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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의 상업활동과 대외무역

고구려의 상업활동

고구려는 만주와 한반도 북부의 중앙지역에 위치했다는 지리적 이점을 충분히 살려 초기부터 상업활동에 나섰습니다. 고구려를 건국하는 데 핵심적인 노력을 한 소서노는 대단한 재력가였습니다. 소서노가 자기 재산을 기울여 고구려를 세우고도 다시 남하하여 백제를 세울 수 있었던 것은 그녀가 농업 아닌 상업에 종사했기 때문입니다. 

고구려는 초기에 식량이 부족했기 때문에 먼 곳에서 식량과 고기,소금등을 공급받아야 했습니다. 일부는 약탈로 충족했지만 상거래를 통해 부족한 물자를 공급받았습니다. 한나라와도 책구루에서 서로 물자를 교환했습니다.

기록에 보이는 고구려의 개별 상인은 미천왕인 을불이 처음일 것 같습니다. 을불은 재모란 자와 함께 압록강가에 배를 타고 소금을 팔러 다녔습니다. 소금이란 염전을 필요로 하는 것이라서 염전의 주인은 분명 귀족층이었습니다. 그러나 소금을 받아다가 장사를 하는 것은 귀족이 아닌 일반 평민이었습니다. 소금은 귀중한 자원이기 때문에 국가에서 통제하는 경우가 많았는데 고구려에서는 개인이 소금장사를 할 수 잇었던 것 같습니다. 을불은 이곳저곳을 다니며 장사를 하는 행상이었습니다. 을불과 같은 행상이 일반화됨에 따라 사수촌 노파집과 같은 여관집도 번성하였습니다.

상업이 발달하면 반드시 시장이 있어야 합니다. 시장은 제천행사를 하는 장소에서 비롯했다는 설이 있는 것을 보면 시장의 존재는 대단히 오래된 것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신라에서는 소지마립간 12년인 서기 490년에 처음으로 수도에 시장을 개설했고, 지증왕 9년인 508년에 동시전을 두어 동쪽 시장을 국가에서 관리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고구려에 이와 같은 기록이 보이지 않으나 시장의 존재는 확인할 수 있습니다.

삼국사기 <온달열전>에 보면 평강공주가 온달에게 말을 살 때는 "시장사람들의 말을 사지 말고 꼭 나라에서 내놓는 국마를 사오도록 하세요"라고 했습니다. 고구려의 시장은 개인끼리의 거래만이 아니라 국가에서도 시장에 물건을 내다 팔 정도로 활발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고구려 시장에는 소와 말,각종 기물,곡물,그리고 노비,토지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물건을 사고 팔았습니다.

시장의 규모를 알려주는 자료로 당서<위운기열전>의 기록이 있습니다. 605년 수나라 장군이었던 위운기는 거란을 공격하기 위해 당시 수나라에 복속되어 있던 돌궐의 군사 2만명을 동원했습니다. 그는 돌궐병사들을 요서지방의 유성(대릉하 유역)에 있는 고구려 시장(여기서 요서지방이 고구려 영토였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으로 교역하러 가는 상인단으로 위장시켜 거란을 속여 방심하게 한 후, 기습공격으로 거란군을 크게 이겨 수나라 임금에게 칭찬을 받았습니다. 대규모 군대의 움직임을 교역단이라고 위장했고 그것이 거란 사람들에게 통할 수 있었다는 이 사건에서 이 무렵 고구려 시장이 엄청나게 큰 규모였음을 알게 해줍니다. 당시 유성은 국경지대였고 고구려는 여기서 북방 유목민족은 물론 중국의 여러 나라들과 대규모 교역을 했던 것입니다.

이러한 대규모의 교역과 상업의 발달이 있으려면 물물교환은 물론이거니와 화폐의 통용이 필수적입니다. 고구려는 요동지방 등지에 있는 광산에서 금과 은을 캐내어 이를 화폐로 사용하였습니다. 삼국지에는 남자가 결혼할 때 가져온 돈과 폐백을 사위집 곁에 쌓아둔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고구려에서도 화폐를 사용한 것은 분명하나, 그 명칭과 단위가 무엇인지는 알려져 있지 않습니다. 고구려에서는 화폐만이 아니라 금,은,옷감 등이 화폐를 대신하여 사용되기도 하였습니다.

또한 귀족들도 자신들의 재산 증식과 세력확장을 위한 중요한 수단으로 상업을 각별히 보호했습니다. 귀족들 자체가 상인단을 거느린 사람들이었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습니다. 고구려의 귀족들은 단지 대규모 토지를 가진 영주만이 아니었습니다. 농업보다 상업의 이익이 높았기 때문에 상어봘동이 활발한 국가에서 귀족들이 상업에 손을 안 댈 이유가 없습니다.


고구려의 대외무역

고구려와 중구과의 공식적인 무역활동은 태조대왕 57년 (109년) 기록이 있습니다. 중국과의 교역에서 고구려의 주된 수출품은 말,황금,백은,각궁,단궁,천리마,생태피,골계피,초피 등이었으며, 수입품으로는 비단을 비롯한 의류,물소,수레의 장식 등이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기록에 전해지는 것뿐이며, 실제로는 대단히 다양한 종류의 물건이 대량으로 거래되었습니다. 고구려는 북위와 매년 금 200근,백은 400근이나 되는 엄청난 양의 교역을 했습니다.

왜국과의 교역에서도 철로 만든 방패와 철과녁,황금,북 등의 악기,각종 토산품등을 수출하고 왜국의 각종 토산품(황금,은,수은,수정염주,부채 같은)을 수입했습니다. 교역은 주로 사신 왕래와 함께 이루어졌고 정부 간의 교역 외에도 민간인간의 사무역도 진행되었습니다.

고구려의 대외교역은 북방의 유목국가들과도 대단히 활발했습니다. 특히 5세기때 유연은 남쪽의 북위와 지속적으로 전쟁을 하는 통에 농업국가로부터 얻어야 하는 각종 산물을 고구려에게서 공급받아야 했습니다. 고구려는 유목국가가 가진 말,유제품,가죽제품 등을 받고, 그들에게 직물류,농산품등을 공급하는 교역을 했습니다. 유성에 있던 고려시장은 유목국가들과 농업국가인 고구려(원래 고구려는 유목.농경국가입니다.)와의 대규모 교역시장 이었던 것입니다.

고구려는 거란을 지배함으로써 그곳의 내륙소금을 확보하였고 지두우를 유연과 나눔으로써 좋은 말들의 산지를 확보했으며, 북으로 실위에게 철을 수출함으로써 영향력을 행사하는 등 유목국가에 관한 경영을 상업으로 마무리했습니다. 또 특이한 산물을 찾아서 멀리 서역의 국가들과도 교역을 했습니다. 사마르칸트에 새겨진 벽화를 보면 고구려 사신이 등장하는데 이는 고구려가 멀리 서역국가들과 교류를 했다는 중거입니다.
고구려의 복속민인 숙신의 경우 그들 대부분이 숲속에서 무리를 지어 살기 때문에 이들에게 필요한 각종 농산물이나 소금,차 등은 외부로부터 공급을 받아야 했습니다. 고구려는 이들에게 상인단을 보내 물자를 주고 그들에게서 특산물을 받았습니다. 고구려의 숙신 통제는 이러한 상업적 이익과 결부되어 있었습니다. 오늘날 시베리아 지방에서 순록을 키우며 사는 유목민에게까지도 고구려에서 상인단을 보내 교역을 했을 것 입니다.

이렇듯 고구려는 국가에서 상업을 장려함으로써 국익을 증진시켰을 뿐만 아니라 국력을 강화시켰고 그것이 광개토대왕의 정복황동으로 나타난 것입니다. 조선이 가난하고 국력이 약했던 것은 국가에서 농업만 위하고 상업은 말업이라 천시했기 때문입니다.
 
출처:고구려의 발견
 
Posted by civ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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