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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를 지배한 고구려
06. 16. 2011

5세기 고구려는 고구려 중심의 천하를 장악하며 평화를 누릴 수 있었다. 5세기 천하의 중심은 고구려였다. 이 시대만큼 고구려의 위상이 드높은 적이 없었다. 남조와 북조가 서로 고구려와 외교 관계를 맺고자 안달이 났었고, 백제와 신라를 제어하면서 북방의 실위와 지두우, 물길을 지배하는 가히 동방의 강국의 명성을 드높였다.

더군다나 북위는 고구려에 역대 황실계보를 바치고, 고구려 태왕이 붕어하면 황제 스스로 상복을 입고 통곡을 하며 태왕의 명복을 비는 사당을 지을 정도였다. 이는 당시 북위가 고구려보다 하위 국가였음을 뜻한다. 실제로 역대 황실계보는 곧 그 나라의 역사서인데 이를 바치는 건 조공국이 상국에 하는 행위이다. 그러한 예를 북위가 고구려에 했다는 건 북위가 고구려의 영향 아래 있었다는 이야기이다.

그렇다면 고구려가 5세기 천하의 중심국이 될 수 있었던 데에는 어떠한 요인이 있었을까? 그것은 바로 강력한 군사력에 있을 수 있지만, 그보다는 바로 바다를 지배했기 때문일 것이다.

역사의 흐름을 살펴보면 바다를 지배한 민족이 세계를 지배했고, 그 민족은 번영을 누려왔다. 하지만 바다를 이용하지 못한 민족은 그렇지 못했다. 일례로 조선을 보면 알 수 있다. 조선은 바다를 포기함으로써, 폐쇄적인 사회가 되었고, 변화에 재빠르게 대응하지 못해 결국 이웃 국가들에게 뒤쳐지고, 쇄국만을 고집해 결국 일본의 식민지로 전락하고 말았다.

하지만 바다, 즉 제해권을 잃은 고구려는 국력이 약해질 수 밖에 없다. 고구려는 고구려 천하를 유지하기 위해 제해권을 지키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6세기에 북쪽 물길의 반란을 진압하는 과정에서 남쪽의 백제가 다시 강국이 되었고 고구려의 제해권은 약해졌다. 백제는 521년 혼자서 사신을 파견할 수 없었던 신라가 양나라와 사신 왕래를 하는 데 도움을 준다. 또 백제는 신라와 동맹을 맺고 550년대 고구려가 돌궐의 침입에 방비하는 사이 남쪽지방을 빼앗는다. 이에 위협을 느낀 고구려는 신라와 특별한 약속을 함으로써 백제와 신라의 동맹을 붕괴시키려 했다.

남쪽의 나라들이 고구려에 위협이 되지 않도록 고구려는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특히 백제와 신라가 고구려의 천하에서 벗어나 중국세력과 연합하여 보다 큰 위험세력이 되는 것을 몹시 두려워했다. 그래서 백제와 신라 사신이 서해를 건너는 것을 중간에서 막았던 것이다.

598년 수나라의 침입이 가시화되자 고구려가 가장 먼저 취한 행동은 수가 고구려를 공격할 때 보급로가 되는 요서지방의 전진기지들과 해안의 수군기지들을 선제 공격하여 무력화시키는 일이었다. 612년 수나라가 수백만 대군으로도 고구려에게 패배한 가장 큰 원인이 바로 군량조달 문제였다. 이런 경험을 곱씹은 당나라는 고구려의 배후에서 군량을 보급해 줄 신라를 동맹국으로 삼았던 것이다. 그 결과 당나라는 겨울철에도 고구려를 공격해 올 수 있었다. 실제로 평양을 공격하다가 군량이 부족해진 당의 소정방 부대는 신라 김유신이 보급해 준 군량 덕에 무사히 철수할 수 있었다.

이처럼 중국세력이 고구려를 공격해 올 때 배후에 동맹국이 있다는 것은 고구려에게 엄청난 부담이었다. 고구려는 남쪽의 나라들을 통제하여 고구려의 동맹국 내지는 중립국으로 만들어야 할 필요성이 있었다. 고구려가 당에 패한 주요 원인은 바로 신라가 당의 동맹국이 되었다는것과 서해상의 제해권을 650년 무렵부터 당에 빼앗겨 당나라 군대의 군량공급이 원활히 이루어지지 못하도록 막지 못했다는 것이었다. 서해의 제해권 장악은 고구려를 중심으로 한 세계의 안전을 보장하는 중요한요소였는데, 이를 상실함으로써 고구려는 멸망에 이르렀던 것이다.

고구려가 대륙의 강국으로, 천하의 중심국으로, 수 당과의 대전에서 크게 승리할 수 있었던 요인에는 바로 제해권을 장악했기에 가능했다.

고구려가 동방에서 중국과는 다른 독자적인 천하관을 수립하자, 중원을 통일한 수나라는 이를 참지 못하고 113만의 대군을 이끌고 요하를 건너 고구려를 침공하기 시작한다. 하지만 이들은 강력한 요동 방어선에 묶여 움직이자 못하자, 수 양제는 우문술, 우중문을 시켜 별동대 30만 5천명을 이끌고 고구려의 수도 평양을 함락시키라고 한다. 하지만 이들은 을지문덕의 전략에 걸려, 살수에서 대패한다. 이를 살수대첩이라고 한다. 그런데 고구려가 살수대첩의 승리를 이끌 수 있었던 요인에는 고구려 수군의 활동이 크다. 당시 수나라 해군 내호아는 수나라 별동대에게 식량을 공급해주는 역할을 맡고 있었다. 하지만 이들은 왕제(王弟) 건무의 계략에 의해 패강에서 크게 패한다. 이를 패강대첩이라고 한다. 즉 고구려의 수군이 패강에서 수나라 수군을 무력화 시켰기 때문에 수나라 별동대는 수군(水軍:수나라 수군)에게 식량을 공급받지 못해, 퇴각하다 을지문덕에 의해 크게 패배한 것이다. 『조선상고사』를 저술한 단재 신채호 선생은 패강대첩에 대해 다음과 같이 평하였다.

“고구려가 이 때(건무가 내호아의 수군을 박살낸 패강대첩을 말하는 것) 이미 이길 지위를 차지하였으니 만일 전공의 차례를 따진다면 왕제 건무가 을지문덕보다 앞섰다고 할 것이다. 왕제 건무의 공이 이같이 컸지마는 역사를 읽는 사람들이 흔히 을지문덕만 아는 것은 무슨 연고인가? 사마온공(司馬溫公)의 통감고이(通鑑考異)에 내호아가 양식 배를 잃지 아니했더라면 우문술의 살수의 패전이 없었을 것이라고 하였으니 대개 옳은 말이다.”

당시 고구려가 제해권을 장악하였기 때문에 고구려는 능히 수와 당의 엄청난 대군을 막아낼 수 있었던 것이다. 제해권을 장악함으로써, 고구려는 수와 당의 수군이 육군에 보급할 군량을 빼앗을 수 있었고, 게다가 수와 당의 수군기지를 위협함으로써, 수나라와 당나라와의 대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었던 것이다.

고구려가 제해권 장악에 큰 노력을 기울인 이유에는 중계무역의 이익을 얻고자 함도 있었다.

고구려는 북위의 표현대로 동방의 모든 나라를 제어하면서 동방의 맹주로 군림했다. 고구려는 북위와 엄청난 양의 무역을 했고, 그러한 무역품들은 발달된 도로와 수레를 이용한 국내 상업망을 통해 전국으로 배급되었다. 뿐만 아니라 중국과 교역이 자유롭지 못한 신라, 물길, 왜, 실위 등에 중계무역을 함으로써 막대한 이익을 챙겼다. 이것이 고구려 번영의 중요한 요소 중 하나였다.

한나라가 위만조선을 공격한 이유 중 하나도 위만조선이 동방의 여러 나라들이 중국과 직접 교역하는 것을 막고 중간에서 엄청난 중계무역의 이익을 챙겼기 때문이었다. 고구려도 초기에 책구루라는 곳에서 후한과의 무역을 독점하고 주변 여러 나라에 중계무역을 함으로써 주변 나라들보다 빠르게 국력이 커질 수 있었다. 대릉하 중류의 조양지방은 유목민과 중국인, 고구려인이 함께 모여 거래하는 거대한 국제시장으로 당시 각국의 첨예한 이익이 교차하는 곳이었다.

마찬가지로 서해의 제해권도 고구려의 상업적 이익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필수 불가결한 것이었다. 송나라에 800필의 말을 수출할 정도의 엄청난 배를 갖고 있던 고구려는 기록되지 않는 민간의 교역 규모까지 합치면 어마어마한 이익을 바다를 통해 얻었을 것이다. 이 때문에 당에서 신라로 돌아오는 김춘추 일행을 검문할 만큼 고구려 해상 순찰대의 활동이 대단히 활발했던 것이다.

제해권을 가지고 활발히 대외교역을 했던 고구려가 서해의 제해권을 완전히 포기하고 해외무역에 소극적이었던 조선과 경제의 활력도가 크게 달랐음은 당연한 일이다. 고구려를 제국으로 번성하게 만든 힘의 하나는 서해와 동해를 고구려의 내해로 삼을 정도의 강력한 해군력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고구려는 해상제국으로 불리워도 손색이 없을 것이다. 




☆고구려가 중국과 동방제국(諸國)간의 교류를 막은 기록

472년(개로왕 18년): 고구려가 북위로 가는 백제 선단을 막음
472년: 북위가 파견한 백제 사신단을 고구려가 중간에서 길을 끊음
476년(문주왕 2년): 백제가 송에 사신을 파견했으나, 고구려가 길을 막아 사신 파견을 못함
484년(동성왕 6년): 남제로 파견된 내신좌평 사약사가 고구려군을 만나 가지 못함
626년(영류왕 9년): 백제와 신라가 당에게 고구려가 길을 막았다고 하소연 함
648년(진덕여왕 2년): 당에서 돌아오던 김춘추가 고구려 순라군에 의해 사로잡힐 뻔함

5세기 장수왕 시기와 고구려 말기인 7세기에 고구려 해군력은 최고 절정기에 이른다. 특히 648년 사건은 구체적으로 고구려 해상순찰함이 당에서 돌아오는 신라의 배를 검문한 기록이다. 해상제국 백제 뿐만 아니라 중국의 선단까지 막을 만큼 당시 서해에서 고구려 해군력의 위상이 얼마나 대단했는가를 알려준다 할 수 있다. 그리고 고구려가 연이은 수와 당의 침입을 물리칠 수 있었던 요인 중의 하나가 바로 이 해상권에 있다. 


이문규

 
Posted by civ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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