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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로 본 한국사 > 한국의 건국 신화 읽기 > 2. 고구려의 주몽 신화 읽기 > 1) 주몽 신화의 원형인 부여(夫餘)의 동명(東明) 신화



가. 『논형(論衡)』 길험(吉驗) 편의 동명 신화


부여는 한국 고대사에서 원류적 성격을 가지는 국가이다. 그것은 단지 고조선과 더불어 이른 시기에 국가를 형성하였다는 의미에서가 아니다. 부여를 구성했던 소위 부여족들의 이동 결과 고구려와 백제가 등장하였고, 실제로 고구려와 백제는 스스로 부여의 계승자임을 대내외적으로 표방하였다는 점에서 그러하다는 것이다. 물론 고고 자료에 의하면 부여와 고구려 및 백제 건국의 주체 세력이 서로 어떠한 연관성을 갖고 있는지 불분명한 면이 적지는 않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중요한 정치 이념의 표상인 건국 설화에서 고구려와 백제의 건국 설화에 부여의 동명 신화가 재현되고 있다는 점은 어떠한 형태로든 고구려와 백제의 지배 세력이 부여와 깊이 연관되어 있음을 보여 준다고 할 수 있다.


부여의 건국 설화를 ‘동명 신화’라고 한다. 왜냐하면 부여의 건국 시조가 ‘동명’이기 때문이다. 부여의 동명 신화 중 가장 이른 시기에 채록된 『논형(論衡)』 길험(吉驗) 편에 전하는 동명 신화를 중심으로 살펴보자.


〔사료 2-1-01〕 『논형(論衡)』 길험(吉驗) 편


(가) 북쪽 오랑캐[北夷] 탁리국(橐離國) 왕의 시녀가 임신하였다. 그래서 왕이 그녀를 죽이고자 하였다. 시녀가 말하기를 “달걀 같은 기운이 하늘로부터 저에게 내려와 임신을 하게 되었습니다.”라고 하였다. (나) 그 후에 아들을 낳았는데, 왕이 돼지우리에 버렸으나 돼지들이 입김을 불어 주어 죽지 않았다. 다시 마구간으로 옮겨 말에 깔려 죽게 했으나, 말도 입김을 불어 주어 죽지 않았다. 왕은 하늘의 아들이 아닐까 의심하여 어미에게 아이를 거두어 종처럼 천하게 기르도록 하였다. 이름을 동명(東明)이라 하고 말을 기르도록 명하였다. 동명은 활을 잘 쏘았는데, 왕은 동명에게 나라를 빼앗길까 두려워하여 그를 죽이고자 하였다. (다) '동명'이 달아나 남쪽으로 엄호수(掩淲水)에 이르렀다. 활로 물을 치자, 물고기와 자라가 떠올라 다리를 만들었다. 동명이 건너자 물고기와 자라들이 이내 흩어져서, 쫓던 병사들은 건널 수가 없었다. 동명은 도읍을 정하고 부여의 왕이 되었다. 그런 까닭에 북쪽 오랑캐 땅[北夷]에 부여국이 생겨났다.


▣ 동명 신화를 전하는 자료의 여러 계통


부여의 동명 신화에 관한 문헌 자료는 다음과 같이 두 계통으로 나뉜다. 하나는 부여의 건국 신화로서의 동명 신화를 전하는 문헌 자료로, 대표적으로 『논형』 길험 편과 『삼국지』⋅『후한서』의 부여전을 들 수 있다. 또 다른 계통은 고구려와 백제의 출자 계통을 밝히면서 동명 신화를 전하는 역사서로, 『양서』 고구려전과 『수서』⋅『북사』의 백제전에 전하는 것이 대표적이다.


이 중에서 중국 후한(後漢)의 사상가 왕충(王充)의 저서인 『논형』 길험 편의 동명 신화가 현전하는 자료 중에서는 가장 오래 된 것으로, 늦어도 1세기 말경에는 채록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다음 『삼국지』 부여전에 전하는 동명 신화는 『위략』을 인용하여 기술하고 있는데, 이 『위략』의 기사는 그 내용으로 볼 때 『논형』 길험 편의 기사와 거의 같다. 즉 두 문헌에 전하는 동명 신화는 같은 자료에 근거한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다음 『후한서』 부여전에 전하는 동명 신화 역시 『삼국지』 부여전의 동명 신화를 토대로 작성하였을 것이다. 왜냐하면 『후한서』 동이전을 기술할 때 『삼국지』 동이전을 상당수 참고하였기 때문이다. 따라서 위의 세 문헌 자료에 전하는 동명 신화는 동일한 계통의 자료에 근거한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물론 세 자료에는 약간의 차이가 나타난다. 우선 동명의 출신 국가에 대하여 『논형』은 ‘탁리국(橐離國)’으로, 『삼국지』 부여전은 ‘고리국(高離國)’으로, 『후한서』 부여전은 ‘색리국(索離國)’으로 서로 다르게 기술하고 있는데, 자세히 보면 그 글자체가 유사하기 때문에 다른 나라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후대에 역사책을 편찬하거나 판각하는 과정에서 글자에 변화가 있었거나 잘못 기록되었다고 보는 것이 합리적이다. 그리고 동명이 남하하여 건너는 강 이름도 ‘엄수(掩水)⋅시엄수(施掩水)⋅엄체수(掩㴲水)’로 차이가 있는데, 이 역시 동일한 지명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이렇게 보면 『논형』 길험 편과 『삼국지』⋅『후한서』 부여전에 기록된 동명 신화는 동일한 자료에 의거한 것으로 보아도 무방하며, 그 자료는 『논형』 길험 편의 동명 신화가 가장 이른 시기의 것으로 보이는데, 늦어도 1세기 이전에는 채록된 것으로 추정된다. 따라서 현재 전해지는 부여의 동명 신화는 1세기 이전에 형성된 신화라는 점을 확인할 수 있다.


다음 『양서』 고구려전과 『수서』⋅『북사』 백제전에도 동명 신화가 실려 있다. 이들 역사책에 수록된 동명 신화는 본래는 고구려와 백제의 시조를 밝히는 내용인데, 고구려와 백제가 부여로부터 비롯된 국가라는 인식하에, 부여의 동명 신화를 덧붙여 기록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부여의 동명 신화를 독자적으로 채록하여 전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예를 들어 『양서』 고구려전에서는 고구려가 부여의 한 갈래임을 전제로, 고구려의 출자로서 부여의 동명 신화를 기록하는 식이다. 그런데 그 동명 신화의 내용은 『후한서』의 그것을 거의 그대로 옮긴 것이다. 이는 『양서』 고구려전의 다른 여러 기사들이 대체로 『후한서』 고구려전의 기사를 그대로 옮겨 기술하고 있는 상황과 상통한다 할 수 있다. 당시 양나라가 보유하고 있던 당대 고구려에 대한 정보가 매우 부실하였기 때문이다. 즉 고구려의 주몽 신화가 양나라에 직접 전해진 것이 아니라, 고구려가 부여계의 한 갈래라는 인식에 맞추어 『양서』를 편찬하는 사관들이 『후한서』 부여전의 동명 신화를 고구려의 출자에 덧붙여 기술한 결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수서』⋅『북사』의 백제전에 실려 있는 동명 신화는 이와는 좀 다르다. 즉 두 사서에 보이는 동명 신화는 백제의 건국자로서가 아니라 부여 건국자로서의 동명 신화를 서술하고 있는 것이다. 『수서』와 『북사』의 편찬자들이 백제가 부여의 별종이라는 인식하에, 『삼국지』 등에 수록되어 있는 부여의 동명 신화를 백제의 시조 전승에 추가하였던 것이다. 이에 대해서는 뒤의 백제 건국 설화에서 다시 살펴보도록 하겠다.


이렇게 보면 당나라 초에 편찬되었던 『양서』 고구려전이나 『수서』⋅『북사』 백제전의 동명 신화는 앞선 시기의 역사책인 『삼국지』나 『후한서』의 동명 신화를 그대로 옮긴 것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여러 동명 신화가 전해지지만 실상은 『논형』과 『삼국지』 부여전에 전하는 동명 신화가 기본 내용임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앞에서도 말한 바와 같이 『삼국지』에 인용된 『위략』의 동명 신화도 『논형』의 기사와 상통하기 때문에, 부여 동명 신화의 기본 자료는 1세기경에 채록된 『논형』의 동명 신화에 불과하다고 볼 수 있다.


▣ 부여의 동명 신화 성립 시기


1세기 이전에 형성된 부여의 동명 신화는 부여가 국가를 형성할 때 만들어진 건국 신화의 일종이다. 따라서 동명 신화의 구체적인 성립 시기는 부여의 건국 시기와 맞물려 있다. 부여의 존재가 역사책에 등장하는 것은 중국의 역사책 『사기(史記)』 화식 열전을 들 수 있는데, 중국 전국 7웅의 하나인 연(燕)나라에 대한 기사 가운데 “연(‘燕)은 북으로 오환(烏丸)⋅부여(夫餘)와 인접해 있다.”라고 하여 부여의 존재를 언급하고 있다. 화식 열전의 이 기록은 중국 진시황 때(기원전 246~210)의 사정을 전하는 것으로 보인다. 즉 부여는 고조선과 더불어 만주 일대에서 가장 일찍 등장한 선진적인 국가였던 것이다.


이 외에 『삼국지』나 『후한서』 부여전에 기술된 부여의 내용도 상당히 이른 시기에 문명을 이룬 나라임을 보여 준다. 이러한 문헌 자료를 통해 볼 때 부여는 늦어도 기원전 3세기 후반 무렵에는 국가를 성립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따라서 건국 신화인 동명 신화 역시 부여의 국가 성립 시기 무렵에 형성된 것으로 추정되며, 그렇다면 아무리 늦어도 기원전 2세기경에는 동명 신화가 나타났을 것이다. 즉 현재 전하는 동명 신화가 기원후 1세기경에 채록된 것이라 하더라도, 그 시원은 3세기 정도 더 올라간 기원전 3세기 후반~2세기경으로 보는 것이 합리적이다.


▣ 부여 동명 신화의 구조와 내용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부여의 동명 신화는 가장 일찍 채록된 『논형(論衡)』 길험(吉驗) 편의 동명 신화가 기본 자료이다. 그런데 이 동명 신화가 과연 당시 부여에서 통용되던 건국 신화의 전체 모습인지 여부는 알기 어렵다. 부여의 동명 신화와 거의 같은 내용으로 구성되어 있는 고구려의 주몽 신화는 보다 풍부한 내용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즉 부여의 동명 신화도 그 내용이 제법 풍부한데, 중국 측에서 채록할 때 그 줄거리만 간략히 기술한 것인지, 아니면 본래 동명 신화의 내용이 위에서 보듯이 간략한 내용으로 구성되어 있는지 알 수 없다는 것이다. 따라서 여기서는 현재 전하는 자료를 대상으로 그 신화의 구조를 살펴보는 수밖에 없겠다.


위 동명 신화의 내용은 크게 세 부분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가)는 북쪽의 탁리국(橐離國) 왕의 시녀가 하늘의 기운에 감응하여 임신하였다는 내용이다. 고구려의 주몽 신화와는 달리 알로 출생하는 난생(卵生) 설화는 아니지만, 달걀 같은 기운에 감응하는 이른바 ‘감정형(感精型)’ 신화의 요소를 가지는데, ‘감정형(感精型) 신화는 몽골과 만주 지역에 널리 퍼져 있는 신화적 요소이다.


다음 (나) 부분은 동명이 태어나자 탁리국 왕이 죽이려고 하였으나 동물들이 보호하였으며, 자라서 활을 잘 쏘는 능력을 발휘하였다는 내용이다. 그런데 동명이 태어나자마자 버려졌지만 동물들의 보호를 받았다는 내용은 중국의 상고 문화와도 연관된다. 즉 중국 주(周)나라 시조 후직(后稷)의 탄생담을 노래한 『시경(詩經)』 대아(大雅) 생민(生民) 편의 전반부를 보면 다음과 같다.


〔사료 2-1-02〕 『시경(詩經)』 대아(大雅) 생민(生民) 편


그 처음 백성을 낳으신 이 바로 강원이시니 백성을 낳음이 어떠했는가.

정결히 제사 지내시어 자식 없는 부정함을 없애시어

제곡(帝嚳)의 발자국을 밟으시어 마음이 기뻐 쉬어 머무셨네.

곧 아이를 배어 신중히 하여 낳아 기르시니 이가 곧 후직이시네.

아기를 낳으실 달이 참에 낳기를 작은 양처럼 쉬이 낳으셨네.

부서지지도 깨지지도 않으니 재앙도 해도 없으셨네.

그 신령스러움이 밝으니 하늘이 기뻐하시네.

정결한 제사에 즐거워하시니 의연히 아이를 낳게 하심이라.

더러운 곳에 버려졌으나 소와 양이 조심하여 키워 주고,

넓은 숲에 버렸으나 숲의 나무를 다 베어 냈고,

찬 얼음 위에 버렸으나 새가 날개로 덮어 주고 자리를 깔아 주었네.


위의 시에서 보듯이 신이한 탄생, 그리고 버려졌음에도 동물들의 보호를 받고 생존하게 되었다는 점은 동명 신화의 내용과 매우 유사하다. 전한(前漢)이 성립할 무렵에는 네 종류의 『시경』이 전해졌다는 것을 고려하면, 부여의 동명 신화는 『시경』을 통하여 그 모티브를 얻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물론 동명 신화가 달걀만 한 ‘기(氣)’에 의하여 잉태하는 반면, 후자는 발자국을 밟아 잉태하는 차이점도 있다.


또 동명 신화와 유사한 내용을 중국의 서언왕(徐偃王) 설화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서진(西晉)의 장화(張華)가 펴낸 『박물지(博物志)』에 비교적 완전한 내용의 서언왕 설화가 전하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사료 2-1-03〕 『박물지(博物志)』


“서군(徐君)의 궁인(宮人)이 임신을 하여 알을 낳았는데, 상서롭지 못하다고 여겨 물가에 버렸다. 혼자 사는 할머니가 기르던 곡창(鵠蒼)이라는 개가 버려진 알을 주워 집에 가져오니 이상히 여겨 따뜻한 곳에 두었다. 얼마 가지 않아 그 속에서 한 아이가 나왔다. 태어날 때 반듯이 누워 있었으므로 언(偃)이라는 이름을 붙여 주었다. 서군(徐君)이 그 소식을 듣고 궁중에 데려다 길렀다. 아이가 장성하여 인자함과 지략이 뛰어났기 때문에 서국(徐國)의 왕위를 잇게 하였다.”


서언왕 설화는 난생(卵生)이라는 점에서 위의 동명 신화와는 출생 과정이 다르지만, 동명 신화가 변용된 고구려 주몽 신화에는 난생 설화 요소가 등장하므로, 내용상 서언왕 설화와 동명 신화는 서로 통한다고 볼 수 있다. 즉 부여의 동명 신화는 북방계 요소 및 중국 중원 계통의 문화 요소가 서로 섞여 있는 것이다. 이는 부여의 근거지라고 할 수 있는 송요(松遼) 평원 지역의 선주(先住) 문화에서, 서한 시기 중국 한족의 선진 문화로부터 영향을 받은 문화 유적들이 많이 나타나는 것에서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마지막으로 (다)는 탁리국의 왕이 이를 죽이려 하자 탈출하였는데, 엄호수(掩淲水)라는 큰 강을 만나 다시 신통력을 발휘하여 물고기와 자라 떼가 다리를 이루어 강을 건넜으며, 부여를 건국했다는 내용이다. 신(神)이 큰 강을 건넜다는 고사는 흑룡강 일대 민간에 널리 퍼져 있는 이야기로, 부여족의 기원지를 추정케 하는 내용이다.


위 동명 신화는 기본적으로 부여를 세운 건국의 주체 세력이 북방의 어느 지역(탁리국)에서 남쪽으로 내려와 건국한 이야기로서, ‘감정형(感精型)’ 신화 요소와 대하(大河)를 건너는 이주 설화 요소를 갖추고 있다. 이와 같이 유⋅이민이 건국하는 설화는 우리나라의 고대 국가 중 부여계 국가의 건국 설화에서 일반적으로 나타나는 내용이다.


이러한 건국 신화의 내용과 관련하여 『삼국지』 부여전의 다음과 같은 기록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사료 2-1-04〕 『삼국지』 부여전


“(부여) 나라의 나이 많은 사람들이 스스로 설명하기를 ‘옛 ‘망인(亡人)’이다.’라 하였다. …… 지금 부여의 창고에는 옥벽(玉璧), 규(圭; 홀), 찬(瓚; 옥제기) 등 여러 대에 걸친 물건들이 대대로 보물로 전해져 오고 있다. 나이 많은 이들의 말에 따르면 선대로부터 물려받은 것이라 하는데, 그 인장은 ‘예왕지인(濊王之印)’이라 되어 있다. 부여에 ‘예성(濊城)’이라는 옛 성이 있는데, 본래 예맥의 땅으로 부여가 그곳에서 왕 노릇을 하고 있는 것이다. 스스로 ‘망명한 사람[亡人]’이라 이르니 아마도 까닭이 있는 듯하다.”


『삼국지』의 이 기록을 통하여 부여인들이 3세기 무렵 자신들을 외부로부터의 망명 이주민으로 인식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는데, 이는 『논형』에서 확인되는 동명 신화의 내용과 어느 정도 일치한다.


전체적으로 위 동명 신화에 나타나는 역사상을 추정하면, 동명으로 대표되는 집단이 송화강의 북쪽 어느 곳으로부터 남하하여 송요평원에 선주하던 집단들과 결합하여 부여라는 국가를 형성하였음을 알 수 있다.


  * 이 글의 내용은 집필자의 개인적 견해이며, 국사편찬위원회의 공식적 견해와 다를 수 있습니다.



Posted by civ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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