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bit.ly/1x7arVT (사라진 듯)
*"발해 거란 전쟁의 재검토 - 강성봉" 중 "4.발해, 거란 전쟁의 재구성 - 1)거란의 출정과 부여성 함락" 부분을 가져왔습니다. 
 
거란의 출정과 부여성 함락 
강성봉 성북문화원 2014

천찬(天贊)4년(925) 12월 을해일(16일) 거란 태조 야율아보기는 서방 정벌에 성공한 다음 발해에 대한 총공격에 나서며 조서를 발표한다. “일찍이 말한 두 가지 일 중에 한가지 일은 이미 마쳤으나, 유독 발해는 대대로 원수로서 아직 설욕을 못했으니 어찌 편안히 있을 수가 있겠는가.” 하고서 군사를 일으켜서 발해왕 대인선을 정벌하러 친히 출정했다. 황후(순흠황후 술률씨), 황태자(야율배-동단국 인황왕) 대원수 야율요골(태종)이 모두 따라 나섰다.39) 17일이 지난 윤12월 임진일(4일)에 거란 태조는 목엽산40)에서 제사를 지내고,41) 다시 10일 뒤 임인일(14일)에는 오산에서 청우와 백마로 천지에 제사를 지냈다.42) 다시 7일 후 기유일(21)에는 살갈산에 머물러 사귀전43)을 행하였다.44) 다시 8일 후 정사일(29)에는 상령에 머물다가 부여부를 포위했다.45) 다시 2일 후인 춘정월 기미일에는 흰 기운이 태양을 꿰뚫는 상서가 나타났으며,46) 그 다음날 경신일(3일)에 드디어 부여성이 함락됐다.47) 거란의 부여성 함락에 일등공신이 사료에 나타나는 데 그는 漢人 조사온이다. 조사온은 거란이 연 지역을 경략할 때 항복한 자로, 태조는 발해를 정벌할 때 조사온을 한군도단련사로 삼자 힘을 다해 싸워 부여성을 함락시켰다. 이 과정에서 몸의 여러 곳에 상처를 입자 태조가 친히 약을 조제하였다.48) 아울러 부여성 공략에 함께 참여했던 장수는 소아고지가 있었음을 『요사』 열전을 통해 알 수 있다.49)

한편 거란은 출전의식을 행한 후 8일 만에 부여성을 포위하였고, 3일이 지나서야 함락하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이는 부여성에 발해의 상비군인 勁兵이 배치되어 거란에 방비하고 있음을 방증한다.50) 특히 부여부 아래에는 앞에서 살펴보았듯이 ‘강한 군대’라는 이름의 강사현(强師縣)이 있는데, 그 명칭으로 보아 이곳을 군사적 요충지로 생각하였음을 짐작 할 수 있다. 이를 인식한 거란은 발해 침공로를 전통적인 거란도로 하지 않고 수도로 직공(直功)하는 방법을 택하였다. 단, 보급로 차단의 위험을 제거하기 위해서 먼저 부여부를 공격하여 확보하는 방법을 택한 것이라 생각된다.

여기에서 주목되는 것은 발해 수도 직공전략을 황태자인 야율배(동단국 인황왕)가 제안한 것이 주목된다. 즉 부여성을 함락시키자 거란 태조는 호구를 단속하려 들었고, 이를 그만두도록 간언한 이가 야율배였다. 또한 그는 승세를 몰아 홀한성을 공략할 것을 권하기도 하였다.51)

주석

39) 『遼史』 卷2, 撒葛山本紀2, 太祖下, 天贊4年(925), 12月, “乙亥 詔曰 所謂兩事 一事已畢 惟渤海世讎未雪 豈宜安駐 乃擧兵親征渤海大諲譔 皇后 皇太子 大元帥堯骨皆從”.40) 지금의 내몽골 자치구 임동현(林東縣:巴林左旗) 동남족 서랍목륜(西拉木倫:Shiramuren)과 土河의 합류지점에 있는 거란족의 聖山이다. 목엽산은 산위에 거란 시조 사당을 세워 기수가한은 남묘에, 가돈은 북묘에 모셧다. 흙으로 이성의 신상과 여덟 아들의 신상도 나란히 만들어 세웠다. 전해오는 이야기는 “신인이 흰말을 타고 마우산에서 토하를 따라 동으로 오고 천녀가 청우가 그는 수레를 타고 평지송림으로부터 황하를 따라 내려왔다. 목엽산에 이르러서 두 강이 합류되자 거기서 서로 만나 짝을 이루어 여덟 아들을 낳았다. 그 후 족속이 점차 번성하여 나누어서 8부가 되었다.”고 전한다. 매번 행군하거나 봄 가을 시제 때에는 반드시 백마와 청우를 제수로 삼는데 이는 근본을 잊지 않음을 보이는 것이다([遼史』, 卷37, 志7, 地理志1, 上京道, 永州, “有木葉山 上建契丹始祖廟 奇首可汗在南廟 可敦在北廟 繪塑二聖幷八子神像 相傳有神人乘白馬 自馬盂山浮土河而東 有天女駕靑牛車由平地松林泛潢河而下 至木葉山 二水合流 相遇爲配偶 生八子 其後族屬漸盛 分爲八部 每行軍及春秋時祭 必用白馬靑牛 示不忘本云”.)41) 『遼史』 卷2, 本紀2, 太祖下, 天贊4年(925), 閏12月, “壬辰 祠木葉山”.42) 『遼史』 卷2, 本紀2, 太祖下, 天贊4年(925), 閏12月, “壬寅 以靑牛白馬祭天地于烏山”.43) 거란군의 출전의식이다. 황제가 친정할 때 갑주를 쓰고 여러 황제의 사당에 제사를 지내고 그때 사형수 1명을 정벌 나가는 방향의 기둥에 묶어 놓고 화살을 마구 쏘아 고슴도치처럼 화살이 꽂히도록 하여 상서롭지 못한 일을 무리치는 의식이다. 군사를 돌이킬 때에도 포로를 잡아 매어 놓고 출전 때와 같이 한다. 죄수나 포로를 사살하는 것은 멀리 있는 적을 참획할 수 있기를 희망해서라고도 한다. 이는 뒷날 형법으로 쓰여졌다. 이때 쏘는 화살은 鳴箭으로 쏘는데, 흡사 귀신이 우는 소리와 같다고 하여 귀전이라고도 한다.44) 『遼史』 卷2, 本紀2, 太祖下, 天贊4年(925), 閏12月, “己酉 次撒葛山 射鬼箭”.45) 『遼史』 卷2, 本紀2, 太祖下, 天贊4年(925), 閏12月, “丁巳 次商嶺 夜圍扶餘府”.46) 『遼史』 卷2, 本紀2, 太祖下, 天顯元年(926), 春正月, “己未 白氣貫日”.47) 『遼史』 卷2, 本紀2, 太祖下, 天顯元年(926), 春正月, “庚申 拔扶餘城 誅其守將”. 참고로 거란은 부여부 강사현과 부여현의 발해민들을 요 상경 서쪽과 부여현에 천사시켰다( [遼史』, 卷37, 志7, 地理志1, 上京道, “定霸縣 本扶餘府强師縣民 太祖下扶餘 遷其人於京西 與漢人雜處 分地耕種 統和八年 以諸宮提轄司人戶置 隸長寧宮 戶二千”. ; 『遼史』, 卷37, 志7, 地理志1, 上京道, “扶餘縣 本龍泉府 太祖遷渤海扶餘縣降戶於此 世宗置縣 戶一千五百”).48) 『遼史』, 卷76, 列傳6, 趙思溫, “字文美 盧龍人 少果銳 膂力兼人……及伐渤海 以思溫爲漢軍都團練使 力戰拔扶餘城 身被數創 太祖親爲調藥”.49) 『遼史』, 卷73, 列傳3, 蕭阿古只, “字撒本 少卓越 自放不羈 長驍勇善射 臨敵敢前 每射甲楯輒洞貫……攻渤海 破扶餘城”.50) 『신당서』 발해전.51) 『遼史』, 卷64, 表2, 皇子表, 倍, “聰敏好學 通陰陽Ⱁ醫藥Ⱁ箴灸之術 知音律 善畵 工文章……陳渤海可取之計 天顯元年 從征渤海 拔扶餘城 太祖欲括戶口 諫止 且勸乘勢攻忽汗城 夜圍降之”. ; 『遼史』, 卷72, 列傳2,宗室, 義宗, “天顯元年 從征渤海 拔扶餘城 上欲括戶口 倍諫曰 今始得地而料民 民必不安 若乘破竹之勢徑造忽汗城 克之必矣 太祖從之 倍與大元帥德光爲前鋒 夜圍忽汗城 大諲譔窮蹙 請降 尋復叛 太祖破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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