하게 알린 것이다. 그러면서 그는 고발기에게 한 것과 똑같은 제의를 했다. 당신이 왕이 되라고 말이다. 고연우는 형수의 제의를 흔쾌히 받아들였다. 그러자 우씨는 "나를 궁중까지 데려달라"고 부탁했고, 고연우는 왕후의 "손을 잡고" 궁중으로 들어갔다. 

<삼국사기> '고구려 본기'는 고려 때에 편찬되었지만, 이 책은 기본적으로 고구려 사관(史官)들이 남긴 자료에 기초한 것이다. 그러므로 "손을 잡고"란 표현은 고려 사관들이 아닌 고구려 사관들이 남긴 것이다. 그냥 "함께 궁궐에 들어갔다"고 해도 될 텐데, 굳이 "손을 잡고 궁궐에 들어갔다"고 기록한 것은, 그날 밤 술자리에서 두 남녀 사이에 벌어진 일을 독자들에게 암시하고자 하는 고구려 사관들의 의도를 반영하는 것이다. 

시동생과 함께 궁궐에 돌아온 우씨 왕후는 다음 날 새벽에 대신들을 모아 놓고 "왕이 고연우를 후계자로 지명하고 죽었다"는 거짓 유훈을 명분으로 고연우를 왕위에 앉혔다. 이때 즉위한 고연우는 산상왕(재위 197~227년)이라는 시호로 알려져 있다. 그제야 사태를 파악한 고발기는 군대를 동원하여 왕궁을 포위했지만, 국민여론이 불리하다는 사실을 깨닫고 3일 만에 포위를 풀고 요동(만주)으로 도망갔다.

산상왕을 세운 다음에 우씨는 산상왕과 결혼했다. 고국천왕의 왕후가 고국천왕의 동생인 산상왕의 왕후가 된 것이다. 왕후 '연임'에 성공한 것이다. 한 여인이 연속으로 두 임금의 왕후가 되는 것은 흔한 일이 아니다. 그런 흔치 않은 일의 주인공이 바로 고구려판 미실인 우씨 왕후였다. 

드라마 <선덕여왕>이나 필사본 <화랑세기> 속의 미실은 왕후가 되지 못한 것을 항상 한스러워했다. 그런데 우씨 왕후는 한 번도 아니고 두 번씩이나 왕후의 자리에 올랐다. 그러니, 미실보다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 않은 여인이라 할 수 있다. 

물론 수적인 측면에서는 미실이 우씨를 능가했다. 미실은 진흥왕·진지왕·진평왕 3대의 '후궁'을 지냈다. 하지만, 우씨는 고국천왕·산상왕 2대의 '왕후'를 지냈다. 은메달 3개(후궁 3회 역임)를 딴 미실보다는 금메달 2개(왕후 2회 역임)를 딴 우씨가 '종합순위'에서는 앞서지 않을까?

또 우리는 왕권 교체과정에서 나타난 우씨의 정치권력에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왕의 죽음을 다음 날 새벽까지 비밀에 부쳤다는 것은 그가 왕궁을 장악했음을 의미하는 것. 후계자 자리를 놓고 왕의 동생들을 저울질했다는 것은 그가 캐스팅 보트를 보유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국민여론을 앞세워 고발기의 군대를 물리쳤다는 것은 그가 귀족세력의 지지를 받고 있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정치력 측면에서도, 그는 미실에 비해 조금도 부족함이 없는 여인이었다. 

▲  고구려 남녀의 의상. 사진은 귀족들의 의상. ⓒ 출처: 고등학교 <역사부도>

그런데 우리는 우씨가 고국천왕의 왕후에서 산상왕의 왕후로 바뀌는 과정에서 나타난 고구려인들의 정서에도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고발기의 군대가 우씨-고연우 커플을 꺾지 못한 것은 결코 군사력이 약해서가 아니었다. 고발기가 패배한 것은 국민여론이 이 커플을 지지했기 때문이다. 고구려인들은 우씨-고연우 커플에 대해 별다른 거부감을 표현하지 않았다. 이런 정서 위에서 우씨는 왕후 연임에 성공할 수 있었다. 

조선시대 사람들 같았으면, 누가 옳고 그르냐를 떠나서 이전 임금의 부인이 다음 임금의 부인이 되는 것을 도저히 용납하지 못했을 것이다. 고구려인들 사이에도 그런 정서가 있었다면, 우씨와 산상왕은 결코 공식 커플이 되지 못했을 것이다. 그냥 내연관계로 남았을 것이다. 

고구려인들이 우씨 남성편력 용인한 이유는?

그럼, 고구려인들이 우씨의 남성편력을 용인한 이유는 무엇일까? 그들의 성 관념이 개방적이어서? 아니면, 형이 죽으면 동생이 형수와 결혼하는 형사취수(兄死娶嫂) 풍습 때문에? 여기에는 보다 더 본질적인 측면으로서 정치제도적인 원인이 작용한 것 같다. 

필사본 <화랑세기> 속의 미실이 왕실 남자들과 중혼(重婚)을 한 것은 미실이 남자를 밝혀서가 아니라 왕족 남자들이 미실을 필요로 했기 때문이다. 그들이 미실을 필요로 한 것은 미실이 대원신통(大元神統)이라는 왕비족이었기 때문이다. 미실은 대원신통 중에서도 가장 정통성 있는 혈통의 보유자였다. 왕비족과 혼인해야 왕의 자리를 노릴 수 있는 왕족 남자들로서는 그런 이유 때문에 미실을 필요로 했던 것이다. 

<삼국지>에서는, 우씨가 소속된 제나부가 고구려의 왕비족이라고 했다. 어느 집단이 왕비족이라고 규정한 성문 법규는 없었을 것이다. 일종의 관습법 형식으로 존재했을 것이다. '왕이 되려면 왕비족과 혼인해야 한다'는 관념이 정치질서에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이런 관념이 존재하는 사회에서는, 왕족 남자가 혼인할 수 있는 여성의 범위가 축소될 수밖에 없다. 왕비족 안에서도 힘 있는 가문이 따로 있으므로, 왕족이 혼인할 수 있는 대상은 왕비족 내에서도 한두 가문에 지나지 않았을 수도 있다. 

그런 이유 때문에, 새로 즉위한 산상왕이 결혼할 수 있는 여성의 범위는 한정되어 있었을 것이다. 우씨 혹은 우씨의 친척들 중에서 고를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우씨와 산상왕의 혼인이 용납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그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우씨가 왕후 연임에 성공할 수 있었던 본질적 요인은 왕족의 결혼상대방을 왕비족으로 한정하는 정치제도에 있었다고 볼 수 있다.


Posted by civ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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