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kr.blog.yahoo.com/shim4ro/1324


고구려의 계층 구조

[하호의 성격]

   고구려 초기의 사회 구성에 관해서는 먼저 ≪삼국지≫ 동이전 부여조에서 “읍락유호민 민(명)하호개위노복(邑落有豪民 民(名)下戶皆爲奴僕)”이라고 한 기록이 주목된다. 이 기록은 부여사회에 관한 서술이지만, 당대의 고구려 사회와 크게 어긋나지는 않는다. 
  이 기록의 해석을 둘러싸고 그간 많은 논란이 있었지만 그 뜻은 ‘읍락에 호민이 있고, 민은 하호로서 노복과 같은 처지에 있다.’라고 풀이된다. 하호는 ≪삼국지≫ 동이전에서 고구려나 동예·삼한·왜의 사회를 기술하는 데에도 사용되었다.

  하호는 후한대(後漢代)에 부강한 호족인 상가(上家)와 대비되는, 빈한하지만 독립된 가계를 가지고 자유로운 신체를 보유한 소작농을 지칭한 용어로 쓰였다. 그러면 ≪삼국지≫ 동이전에서 이 하호라는 용어로 표현된 계층은 중국의 그것과 동일할까? 
  그러나 이 때 하호는 어떠한 특정 계층의 구체적인 신분적 성격이나 계급적 성격을 파악해 개념화된 것은 아니다. 하호는 당대의 중국인들이 동방 사회를 살펴보았을 때 파악되는, 외형상으로 빈한한 민 일반의 존재를 당시 자기들 사회의 빈한한 민을 지칭하는 용어인 하호와 마찬가지로 기술한 것뿐이다.

  호민도 외형상으로 부강한 민호를 하호와 대비해 이원적으로 파악해 기술한 것이다. 따라서 하호의 계급적 성격은 중국인이 쓴 용어 자체에 의해서가 아니라 당대의 동이족 사회의 역사적 성격에 의해 규정되어져야 할 것이다.

[지배 계급]

   ≪위략≫과 ≪삼국지≫ 동이전에는 2세기 후반부터 3세기 전반에 걸친 시기의 고구려의 사회상을 기술한 부분에서 “대가(大家)는 농사를 짓지 않으며, 하호는 부세(賦稅)를 내어 노객(奴客)과 비슷하다.”거나 “나라 안의 대가는 농사짓지 않으며, 좌식자(坐食者)가 1만여 명이 되고, 하호가 식량과 고기 및 소금을 날라와 공급한다.”고 하였다. 여기서 말하는 대가나 직접 노동에 종사하지 않는 1만여 명의 좌식자들이 고구려의 지배층이다. 좌식자에는 왕족을 비롯해 각 부와 부내부의 장들과 그 친족이 속했다.

   그리고 사자·조의·선인 등과 같은 전문 행정 및 군사요원, 그리고 5부 출신의 일부 전업 전사(戰士)들이 포함되었다. 이 밖에 샤먼(Shaman)과 같은 종교적·주술적인 업무를 담당하는 이들이 해당되었을 것이다. 이 지배층은 다시 족장층인 가(加)계급과 그 아래 계급으로 크게 구분된다. 전자는 그 뒤 점차 중앙 귀족으로 전신하게 되었으며, 후자도 고대 국가의 중·하급 귀족이 되었다.

[민의 존재 양태]

(1) 읍락 공동체의 분화

   사회 분화가 진전되어 감에 따라 읍락의 구성원인 일반민 중 일부는 자영농으로서 스스로의 가계를 영위해 나갔으며, 자신의 집에 병장기를 가지고 있어 전시에는 병사로서 출전하였다. 그들 중 일부는 상승해 사자·조의·선인 등이 되어 좌식자의 일원이 되었다. 읍락민 중의 일부는 토지를 상실한 빈농이 되어 용작(傭作)을 하기도 하였다. 고국천왕이 사냥하러 나갔다가 만난, 용작을 하며 살아가던 빈농이 그러한 예이다.

  또한 뒤에 미천왕이 된 을불(乙弗)이 봉상왕의 박해를 피해 산야로 숨어다닐 때, 수실촌의 음모(陰牟)라는 이의 집에서 용작을 하다가 1년 뒤에 그 집을 떠났다. 이는 일종의 머슴살이와 같은 것이었다. 고국천왕이 만난 빈농이나 을불의 경우 모두 스스로의 신체에 대한 권리를 지닌 자유민이었다. 이들과 같은 빈민이나 노약자들은 스스로 무장을 할 수 없어, 전시에는 보급품을 운반하는 노역을 담당했던 것 같다. 이러한 류의 민들 중 일부는 귀족의 예민으로 전락되었던 것으로 여겨진다.

   이런 민의 분화 현상은 고구려가 형성되는 과정에서 이미 상당 정도 진전되었으며, 대외적 팽창에 따른 잦은 전란과 막대한 물량의 유입 등에 의해 촉진되었다. 분화의 진전은 필연적으로 읍락의 공동체적인 성격을 약화시켰다. 그러나 이것이 곧바로 읍락 단위의 통합력을 해체시켰음을 뜻하는 것은 아니다. 적어도 ≪삼국지≫ 동이전 단계, 즉 2세기 후반에서 3세기 전반에 걸친 시기의 고구려의 정치구조는 상당한 정도의 자치력을 지닌 부 및 부내부를 왕권하에 중층적으로 통합한 상태였다.

  바꾸어 말해 읍락 단위의 공동체적 관계가 해체된 것을 바탕으로 한 새로운 사회 편제와 정치 조직이 아직 성립되지 못했음을 말해준다. 사회적으로도 취수혼이 널리 행해지고 있어서 친족집단의 공동체적 결속이 강하였다.

(2) 양인 농민층

   점차 민의 존재 양태는 사회 분화에 따른 경제 관계에 의해 다양화되었다. 아울러 왕권과 중앙 집권력이 강화됨에 따라 족장과 족원이라는 관계에 의해 규정되는 예속 형태 외에 고대 국가와 민의 관계라는 측면이 보다 강해졌다. 이는 곧 족원들에 대한 족장의 지배권을 약화시켜, 그들을 국가의 지배하에 귀속시키려는 것이다. 각 부의 족장(加)들의 횡포에 대한 중앙정부의 간섭과 응징 등은, 각 부 단위로 자치가 행해지는 가운데 족장들의 수취와 권력에 제약을 가한 사례들이다.

   고국천왕 때 실시되었다는 진대법이나 그 밖의 ≪삼국사기≫에서 자주 보이는 진휼의 기록 등은, 곧 읍락 공동체의 해체에 따라 일어나는 계급 분화과정에서 민이 귀족이나 여타의 호민들의 노비로 전락하는 것을 막고, 그들을 국가의 공민으로 확보하려는 노력이었던 것이다. 양인(良人)에 대한 기록상의 첫 표현은, 6세기 중엽 신라에서 사다함(斯多含)이 가야 정벌전에 참가하고 돌아오자 왕이 공을 인정해 포로 200명과 토지를 주었는데, 그가 전쟁포로 노예들을 해방시켜 양인이 되게 했다는 데서 나온다.

   이 때 양인이란 재산권과 신체의 자유권을 보지하고 국가에 직접 귀속된 일반민을 말한다. 이러한 양인의 존재는 비단 사다함의 조처에서 처음 비롯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일반적으로 삼국 사회에서 국가와 민의 지배 예속 관계에 입각한 양인층의 창출과 형성이 지배적인 양태가 되기 위해서는 족장층의 족원에 대한 전통적인 지배력의 배제가 요구된다. 그것은 곧 읍락의 공동체적 관계의 청산과 지방관에 의한 율령에 입각한 촌락 사회의 지배와 궤를 같이하는 것이었다.

(3) 조세와 역(役)

   국가에 의한 민에 대한 수취상태를 기술한 ≪수서 隋書≫ 고려전에서는 “인세(人稅)는 포(布) 5필, 곡식 5석이며, 유인(遊人)은 3년에 한 번 세를 내는데, 10인에 세포(細布) 1필이다. 조(租)는 상호(上戶)가 1석, 그 다음 호는 7두, 하호는 5두이다.”라 하였다. 여기서 인세는 인두세인데, ‘포 5필 곡 5석’은 너무나 과중해, 이를 호주(戶主)에게 부과되었던 세라고 보는 견해와, 포 5필이나 곡 5석으로 풀이하는 견해가 제기되었는데, 여러 면에서 분명하지 않은 점이 많다.

   한편 ≪주서≫ 고려전에서는 “부세(賦稅)는 견포(絹布) 및 속(粟)이며, 그 빈부의 정도에 따라 차등으로 징수한다.”고 하였다. 구체적인 수치는 밝히지 않았지만 이는 당시 민에 대해 빈부격차를 헤아려 차이를 둔 일정액의 부세가 부과되었음을 알게 한다. 이 밖에 민에게 역이 부과되었다. 노동력 징발의 기준은 15세였다. 또한 민은 차출되어 군대에 징집되었다. 이 군역은 민에게 부담이 컸다. 특히 통일 전쟁이 치열하게 전개되었을 때에는 제대로 복무기간이 지켜지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또 전사하거나 포로가 되는 경우가 빈번할 것이니 이에 따라 민의 경제적 파탄과 몰락이 심각했을 것이다.

[노비 계급]

   고구려 사회구성의 최하층을 형성하고 있는 것이 노비이다. 노비는 그 발생 요인에 따라, 일차적으로 포로·형벌·약탈·부채·매매 등에 의한 노비가 있고, 이차적으로 노비의 자손들인 혈연노비가 있다. 노비는 원시 공동체 단계의 사회가 해체되면서부터 발생했으나, 고구려의 경우 대외적 팽창에 따라 전쟁 포로가 가장 중요한 노비의 공급원이 되었다.

   전쟁 포로나 노획된 민호가 모두 노예가 되었던 것은 아니다. 노획된 민들의 저항 정도나 그 집단의 경제적 생활 양식 등에 따라, 집단 정주시켜 수취하는 방법을 택하는 경우도 있었고, 심지어 모두 죽여버리는 경우도 있었다. 이는 본원적으로 당대 사회의 생산 양식과 생산력의 발달 정도에 의해 좌우되었을 것이다. 유명한 염사치(廉斯憮)의 사화(史話)에서 보이듯, 1세기 초반 무렵 한(韓) 땅에 나무를 베러 왔던 중국인 1,500명이 사로잡혀 노예로 사역되었는데, 불과 수년 만에 500여 명이 죽었다고 한다.

   이러한 과도한 인명의 소모율은 당시 한(韓)사회에서의 대규모적인 노예 노동의 경제적 일면을 전해준다. 이 점은 철기 문화 농도의 심화와 생산력의 증가 등에 따라 상당히 달라졌을 것이다. 대체로 삼국 사회가 진전되어 갈수록 귀족의 경제 기반의 확충에 따라 포로의 노비화는 일반화되었을 것이다.

   고구려 사회에서 호강한 귀족들에 의해 민이 약탈되어 노비화된 경우는 ≪삼국사기≫에도 몇몇 사례가 전해지고 있다. 형벌에 의한 경우도 노비화의 주요 동기의 하나였다. ≪삼국지≫ 동이전에서는, 죄를 지으면 죽이고 처자는 노비로 삼는다고 하였다. ≪구당서 舊唐書≫ 고려전에서는, 모반을 했을 경우 죽이고 그 집안을 적몰한다고 하였다. 이 때 그 가족은 노비로 삼았던 것으로 보아진다.

   또한 도둑은 12배로 변상하게 하고, 배상할 수 없으면 자녀를 값으로 쳐서 노비로 삼았다. 남의 소나 말을 죽인 자도 노비로 삼았다. 이러한 형벌체계는 곧 일반 채무의 경우에도 적용되었을 것이 분명하다. 빈궁한 민들이 흉년이 들어 자녀를 노비로 파는 경우도 종종 있었다. 이렇듯 인신의 매매와 채무에 의한 노비화가 진행되어, 자연 노비 매매는 항시 행해졌을 것이다. 노비의 자식은 혈연에 의해 신분이 계승되었다. 다만 부모 양계에 신분의 차이가 있을 경우의 구체적인 면모는 분명하지 않다. 당대 고구려 사회의 경제 관계에서 노비 노동이 차지하는 비중 등도 확실하지 않다.

[집단 예민]

   고구려의 대외적 팽창에 따라 흡수된 피정복 집단이 존재하였다. 가령 옥저나 동예의 읍락들은 재래의 읍락질서를 유지하면서 족장을 통해 공납을 바치며 간접적으로 고구려의 지배를 받았다. 옥저나 동예의 읍락 내에도 노예는 있었으나, 전체적으로 각 읍락은 공동체적 성격이 농후했으며, 집단적으로 고구려에 예속되어 일종의 집단예민과 같은 성격을 가졌다. 옥저나 동예와 같은 예맥족 계열의 집단들 외에 선비족이나 말갈족 같은 이질적인 족속들도 일부 집단적으로 예속되어 있었다.

   그 뒤 고구려 사회의 발전에 따라 예속민 집단의 존재 양태가 어떻게 변모했는지는아직 구체적으로 밝혀지지 않고 있다. 그 중 상당 부분은 고구려 지방통치 체제의 진전에 따라 지방관의 통제를 받는 일반민으로 편제되었던 것 같다. 일부는 집단 예민적인 존재로 계속 남았을 것으로 여겨진다. 또한 이질적인 종족인 거란·말갈 등속의 촌락은 고구려 말기까지도 그들의 예전 촌락체제를 유지하면서 피복속민 집단으로 고구려에 예속되어, 공납과 함께 필요할 때 군사적으로 동원되었다.

출전 : [디지털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동방미디어, 2001

 

Posted by civ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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